|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저는 지난번에 세상에 수 많은 종교들이 많이 있지만 진짜 영생을 주는 종교는 하나 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교회가 바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렇게 믿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옆에서 들려오는 이설에 마음을 기울이지 마시고요 더 말씀 가까이 하시고 기도 많이 하시어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으로 느끼시면서 믿음 준비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보니까 어떤 경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믿어도 헛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보입니까
진리교회가 어디인지 알았으면 그 진리교회에서 가르치는 아니죠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도 만나셨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직 만나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 중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다시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읽은 말씀도 그렇고요. 마태복음 25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 25:10-12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 같습니까?
기름 부족한 여인들이죠?
함께 신랑을 기다린 여인들이 밤이 깊어갈 때 보라 신랑이로다 라는 소리에 열 처녀들이 함께 일어나서 등을 들었습니다만 다섯 명의 등불은 어떠하였다고 합니까?
등불이 꺼져가니 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빛이 초롱초롱한 처녀들을 향해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 합니다.
그러니 뭐라 했습니까? 25장 9절입니다.
마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기름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임을 다 아시죠?
성령의 감동하심은 또 다른 말로는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숙희 집사님의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 강 선생님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성령의 감동하심은 개개인이 스스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나누어 줄 수 없는 믿음 하늘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결코 기름 부족이 뵈이지 않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름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름은 부족하면 보충하면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름 부족했던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보충 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문을 두두립니다.
그러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12절입니다.
마 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다섯 처녀들은 알았다고 했을까요? 모른다고 했을까요?
안다고 했으니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라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에서 신랑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미련한 처녀로 대표되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되 자기들 방식으로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 같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 잘 아시는 요한 복음에는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내 방식대로 알아야 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알아야 합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면 고쳐야 합니까?
우리 성도님들 저는 이런 내용을 얼마 동안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들이 검토해 보시고 성경 말씀과 일치하다는 확신이 드신다면 받아 들이시고요.
아니라면 다시 검토를 해 보시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흔들리지 마시고요 바른 확신가운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시편기자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무슨 말씀 같습니까?
하늘을 비롯한 모든 천연계가 누구를 증거 한다는 말씀 같습니까?
모든 천연계가 하나님을 증거한다. 아멘입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신성이 어디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까? 천연계를 통해.
그런데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시 77: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무슨 말씀 같습니까?
천연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통로를 주셨지만 그것 만으로는 어떠하다고 합니까? 부족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주신 것이 인간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 중에 제일 큰 사랑이 어떤 사랑 일까요? 성경은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어떤 사랑이 큰 사랑이라고 합니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나요?
친구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 거 같습니까?
성경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그런데 그 부모의 사랑도 완전하지 않다고 합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의 사랑 중 가장 큰 사랑이 엄마의 사랑이라고 합니까?
그것도 젖먹이의 사랑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잊을 수가 있다.
6.25 전쟁 때의 일입니다.
저희 고향에도 남쪽이지만 밀고 내려오는 북쪽에 밀려 저희들 마을도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도 이웃 사람들도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저는 그때 엄마 뱃 속에 있었고요.
우리 이웃에 저보다 두해 먼저 태어난 형이 있었습니다.
이제 갓난 젖먹이 아니이죠? 이사야 49장 15절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라는 그런 젖먹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업고 피난을 가는데 갑자기 총알에 귀 옆을 스쳐 지나갔고요.
비행기의 포사격으로 인하여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등에 있는 아들이 거추장 스러워서 내려서 풀숲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도망을 갔습니다.
한참 지내니 포 소리도 줄어서 조용하고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누구 생각이 납니까?
풀숲에 던진 그 아이 생각이 나서 다시 돌아서서 가보니 풀숲에서 울고 있드랍니다.
에고 내가 죄가 많지 하면서 다시 엎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그 집 아들들 중 가장 효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뭐 하기에는 넉넉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요?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에 대하여 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오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시면 엄청난 복이 우리에게 옵니다.
로마서를 통해 주시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까?
하나는 하나님의 인자면이고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엄위 면입니다.
마치 동전의 두면처럼 하나님의 두 면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많은 분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보통 많은 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살아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과연 그럴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구약과 신약을 같이 좀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먼저 드린다면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엄위에 대하여서도 인자에 대하여서도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말씀을 올려드립니다.
사 66:15-16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16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무서운 하나님 같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같습니까? 예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수 많은 말씀 중 한 말씀입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엄위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줄까요?
많은 말씀중 하나만 보겠습니다.
계 14: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일반적인 이해로 신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이해를 한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구약에서도 볼 수가 없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도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노와 홍수이고요.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습니다.
홍수를 피하라고 120년의 시간을 주어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요 주셨고요.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의인 롯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는 자비가 없다고요. 마지막 심판에는 자비가 썩여 있지 않다라고 신약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하나님만 엄위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요 신약의 하나님도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에 대하여서도 구약과 신약 다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하나님의 인자에 대하여 올려드립니다.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 말씀도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여러 말씀중 하나입니다.
