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부터 습기를 먹은 바람이 불어왔다.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타고 올라온 열풍은 오수에 빠진 정원의 야자수들을 흔들어 깨웠다. 오스티아 해변의 모래밭이 한낮의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창가에 앉아서 멀리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봄부터 찬탈자 막시무스의 함대가 항구를 봉쇄하여 푸른 바다 너머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붙들고 더할 수 없이 자애로운 사랑이 담긴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그토록 큰 소망을 품게 했고 그토록 많은 좌절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든, 바로 그 아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얘야, 나는 이제 세상의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졌는데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게 그 은총을 이미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이제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서양문학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화 장면의 하나로 꼽히는 이 일이 있은 날부터 딱 보름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곡하는 것을 금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이 경건했던 어머니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다음 자신은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주여, 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평생토록 눈물을 흘린 어머니를 위해 제가 이렇게 운다고 어찌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신에게 한 고백이다.
서기 387년 로마 인근의 항구도시 오스티아에서 이렇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건한 여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모니카다. 그녀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들이 오늘날 “신약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기독교인이며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라는 평가를 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리고 그가 신에게 한 고백들을 적은 자서전 형식의 글이 기독교문학의 백미이자 서구 고백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고백록’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가 하나 들어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의 말미에 왜 뜬금없이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담아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참 오래된 수수께끼인데, 그 답은 이렇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혀 짜진 옷감처럼 신의 섭리에 의해 계획되어 이끌려온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우주의 역사 또한 오직 신의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전되며 인도된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신학 용어로는 ‘오이코노미아’ 또는 우리말로 ‘구속 경륜’이라 한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지난 2000년간 견지하는 우주관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마지막 질문 중 하나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역시 쉽지 않은 물음인데, 우리는 그 답을 현대과학이 우주 발생에 관한 표준이론으로 인정하는 ‘빅뱅이론’을 살펴보면서 찾고자 한다.
우주를 지배하는 여섯 개의 수
약 137억년 전으로 추산되는 아주 먼 옛날, 밀도와 온도가 최대이고 크기가 극히 작은 ‘특이점’이 있었다. 천체물리학자들에 의하면 빅뱅에서 빅뱅 이후 10-43초까지, 즉 ‘플랑크 시기’라고 부르는 때에 ‘양자 요동’에 의해 특이점이 형성되었다. 영국의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제시하고 스티븐 호킹이 증명한 이 점의 크기는 약 10-33㎝다. 이 값을 ‘플랑크 길이’라고 한다. 펜로즈는 그의 저서 ‘황제의 새 마음’에서 이 점은 너무 작아서 만일 신 같은 어떤 절대적 존재가 3차원 이상의 고차원 영역인 위상 공간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우주를 만들려면 1010¹²³분의 1의 정밀도에 해당하는 점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쉽게 설명하자면 우연에 의해 우주가 과거와 같은 특이점을 가질 확률이 1010¹²³분의 1, 즉 사실상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펜로즈도 매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 우주를 출범시키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우주의 순간순간 행동을 지배하는 동역학 방정식들(뉴턴·맥스웰·아인슈타인 등의)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준 놀라운 정밀도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은 어째서 그렇게 정밀하게 계획된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러한 특이점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이 작은 점은 너무나 압축된 나머지 ‘어느 특이하고도 영광스러운 순간에’ 급기야 대폭발을 했다. 말 그대로 ‘빅뱅’이었다. 그럼으로써 우주가 시작되었다.
백뱅은 엄청난 규모로 동심원을 그리며 진행된 갑작스럽고 광대한 팽창이다. 이 폭발은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는 폭발과는 전혀 다르다. 폭발에 의한 팽창은 분명하지만, 텅 비어 있던 어두운 공간을 뭔가가 순식간에 채워나간 것이 아니다. 아직 공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s=0)이다. 이 특이점이 ‘언제’ 존재했느냐고도 물어볼 수 없다. 아직 시간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t=0)이다. 무에 가까운 특이점밖에는 공간도 시간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는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삽시에 상상할 수조차 없이 빠른 속도로 팽창했고 지금도 여전히 무섭게 팽창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을 ‘인플레이션 이론’이라고도 한다.
이 이론 가운데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운 것은 빅뱅 이후 팽창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 ‘깜짝 놀랄 만큼’ 유리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은, 그것은 우주의 초기 상태가 빅뱅 후 10-43초 이전에 이미 지금의 우주와 생명체가 탄생하기에 딱 맞게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가. 영국왕립천문대의 대장이자 블랙홀 권위자인 마틴 리스의 설명을 들어 보자. 그의 저서 ‘여섯 개의 수’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측정 가능한 여섯 개의 숫자에 지배받는다. 빅뱅을 통해 수소가 헬륨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여하는 입실론(ε=0.007), 전자기력의 세기와 중력의 세기 간의 비율을 나타내는 N=1036, 우주의 상대적 밀도를 나타내는 오메가(Ω~1), 우주 팽창의 가속도를 조절하는 우주상수 람다(Λ), 우주 배경 복사의 불규칙을 나타내는 Q=10-5, 공간의 차원을 나타내는 D=3이 그것이다. 그런데 리스는 이 숫자들이 빅뱅 후 10-43초 이전에 이미 우주를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가장 이상적 환경으로 세팅했다고 했다. 만일 이 숫자의 값이 조금만 크거나 작았더라면 현재의 우주와 생명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일이 어찌 10-43초라는 찰나에, 어찌 그리 적절히 조절될 수 있었을까? 그 값들에 아주 미세한 변화만 있었어도 우주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며 우리와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니, 도대체 이러한 숫자들과 물리법칙들은 어디서 왔을까? 왜 하필이면 이 숫자, 이 법칙들일까? 이런 물음들은 “신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이 회장의 질문과도 직접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만일 당신이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내가 왜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빅뱅이론으로부터 시작했는지 이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만일 이 여섯 숫자를 신이 전능한 능력으로 미리 정했다면 이 숫자들이 곧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다. 그게 아니고 단지 우연이었다면, 신은 없거나 있더라도 적어도 창조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나는 할 수 없다. 나뿐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현 시점에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나는 당신에게 이 문제 해결에 관한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고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이 내놓은 가설이다. 당신은 편견 없이 듣고,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믿으면 된다. 어떤가? 그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의 첫 마디인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에서 먼저 ‘태초’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는 ‘고백록’에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고 잘라 말했다. 한데, 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단언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논리는 이랬다.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을 그는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 그야말로 ‘태초에’ 창조와 함께 ‘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1600년 전의 신학자가 현대 천체물리학자들과 우주의 발생에 대해 거의 같은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이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