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 혜원 스님
‘일체중생 실유불성’ 아는 것이 깨달음
불교신문은 이번호부터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인 ‘깨달음과 수행’을 주제로 토론을 시작합니다. ‘깨달음과 수행’은 누구나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도 말하기를 꺼려온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비의 동굴’에 가두어 놓을수록 더 많은 오해와 왜곡이 생깁니다. 불교신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공개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불교의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계기가 될것입니다. 그동안 진지한 수행과 연구를 해온 강호논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고를 바랍니다.
얼마 전, 조계사 보문사 등에서 당대의 선지식을 모시고 간화선 중흥을 위한 ‘대법회’가 열리고 담선도 있었다. ‘깨달음이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선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주제였다. 이에 대해 선사들께서는 ‘청색청광 백색백광’의 법음을 세상에 나투셨고, 이를 인연으로 수행자들은 다시 재발심과 대신심으로 수행에 임하였을 것이다.
<사진설명> 선(禪)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즉각 깨달을 것을 강조한다. 이는 과거나 미래의 공덕에 의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비하면 ‘헉명적 변화’라 할만하다. 사진은 돈오에 이르기위해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의 모습.
‘깨달음과 수행(선)’은 불교의 요체이며 수행자의 목적이며 삶이다. ‘깨달음과 수행’. ‘수행과 깨달음’, 이 둘은 그 단어의 위치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즉, ‘깨달음과 선’이라고 하였을 때는 본각과 시각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선과 깨달음’이라고 할 때는 불각으로부터의 시각과 이후의 각(悟)이 될 것이다. 여하간 ‘깨달음과 선’은 불교의 종(宗)인 것이다.
‘깨달음’은 정각, 즉 삼보리(三菩提, sambodhi)이며, 선은 삼보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일까? 주지하다시피 ‘일체중생 실유불성’임을 명증(明證)하신 것이다. 그분을 ‘대각자’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은 찰나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수행 즉 선을 통하였으며 또한 깨달음 이후도 계속 선(禪)을 하셨으므로 그분의 일생은 그대로 선의 연속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깨달음을 법(法)으로 하여 이 법에 귀의한 자는 법의 믿음으로써 수행을 하도록 한 내용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각 시대별로 ‘깨달음과 선’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달리 하지만, 그 수행의 요체인 삼학(戒定慧)은 근간을 이룬다. 초기불전에서는 오온이 무상함을 관찰(선정)하여 해탈을 완성하도록 하였고, 대승불전에서는 보살도를 통한 성불이 바로 수행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둘의 수행은 삼아승지 백겁에 걸쳐 닦아야 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중국선종에서는 ‘심즉불(心卽佛)’이라고 하여 중생의 동일한 진성을 믿고 수행을 통해 이를 돈오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의 공덕과 기약이 없이 현재 이러한 수행이 전부이며 이를 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수행을 중국에 보급한 자가 보리달마이다.
달마를 처음 주목한 사람은 당의 도선이다. 그는 당시 대표적인 선사로 알려진 승주의 사념처법의 행에 대하여 달마의 ‘반야공관’의 새로운 선수행을 목격한 것이다. 인도적 사고인 사념처의 실천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네 가지 행법으로 부정, 고락, 무상, 무아의 상을 관하는 것. 오정심(五停心)의 사마타에서 비파사나의 행이다. 달마는 중국의 선자들을 위해 궤도를 수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달마의 어록인 〈이입사행론〉에는 이러한 달마의 선사상 즉 선수행이 나타나 있다. 달마는 선법의 입장을 ‘교를 근거로 하여 종(宗)을 깨닫는다’고 밝히고 있다. 내용은 ‘중생이 동일한 진성임을 믿는 것’이다. 종의 깨달음은 나중 종밀스님이 말하는 해오(解悟), 신오(信悟)이다. ‘중생은 평등한 진성을 가지고 있고 번뇌 망상의 현실은 외부의 영향으로 진성이 덮여져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객진은 불실한 것이며 본래적인 것이 아님’을 신해(信解)하는 것이다. 이 신이 조사선의 지표이며 이 신이 없이는 선이 성립하지 않는다.
수행의 근간은 삼학…간화선은 분별심차단하는 직관 중시
화두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것…치열한 심적 단련 있어야
진성은 불성이며 자성이며 달마는 ‘대승안심’이라고 했다. 이 안심의 실현을 이입(理入)과 사행(四行)으로 설한다.
이입은 본래적인 깨달음(본각)이다. 깨달음은 미혹함에서 미혹함이 아니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함과 깨달음의 구별이 없는 본래의 깨달음을 말한다. 이를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분명히 분별을 수반하는 것. 이입은 자타범성(自他凡聖)의 구별이 없는 경지, ‘벽관(壁觀)에 응주’이다.
