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재~만복대~덕치리 지명 해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 맞춘 돌 포장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의 군사에게 쫓기던 진한의 왕이 달궁 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치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팔량치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고 한다.
-달궁 이야기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 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달궁계곡이 마한 왕조의 피신처였음을 밝힌 이는 김경렬씨다. 김씨는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2>에서 지금의 달궁계곡에서 지리산 개산의 비밀을 풀었다. 마한왕조와 관련한 지리산 자락의 기록은 지리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서산대사가 황령 아래 있던 절 황령암에 대해 적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 가운데 한 산이 있으니 지리산이다. 이 산 북쪽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른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과 정령이다. 옛날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서 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공사케했다. 도성이 완성된 후 고갯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 가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 팔량치라 했다. 서쪽은 정장군을 배치하고 정령(현재 정령치)이라 칭했다. 동쪽은 황장군을 배치시켜 황령으로 불렀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자락을 동강내고 도로가 연결된 해발 1090m의 성삼재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일제침략기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달궁은 전설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달궁 터를 감추고 있던 흙이 씻겨 나갔다. 그때 드러난 것은 지금의 주춧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와 청동제 수저 수십 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세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곳곳에서도 찾아진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남아 있다. 설명문에는 조각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인근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찾아봐도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포수들도 마한 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말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1400여m에 이르는 고봉의 능선이면서도 마한 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지금은 빽빽한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1960년 이곳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 유물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고단 일대는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기도 했고 고려조에는 몽고군과의 항전이, 임진왜란에는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삼한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4년(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3세기 후반 마한세력이 중국과 교류했다고 나오고, 4세기에는 마한의 일부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궁마을에 쫓겨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가 바로 이들 무리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한 연대가 온조왕 27년, 서기로는 기원 후 9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시조인 온조왕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참 뒤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온조왕의 업적인 양 끌어올려 기록해 놓았다는 설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백제가 마한을 굴복시키고 그 지역을 백제 영역으로 병탄시킨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백제의 마한 병탄에 대한 신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백제가 마한을 병탄시킨 시점이 백제의 제9대 임금이었던 3세기 말, 책계왕 때였다고 주장한다. 백제왕이 처음 북쪽에서 왔을 때, 마땅히 거처할 땅이 없다하여 마한의 국왕은 그의 땅 1백리를 떼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이다. 마한은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다. 지리산 마한 왕조는 후에 지리산이 김해 가락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으로 봐서 가야세력에 의해 정복된 것으로 추측된다.
반야봉·노고단·만복대·고리봉·덕두봉 등의 고산준령에 둘러싸인 달궁마을에서 심원마을까지 6㎞에 걸쳐 흐른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있는 계곡 가운데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계곡의 하나다. 약 20m 떨어진 곳으로 지리산 종단도로가 지나지만, 계곡으로 들어서면 쟁
기소·쟁반소·와폭·구암소·청룡소·안심소 등 폭포와 소(沼)가 비경을 이룬다. 계곡로를 따라 쟁기소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쇠다리를 건너면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으로 오를 수 있다. 반야봉 아래 중봉 조금 못미친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심원계곡이 나오고, 심원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심원마을에서 다시 달궁계곡의 끝부분과 만날 수 있다.
◆[고리봉] 1248m
고리봉은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남원시를 벗어나 곡성 쪽으로 서진하다 보면 금지들이라 불리는 평원에서 눈앞을 가로막고 솟은 바위산이 바로 고리봉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대추, 밤, 곶감)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 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묘봉치墓峰]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의 허리를 낮춘 부분인데,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서쪽에 산동면 위안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묘소가 있는 봉우리다.
◆[만복대] 萬福臺 1438.4m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령치] 1172m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 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큰고리봉] 해발 1305m
남원시 산내면과 운봉읍 경계에 있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점인 성삼재에서 만복대 구간에 있는 고리봉(작은고리봉)과 구분하여 큰고리봉이라 불리운다. 정령치 휴게소를 떠나 큰고리봉까지 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 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큰고리봉에서 대간은 고기리 마을 방향으로 뚝 떨어진다.
◆[고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촌리(高村里)와 내기리(內基里)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高基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다. 고기리에는 내기, 고촌 등이 있다.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