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성리에 흐르던 눈물과 애국가
사드기지 공사 장비 반입저지 1박 2일 투쟁기
지난겨울은 너무도 길고 추웠다.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지독하게 불어 급기야 평화광장 천막을 날려 버렸다. 3월이 되어도 겨울은 좀체 물러가지 않을 듯 했다. 낮에 잠시 따뜻해도 밤은 여전히 추웠다.
집회에 나오는 시민들은 간절하게 따뜻한 봄이 오기를 빌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따뜻한 봄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공사 장비가 밀고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날이 따뜻해지면서 드디어 국방부가 언론에 정보를 솔솔 흘리면서 장비를 반입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12일, 장병 복지를 위한 공사 장비를 들인다면서 국방부는 4천 명의 경찰을 소성리로 보냈다. 이날 철제 틀 안에 그물을 쓰고 우리는 저항했다. 자칫하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날 지경이었고, 결국 국방부와 경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3일 간의 평화였다. 그동안 협상한다고 했다. 처음부터 협상은 결렬될 것이라는 걸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국방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미군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3일간이 조금 길어지자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북한에서 핵실험을 중단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럼 북핵을 막기 위해 ‘임시’ 배치된 사드는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27일까지만 버티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소성리사드철회 성주주민대책위원회(이하 성주주민대책위),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원회(이하 김천시민대책위), 원불교성주성지수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원불교비대위)를 중심으로 만든 사드철회 평화회의는 공사 장비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에서 조금 물러나, 지붕누수공사와 화장실 문제 해결을 위한 오폐수공사를 먼저 한 후(2달 정도 걸린다니) 나머지 공사는 북미정상회담 이후 다시 대화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모든 공사를 다해야 한다’며 거절당했다.
그러는 사이 소성리에 또다시 ‘보수단체’가 사드배치를 찬성하는 집회를 한다며 나타났다. 이들과 주민들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라며 경찰도 마을 안으로 대거 들어왔다. 사드 기지로 가는 진밭교 위에도 경찰 버스가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21일 소성리 7차 범국민행동 때는 경찰이 보건소 앞 삼거리에서 마을회관으로 들어가는 큰길을 터주지 않아, 참가자들이 ‘보수단체’들의 온갖 야유를 들어가며 마을 뒤로 돌아 들어가야 했다.
자연히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러다 작전을 진행하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때맞춰 언론에서는 국방부가 23일 장비를 들일 것이라고 보도를 했고, 대회 때도 같은 내용의 공지가 있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이제 언론에서도 ‘장병 복지’가 아니라 ‘미군 전용식당’과 ‘미군 숙소’를 위한 공사라는 보도를 하였다. 심지어 ‘보수신문’과 ‘보수단체’조차 미군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미군은 사람 아니냐. 전투식량으로 연명하는 미군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칠 정도였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그리고 자식을 군대에 보낸 사람들은 알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이슈가 나올 때마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들이 자주 나온다는 걸. 그 반면 미군들은 훈련 나와서 친 천막에조차 샤워실을 갖출 정도로 그들은 불편한 걸 못 견뎌 한다는 걸. 그들에겐 병역이 의무가 아니라 직업이고 근무 환경이니까.
그러니 그 미군들이 쾌적한 근로 환경을 요구하는데 국방부가 해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는 했다. 그러나 미군들이 출퇴근하는 길을 닦아주고, 미군 전용식당과 숙소를 리모델링하고, 사드 발사대를 고정시킬 패드를 깔고... 그렇게 미군 기지가 안착되는 것은 곧 사드배치가 ‘임시’가 아니고 ‘완전’배치된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더구나 아직 환경영향평가는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국방부 스스로 언론에게 밝히고 있지 않은가. 이유는 미군이 계획서를 보내주지 않아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언론은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미군과 미국에겐 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 법이 미군 앞에선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선 어떤 협상도 불가능했다. 다만 받아들이되 저항이 아닌 굴복(국방부는 주민설득이라고 했다)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패배를 예측한다고 해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22일, 지난 12일처럼 김천시민촛불집회를 마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저녁 무렵 갑자기 비상이 떴다. 진밭교를 경찰이 완전 장악했으니 가능하면 7시 이전이라도 달려와 달라고 했다. 이어서 김천밴드에도 오늘 집회를 취소하고 소성리 촛불문화제에 모이라는 공지가 떴다. 농소로 경찰차 여러 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소식도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저녁을 먹고 출발했다. 몹시 떨렸다. 진밭교에 이미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니 내일은 꼭 장비를 들이겠다는 국방부의 의지가 읽혀졌고, 그런 만큼 막으러 가는 우리의 패배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폼 나게 공사 장비를 들여보내고 싶은 국방부와 이를 허용할 수 없는 우리. 그런 우리가 누구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감히 못하고 있는, 거대미국을 상대로 짹 소리를 내는 주권자들이 아닌가?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600일이 넘는 투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군사 주권 없는 대한민국의 실체를 알았다. 그렇게 식민지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금 주어진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는 자들의 위선을 깨달았고, 그것이 우리를 투쟁의 전선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달밭재를 넘어서자 경찰 버스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막 버스에서 내린 전경들이 행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찰 버스가 많아서 차가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 차를 막지는 않았다. 마을회관 앞 삼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경찰차와 전경들이 더 많이 눈에 뜨였다.
