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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명해지는 일이다. 유명해지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다. 행복이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데 있다. "그대의 성을 산 위에 구축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 많지만, 세상이란 사물의 진가를 판별할 능력이 없다. 세상은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 편리한 자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반대하고 의로움을 주장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상례이다. 그 점에 있어선 사회나 교회나 아무런 다를 바가 없다. 신앙의 생애란 이러한 것이다. 곧 존귀한 생애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그 존귀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생애이다. 이 세상과는 가치의 표준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간조
정의와 진리, 다른 말로 하면 신의 율법이 인간들 사이에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는 것, 이것이 “하늘의 이상”입니다. …… 땅이 하늘을 너무 닮아 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토머스 칼라일 <영웅숭배론> 중에서
현실세계에 눈을 돌리는 젊은이들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문학이 필요한 이상
인문학은 좀 더 친절하게 그들을 찾아 나설 수는 없는가.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만일 내가 무언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내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다. ……
나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 이 섬나라에 사는 나의 동포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로운 일들을 모국어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가 되련다.
아테네인, 로마인, 근대 이탈리아인,
그리고 고대 히브리인의 가장 우수한 최고의 지성이
그들의 조국을 위해 했던 그 일을,
나 또한―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나의 조국을 위해 하고자 한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명예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데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존 밀턴
일찍이 인간이 처했던 상황치고 그 나름의 의무와 이상을 가지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초라하고, 비참하고, 부자유스럽고, 경멸할 만한 현실,
여기 너의 이상이 있지, 다른 아무데도 없다.
현실에서 일하며 이상을 만들어내라.
일하면서 믿고, 살고, 자유롭게 되라.
어리석은 자여!
이상은 너 자신 안에 있고, 장애도 너 자신 안에 있다.
너의 조건은 네가 그 이상을 형상화시킬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재료의 종류가 이것이든 저것이든,
네가 지어내는 형태가 영웅적이고 시적이면 그만 아닌가?
현실의 감옥에 갇혀 야위어 가며,
자신이 지배하고 창조할 수 있는 왕국을 희구하여
신들에게 애절하게 호소하는 사람이여,
이것이 진실임을 알라,
네가 구하는 것은 너에게 있다.
‘여기 있지 다른 아무데도 없다,’
네 눈이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토머스 칼라일 <의상철학> 중에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정채봉 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에서 -
수업 종료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장실에 가 팬티 속의 묵직한 것을 변기에 버렸다. 그러나 이는 뱀의 몸뚱아리에 불과했다. 교실에 돌아와 보니 내 의자 위에 뱀 머리가 한 덩어리 남아있는 것 아닌가.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이 "꺅. 지독한 냄새"라며 난리법석이었다. '똥싸개'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이후 학교 생활은 줄곧 왕따를 당해야 할 것이다.
"누가 내 의자에 똥 쌌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여자 아이들은 곧바로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야"라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소동을 보고 있던 담임 N 선생님이 다가왔다.
"선생님 보세요.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내 의자에 똥을 쌌어요…."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누가 들어도 단박에 거짓말이라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이 50이 넘은 여성이었는데, 내가 그리 따르던 분은 아니었다. 그뿐인가. 한여름 체육시간, 땀에 화장이 흘러내린 모습을 보고 "떡칠 화장 할망구"라고 뒤에서 흉을 보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이 뭐라고 하실까. 심하게 혼을 내시는 건 아닐까.
다음 순간, 선생님은 숨을 죽이고 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게 말이야. 나쁜 아이가 있었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선생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똥을 치우더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자, 빨리 자리로 돌아가. 수업 시작한다"라고 외치셨다. 서경식 교수 <고백>
작가 김훈의 2002년 인터뷰(당시 55세)
"친구가 없어요. 또래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 10살 아래죠. 우리 마누라도 이상하대요. 그런데 쉰다섯 먹은 사내새끼들이라는 것은 대부분 썩고 부패해 있거나, 일상에 매몰된 아주 진부한 놈들이거든요. 그래서 상대할 수가 없어요.
그럼 내가 젊은 놈들하고 통하나? 그렇지도 않아요. 난 사실 20대도 싫어, 젊은 놈들을 보면 그런 놈들의 나이를 졸업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져. 저런 무지몽매한 자식들하고는 이제 상종할 일이 없으니까, 얼마냐 다행이냐고? (그는 '킥' 웃었다.)
