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이야기
아들아, 이번엔..가야 이야기 두번째란다.
가야에도 건국신화가 있지..두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하나는 금관가야,또 하나는 대가야의 이야기란다.
유명하고 많이 알려진 것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이지.
옛날 지금부터 약 2천년 전 쯤이었지.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가까운 곳엔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풍요롭고
강과 바다를 통해 또다른 세상과 통하는 곳..지금의 경남 김해란다.
이곳이 바로 금관가야가 태동한 곳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지.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아.
처음엔 이땅에 나라가 없이 아홉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의 지도자들, 구간(九干)이
서로 협의하며 다스리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들이 그들을 이끌어줄 왕과 새로운 나라를 원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하늘이 그들의 바람에 응답하게 되지.
"황천(皇天)이 나에게 임금이 되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라 하니 이곳에 내려오겠노라.
그대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나를 맞으라."
그리고 그땅의 산위 봉우리에서 구간과 백성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는 구지가(龜旨歌)란
이름으로 전해와.
아들아 너도 들어 아는 노래란다. 너도 금방 외워 따라 부르더구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내어놓지 않으면 너를 구워먹으리.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그렇게 노래하고 춤추며 기다리니 하늘에서 함이 내려와 보니 그 안에 황금알이 여섯이
있었고, 그 알을 고이 모셔와 구간 중 하나인 아도간의 집에 모셨지.
그리고 그 알에서 곧 여섯명의 동자가 태어나고, 그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자가 바로
김수로(金首露).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는 분이시며, 나머지 다섯은 각자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단다. 공식적으로 금관가야의 건국은 서기 44년의 일이지.
김수로왕릉
자, 여기서 잠깐. 하늘에서 정말 황금알이 내려오고, 황금알이 사람이 되었다는건
실제로 정말 그랬다는건 아니고..이건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하여야 한단다.
구간과 그의 백성들은 원래 김해땅에서 살아가던 토착민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그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지.
그런데 이주민들이 토착민보다 더 앞선 문물을 가지고, 또 더 앞선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사람들이었을거야. 그런데..이 신화를 보면 이주민과 토착민들은 격렬하게
싸우기 보다는 서로 받아들이고, 화합을 해.
그 결과가 바로 가야란 나라들이지.
이렇게 상징과 비유를 통해 나라를 세운 왕을 신성한 사람으로 믿게 하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면서 그 왕이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오래도록 다스릴 수 있도록 한거지.
그리고 구지가는 또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데..
아마도 그 옛날,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적 행사의 한 모습, 특히 영신(迎神)굿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어.
허황옥 왕후릉
그런데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전해.
김수로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면서..구간들이 이제는 배필을 맞아들이기를 청하지.
그런데 김수로가 거절하며, 나의 배필은 하늘에서 정하여 보내줄 것이다라고 하였단다.
얼마 후에 김수로가 유천간 등 신하를 남쪽 바다로 보내 왕후가 될 배필을 맞으라 하니
과연 얼마 후에 배 한척이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김수로와 허황옥이 첫 대면을 하게 되었지.
그때 허황옥은 그녀의 나이 열 여섯,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하늘의 명을 받아 당신의 배필이 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고 했어.
그리고 이들은 부부가 되어 왕자를 열명 두었다 하는구나.
허황옥 왕후가 김수로왕에게 청하여 첫째 아들은 김수로왕의 성을 받아 김씨로 하되,
그 다음 아들은 허황옥 왕후의 성을 받아 허씨로 하여 달라고 했고, 김수로왕은 받아
들였어.
그리고 나머지 아들 일곱명은 불교승려가 되어 지리산이 있는 하동 칠불사에서
성불했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 온단다.
파사탑
여기서 또한번 이 전설을 하나하나 새겨볼까.
허황옥 왕후는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확실치는 않아.
그러나 금관가야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물고기 두마리 장식, 쌍어문(雙魚紋)이
정말 인도 북부에서 그대로 전해지고, 아유타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해.
또 허황옥 왕후가 가야로 올때 타고 오던 배에 파도를 잠재우고자 싣고 왔다던
파사탑의 존재..우리나라에선 그런 석탑 양식은 없단다.
또 파사탑의 돌도 우리나라 것은 아니라 하는구나.
인도에서도 허황옥 왕후의 이야기는 유명해서..그들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단다.
그렇다면..100% 확신할 순 없겠으나 그 가능성은 상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
그리고 허황옥 왕후의 도래는 가야가 바다를 통해 외부세계와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김수로왕도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지만 그는 북쪽에서 육지를 통해 왔을 가능성이 많고,
그에 반해 허황옥 왕후는 바다를 통해 이주해 온 경우거든. 그것도 인도에서.
그렇다면 가야는 중국과 왜는 물론 인도..또 동남아와도 교류하는 열린 나라였을 거야.
우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최초의 다문화 가족? 국제결혼의 사례라고 해야할까?
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어머니의 성을 따른 사례도 되겠다.
허왕옥 왕후가 가야로 올때..그 배엔 종자들이 있고 또 오라비인 장유화상도 함께
왔다고 해. 장유화상(長游和尙)은 불교승려로, 김수로왕과 허황옥왕후의 아들
7명을 불교승려로 이끌고 지리산 칠불사에서 성불하게 했다는 사람이기도 해.
그렇다면 또 재미있어지는 것이, 이 장유화상의 존재는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는
드문 남방불교인 소승불교가 우리나라에도 유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최초 유입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태왕때의 일인데
그 기록보다 거의 300년 앞서는 사례가 되거든.
또 김해 장군차(金海 將軍茶)는 허황옥 왕후가 가야로 오면서 예물로 가져온
봉차(奉茶), 차 씨앗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그렇다면 우리나라 녹차시배지인
하동 화개의 그것보다 거의 700년은 더 앞선다고 봐야겠지.
또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 있단다.
가락국기에 전하기를 신라의 4대 임금인 석탈해가 신라의 왕위에 오르기전에
김수로왕을 찾아와 당신의 나라를 빼앗으려 왔다고 했다고 하는구나.
그러자 김수로왕은 천명을 받은 몸으로 함부로 나라를 줄 수 없다하니
서로 재주를 겨루기로 했지.
수로왕이 승리했고, 석탈해가 물러났는데..
김수로왕이 생각하기를 그는 왕위에 위협되는 자라 수군을 보내 추격했지만
석탈해(昔脫解)는 추격을 벗어났다고 해.
석탈해..그의 설화에서 보자면 그는 지금 왜의 동북방 용성국 출신으로, 신라에
가기전 먼저 가야에 도착하여 왕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신라로 가 지배세력에
편입하는데 성공하고 힘을 키워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지.
지리산 칠불사(하동 화개면)
이렇듯 금관가야의 설화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많고, 지금도 새겨두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많아. 달성 녹동서원에서..사야가, 김충선 장군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얘기했지만
열린 마음으로 또 열린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외국에서 왔다고 편견 가지지 말고, 그들 스스로를 우리의 자산으로 삼으면 된단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이 함께하여 더 크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들아, 우리는 이렇게 옛 역사를 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면서 배우게 되는 거란다.
작성자:방랑다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