마을 뒤로 들어가 마을회관에 차를 대니 회관은 불이 깜깜하고 조용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계셔서 다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진밭교에 올라갔다고 하셨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경찰차들이 회관 앞 캐디 숙소 위로 죽 대어져 있고, 경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진밭교에 이르니 경찰이 잔뜩 에워싼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김선명 원불교사무여한 단장이 마이크를 들고 경찰을 규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집에서 올 때 약간 떨어지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대열 안에 들어가니 의자를 날라 왔다. 처음엔 모자랐지만, 계속 들고 와서 나중엔 다들 앉을 수 있었다. 우산을 끄고 나눠주는 비옷을 입었다.
집회가 시작되었다.
경찰이 자꾸 인도로 내려와서 우리 자리를 축소시키려 했다. 교대한다면서 밀어대기도 했다. 박철주 상황실장이 손가락에 기브스를 하고 나타났다. 채증하던 경찰에게 손가락이 꺾였다고 했다.
가에서는 경찰과 실랑이하는 가운데도 집회는 계속 되었다. 운영팀이 큰 비닐을 갖고 와서 위로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양 가를 끈으로 묶고 가운데는 몇 사람이 피켓으로 받쳤다. 꼭 벌 서는 것 같았다. 10분마다 교대하자고 했다. 그런데 피켓 든 사람들은 교대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받쳤다.
김선명 사무여한단장이
“국방부가 사드 알박기를 하는데 경찰들이 부끄러운 시녀 노릇을 한다. 경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라!”고 촉구했으나 벽에 말하는 것이었다.
김도심 원불교 대구경북교구장도 경찰에게 한 마디 했다.
“물컵을 던졌다고 잡아갔는데, 경찰이 주민 이빨 부러뜨리고 갈비뼈 나가게 하고 온몸을 멍들게 한 건 범죄가 아니냐?”
비가 점점 내려 비닐에 물이 고였다. 막대로 지탱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전히 피켓으로 받치고 있었다.
얘기 도중 부녀회장이 담요를 앞 사람에게 주며 전달해 달라 부탁했다. 소성리 한 할머니가 상황이 급한 걸 보고 맨발에 슬리퍼 신은 채로 쫓아 올라와서 추울 것 같아 가져왔다 한다.
원불교 천막인 진밭평화교당에선 조용히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간간이 경찰이 밀어대면
“폭력 경찰 물러가라!”
“동작 그만!”
을 외쳤다.
‘아침이슬’, ‘광야에서’,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기자들이 오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어디 것인지 적힌 것도 있었으나 안 적힌 것도 있었다. 사람들이 사회자에게 어디 언론사인지 확인을 한 다음 찍을 수 있도록 통제하길 요구했다. 그리고 조선, 중앙, 동아는 취재하러 들어오지 마라 했다. TV 조선과 채널 A도 당연히 배제되었다.
“불법사드 가동 중단!
우리가 평화다!
소성리가 평화다!
사드 가야 진짜 평화!”
구호를 외쳤다.
천주교 미사가 시작되었다. 밤 10시가 넘은 것 같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들 가는가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이 밤 긴 밤이 되겠지요. 온갖 불법과 탈법을 동원하여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요? 말로 설득할 수 없으니 오로지 폭력만이 가능하니까요.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폭력보다 더 강한 진리의 힘으로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라는 말로 미사가 진행되었다. 김동건 신부와 함께 미사를 주례한 신부님은 밀양에서 오신 분이라 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을 할 때 그 경찰 풍경이란다.
미사가 끝나고 집회를 이어가던 중 경고 방송이 나왔다.
