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문구 선생님을 모두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 보령시민, 특히 보령시의 공무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이문구 시인"이라거나, "이문구씨가 그렇게 유명하냐"는 등의 무식한 말을 하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 합시다. 저서를 한 권이라도 읽고 말입니다. (그런 사례가 있기에)
故 鳴川 李文求
명천은 1941년 4원 12일 당시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현: 보령시 대천2동) 387번지 관촌마을락(아랫 갈머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천면 명천리에서 태어나자 이내 이사 했기에 호적이 관촌에 올랐다며 호를 명천이라 함도 그랬기 때문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심) 명천의 관향은 한산韓山으로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李之函의 13대 자손이다. 1989년 서울신문에 「토정 이지함 1부」를 연재하기도 했다. 빈농의 가정형편(농촌소설의 바탕이 되었던) 가운데 성장한 명천은 유년 시절에 조선조의 마지막 유생儒生이었고 서원· 향교에서 당세관을 지내며 지방의 문장가로 활동했던 할아버지에게 재래적 가정교육과 함께 한문을 배우며 작가적 정서의 바탕과 인격형성을 갖추게 되었다.
◆9.28 수복이 되자마자 명천보다 네 살이나 더 많은 짝과 그 가족들이 이성을 잃은 채 몽둥이와 낫, 쇠스랑 같은 흉기를 들고 아주 씨를 말리겠다고 소년 이문구의 집으로 들이닥쳤었다. 그 때 평소처럼 집안에 가만히 있었더라면 개죽음을 당했을 것을 용케도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자전적 연작소설「관촌수필」에 나오듯이 해방 후의 혼란시대와 6.25 사변의 암흑시대를 살아온 명천의 어린 시절의 삶은 민족 분단의 희생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서기와 등기소서기를 지냈고 사법서사를 했던 명천의 부친은 당시에 남로당보령지역조직의 총책을 맡았던 까닭으로 6.25사변이 발발하자 예비검속 된 뒤 대전교도소에 수감, 경찰이 후퇴하기 직전 맏형과 함께 처형되었고 위의 형마저 보령의 우익에게 잡혀 대천바다에 산채로 수장水葬을 당하는 참상을 겪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좌익 인사였기에 어린 명천이었음에도 원죄의 화인火印으로 늘 감시를 당해야만 했다.
국민학교 6학년이 되자 공교롭게도 명천의 짝이 인민군 치하일 때 좌익의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전직기관장의 아들이었다. 9.28 수복이 되자마자 명천보다 네 살이나 더 많은 짝과 그 가족들이 이성을 잃은 채 몽둥이와 낫, 쇠스랑 같은 흉기를 들고 아주 씨를 말리겠다고 소년 이문구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 때 평소처럼 집안에 가만히 있었더라면 개죽음을 당했을 것을 용케도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때 일로 모친과 조부까지도 세상을 떠났고 명천은 두 살 어린 동생과 조카를 맡아야 하는 이른바 소년가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학교에 전교 수석(입시경쟁3:1)으로 입학했던 명천이었으나 공부대신 어른들이 흔히〈애 버려놓는 못된 책〉이라고 일컫던 소설만 읽어댔다며 명천은 당시를 다독과 남독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었다. 친한 동창생(당시 남포면 거주)의 맏형(『자유문학』에 추천 신인 작가로 등단했고, 그 뒤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장을 지냈던 故최진우 소설가)이 소지하고 있던 장서를 온갖 죄다 빌려서 읽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명천은 이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순수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이나 친척 일가들까지 빨갱이 아들이라며 냉정하게 멀리하니 어린 나이에 기댈 곳이 없었다. 월전(지금의 동백관이 있는 마을)에 가끔씩 돌봐주는 외삼촌이 살고 있었지만 빨갱이 생질 때문에 피해를 끼칠까 두려워 대놓고 의지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설움과 고통 속에 배를 굶주리면서도 농사를 지어가며 견뎌보았으나 결국 부모형제를 빼앗긴 저주스런 고향 땅을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1959년 서울에 올라간 명천은 좌판을 벌여놓고 건어물이나 마늘 따위를 팔았고 물건을 어깨에 메고 아현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떠돌이 행상도 했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숨어 지내듯 초조한 삶이었던 까닭은 가족과 함께 무고한 죽음을 당할 뻔했던 일이 뇌리에 빨갱이라는 대못으로 늘 박혀 언제 참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의식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남로당 도간부라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구명되었던 이호우 시조시인(당시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이 KNA기 납북사건에 대한 필화사건으로 또 다시 위태롭게 되자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화를 면한 일이 있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다. 살 수 있는 길이 절실했던 어린 명천은 이 기사를 보자 단순히 문학을 하면 빨갱이 아들이라도 개죽음은 면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고 문학의 꿈을 지니게 되었다.
