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손님을 위해 잠시 색다른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필요할 경우라던가 아니면
커플끼리 하루 데이트로 어디를 갈까 망서려질 때 참고하시라고 한참전에 찍어 놓은 사진으로 길안내를 시작합니다.
서울에서 지척인데가 교통편도 아주 수월하고 이국적인 풍광과 오랜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본토요리는 아니지만 중국냄새 물씬나는 중국요리로 폼도 잡아 볼 수 있고
좀더 월미도, 연안부두 그리고 만석부두 쪽으로 발길을 하시면 싱싱한 해산물로 입에 호사를 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럼 따라와 보실까요?
인천, 100여년 전 우리나라에 개화기의 문물이 들어온 제물포항을 둘러보는 첫발은
189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철도가 놓였던 경인선의 시발점 인천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북성동 중국인거리 제1 패루
인천역을 나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우람한 대문 하나, 척보면 안다 하듯이 아, 여기가... 하고 바로 감이 잡힌다.
패루(牌樓)는 중국인들이 거리와 건물, 또는 묘지 입구에 세우는 커다란 대문으로 중국인거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중국에서 가중 유명한 패루는 천안문.
인천 중국인거리에는 3개의 패루가 있는데 인천시 중구와 자매결연을 맺은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시가 무상 기증한 것으로,
중국 정부에서 2억 원을 드려 직접 제작 했다.
특이한 것은 여러 나라에 이름난 중국인거리가 있지만 패루를 무상으로 기증한 곳은 인천 중국인거리가 처음이라고.
짙은 빨간색이 가득한 골목에 들어서면 눈깜짝 사이 중국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거기다 가게 안에서, 좌판 옆에서 들리는 왁자한 중국말까지.
자유공원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 아랫길에 있는 제3 패루.
숯불을 피운 옹기 벽에 붙여서 굽는다는 티베트식 만두,
자장면의 원조가 탄생한 이골목에서 자장면 시식은 당근.
용하게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국풍의 식당 건물들.
1884년에 들어섰던 청국 영사관 터에 1934년에 지은 화교중산학교.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국기와 본관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마크는 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
농구를 하는 초등학교 3학년 짜리들이 떠드는 말은 한국말.
1910년 초대 영사 가문연이 지은 청국영사관 회의청,
운동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화교협회 건물 2층에서 내려다 보아서 역사 깊은 현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늗다.
안내문에 따르면 정면에 있는 현판은 '萬國衣冠' 그왼쪽은 '樂善好施' - 1922년 조선인중화총상회에서 설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띠를 감아 놓은 항아리.
화교협회 건물 입구
중국인거리 아래 선린동에 있는 해안성당, 1966년 6월에 준공, 1972년 해안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안성당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건물은
1939년 청국 조계지 안에 세워진 중국인 주택으로 1995년 해안성당에서 화교에게 매입,
지금 남아 있는 중국인 주택 가운데 내외부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건물이라고 한다.
청.일 조계지 계단 바로 왼쪽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화교 주택,
지금도 화교가 살고 있다.
이국적인 붉은벽과 푸른대문, 대문에는 단오날 중국 풍습대로 빨간실로 묶어 걸어 놓은 나뭇가지가...
무슨 나무인지는 확인 불가.^^
화교주택의 조계지 계단쪽 벽에 있는 창,
누덕누덕 덫칠한 벽에 청테이프로 덧붙인 창문과 삭아내린 철망,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라도 하듯 녹쓴 울타리를 타고 오른 푸른 줄기와 잎사귀들...
중국인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창문.
우리나라 개화기 1883년 개항한 제물포항,
일본을 선두로 청국,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 체결과 영사관이 설치되고 통상 활동이 시작되면서
외국의 무역상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 할 수 있는 지역이 필요하게 되어
제물포 땅을 빌려 쓰는 祖界 계약을 맺었다.
이 계단을 기준으로 왼쪽은 청국, 오른쪽은 일본.
지금도 두 지역에 남아 있는 건축물을 통해 두 나라의 차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청국과 단출하고 가지런한 일본의 모양과 색으로.
조계지 계단 오른쪽 일본 지역 건물들, 최근 일본풍으로 리모델링을 한건데 왠지 모르게 애매모흐...
옛날 인천부청사였던 건물, 지금은 인천광역시 중구청.
1883년 10월 양식 2층 목조건물로 시작, 1902년 청사 신축하고 1906년에는 인천이사청으로,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는 인천부청으로 사용.
지금 이건물은 1933년에 지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공사중...