김도심 교구장이 다시 발언을 했다. 밥 먹다가 갑자기 경찰이 밀어닥쳤다고 개탄했다.
원불교로서는 참 비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다. 작년 4월 26일 사드발사대 2기와 X 밴드레이더가 반입되던 날은 28날 있을 원불교 대각개교절 준비로 한창일 때였다. 대각개교절은 불교의 부처님 오신 날이나 기독교의 예수탄생일이나 부활절만큼이나 큰 날이지만, 이 작은 종교는 이렇게 무시당하고, 짓밟혀졌다.
이번에도 그날을 닷새 앞두고 기습적으로 장비를 반입하겠다는 것이었다.
11시쯤 박철주 상황실장이 나와 내일 아침에 장비가 반입될 것 같다고 나이가 든 사람은 쉬라고 했다. 상황실 대변인인 강현욱 교무의 지휘 아래 자리 배치가 이루어졌다. 40대 이하와 자기가 젊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에 의자를 갖고 앉고, 가운데는 의자를 빼고 깔개를 깔았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은 쉬러 가거나 자리에 누워 쉬라 하고,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교대로 쉬라 했다. 체력을 비축하라는 것이었다.
나가는데 피켓 든 사람들은 힘들면 힘들다 이야기해서 교대하자는 소희님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아무도 말 못할 것 같다면서.
오늘도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 때문에 가야 했다. 다리가 아파 못 온다던 70대 언니도 왔다 갔단다. ㅅ님은 멀리 있는 근무지에서 지난번처럼 또 달려왔다가 간 모양이다. 사람들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안 편하다고 차라리 달려오는 것이 낫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한 젊은 엄마가 나가면서 추운데 입으라고 패딩잠바를 벗어주었다.
쉬러 나오니 부녀회장이 소성리 70, 80 큰언니들이
“마을회관으로 쉬러 가라니까 (혹시 경찰이 막아서 못 올라올까봐) 안 가려 한다.”
고 걱정을 했다. 그랬더니 김선명 사무여한단장이 원불교 컨테이너에 들어가 쉬시라고 권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마을회관에 내려가기가 꺼려졌다.
농소, 월명 아지매들과 함께 컨테이너에 들어갔다. 좁은 방에 한 10명 정도가 모인 것 같다.
여기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듣게 되었다.
소성리 나(나이) 많은 언니들의 말을 종합하면 막 저녁을 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전투 경찰이 방패 들고 뛰어가더라는 거다. 놀라서 진밭교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대답이 왔는데 그 순간 위쪽에서 경찰이 까맣게 내려왔다고 한다.
지난 12일 사용했던 철제 틀을 용접하려고 끄집어내는 걸 경찰이 봉고차 안에서 보고 무전기로 연락해서 위, 아래서 들이닥쳐서 빼앗으려 한 것이다. 며칠 전부터 이미 들어온 많은 경찰들에게 적은 수의 지킴이들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강현욱 상황실 대변인과 박철주 상황실장이 철제 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틀 안에 들어간 채로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단다. 그 아래에는 에어매트가 깔려있지 않아 아찔했다고 한다. 그대로 대치 상태가 지속되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싸워야 했다는 것이다.
조금 이야기하다가 대충 자리 잡고 잠을 잤다. 자리가 좁아 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패딩잠바를 이불 삼아 덮고 잤다. 1시가 넘어 눈을 떴다.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였다. 나중에 들으니 전기 판넬이 고장 났단다. 다리도 못 펴고 자는데다 바닥까지 차니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밖으로 나왔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경찰도 일부는 누워서 자고 있었다.
바깥 손잡이에 전기가 통해서 열고 닫는 것이 힘들었다. 비 때문인가 보다.
농성장으로 들어가니 아까 깔개만 깔렸던 바닥에 비닐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비닐을 덮고 누워 자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장대로 받쳐놓았다. 제법 천막이 되었다. 음악도 잔잔하게 흐르고 따뜻하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보온통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들어가 잠시 책을 보다가 다시 잠이 와 나도 다른 사람처럼 누워 잠을 잤다. 패딩잠바는 입고, 가방은 베개 대신으로 하고, 비옷을 이불 삼아 덮었다. 비닐 바닥이 오히려 컨테이너보다 따뜻해서 몇 시간 잘 잘 수 있었다.
5시 쯤 대열이 다시 정비되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보니 날이 새고 있었다. 비가 내려 어둡긴 했으나 주변이 좀 밝아졌다.
