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동일마을
아름다운 남해 독일마을
독일마을 스토리텔링
남해는 들리는 곳마다 역사가 숨 쉬고 문화가 꽃피는 곳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배문학 하면 남해의 백련마을 앞 노도. 노도하면 서포 김만중 선생이 생각나지요. 대표적인 작품으로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등 여러 가지 작품을 남긴 곳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하면 남해 노량바다에서 마지막 전투한곳, 이순신장군께서 순국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현대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독일 마을을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남해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지점에 삼동면 물건리 천연기념물 150호인 물건방조어부림에서 마주하는 산마루에 붉은색 지붕이 흘러내리는 듯 한 이국적인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모던 것이 독일식이다. 물론 이곳에 자라는 풀과 나무는 우리 국산 이지요. 도로부터 집과 정원 모던 것을 독일식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남해군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독일마을 그 이름 글 맞게 30여 채의 독일식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6~70년대 근대화 과정애서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로 나가 일하던 교포들의 보금자리다. 독일마을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파독 근로자로 나갔던 교포들이 여생을 고국에서 보람되게 보내고자 하나 둘 정착한 곳이다. 지금은 역사 속의 한 페이지로 묻히고 있지만 파독 간호사와 광부는 한국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70년대 중반까지 파독 간호사와 광부는 무려 2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국민의 총 생산액의 2퍼센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1997년 11월 독일 북부 도시인 노드프리슬란드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구상을 하고 남해군은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독일에 근로자로 나아간 교포들이 조국의 향수를 잊지 못하여 퇴직 후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 하였다.
교포들은 30여 년이 지났기에 문화나 생활환경이 이미 독일인처럼 굳어져 있어 귀국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함께 모여 살면서 몸에 익힌 독일식 생활양식을 한국에 전파하고 힘을 합쳐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기로 희망 하였다.
남해군은 교포들의 이러한 바람을 현실화 시키고자 2000년부터 독일 교포 정착촌마을 사업을 계획했다. 부지 조성은 2000년 6월에 해안경관이 아름다운 물건방조어부림이 마주하는 곳에 약 3만평의 택지를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283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반시설공사를 포함해 독일식 주택83동 복지회관 1동 독일식 공원 등으로 조성키로 하였다. 그리고 독일마을 정착 희망자를 모집하기 위해 독일의 베를린. 마인츠. 본. 함부르크. 등지에서 네 차례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자격 요건은 독일에 간호사나 광부로 파견 되어 20년 이상 거주한 교포로 한정했다. 그렇게 하여 2002년 6월 다섯 가지 유형의 독일식 주택 표준 모텔 선정과 함께 150평 안팎의 64필지를 분양했다.
아름다운경치로 유명한 경남 남해군에 독일마을이 생겨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문을 듣고 온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는 독일마을은 문자 그대로 독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전형적인 독일식 집과 파란 눈의 독일 노인의 산책하는 모습이 보이고 이따금씩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독일인들이 이역만리 이곳 남해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됐을까?
사연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 박정희정부가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는 변변한 자원도 돈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돈을 빌려오기란 쉽지 안 했다.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 등의 비협조로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서독이 1억5000만 마르크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빌려준 것은 아니다. 당시 서독 역시 경제개발로 인력이 달려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다. 특히 간호사와 광부가 많이 필요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들을 서독에 보내주고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 하여 돈을 빌린 것이다. 이 돈은 장차 한국 경제 부흥에 종자돈이 됐다.
1차 서독 파견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000명이 몰릴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자리가 부족했다. 이들 가운데는 정규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이렇게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독일 경제발전에 큰 영양을 미쳤다.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1960년대 젊은이들은 남자는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란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땅 독일로 떠났다. 조국에서 못 이룬 꿈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다.