그놈들이 뭐 부럽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 시절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무질서와 몽매 속에서 사는걸 '청춘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김경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생각의 나무, 2005)
진정한 종교 vs. 제도화된 종교
45 | 당신도 내 나이가 되면 고령화가 바로 긴 병의 일종임을 몸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
91 | 종교를 지닌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의 정신상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하다. 우리가 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까닭은 아마도 우리가 아직 종교를 지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환자들 가운데 내면적으로 깊은 신앙을 갖춘 참된 종교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대다수의 환자는 어느 정도까지 신앙을 지니고 있지만 심리적 충돌이나 두려움을 벗어나는데 그 신앙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
136 | 삶과 죽음의 문제가 영원히 존재하는 한 우리의 종교적 추구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영적인 종교의 운명이다. 반(反)종교론자인 프로이트, 마르크스, 러셀, 사르트르 등은 자신들의 사유의 제한 때문에 세속적인 생명의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서, 근본적으로 궁극적 관심이나 궁극적 진리에 관여하는 종교적 구도의 정신적 의의를 체험할 수 없다. |
222 | 우리는 ... 삶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의의의 성찰을 본질로 삼는 종교의 참뜻을 재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개별 실존의 <진실한 본연성 종교>(true and authentic religion)와 <제도화된 비본래성 종교>(institutionalized and inauthentic religion)를 구분해야 한다. |
270 | 건전한 생사관을 확립하려고 하지도 않고 인생을 일종의 임무나 사명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다만 사후의 아름다운 세계로 도피하려고만 하는 무책임한 태도로는 생명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
부위훈 지음, 전병술 옮김 <죽음, 그 마지막 성장>(청계, 2001)
2005년 다국적 미디어조사기관인 ‘NOP월드’가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주당 독서시간을 조사한 결과
세계 평균 독서시간은 6.5시간이며
인도인이 주 평균 10.7시간으로 1위를,
그중 한국인의 독서시간은 3.1시간으로
평균시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30개국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모리스 버만 저, 심현식 역, <미국 문화의 몰락>
* 대부분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을 바보라고 간주하고 방송을 제작한다.
* 대학들의 위상은 마치 중세 말 교회와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천국(고수익의 직장)에 갈 수 있는 면죄부(학위)를 판매한다. 이것이 수천을 헤아리는 고등교육기관들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 되어버렸다.
* 지식의 습득이 사람의 정신이나 인성을 훈련시키는데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하던 기존의 원칙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식은 현재 상품처럼 판매되기 위해 생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또한 새로운 생산에 이용되고 부가가치를 창조하고 소비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대학의 학장 총장들은 너나없이 기업체 CEO를 모방하기에 급급하고, 기업에서 사용하는 경영 용어라든지 애매모호한 화법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진지한 사상과 의식을 지닌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 하룻밤 사이에 인생을 바꾼다는 식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책 이외에는 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스벤 베커츠는 하이퍼텍스트의 등장과 인터넷이 인쇄물이 제공해주던 ‘수직적 경험’을 파괴시킨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책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는 경험이야말로 독자를 사색의 세계로 안내하고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만약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상태를 주인공과 대조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더 깊은 의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하이퍼텍스트가 제공하는 것은 ‘수평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연관된 (또는 연관 없는) 생각이나 정보를 스쳐 지나치는 경험을 가리킨다. 이처럼 컴퓨터 매체는 삶의 깊이나 자아 성찰에 오히려 역효과를 주며, 네트워크를 통해 얻어내는 효과라는 것도 실은 분산되어 있는 자아로서, 별 의미 없는 인포테인먼트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 최근에는 조악하고 저속한 것들이야말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문화적으로도 환영받는 실정 ………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다는 것이, 그것이 비록 우스꽝스럽거나 부끄러운 모습이더라도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었다.
* 한나 아렌트는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니며 오락이고, 사회가 이런 과정을 통해 문화적 발전을 이룬다는 발상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했다.