6시 쯤 집회가 시작되었다. 원불교도 이태옥님이 사회를 보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상황실장이 보고를 했다. 아직 언제 작전에 들어갈지 잘 모르겠으나 8시나 9시 쯤 들어갈 거라 했다.
김성혜 교무가 나와 요가를 했다. 어깨도 돌리고 팔도 돌리고 손바닥도 비비고 했는데, 다리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어서 펼 수 없는 상태라 따라 하기가 어려웠다.
철제 틀은 빼앗겼으나 그물은 남아 있어 돌렸다. 버틸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을 거라 했다.
이어지는 원불교 법회.
그다음 개신교 예배 후 천주교 미사를 준비하는 동안, 강현욱 상황실 대변인이 브리핑을 했다.
1) 우리 쪽은 국방부에게 지붕 보수와 화장실 공사는 하고, 나머지는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다시 논의하자 했지만 거절당했다. 왜 이 시점에? 남북, 북미대화가 잘 이루어지면 사드는 애물단지가 된다. 즉 북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들어온 전략무기이니 내보내야 한다. 그 전에 미군 기지를 완공해서 완전 배치를 하려는 것이다.
2) 절묘하지 않는가? 보수단체가 집회를 한다고 해서 경찰이 주민과 충돌을 막는다고 들어왔다. 엊저녁 보수단체가 나가면 철수한다고 했다. 그러나 5시에 간다고 하던 보수단체는 7시에 철수한다고 했고, 경찰은 그대로 있다가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경찰이 보수단체와 함께 모의했거나 또는 이용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는가?
김밥을 나누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가방에 넣었다. 미사 중 이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된다고 알렸다. 상황실장이
“경찰이 인권적으로 진압한다고 약속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비웃었다. 기껏 200명도 못되는 사람들에게 중무장한 경찰 3천 명이 에워싸서는 ‘인권적’으로 하겠다니 비웃일 일이 아니겠는가.
“다치지 말라”고 당부한 상황실장은 경찰에게
“이분들은 나이 드신 분이 많다. 칼이나 가위를 쓰면 위험하니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김동건 신부도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경찰 방송차에서 기자들은 다 나가라고 방송을 했다. 공포가 밀려왔다. 기자들이 없는 가운데 뭔 짓을 하려는 거지?
기자들 나가지 마라고 사람들이 부르짖으니 원불교 기자와 독립카메라 감독들이 나가지 않고 대열 앞이나 가에 있었다. 나중에 보니 아침에 들어온 우리 율동맘도 자리에 들어와 진압 장면을 울면서 찍고 있었다.
장대를 치웠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미사를 하는데 뒤가 갑자기 확 무너졌다. 경찰이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진밭교 올라가는 쪽은 비탈져서 뒤에서 쳐 들어오면 자칫 사람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깔릴 수 있었는데 실제로 깔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보니 칼로 그물을 찢고 있었다.
“칼! 칼 갖고 있어요!”
“사진 찍어줘요! 사진!”
“앗! 칼에 찔렸다!”
외치니 누가 달려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잠시 주춤해졌고, 상황실장과 운영팀이 달려가 항의를 하니 다들 칼 같은 것은 없다며 시치미를 뗐고, 지휘관은 지적당한 경찰 주머니를 뒤져 확인하려는 것을 막았다.
들 것이 와서 쓰러진 사람이 실려 가자 다시 공격이 이어졌다.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이 우리도 돌아앉자고 했다. 돌아앉았는데, 앞쪽으로 남자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러 남자들이 쫓아가서 저항했다. 빠지는 것 같더니 여경들이 들어왔다. 잠시 싸우다가 빠지고 다시 남자 경찰들이 몰려왔다. 피켓을 들고 저항하던 젊은 남자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발로 차며 못 들어가게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남자는 질질 끌려 나갔고, 또 지휘관이 손짓을 하자 가 쪽에 있던 정 목사가 경찰에게 목이 껴인 채 들려나갔다. 언제 벗겨졌는지 비닐이 벗겨지고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좀 있으니 제대 옆에 있던 작은 탁자를 빼내기 시작했다. 신부님과 여러 사람들이 저항했으나 소용 없었다. 탁자가 들어내졌다. 신부님이 제대를 조금 옮겨 막으려 하자 이제는 제대를 빼앗기 시작했다. 사제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마치 범죄자 체포하듯 마구잡이로 여럿이 달려들어 우악스럽게 밀어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다시 우리 쪽으로 향했다. 채증 카메라가 엄청 많이 몰려왔다. 처음 남자 경찰들이 여자들을 잡아가려해서 막 항의를 했다. 칼을 휘두르기에 그것도 항의했다. 끌려 나갔던 상황실장이 와서 지휘관에게 항의하자 여경이 투입되었다.
