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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cmcmed.co.kr/community/bbs/viewbody.php?code=newsletter&page=1&number=3615&keyfield=&key=
김종률 원장님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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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wi in Africa
말라위란 나라이름을 들어 보셨나요?
아프리카 남동쪽에 있는 작고 가난한 나라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이곳 말라위를 다녀왔습니다.
미국본토도 아직 제대로 가보지 못한 제가 머나먼 아프리카,
거기에서도 말라위란 나라를 다녀오게 될 줄은.....
말라위를 가게 된 것은 평소 아프리카를 동경하였던 제 딸이 우연히
말라위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김용진 목사님을 작년 봄에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이야기 중에 제 딸이 말라위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김 목사님이 이를 허락하여서
일이 성사된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11학년인 제 딸아이가 신기하게도 아프리카를 가고 싶어 하고,
그 것도 관광이 아닌 봉사로 말라위까지 가려 하는 것이 도무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작년에 만 15세 였던 아이가 우물 안 개구리인 아빠보다는 통이 큰 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참.....
제 딸아이는 자기 혼자서 아프리카를 가겠다고 하고,
저는 아프리카는 절대로 안된다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은 제가 딸과 같이 따라가는 것으로 합의를 했지요.
아무튼 제가 대단한 딸을 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프리카로 떠나려니 봉사기간이 2주가 필요하다는 말에
병원을 2주나 비울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개원 12년차인데 일 년에 4일 이상을 쉬어 본적이 없었거든요.
다행히 말라위를 가려는 기간이 7월 휴가철이라 1주는 대진의를 쓰고
1주는 병원 문을 닫고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1. 말라위
말라위 국토의 크기는 남한보다 약간 크며 인구는 1400만명이고
2009년 1인당 GDP가 328$로 아프리카 52개국 중 46위인 최빈국입니다.
영국보호령에 있다가 1964년에 독립한 나라로 국민 성인의 HIV 유병률이
12%나 되며, 에이즈와 말라리아로 1985년부터 현재까지 약 100만명이
죽었으며 매년 약 10만 명이 계속해서 죽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기대수명은 43세 뿐이고 인구의 절반이 청소년입니다.
HIV유병률이 12%라니, 모르고 가서 그렇지 알고는 더 못갈 곳 같습니다.
말라위는 국토의 대부분이 지루 상에 위치하여 해발고도가 900∼1,200m에
이르고 아열대계절풍 기후로 11∼4월이 우기이고, 5∼11월은 선선한 건기입니다.
최고기온은 35℃, 최저기온은 7℃이고, 국민대부분이 기독교를 믿고
공용어는 영어와 치체와어 입니다.
국토의 1/4 가량을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말라위호수가 차지합니다.
아프리카를 가기전에 말라리아 예방약을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장티프스 예방주사와 황열예방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황열예방 주사는 국립의료원에만 있으므로 일정에 주의 하여야하고
황열예방주사 효과는 10년간 지속된다고 하여 이 주사를 맞으면
Yelllow Card를 주는데 이를 여권에 보관합니다.
이런 말라위를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세번이나 갈아 타야 합니다.
인천에서 홍콩, 홍콩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요하네스버그에서 말라위의 블렌타이어 공항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비행기 타는 시간만 총 20시간이고, 집에서 나와 말라위 현지까지
가는데 총 34시간이 걸린 장거리 여행이었습니다.
2편에 계속...
Malawi in Africa 2
2. 마칸디
저희가 도착한 곳은 말라위의 남쪽에 있으면서 옛 수도인 블렌타이어에서
차로 약 1시간 반 거리의 Makandi 란 마을입니다.
Makandi에는 약 300명의 죄수가 수감된 교도소가 있고
이 교도소 주변에 몇 십개의 집이 있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마칸디 마을 전경 마을의 집 들
마을 이발소 공동 빨래터
이 교도소에서 사역중인 김용진 목사님이 말라위에서 하시는 일은
열악한 교도소의 죄수와 주변 마을과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 1끼 옥수수죽을 먹고 있는 죄수들에게
주변 땅을 개간해서 곡식을 재배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주고,
양계장을 만들어 한달에 한번 이라도 고기를 먹게 해주려고 합니다.
또 학교를 세워서 학생을 교육하고, 밥 꿂는 아이들에게 사랑의 음식이라는
점심급식을 해주려고 준비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마칸디라는 이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걸어서 다른 마을로 가거나 허름한 창고에서 모여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김 목사님이 한국의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이곳 마을에 학교를 세워 주었습니다.