장사로 얼마간 돈을 벌자 명천은 꿈꿔왔던 작가가 되기 위한 길의 첫걸음으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했다.
◆동리는 명천을 한국문단에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고 1.2학기 기말시험문제로 이문구 소설을 논하라고 낼 정도였다.
입학실기 시험을 잘 본 덕에 등록금 반액을 면제받는 을류 장학생이 된 명천은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조연현, 김구용 등으로부터 문학수업을 하게 된다. 특히 김동리는 문체가 남다르다며 입학 때부터 명천을 각별히 대했고 학원출신들의 깔끔한 문장보다는 명천의 투박한 문장을 특별히 여겼다. (학우들 가운데는『학원』출신이 많았고 고교 때 문학콩쿨이나 백일장을 휩쓴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문장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문장인데 이에 비해 자신의 문장은 감칠맛이 부족한 노가다 판 문장이었다고 명천은 회상했었다.)
어느 날 동리는 강의 시간에 이문구의 습작을 토론 대상으로 내놓았다. 학생들은 흔히 보던 것과는 색다른 습작품에 대해 비판을 가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토론에 열기를 올렸다. 그러나 동리는 명천을 한국문단에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고 1.2학기 기말시험문제로 이문구 소설을 논하라고 낼 정도였다.
그렇게 만난 명천과 동리는 각별한 사제지간이 되었고 동리의 수제자란 말과 양아들이란 말까지 듣게 되었다. 명천은 김동리를 만나기 이전부터 동리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왔는데, 동리는 해방직후부터 줄곧 보수논객으로 일관되어 왔고 명천은 70년대 중반부터 진보적 문학 진영을 조직하는데 핵심적 일원이 되며 서로 상극된 문학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서로의 문학성향에 대하여는 진심으로 존중하며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정신적으로 자신의 스승은 동리뿐이라며 조실부모한 자신에겐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고 명천은 회상했다.) 특히 동리의 소설『驛馬』에 매료되었던 명천은 동리를 가까이 모시며 동리가 발간하던『월간문학』에서 4년 8개월과 『한국문학』에서 2년 5개월 동안 함께 몸담아 일했다.
명천의 나이 22세인 1963년『현대문학』9월호에「비구니」가 연모戀慕의 탈속 이야기인 단편소설「다갈라불망비」가 김동리로부터 초회 추천을 받았고 대학 졸업 후에도 도로포장 공사나 공동묘지 이장공사(연희동 소재 주 외국인학교 터에 있던 묘 3000기를 옮김. 훗날 장편소설 [장한몽]의 소재가 됨)등 일을 닥치는 대로하면서도 글을 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6년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강판이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발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다. 치료기간 중에도 단편소설 「백결」을 써내어 『현대문학』7월호에 추천 완료되었다. 이 때 동리는 추천사에 “우리나라의 소설도 이제는 문장 맛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며“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 명천은 단편소설「兄弟」「李風憲」「生存許可願」「不動行」「地血」을 『현대문학』『사상계』『예술서라벌』에 발표한다.