“커터는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전혀 다치지 않는다.”고 지휘관이 말해서 더 이상 말을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여자를 남자 경찰이 들어내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세 명의 남자 경찰이 다리로 여경들 뒤를 받치고 앞 쪽에서 여자 경찰들이 여성들을 들어냈다. 우리가 뭐라 하면 손을 대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했다. 점점 사람이 줄어드니 이젠 지휘관이 노골적으로
“커터! 커터! 커터!”
외쳤다. 여기저기서 칼로 그물을 당당하게 잘랐다. 사람이 다치지 않는다고 공언했으니 이젠 여기저기 칼이 난무했다. 앞이나 옆에 그물을 쓴 사람들 목 부분이 졸려져 위험하게 느껴졌다.
“목이 졸린다고!”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뒤에 앉은 한승호님이 끌려 나갔다. 천식이 심한 분인데 걱정하는 사이 내 옆 젊은 남성이 공격을 받았다. 내 앞에서 당차게 싸우던 젊은 여성이 끌려가고 나도 여럿이 들어냈다.
시멘트 바닥 물이 흥건한 곳에 눕혀 놓고 일어나 나가라고 했다. 찬 물이 고인 곳에 누워 있으니 몸에 힘이 풀리고 이대로 자고 싶어졌다. 못 일어나고 있으니 한참 일으키려 하다가 다시 넷이 들었다. 차마 기자들이 있는 곳까지 늙은 여성을 들고 나가기 싫었던 것 같았다.
컨테이너 앞에 두어 사람이 경찰에게 갇혀 있었다. 그 앞 평화계곡 쪽에는 밀려난 사람들이 있었다. 마을회관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다 한다. 여기서 앰블런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최용정 김천시민대책위 자문위원이 깔개 같은 것을 구해 와서 앉도록 할 때까지 찬 바닥에서 경찰에게 에워싸인 채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앰블런스가 도착하여 보건소로 데려다 주었다. 보건소에는 손가락이나 목 등을 다친 사람들이 와서 치료를 받고 그 중 심한 사람은 성주나 김천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아침에 따뜻한 물 한 잔만 마시고 빈속이라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물을 마시고 누워 있으니 왼 손목이 시큰했다. 약을 바르고 나니 이젠 또 왼쪽 어깨가 쑤셨다. 어깨는 지난 12일부터 계속 아팠던 데다. 약을 바르고 다시 물을 마시고 그렇게 한참 후 기운을 차리고 나니 바깥에서 ‘보수단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보건소로 내리면서 구급대원이 패딩잠바 모자로 얼굴을 덮어준 이유가 그들에게 안 보이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저기에 주민은 없다! 외지인은 다 내보내라!”
“보건소에 있는 것들은 내보내라! 왜 우리 세금으로 치료하냐?”
등등.
한참 있으니 심하게 다친 사람들이 실려 왔다. 한 사람은 산소마스크가 없으니 바로 병원으로 보내라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들어왔다. 최후까지 차에다 파이프를 연결하고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경찰이 그대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쳤다고 하는데 한 여성은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그러다 소성리 이장님이 들어오셨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다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는데 보건소 에 왔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우리도 마을회관에 가고 싶어졌다.
김성혜 교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혜 교무는 엊저녁에도 경찰에 질질 끌려갔는데 오늘도 타박상을 입었다. 우리는 이장님을 따라 밭둑길로 해서 가려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 20여 명이 달려와 못 가게 막았다. 마을회관에 가서 누워 있겠다고 해도 안 된다 했다.
김성혜 교무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경찰과 그 밑에 있는 경찰인 듯한 이들과 말다툼을 했다. 어제부터 경찰에게 당한 교무님은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왜관 교무까지 나서서 경찰과 싸웠으나 택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트집만 잡힐 따름이었다. 아마도 저 경찰들은 고상하지 못하고 사납게 행동하는 데모꾼으로 우리를 기억하겠지. 씁쓰레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결국 김성혜 교무는 옷이라도 갈아입으려고 대각전으로 가고 나머지 우리 다섯은 도로 보건소로 돌아왔다. 장비가 반입될 때까지 마을 앞길이 차단되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니 장비가 들어온다고 했다. ‘보수단체’에서 트는 음악이 ‘개선행진곡’으로 바뀌었다. 그 경쾌한 곡을 듣고 있자니
“만세! 만만세! 용사들 돌아오누나! 높이 불러라 만세! 만만세!”