등록문화재 제249호.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시지정유형문화재 제7호)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1882년 11월 개설,
1909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1911년에는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해방 후 다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내부 공사중.
개념 없는 사람들의 넌센스 같은 이야기 하나,
일본이 망한지 6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역사도 살려야 한다며
문화재로 만들고 보전을 하기로 한 것까지는 그나마 천만다행.
대리석 건물을 보전하기 위한 첫 작업이 흰 뺑기칠,
당연히 주위에서 난리가 나자 2층 건물만 허연 몰골로 남게 되었다는...
해서 대리석을 파고 든 흰 페인트는 이제 다시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공사중 .
옛날 일본18은행 인천지점(시지정유형문화재 제50호)
1890년 10월,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이 있는 18은행이 개설한 인천지점 건물.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으로, 1954년 10월 한국흥업은행 인천지점으로.
지금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일본 58은행 인천지점(시지정유형문화재 제19호)
인천 전화국에서 주조하는 신화폐와 구화폐를 교환하는 업무를 위해
일본 오사카에 본점이 있는 58은행이 1892년 7월 설립한 인천지점.
1946년 조흥은행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인천 중구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헌데 이건물 현관입구 전경은 이렇게 찍을 수 밖에 없다.
이유는 아래아래 사진으로.
턱허니 볼품 사납고 심술굳게도 입구를 막고 있는 이 건물은?
아무리 주인 없는 집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남의 집 대문을 가로막고 있는 그 속셈에 대해서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 두자.
인천에서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만 찾는 술집 '民'
인천우체국(시지정유형문화재 제8호)
1884년 경성에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근대식 우편제도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1896년에는 인천우체국 청사를 신축하였고, 1905년 인천우체사를 인천우편국으로, 1923년 지금 건물을 준공하고 이전.
현재는 중동우체국으로 사용중
새롭게 변신을 하고 여러 예술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예술의 거리가 된 창고 건물들
자유공원 오르는 중턱에 있는 인천시역사자료관
구)제물포구락부(시지정유형문화재 제17호)
1901년 완공된 인천지역 외국인들을 위한 사교장.
1913년 일본재향군인 인천연합회가 사용하다 1953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개관
원형 복원사업으로 또 공사중.
1888년 최초로 만들어진 서구식 공원으로 이름은 각국공원(各國公園), 지금은 자유공원.
정상에는 1882년 4월 한국과 미국 사이에 조인된 한미수호 통상조약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1982년에 세운 기념탑이 있고,
그 아래 쪽에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7주년이 되는 1957년 9월 15일에 동상을 세웠다.
공원 이름을 발음이 좀 뻑뻑하더라도 그냥 각국공원으로 내버려 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왜? 그놈의 자유를 찾기 위한 갈등은 지금 이시간까지도 진행중이니까.
차라리 바꾸지 말고 그냥 각국공원이라 했으면
여러 나라는 물론 사람들이 글로벌스럽게 하나되어 잘 살자는
오늘날 부르짖는 구호에도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였을라나?
비둘기도 평화를 상징하는 길조라는데...
인천항과 월미도
북쪽에서 본 홍예문(시지정유형문화재 제49호)
남쪽에서 본 홍예문
1908년에 세워진 홍예문은 본래 무지개문이란 뜻이란다.
모양새나 쓰임새로 보면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만든 배경에는 슬픈 일제 침략의 역사를 담고 있다.
당시 개항지 인천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다보니 자신들의 조계지는 좁고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어
자국의 조계지를 넓히기 위해 언덕에 길을 내면서 세운 문이 바로 홍예문이다.
현재 홍예문은 자유공원과 이어진 육교로 이용되고 있으며
또한 당시의 일본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써 역사적인 자료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천제일교회 뾰죽탑과 하늘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와
초석
교회를 지키는 멍멍이들이 역시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천주교 답동성당(사적 287호)
벽돌조 고딕식 건물로 1890년대 건축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
육이오 때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고, 1979년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한 답동성당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개항기부터 한국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꼽혀 왔으며,
천주교 인천교구 114개 본당의 주교좌 성당이다.
잠시 천상의 침묵속에 잠겨 자신의 마음속도 살펴 본 뒤에
신포시장으로 내려가 유명한 닭강정 맛을 보아도 좋고
연안부두, 월미도, 아니면 만석부두로 달려가 짭짤한 바다내음 맡으며
싱싱하고 푸짐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알딸딸하게 부딛치며 여유만만하게 발길을 돌리시면
우정도 사랑도 새로워지실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