1968년 8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신문학 60년 기념사업으로『월간문학』을 창간하고 김동리 주간의 이 문학지는 명천에게 첫 직장을 부여한다. 이해에 명천은 또 단편소설「두더지」「金濁甫傳」「담배 한 대」「簡易驛」「이삭」「가을소리」를 내었고 그 다음해 『사상계』에「白衣」를『창작과 비평』에「몽금포타령」을 발표했다.
◆염무웅 평론가의 “잃어진 육친과 쫓겨난 고향에 대해 바치는 최대의 문학적 헌사요 낳아 길러준 땅에 되돌리는 가장 귀한 앙갚음”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명천은 70년대에 들어서며 농촌소설을 쓰는 이들 중에 비중 있는 작가로 활동했고 이때에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내었으며 이룬 성과도 매우 컸다. 이 때 발표한 장편소설「장한몽」과 단편소설「암소」는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암소」는 극화되는 등 문단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론가인 신동욱 교수가 명천의 소설에 대해「우리 삶의 밑바닥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의지」란 비평문에서 “문체와 인물의 기질과 심리적 성향에서 조화를 획득함으로써 더욱 강렬한 새로운 리얼리즘을 성취시켰다.”고 호평하는 등 많은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어내며 문단에 뚜렷이 떠올랐다. 그 뒤에도 화제가 되었던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으며 첫 소설집『이풍진 세상』을 정음사에서 간행하고 장편소설『장한몽』을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했는데『장한몽』은 한국일보사에서 주관한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다. 이때부터 연작소설『관촌수필』이 시작「日落西山」「花無十日」「行雲流水」를 발표하여 수많은 화재를 낳았다.
◆197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 조연현으로 바뀌고 성실히 몸담았던『월간문학』을 5년 근무의 퇴직금도 한 푼 받지 못한 채 떠나게 되었다.
곧 이어 동리선생의 부인이자 소설가 손소희 씨가 설립한 도서출판 한국문학사의 편집장이 되었고『한국문학』을 창간하고 「우산도 없이」「촌부」「綠水靑山」「空山吐月」을 연이어 발표해 염무웅 평론가의 “잃어진 육친과 쫓겨난 고향에 대해 바치는 최대의 문학적 헌사요 낳아 길러준 땅에 되돌리는 가장 귀한 앙갚음”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지금의 한국작가회의)를 발족하고 한국문학사 편집실을 사무실로 내놓고 유신선포와 관련하여 구속된 시인 김지하 소설가 이호철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민중의 자유를 구현시키기 위해 조직했다. 국보위에서는 명천을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정치쇄신특별법 해당자로 묶어 정치활동규제대상에 올려 발표하는 등 정치적 수난의 해였다
단편「晩秋」「새로 생긴 곳」「낚시터 큰애기」「죽으면서」「白面書生」등을 발표한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발족하고 실무간사를 맡았다. 사무실은 명천이 근무하던 한국문학사 편집실이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유신선포와 관련하여 구속된 시인 김지하 소설가 이호철 등의 석방을 요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민중의 자유를 구현시키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서 훗날 [민족작가회]가 될 모체였다. 그때부터 명천의 원고료 수입은 대부분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경상비로 쓰였고 명천에겐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늘 사찰요원이 붙어 따라다녔다. 그렇게 정치적 상황이 암담한 현실에 글 쓰는 일 자체에 회의를 느낀 명천은 『한국문학』편집장을 그만두고 몇몇 동료문인들과 절필하기까지 했다.