학창시절에 배웠던 가사가 떠올랐다. 장비가 들어온다는데,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을 건데, 그 우는 사람들 곁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타는데 장비차가 보였다. 그러자 음악 소리는 애국가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만세 소리와 계속되는 애국가.
장비가 다 들어가고 나니 이장님이 마을길을 돌아 들어갈 수 있도록 기다리니 나오라고 했다. 셋이 나오다 손가락을 다친 여성이 이젠 논길로 가도 되지 않겠냐 해서 그리로 갔는데, 이번에도 경찰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막았다. 장비가 다 들어갔어도 안 된다고 했다. 도로 나와서 보건소를 지나 마을 뒷길로 들어갔다.
가면서 보니 보수단체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박근혜를 석방하라’ 팻말을 들고 있기도 했다. 외국군을 위한 장비가 들어가는데 애국가를 틀어대는 ‘보수단체’라니. 이 사람들에게는 진짜 보수주의자 김구도, 장준하도 빨갱이로 보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울지 않았다. 오직 분노를 담담하게 삭이고 있었다. 하늘이 대신 울어주었다.
ㄱ님은 경찰을 상대로 외치고 있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미군의 개 노릇을 했다.” 운운. 근무 때문에 함께 싸우지 못한 ㄱ님은 그 때문에 더 슬퍼하고 더 분노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정리 집회를 하고, 우리는 돌아왔다.
600일 넘게 김천역 평화광장에서 촛불을 들면서 누구보다 따뜻한 봄을 기다렸던 우리. 날이 따뜻해지면 공사 차량이 밀고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행여나 하며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우리. 27일까지만 참아줬으면 했지만, 국방부는 미군 밑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닌 소성리 롯데 골프장 사드 기지.
미군은 여기에 편의 시설을 갖추고 출퇴근을 하고, 그리고 사드와 X 밴드레이더를 운용하는 모든 시설을 갖추려 한다. 환경영향평가? 그 따위 미군 사전엔 없다. 임대료? 오히려 자신들의 주둔비를 올려 달라 하고 있다. 불법? 위법? 그들은 무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이렇게 우리 땅을 떡하니 갖다 바치고, 우리 안보를 외국군에게 맡기고, 사드만 들어오면 우리 안보가 지켜진다고, 수도권이 방어된다고 우리에게 받아들이라고 윽박지른 건 대다수 국민들이다.
싸우는 우리들에게 지역 이기주의자라 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주민은 없고, 전문 시위꾼만 모여서 싸운다고도 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보다 그 냉소와 야유가 오히려 더 아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잠이 쏟아져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운전하던 이선생도 잠이 쏟아져 자꾸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집에 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 평화광장에 집회하러 나가니 비가 많이 내렸다.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기는 했으나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한 농소 어른이 조금 듬성하게 앉아라고 했다.
“오늘 같은 날, 사람이 적어보이면 더 힘이 꺾인다”고.
https://band.us/band/62923373/post/24327
소성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괴로움은 우리보다 더 컸다. 경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밤에도 불을 밝히고 있어 불안하다고 했다. 예전처럼 경찰은 버스에 시동을 켜놓아 소음과 매연에 시달리게 했다. 23일 22대의 차량이 들어갔고, 다음 날에도 20여 대가 들어갔다. 25일엔 인부들을 태운 봉고차가 10여 대 들어갔다. 소성리 주민들은 인부나 공사 차량을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힘이 부족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김천도 농소 젊은이(라고 해야 4, 50대지만)들 중심으로 인부들이 출퇴근하는 시간에 함께 저항하기로 했다.
그래도 매일 공사 차량이 들어가는 것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상실감을 어찌 말로 다하랴!
사나흘 지나니 시민들은 웃을 여유를 찾았다. 어쨌든 금방 해결되리라 생각지는 않았던 일이 아닌가.
이 경험은 우리로선 처음 있는 경험이다. 600일이 넘도록 촛불을 켜는 일이 어디 흔하겠는가. 또 그 일을 우리가 하리라고 어떻게 예측했겠는가. 우리는 이 투쟁이 어떻게 끝날지 예측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 나름의 삶을 지키고자 오늘도 촛불을 켜고 소성리가 위험하다고 하면 달려가 함께 싸울 따름이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이다. 우리도 국민임을 인정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