유학과 돈의 꿈을 품고 떠났지만 그들이 말하는 3년간의 광부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40도가 넘는 지하 2000미터~3000미터의 작업은 속옷을 5~6번 짜서 입고 장화 속에 고인 땀의 물을 열 번 이상 쏟아야 비로소 하루해가 지나간다고 한다.
독일로 간 간호사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최대의 목적 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도 병원 일에 쉽지는 안했다. 40Kg을 겨우 넘기는 가녀다란 몸으로 거구의 독일환자를 씻기고.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여려가지 애로 사항이 겹치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여 받은 돈 600마르크 중 자신들은 10마르크만 남겨두고 고향으로 송금하여 돈을 모았다.
60년대에 해외를 간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고 한다. 1진 광부를 데리고 독일에 갔던 그 당시 노동청 작업안정 국장은 광부들은 소풍가는 아이 같았다고 말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3년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한국의 음식을 먹고 싶어 배추대신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고 한국의 노래를 들으며 향수를 달래는 것이 광부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다 간호사들은 향수병에 걸려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잘 적응한 간호사도 문제가 생긴다. 뚱뚱한 독일인들을 수십 년 동안 간호사로 일하느라 허리와 관절에 무리가 와 대부분 수술을 받았다 광부들은 기계로 손가락 한두 개 잘려 나아간 것은 광부에겐 예삿일이었고 함께 지냈던 동료의 죽음도 지켜 바야 했다고 한다.
1964년 12월 차관을 빌리기 위해 우리나라대통령이 서독 함보른 탄광을 방문하였을 때 연설 중에 파독 근로자와 대통령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때 독일 뤼프케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한국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돕겠노라 고하면서 손수건을 건너면서 말씀하셨던 뤼프케 대통령의 따뜻한 격려는 가난한 나라에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정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손수건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역사적인 손수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렸다 독일인 손자 손녀를 둔 60. 70.대 노인의 이들은 연금으로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생을 고향인 한국에서 보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즈음 당시 남해군수(현 김두관 경남도지사) 가 이런 사연을 듣고 이들을 위한 삶의 터와 부대시설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독일인 배우자들도 함께 한국에 가 살겠다고 적극으로 희망한 약 50가구가 한국행을 희망했다.
이렇게 하여 남해군 삼동면 물건마을 뒷산에 독일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물론 자기 취향대로 집을 짓되 독일식으로 집과 정원을 조성 하도록 하였다. 멀리서 보면 건물 외양 때문에 독일 마을처럼 보인다.
독일마을 터는 바다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남해의 영산인 금산의 한 줄기가 길게 뻗어 가다가 멈춘 곳이기도 하다.
풍수적으로 이곳 터를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약 풍수가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맞느냐를 따지는 것이라면 이곳은 농부나 어부에게는 맞지 않는다. 농부들에게는 이곳이 너무 가파르고 어부들에게는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말년을 한가롭게 보낼 이들에게는 아주 쾌적한 공간이라고 본다. 뒤로는 산이 좌우로 팔을 펼쳐 감싸 주듯이 하고 앞으로는 남해의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져있다.
이들은 이곳에 사는 거미. 지렁이들과 도 친하게 지내자 고 할 정도이며 자연과 공존을 생각 했을 정도이며 주변의 나무와 풀 한포기도 잘 어울리고 있다.
독일마을에서 아침일출과 저녁월출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독일마을은 정동향을 바라보고 있어 매일 아침 특별한 일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해뜨기 전 검은색부터 주황색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등 바다의 색깔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간이 나시면 독일마을에서 일출을 한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한 음력 대보름이면 월출이 대 장관을 이룹니다. 일출과는 다른 감상적인 분위기 이지요.
무엇인가 일이 있어 들리시는 여행으로 오시는 것 보다 편안하고 행복이 필요할 때 남해 독일마을로 오십시오.
좋은 공기와. 맛있는 물. 좋은 풍경으로 내 몸에 재충전이 필요할 때 남해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작성자 : 문화관광해설사 이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