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실 아내의 몸에서 난 자식을 적출(摘出) 또는 적자라하고 작은집, 즉 첩(妾)의 몸에서 난 자식을 서출(庶出) 또는 서자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개 가정을 이루는 법은 일부일처제를 택한다. 그러므로 이미 호적에 아내가 정식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다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왕실이든 사대부이든 서민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대신 첩은 둘 수가 있다.
처(妻)는 귀밑머리를 올리고 정식으로 사주단자를 주고 받으며 혼례를 치른 뒤 맞아들이지만 첩(妾)은 일체 의례가 생략된다[聘則爲妻 奔則爲妻]. 따라서 처는 나이으 많고 적음을 떠나 정위(正位)에 앉지만 첩은 정위에 앉지 못한다. 비껴서 있거나 옆자리에 있거나 옆자리에 앉는다. 왕실에서도 중전(中殿, 中官殿)은 한 사람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적(嫡)과 서(庶)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며 또한 그 차이가 크다고 하겠다.
불교, 특히 선가(禪家)에서의 적출과 서출은 그런 Ent에 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선 하택신회선사와 남악회양선사를 예를 들어 보자.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거니와 또한 멸하지도 않았으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有一物於此 後本以來 昭昭靈靈 不會生不會宬 名不得得].
이 말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 대두되고 있는 ‘한 물건’에 대한 대답으로 인하
여 적출과 서출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였길래 그토록 엄청난 차이로 벌어지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주석을 보다.
한 물건이란 무엇이가? ○ 즉 하나의 둥근 모습[一圓相]이다. 옛사람이 송하기를
옛부첨님 출현하시기 전부터
그대로 둥근 한 모양이었네
석가모니 부처님도 오히려 몰랐는데
가섭존자 어떻게 전했겠는가
하였다. 이것이 한 물건의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거니와 또한 멸하지도 않았으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는 이유다.
육조스님께서 대중들을 향해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명(名)도 없고 자(字)도 없다. 제군들이여, 알겠는가?” 하니, 대중들과 함께 앉아 있던 신회선사가 썩 나서며 대답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며 이 제자[神會]의 불성입니다.”라고 하여 결국은 육조의 서출이 되었다.
또한 남악으 회양선사가 숭산(崇山)으로부터 와서 육조를 배알하니 육조가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이 말 한 마디에 회양은 말문이 막혀 참구(參究)하기 팔 년, 마침내 활연히 깨닫고는 다시 육조를 뵙고서 “설사 ‘한 물건ꡑ이라 해도 곧 맞지 않습니다.ꡓ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회양은 육조의 적출이 되었다.
한 사람은 즉시에 대답을 하였고 또 한 사람은 팔 년이나 지난 뒤에 ꡐ한 물건ꡑ에 대한 대답을 하였다. 하택신
회선사는 제불의 본원이며 자기의 불성이라 했고, 남악회양선사는 ꡐ한 물건ꡑ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고 했다. 남악회양선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물건에 대한 육조의 뜻을 제대로 이었다는 뜻이고, 하택신회선사의 경우에서는 이미 육조스님께서 명(名)도 없고 자(字)도 없다고 하였던 한 물건에 ꡐ본원ꡑ이니 ꡐ불성ꡑ이니 하고 명자(名字)를 붙였으니 어긋났다는 뜻인가? 이와 같이 남악은 육조의 뜻을 알았기에 적출이 되었고 하택은 육조의 뜻에 모순하기에 서출이 되었다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는 육조스님을 대할 수 있다. 이미 명도 자도 없는데 어떻게 ꡐ한 물건ꡑ이
라 했느냐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남악회양이 ꡐ한 물건ꡑ이라는 말도 오히려 맞지 않는다고 한 것에 고개를 끄
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악회양선사조차 허물이 없을수는 없다. 이는 ꡐ한 물건ꡑ은ꡐ한 물건&
#43089;이라고 해도 맞지 않지만 또한 ꡐ한 물건ꡑ;이라고 해도 방해롭지 않은 도리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ꡐ한 물건ꡑ은 ꡐ한 물건ꡑ이라는 말 이와에 무엇이라 이름 붙여도 관계없다. 그와 동시에 어느 하나만을 고집한다면 그 또한 옳지 않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어라 한들 방해될 것이 없다. 문자의 유무에 관계하지 않는다. 상(狀)을 초월했기에 상(狀)의 유무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택신회가 반드시 허물 될 말을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남악회양에게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는 허물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하택신회에겐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法)을 시설한 공로로 표창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직관과 사변(思辮)에 대한문제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사변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직관이 있을 뿐이다.
하택신회선사가 적출이 되지 못한 것은 사변적 대업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요, 남악회양선사가 적출이 된 것은 직관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등록」이나 「염송(拈頌)」에 의하면 하택신회의 대답을 듣고 ꡐ그대는 지해종사(知解宗師)다ꡑ라고 육조스님이 말씀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택과 남악의 경우에서 시원함과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하택신회의 멋진 대답을 듣고는 ꡐ그래, 참으로 맞는 말이야. 옳거니ꡑ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남악회양의 머뭇거림을 보고는 ꡐ아휴, 답답해. 나 같으면 한마디 일렀겠구먼ꡑ하면서 뭔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ꡐ과연 하택신회가 멋진 대답을 한 것일까. 아무 말 못한 남악회양이 훨씬 더 멋진 게 아닐까ꡑ 하고는 ꡐ그래, 그렇구 말구ꡑ히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칠 것이다. 사족으로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매일 정보물을 수없이 쏟아내는 매스미디어 가운데서도 신문을 가장 먼저 들 것이다. 신문을 손에 들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곳은 바로 15면 상단의 좌편에 있는 4단만화일 것이다. 그리고 희평(戱評)이나 만평(漫評)일 것이다. 우리는 4단만화를 읽으면서 그 기발한 아이디어에 깜짝 놀란다. ꡐ어쩌면 저렇게 현실을 잘 묘사할까ꡑ하고.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난다. 다만 그뿐이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개그맨들의 유모어나 개그를 들으면서도 끄덕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선에서는 이처럼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선에서는 의단(疑団)을 중요시한다. 의심덩어리가 있으면 사변으로 풀기를 요하지 않는다. 직관이다. 직관이란 어떠한 사량(思量)과 분별(分別), 촌탁(付度)을 가자(假籍)하지 않은 순수 그대로 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ꡐ선(禪)ꡑ이란 글자는 ꡐ본다〔示〕ꡑ는 동사와 ꡐ순수하다〔單〕ꡑ는 형용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보기는 보되 순수하게 보는 것이다. 일체 사랑을 배제한 상태로 관하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직관하는 것이다. 직관이란 방법론에 걸리지 않고 목적론을 향한 직접적인 투시다. 본원의 자리는 곁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거나 사변하는 게 아니다. 바로 그 자체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4단만화라든가 희평, 만평, 유모어, 개그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희열을 맛보기 위해 직관하는 것이 선이다.
선에서의 적출과 서출의 관계란 이처럼 직관이냐 사변이냐에 띠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적자는 영원한 종손이며 서자와는 그 맥을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