요나도 하나님의 어떤 면을 알았다는 말씀입니까? 인자의 면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니느웨 성에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성을 용서해 주실 것이고 그러면 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고 망하도록 하려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도망을 갔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이 하늘에 가면 난 그 하늘에 안가! 혹 이런 사람 있습니까?
나에게 어떤 잘못을 하였다 할찌라도 우리는 용서해야 됩니까?
성경에 나오는 두 빚진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누가 용서 받을 수가 없다고요?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 받기 위하여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까?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하죠. 아멘입니까?
신약의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말씀은 찾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래도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일 4:7-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까?
코끼리를 만져본 네명의 장님과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죠?
그 이야기는 불교의 열반경이라고 하는 경전에 나오는 우화라고 합니다.
한 왕이 소경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이빨을 만져본 소경은 코끼리가 단단한 무 같다고 하였습니다.
귀를 귀를 만진 소경은 곡식을 까부는 키 짝 같다고 합니다.
머리를 만진 소경은 바위 같다고 했고요, 다리를 만진 소경은 기둥같다고 했고요.
그리고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져본 소경은 담벼락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 우화 같습니까?
한가지 사물을 보드래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감히 피조물이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바르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을 좀 더 잘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특별방법이 동원 되어야 할까요?
하늘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좀 더 잘 가르쳐 주시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비우시고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됩니다, 아멘입니까?
요 14:8-9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시니까 제자들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그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라고 했죠 그러니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대답이었습니까?
나를 본 자는 누구를 보았다고요? 아버지를 보았다,
우리 성도님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보셨습니까?
아버지의 어떤 면을 보셨습니까?
예수께서는 한번은 이런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눅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두면이 보이시나요?
한 면은 포도원 주인입니다. 다른 한 면은 과원 지기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고요, 과원지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를 통해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아들의 사랑입니까?
좀 더 구체적인 것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가 기록된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시 97: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무엇이 그 보좌의 기초라고 합니까? 의와 공평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의는 무엇을 가지고 의라고 합디까?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주신 구원이 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의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게 인정하십니까? 아멘입니까?
공평은 다른 말로는 공의 하나님의 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의와 하나님의 법을 통해 보여주시는 공의가 기초이다.
이해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엄위를 가리키는 표현이고요,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농부는 하나님의 인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멘입니까?
어떻게 아들인데 아들의 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말씀이미 올려드렸죠?
나를 본 자는 누구를 보았다고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라는 말씀입니까? 한 분이라는 말씀입니까?
일인 이역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죠? 성경도 예수그리스도의 역할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 할찌라도 때로는 일인 이역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래전 전도지에 이런 아름다운 예화가 실려 있었습니다.
로크리얀스의 국왕 ,쟈르캬크는 그 나라의 법을 어긴 왕자를 두고 많은 고심을 하게됩니다. 이유는 국법대로 한다면 왕자는 두 눈이 뽑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두 눈을 뽑고 싶은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을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려니 공의가 성립되지 않고 국정에 혼란이 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공의를 실행하려니 아버지의 사랑이 울게 됩니다.
이윽고 아버지는 집행관에게 명하기를 아들의 눈을 뽑으라 합니다.
아들의 한쪽 눈이 뽑혀지고 다음 나머지 눈을 뽑을려 할 때 잠깐 여기 그 한쪽 눈이 있다고 왕은 자기의 눈을 뽑아 집행관에게 건네줍니다.
공의도 충족시키고 사랑도 지킨 예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지상 성소의 지성소의 법괘와 시은좌가 어떤 상징을 하고 있는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실질적인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생각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그 광경을 시편기자는 이런 아름다운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85:10-11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무엇이 같이 만났다고 합니까?
긍휼과 진리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가 같이 만났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가 만났습니까?
그것을 지성소 법궤의 속죄소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성소 법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강재규 소령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합니다.
강재구소령 아시나요?
저희들 나이 이상이신 분들은 아마도 다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벌써 52년이 되었습니다.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나서 서울고득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육군사관학교에 16기로 임관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전쟁 중이였던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소대원을 이끌고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병사 한명이 수류탄을 던진다는 것이 손에서 빠져 나와 뒤로 떨어졌습니다.
이거 저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모두 엎드려라 라는 말과 함께 당신의 몸은 수류탄을 덮었고 폭탄은 터졌고 그의 몸은 갈기 갈기 찢어지면서 병사들을 구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폭탄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가 됩니까?
지성소의 법궤의 두껑이 열리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늘 법에 의하면 모두가 사형이라는 것이죠.
그 두껑이 열리지 않도록 지금 누가 덮고 있습니까?
속죄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당신 몸에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까?
시편기자는 그 갈바리를 이러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 85:10-11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났다 어디서요? 십자가에서.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들은 사형이라고 땅은 선언하는데 하나님의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여서 내가 그 죄의 저주를 다 받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신 분은 십자가를 많이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죽어야 할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사람되어 오신 하나님. 그래서 성경은 자기피로 사신 교회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피로 산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피로 싼 사람들이 되었다.
우릴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피가 헛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피로 구원받은 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기별을 우리가 사는 이 곳에 더 많이 전하여서 주님 오시는 날 이 진교 바닥에서 구원받는 수 많은 영혼들과 함께 주를 맞이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