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청도, 분바위와 지뢰지대
인천 연안부두에서 4시간이 소요되는 소청도는 백령도를 가면서 잠시 거쳐가는 작은 섬이라 여겼는데 보기와는 달리 큰 섬이었다.
작년 백령도를 가면서 쾌속선 창 밖으로 언뜻 보면서 대청도는 큰 섬이고 소청도는 작을 “소”자가 들어가니 당연히 작은 섬이라 여겼던 것이다.
소청도는 흔한 슈퍼도 없고 식당도 없다. 공공버스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대청도와 백령도는 올해 8월 훼미리마트 5000호점 기념하면서 각각 입점되었는데 소청도는 그 혜택도 지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2.91㎢의 면적을 지닌 소청도는 해양경찰 초소가 있었고 치안을 담당하는 파출소도 따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분교와 대청면사무소 출장소, 보건소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 섬은 110가구 200여 명의 인구가 두 마을로 나누어져 살고 있고 우리나라 최북단에 속해있는 섬이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섬에는 주민이 거주해야 국토가 지켜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섬주민은 각별한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고 국가에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늘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어업과 밭농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업량이 계속 감소되면서 이번에 큰 배를 지닌 선주 2 명이 또 배를 팔았다고 곁에 있던 주민 한 분이 전해준다.
서해바다의 어획고는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달라 수확하는 양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연평도 바다는 중국어선들까지 몰려와 마구잡이로 쌍끌이 어선으로 쓸어가니 낙담에 빠지게 되고 큰 배는 유류값
때문에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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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청 1리 마을의 전경. 마을의 수도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어수선하였고 전선도 어지럽게
널려 있어 전체적으로 조용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2리로 가야 진짜 마을모습을 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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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소청도에만 있는 생계대책형의 소형배 '뗏마' 스티로폴로 만들어져 있다
마을은 1리와 2리로 나누어졌는데 1리는 선착장에서 곧바로 보이는 언덕에 모여 있었다.
1리에는 요즘 보기 힘든 여인숙이 다소곳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지어진 펜션 두 동이 옆에 깨끗하게
서 있었다. 2리는 고개 하나를 넘어서야 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우리는 1리의 보라색으로 색다르게 페인트칠을 한 민박집으로 이동하였다.
민박집은 숙소와 주방이 분리되어 편리하게 보인다. 건물을 보라색으로 칠해 놓으니 마을에서도 확연하게 돋보여
멀리서도 쉽게 눈에 뜨인다.
언덕에 위치한 민박집 창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마을 전경과 바다풍경이 보이고 건너편 산 중턱에 김대건신부 동상
도 보인다. 발품을 팔아 길을 나섰다.
김대건신부는 1800년대 초 사람이다. 중국교회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소청도도 몇번 거쳐갔다고 한다.
그는 덕적도를 기반으로 주민 계몽사업과 간척사업, 배 위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선교를 펼쳐나가다 1846년 대원
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주민들은 김대건신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소청도에 동상을 세워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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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신부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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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면사무소 소청출장소
소청도에 사람이 거주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대청도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부속섬으로 불리면서 신라시대 때
장보고의 무역통로로 이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개성(경)과 가까워 원나라 황족이 귀양을 왔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난 10월에는 일제가 설치해 놓은 기뢰 3개가 예동포구에 떠내려와 1개는 저절로 폭파되어 없어졌고 2개와 3개는 해체하여 당시에는 모든 것이 귀해 마을의 연료로 쓸 요량이었는데 3번째 기뢰를 해체하다가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폭파되어 주위에 있던 마을 사람 59명이 사망하고 6명이 크게 다치는 일이 아픈 기억도 가지고 있는 섬이다.
예동포구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배가 여러 척 있다. 박정희정권시대 때 주민들의 생계대책으로 허가받지 않고도 조업할 수 있는 배를 암묵적으로 허가해 주었는데 스티로폴로 만든 20여 척의 조그만 배가 포구의 길가에 늘어져 있었다. 먼 곳은 가지 못하고 바다가 잔잔할 때 가까운 바다로 나가 낚시줄로 고기를 낚아올려 생계를 잇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데 지금도 조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배의 이름은 '뗏마'라고 하였다.
예동마을에는 또한 70년 된 한옥 1채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1940년대 지었는데 얼마 전까지 할머니 한 분이 사시다가 지금은 아들에게 명의를 이전해 주었는데 아들은 살지 않고 빈 곳으로 두어 곧 무너질 것 같이 을씨년쓰러웠다. 이 곳을 문화재로 지정할 려 하는 절차를 한번 밟았다는데 최근까지 지지부진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곳은 소청도에서 명물이 될 수 있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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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 508호 분바위. 온통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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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일제가 세워놓은 등대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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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새롭게 신축해 놓은 등대
섬은 최근 분바위라 불리는 천연기념물이 하나 추가되어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세계에서 2군데 밖에 없는 바위라고 하는데 선캄브리아시기 때 석회암이 열과 압력을 받아 화산활동으로 융기된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대리석이 마치 분을 칠한 것 같이 하얗게 빛을 발하며 남동쪽 해변에 300m 정도 서있었다.
분바위는 바위임에 틀림없지만 평범한 바위를 벗어나 가까이 가 보아야 비로소 정확히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대리석은 일제시대 때부터 마구 캐가는 수난을 당하면서 1970년대는 대리석의 광산개발로 쇠말뚝을
박고 무차별적으로 캐가다가 저지를 받고 작년 11월에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508호로 지정된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고 하다못해 흔하디 흔한 표식도 세워놓지 않았다.
등재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천연기념물은 쓸쓸히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4시간이 걸리는 섬을 가면서 갈려면 백령도와 대청도로 관광을 가지 굳이 소청도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외면당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굳이 지정해 놓고 팻말 하나 세워두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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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청1리 예동포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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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대에 세워놓은 팔작한옥집. 소청도에서 1채 밖에 없어 문화재로 지정해 놓아도 될 듯
소청등대는 분바위를 오르는 길만큼 가팔랐다.
오른편 길은 절벽으로 이어진 낭떠러지 길이어서 잘못 핸들을 꺾으면 수직으로 낙하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분바위를 가는 길은 왼쪽 해안에서 도로로 올라오는 길은 북한과 인접한 곳이어서인지 사람이 통행할 수 없도록
곳곳에 지뢰를 설치하여 철조망까지 둘러놓은 길이었다.
이 날은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려 안개까지 낀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등대에 도착하였다.
소청등대는 우리나라에서 4개 밖에 되지 않는 유인등대로 인천에서는 팔미도등대와 더불어 이름난 곳이다.
1908년 일제가 세운 등대는 시설이 노후가 되어 헐고 2006년 12월 새롭게 건물을 신축하였다. 건물은 산 위에 있
으면서도 육중하게 느껴져 중국 산동반도와 대련 등지를 오가는 선박들에게 안전한 항로를 비춰주고 있었다.
인천에서 다시 배가 들어온다. 하루 세번 운항되는 쾌속선은 제일 먼저 소청도로 들어온다.
소청도에서 대청도까지는 10여 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백령도까지는 30분이 걸린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소청으로 왔다가 오후에 대청으로 넘어가는 관광객이 많다.
쾌속선 근처로 조그만 학꽁치가 하얗게 몰려든다. 몰려드는 학꽁치의 떼처럼 소청도에도 떼로 몰려드는 관광객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첫댓글 서해 5도를 둘러보고 다음 섬으로 넘어갈려고 합니다.
겨울철 카페에 할 일이 없어 사람들 찾아오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지대한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대한 관심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샘~많이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