벽관은 마음이 벽이 되어 관하는 것인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편안한 마음’의 표현이다. 따라서 벽관은 오(悟)와 둘이 아닌 수(修)이다. 벽관으로서 진성의 리(理)와 일치하여 얻어진 적연무위의 경지가 이입인 것이다. ‘여시안심자벽관(如是安心者壁觀)’이라고 하듯이 벽관과 안심은 불이이다.
또한 달마는 새로운 사념처를 설한다. 사행은 이입벽관을 근거로 한다. 이입은 돈(頓)이고 행입은 점(漸)이다.
사행 중 보원행(報怨行)은 수행자가 고를 만날 경우, 숙생의 악업의 결과라고 보고 이를 감수하여 원심을 갖지 않는 행이며, 수연행(隨緣行)은 영예로운 일이 있으면 과거의 인연으로 얻어진 것, 인연이 다하면 무로 돌아간다고 관하는 행이며,
무소구행(無所求行)은 미혹과 불안은 탐심과 구함에 있는 것으로 그러한 생각을 쉬고 구함의 집착이 없는 행을 말하며, 칭법행(稱法行)은 법은 ‘성정(性淨)의 이(理)’이로서 성(절대적 존재)은 본래청정하여, 모든 상이 공으로 돌아가고 염착을 떠나고 피차가 있지 않는 것인데, 이 理를 신해하게 되면 법의 理에 맞는 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행은 이입과 함께 실생활에 있어서 육도를 행하고 보살의 도를 행하는 것이므로 대승보살도이다.
달마의 이러한 선수행은 나중에 남북양종의 선수(禪修)의 모체가 된다. 신수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에서는 ‘개오(開悟)의 체험’을 중요시하지만 이는 하택신회(684~758)이후 멸시되고, 마조도일(709~788)이후는 표면적으로 거의 무시된다.
선체험이 다시 중요시 된 것은 선승의 심리가 다시 내부로 향하게 된 것에서부터다. 이것은 바로 공안에 대한 비평이며 공안비평과 개오의 체험의 중시가 결부되어 남종시대에 생긴 것이 공안선(간화선)이다. 이는 오조법연, 원오극근에서 싹이 트고 대혜종고에 계승되어 자아철견을 위한 명확한 방법론으로서 인식되고 실천되는 수행법이다.
공안선은 수행자에게 반은 강제적으로 ‘의단’을 일으키게 하여 깨달음을 열게 하는 것이다. 치열한 의단의 돈발(頓發)은 임제의 할, 덕산의 몽둥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공안은 단지 도구와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의단을 일으킬 수 있는가 뿐이다. 스승은 이를 위해 제자에게 여러 가지의 도구를 사용해 보인다. 그것은 예로 촛불, 차 한 잔, 차관(주전자), 호떡, 고양이, 물소리, 등이다. 또한 ‘조주무자’등의 난해한 공안을 무기로 삼기도 한다.
간화선은 우리의 분별적 사유를 차단함으로써 우리를 지적인 깨달음(직관)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행이다. 선지식은 선자의 개성보다도 기량의 적확함을 판별한다. 인가는 이를 뜻한다. 여기에 간화선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간화선은 개오라는 점에서 현저한 효과를 거두어 크게 유행한다. 이처럼 간화선이 성립한 의의는 아주 크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론이 확립된 것에 의해 선은 문화나 소양의 차를 넘어서 모든 이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화선은 잘못된 이해와 수행으로서 자칫 선의 본질인 주체성과 창조성을 잃는다. 주체성은 개인의 체험과 동시에 창조성이다. 새로운 날, 나날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주체성의 열림이다. 이러한 선의 세계를, 만약 이미 받아들인 간화에 이끌림이 된다면 이는 분명 분별적 사유로 도리어 차단되어 버릴 것이다. 선 본래의 입장에 있어서는 화두는 스스로 만들어졌다. 선자는 처음부터 절대적 존재인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 화두를 어디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만들어 진 것이다.
혜가는 달마로부터 화두를 받은 것이 아니다. 화두는 내부에서 일어나고 안심하고 싶다고 하여 스스로 왔고, 승찬과 혜가의 사이도 그랬다. 그 외 〈전등록〉 등에서 보면, 선자들은 선문을 두드리기 전에 가지가지 준비를 했다. 능가를 읽던가, 반야 열반을 연구했던가, 법화를 수 백 번 염송했다. 덕산선감은 〈금강경〉을 지고 있었지만 내심의 언저리는 깜깜했던 것이다. 화두가 생겼던 것이다. 남쪽에 가서 이를 풀어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화두가 생기는 데는 이 같은 심적 단련이 있었다. 여기에 선의 진면목이 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대의정과 대분심은 선지식으로부터 내 던진 또 하나의 화두와 만나 줄탁동시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영광(靈光)’ ‘본래인’ ‘청정광’으로 환원하는 오경(悟境)이다. ‘깨달음과 선’은 시대의 문화적 차이에서 그 수행의 방법은 달리 하겠지만 그 근원은 불이임을 여기서 보게 된다.
혜원 스님/ 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28호/ 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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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큰 보탬이 됨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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