1976년 명천의 나이 36세로 부인 임경애任景愛 씨를 만나 결혼하고 중편「엉겅퀴 잎새」를 집필함으로 다시 창작활동에 복귀했다. 다음해 한진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업하고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발안 쇠면부락)로 이거했다. (언론에서는 “近幾의 두메로 귀향”이라고 떠들었지만 전세비용이 비싼 도시를 피해 시골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명천은 회고했었다.) 그해 7월 장남 산복山馥이 태어났다. 명천은 발안에서의 생활을 또 다른 연작소설『우리동네』의 창작 모티브로 잡았다. 「우리동네 黃氏」로 발표된 「으악새 우는 사연」도 발안에서 보고들은 얘기를 담아낸 것이다. 그해 연작소설집『관촌수필』을(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고 중편소설집『엉겅퀴 잎새』(열화당)와 산문집『아픈 사랑 이야기』(진문출판사)를 간행했다.
1978년 단편집『으악새 우는 사연』을 한진출판사에서 간행했고 「우리동네 李氏」로 한국문학사 주관 제 5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1979년 딸 자숙自淑이 태어났고, 「우리동네 柳氏」를 발표하고 산문집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를 간행했으며 경미문화사에서 펴낸 『한국문학전집』에 이문구 권으로 장한몽을 간행했다. 이해에 명천은 무크지『실천문학』의 편집위원이 되어 전문 편집인으로서 그 역량을 발휘했다.
1980년은 형편이 좀 나아져 다시 서울로 이사하고 아들 산복이를 얻은 해이기도 하다. 단편「우리동네 姜氏」「우리동네 張氏」「소설 金周榮」「연애는 아무나 되나」「남의 여자」를 발표「곽산기생 보름이」「버드나무가 있는 풍경」「李某演義」를 탈고하는 등 창작력을 활발히 했으나, 이때 시인사를 통해 간행한 콩트집『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못허나』를 계엄사령부가 판매금지조치를 내렸고, 국보위에서는 명천을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정치쇄신특별법 해당자로 묶어 정치활동규제대상에 올려 발표하는 등 정치적 수난의 해였다. 그때는 고은 송기숙 이호철씨가 감옥에 있었고 김지하 시인도 석방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 뒤 연작소설『우리동네』를 민음사에서 간행해 70년대 한국농촌의 배경을 잘 나타낸 소설로 문단 사에 올려놓았다. 1983년 정치활동규제로부터 해금되었으며 서울신문 기획연재「新東國與地勝覽 .忠南北道篇」을 집필했고『신한국문제작가선집』(어문각)과『제3세대문학전집』(삼성출판사)에 이문구 권이 간행되었다. 이해에 동시「개구쟁이 산복이」를 포함한 25편을『시인』에 발표했고 윤석중의 추천으로『새싹문학』에 재 발표함으로 동시인이 되기도 했다. 1984년『농민신문』에 장편 「산너머 남촌」을 연재 시작했고 『현대의 한국문학』(범한출판사)에 이문구 권이 간행되었으며 그해 실천문학사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1985년 다시 황순원 고희기념문집에「강동만필」을 발표하고 계간 『실천문학』을 창간했으나 언론기본법 제 1호에 적용되어 강제로 폐간되었다.
◆명천은 병상에서도 마지막 생명의 불을 다하여 사리와도 같은 문학을 우리에게 남겼다.『개구쟁이 산복이』와 『이상한 아빠』에 이어 세 번째 동시집『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가제, 창작과 비평사)를 탈고해놓아 또 한 번 문단에 놀라움과 감동을 선물했다.
1988년 국제 펜클럽대회에 치사를 한 김동리의 문제가 오해를 불러 민족작가회의에서 동리를 비방하자 부모처럼 반생을 함께 살아온 스승에 대한 인간적 도리로 민족작가회를 탈퇴했다. 그 해에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창작과비평사)를 상재했다.