학교를 가보니 책상도 없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다 떨어진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이곳 학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 지은 학교 전경 개교축하 발표준비중인 학생들
맨 바닥의 교실과 학생들 학생들 교과서
제 딸 호연이가 말라위에서 할 일은 이번에 새로 지은
이 학교의 각 학년 교실마다 학습게시판을 만들어 주고
교실 내벽 페인트 칠을 해주는 것이었고,
굿피플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구호기관과 연결되어
어린이 지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학생의 자매결연을 위한
전교생 400명의 개인 신상을 프로파일링 하는 것 이었습니다.
또한 종교단체에서 기부된 기금으로 초등학생의 점심 급식을
만들어 주기 위한 기초 조사 작업을 도와 주었습니다.
학생들이 이 것 때문에도 학교를 온다고 합니다.
점심급식을 만드는 곳 점심 급식 중인 모습
저는 딸과 함께 이 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호연이가 교실게시판을 꾸밀 스티커, 사진등을 미리 미국에서 많이 사가지고 가서,
각 학년의 수준에 맞게 같이 만들었습니다.
게시판으로 쓰일 베니다판을 준비해서 페인트 칠하고
게시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붙이고, 또 교실내부 벽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하루종일 딸과 같이 하니 저 자신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사실 제가 아빠로서 그간 호연이 에게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이곳 아프리카 까지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제 기억에 저는 제 딸과 같이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애기때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잠시 놀아준 기억뿐입니다.
공놀이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가까운 고수부지에서 산책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좀 커서 호연이가 7살 부터는 첼로에 올인 한다고 같이 있기가 힘들었고,
어쩌다 일찍온 날은 컴퓨터나 붙잡고 있고, 아니면 의사회 일한답시고 늦게 오고
술먹고 술주정이나 하는 아빠를 보면서 제게 실망이 많았을 겁니다.
조금 더 커서 중학교 1학년때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지금껏 5년 동안 떨어져 있어서 더욱 미안한 아빠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2주간의 여행은 제게는 무척이나 큰 의미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제가 딸에게 하도 참견을 많이 했는지,
제 딸이 한국에 와서 다시는 아빠랑 둘이 여행 안간다고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고 투정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3편에 계속...
Malawi in Africa 3
3. 말라리아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는 매우 무서운 병입니다.
말라위에서도 2009년 동안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자수는 약 7천명이었으며
450만명이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희 나라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는 횟수 만큼 이나 말라리아에 걸린다고 합니다.
이곳 마칸디 마을에서 목사님과 함께 2008년부터 1년간 봉사를 하던 한국청년이
2009년 5월 말라리아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분의 부모님은 상심하였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이곳 마칸디에서 다시는 말라리아로 죽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이곳에 진료소를 세워 주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따서 이윤상진료소입니다.
이곳 진료소 마당에는 고 이윤상씨의 묘소가 있습니다.
진료실앞 고 이윤상님 사진 추모예배를 하는 현지 목사님
묘비명 - "말라위를 사랑한 이윤상의 묘" 이윤상진료소
진료소 앞에 걸린 활짝 웃는 이윤상씨의 사진이 너무도 밝고 위대해 보였습니다.
이렇듯 말라리아는 너무도 무서운 질병입니다.
이 곳 진료소는 한국에서 지원되는 비용으로 유지되고 있고
정식의사는 아니고 1명의 보조의사(?)와 간호보조 1명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저도 이곳에 있는 동안 2일간 이곳 진료소에 가서 환자 진료를 도와주었습니다.
할머니 같은 노인이 들어오는데 40대 초반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울면서 업혀 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중환자실에 빨리 입원해야 할 것 같은 아이도 여럿 있었습니다.
말라위의 5세 미만 사망률이 1000명당 111명이나 된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환자들이 감기 같은데 이곳 진료의는 말라리아라고 합니다.
무언인지 모를 말라리아 치료약 1종을 3일치 처방합니다.
일부 오남용이 우려되지만 약을 안먹어서 환자가 죽어나갈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처방을 안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말라리아 테스트 킷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나 하고 처음 보는 테스트 킷은 말라리아 감염여부가
약 5분이면 결과가 나옵니다.
그러나 키트 비용 때문에 자주는 못쓰고 아주 어린아이의
감별진단을 위해서만 쓴다고 합니다.
하루 백여명을 진료하는데 이곳이 아니라면 약 10Km 이상 밖에
정부진료소가 있어서 걸어서 3시간을 가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치료가 않되어서 정부진료소로 환자를 보내도 몹시 아픈 몸을 이끌고
3-4시간씩 걸어가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곳 이윤상진료실에는 문을 열기도 전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작은 진료소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진료소 대기실 진료소 처치실
현지 보조의사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이 진료를 위한 것이 아니고 호연이와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진료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호연이를 혼자 있게 할 수가 없었던 것도 있고 프로젝트가 핑계였지만,
진료 팀웍이 아닌 저 혼자서 낮선 질병의 진료를 본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환자를 보면 잘못된 판단으로 오히려 더 해를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모르는 제 딸아이는 왜 진료를 계속 하지 않느냐며 저를 다그칩니다.
잔소리만 하는 저랑 계속 같이 있기 싫어서 였을까요 ? 아니면
의사인 제가 자랑스러워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 마음이었을까요 ?
그들을 한명이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
의사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슈바이쳐의 마음,
그러나 제 가슴속에 있는 슈바이쳐는 너무 작고 연약해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마음속으로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뿐입니다.
서울에 와서 보니 2010년 여름부터 대한약사회가 아시아 보건의료단체 가운데는
최초로 UN재단과 말라리아 퇴치 운동에 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말라리아 퇴지 운동에 참여한답시고, 대학생에게 강의를 하러 다니고
복지부 장관을 만나고 난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당연히 우리 의사가 해야 할 일을 약 판매상인 약사가 나서는 것도 우습고,
이러 일들에 저 자신이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만
마음만 있고
현실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4 편에 계속...
Malawi in Africa 4
4. 교도소
800명이 정원인 치치리 교도소에는 1,760명의 수감자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체감온도 30도를 훨씬 웃도는 덥고 축축한,
숨쉬기 조차 힘들만큼 비좁은 방에서 무려 180여명의 재소자들이
다리 한번 펴지 못한체 웅크리고 앉아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14시간을 통제를 위해 감옥안에 갇혀 있어야 했고
식사도 하루에 한번 옥수수죽을 먹고 있었습니다.
감방의 빗장이 열리는 오전 6시
어둡고 갑갑한 감방안을 벗어난 수감자들은 밤새 뻣뻣해진 다리와 허리를 마음껏 폅니다.
그나마 몸이 자유로워지는 시간입니다.
이곳의 수감자들은 흉악범도 있지만 궁핍한 생활에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많습니다.
지은죄보다 가혹한 처벌.
인간적인 삶이란 흉내조차 내기 힘든 말라위 치치리교도소의 재소자들 입니다.
치치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칸디가 저희가 있던 곳입니다.
제가 갈 곳이 치치리보다는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교도소란 곳에서 죄수와 같이 지낼 생각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제가 있던 마칸디 교도소는 사정이 훨씬 좋았고 저희는 교도소 안이 아니라
교도소 밖의 마을에서 생활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교도소의 전체 수감자는 300명 정도였고, 치치리 교도소 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곳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지만 조그마한 자기만의 공간도 있습니다.
이 교도소는 숙소 건물을 제외하고는 담장이 없었습니다.
낮에 노역 작업을 하는 장소는 마을에 있지만 이들은 자체적으로 선임자들이
망을 보는 정도로 제가 보기에도 느슨한 통제로
비교적 인간적으로 대우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담이 없는 마칸디 교도소 정문 교도소 건물 속
낮에 노역 작업중인 죄수들 몇대 않되는 현대화된 농기계
말라위 교도소의 수감자들은 생활고로 인한 생계형 범죄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막연히 생각했던 아프리카 흑인 교도소 죄수의 이미지와는 무척 달랐습니다.
그들과 일하는 곳에 같이 있었고, 교실벽은 그들과 같이 페인트칠을 하기도 하였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말라위 인구의 80%는 기독교를 믿고 있어 예배가 생활화 되어 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이 "선교를 하려면 기독교인이 20%도 않되는 한국에서 선교를 해야지
80%이상인 나라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이 맞지 않는다" 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신 것처럼
샤마니즘으로 가득찰 줄 알았던 아프리카가 기독교의 나라가 된 것이 신기했습니다.
물론 유럽강대국의 식민지하에서 강제적인 기독교화가 있었는지는 모를지만요..
마칸디 교도소에서 일요일마다 있는 죄수들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 곳의 예배는 한국 교회의 예배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죄수들 끼리 여러 개의 중창단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아카펠라 그룹처럼
화음으로 찬송하고, 북소리에 맞추어 열정적으로 춤추며 예배하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려고 진심으로 생을 갈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마칸디 마을에 있는 마을교회에서 예배보는 일반 마칸디주민의 예배도
가 보았는데 역시 음악적으로 타고난 흑인의 본성과 어울어져
예배를 마치 잔치, 축제화하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둘다 대단한 예배였습니다.
별것 아닌 비누 2개에 매우 기뻐하며 받는 죄수들을 볼 때,
역시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사는 삶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