1989년 1월 토정 이지함이 태어난 자리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폐가를 얻어 내려온 명천은 어느 글에서 표현했듯이 ‘오늘은 글밭을 일구고 내일은 텃밭을 매는’ 생활 가운데 『산너머 남촌』을 두 번째 장편으로 내놓았다. 1990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산너머 남촌』을 펴냈다. 그해 김동리 선생이 쓰러지자 즉시 서울로 올라가 내리 석 달간 머물며 간병했다. 명천은 남들의 길흉사를 잘 챙기는 사람이며 특히 남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는 들무새로 문단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인정이 삭막해지는 현세에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 바로 참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명천이 높여 추앙하던 [매월당 사상]과도 일치한 점으로 이때부터 명천은 집필을 시작하여 1992년 문이당에서 역사장편소설『매월당 김시습』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무렵 명천의 집필실인 청라의 폐농가가 폭우로 인해 지붕이 뚫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새집을 짓거나 헌 집을 고칠 돈이 없던 명천은 불가피하게 경기도 발안으로 집필실을 옮겨가려고 했으나 명천의 죽마지우인 조태연씨의 청을 들은 지역의 독지가가 폐농가를 허물고 조립식으로 다시 지어주었다. 그 뒤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의 김시습의 삶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최초의 저항시인 매월당 김시습의 모습만을 나타낸『매월당 김시습』은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사십만 부를 판매하게 되었다. 그때 올린 인세수익으로 송파구의 진주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93년『유자소전』을 간행하여 제 8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 했다.
명천은 보령시에 내려온 해에 이원길씨(한내문학회 초대 회장)의 도움으로 [한내문학회]를 결성하여 지역 문학의 씨를 뿌려놓고 동인지『한내문학』12호가 나오기까지 애정을 다해 이끌어왔으며, 산문집「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와 「글밭을 일구는 사람」을 펴냈고 소설집『유자소전』을 내어 만해문학상 수상했고 또 소설집『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부터 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명천은 병상에서도 마지막 생명의 불을 다하여 사리와도 같은 문학을 우리에게 남겼다. 『개구쟁이 산복이』와 『이상한 아빠』에 이어 세 번째 동시집『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작과 비평사)를 탈고하여 또 한 번 문단에 놀라움과 감동을 선물했다.
명천 선생의 약력
▷1941년 보령 출생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5년 단편소설「다갈라불망비」와「백결」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 시작
▷1972년 소설집「이 풍진 세상을」간행.
▷1974년 소설집「해벽」간행.
▷1977년 연작집「관촌수필」간행.
▷1981년 연작집「우리동네」간행.
▷1987년 장편소설「장한몽」간행
▷1990년 장편소설「산넘어 남촌」간행
▷1992년 장편소설「매월당 김시습」간행
▷1993년 소설집「유자소전」간행
▷2000년 소설집「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간행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현, 한구작가회의) 이사장 취임.
▷2001년 지병으로 민족문학작가회 이사장직 위임.
▷2001년 제3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2003년 2월25일 타계
▷2003년 국가훈장문화은장
◎문학상 수상경력
*한국 창작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 *요산문학상, *흙의 문예상, *펜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농민문학상, *만해문학상, *신동엽창작기금수혜, *춘강문예창작기금수혜. *동인문학상 수상.
*프로필 가운데 문학과 관련 된 것만 넣었음. 문예지『작가세계』 15호 이문구 편 일부를 참고함. (이상 2003년 2월 25일 보령신문에 발표한 내용을 일부 수정함) - 안학수 -
첫댓글 참지기의 작가마당으로 글 옮겼습니다. 안선생님 글 방 만들었으니 왕성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관촌수필]과 [산너머 남촌] 두 편의 작품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위의 글을 세심히 읽고 나니 많은 도움과 새롭게 '이문구선생님 문학관' 건립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안학수선생님이 말씀하신 '올바른 이문구 문학관 건립'에 생각과 힘을 보탭니다.
잘 읽고 갑니다. 아직은 [관촌수필]한작품만 읽었지만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 많습니다. 저도 '올바른 이문구 문학관 건립'에 마음을 보탭니다.^^
선상님의 많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마을분 모두 함께 이문구 문학관을 위해 참지기님께 힘을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