* 책을 읽는 사람이란 결코 신문의 스포츠 란을 골라가며 읽거나 처세 관련 베스트셀러를 듬성듬성 읽거나 컨설턴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만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란 두어 시간만이라도 전화나 텔레비전을 뒷전에 둔 채 까다로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 또한 책을 읽는 사람이란, 우리 인간 됨됨이의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깊은 면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에 있을 뿐만 아니라, 책들을 섭렵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정직하게 믿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 현 미국 문화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문화가 아니라 집단주의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정치학자 케네스 미노그는 개인주의를 비난하는 현실에 대해, 현대의 혁신적인 활력을 말살시키는 작업이라고 비판한다.
* 특정 활동이 개인적으로 나타날수록, 그리고 공공에 드러나지 않을수록 장기적으로는 보다 큰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유대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이들 관계가 비공식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네스 미노그가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로 엮어진 문명보다 오히려 개인들이 더욱 강력한 실천적 협조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지녔다.
* 수도사적 해법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는, 전통적인 기술, 남에 대한 배려, 성실성, 학문의 정통성 보존, 비판적인 사고, 계몽주의 지적 전통 등이 있다. 그 밖에도 환경 악화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 개인적 성취 및 독립적 사고에 대한 가치 부여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모든 본보기들의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싸구려 속물주의, 소비주의 문화, 이익 추구, 권력 투쟁, 명성에 대한 동경, 자신을 드러내기 등을 과감히 배척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위대한 사람들만이 수도사적 해법을 실천하는 신수도사적 개인(New Monastic Individual; NMI)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와 정반대로,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수도사적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에 ‘무교회학파’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저변에 깔고 있었듯이, 무교회주의 기독교신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전공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그룹이 등장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언필칭 진리의 종교라면 비기독교인에게도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자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기 다르게 사랑하실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면, 왜 우리를 개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C. S. 루이스(Lewis)
단지 너 자신을 개선하라.
그것이 네가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조지프 콘라드(Joseph Conrad)가 쓴 작품 중에 내가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라는 무서운 이야기로서...
그는 도덕으로 견뎌내는 개화된 인간의 삶이란 가까스로 식은 용암의 얇은 표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것과도 같아서 자칫 방심했다가는 언제 어느 때 그 표면이 갈라져 불타는 심연으로 떨어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은 루소의 관점과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루소는 "인간은 사슬에 묶여 태어나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콘래드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충동을 풀어놓거나 통제받지 않고 되는대로 삶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집 센 충동을 좀더 우위의 목적에 복종시킴으로써 자유로워진다." --러셀 자서전에서
“단지 하나의 나라만 아는 연구자는 하나의 나라도 모른다” -세이무어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
사람들은 하나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고 있네.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고의 존재를, 마치 자기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로 여기면서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주 하나님’이라든지,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든지 ‘선하신 하나님’ 따위의 말을 하지는 않을 테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날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성직자들에게는 그저 상투어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마음속 깊숙이 느끼는 자라면, 말문이 막히고 외경심 때문에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할 테지. -괴테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그래!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수도원 살인사건의 수사를 맡은 윌리엄 수도사가 범인 호르헤 수도사에게 한 말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신앙이 절대적이며, 자신의 신앙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신앙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들이 즐겨 하는 놀이가 바로 '하나님 놀이'입니다. 자신이 신앙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전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이 한점의 의혹도 없는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들을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중세말의 종교재판관들이죠. 남의 머리속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투시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바가지 만한 머리 안에 절대자의 뜻을 다 담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적 교만이요, 신성모독이 아닐는지요? 천사 루키페르가 반역천사 된 것도 이런 교만 때문 아닌가요?
종교적 확신...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오히려 정직한 회의가 신앙의 건전성을 보장하는 것 아닐까요?
C. S. 루이스가 생각한 교회
아무리 곰이 좋아도 동물원에 갇히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아무리 성직자가 좋아도 교회에 갇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우선 교회는 집단적인 곳으로서, 지겹게도 '모이는' 행사를 강조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종류의 일이 개인의 영적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에게 종교는 선한 사람들이 혼자 기도하거나 두세 명 정도 모여 영적인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수선스럽고 소모적이고 성가신 일들이라니! 종(鐘), 군중, 우산, 게시물, 소란, 끝도 없는 정리 정렬. 나는 찬송이 거슬렸다(지금도 그렇다). 악기 중에 가장 좋아하지 않는 것이 오르간이었다(지금도 그렇다). 게다가 영적 서투름(gaucherie) 때문에 어떤 의식(儀式)이건 잘 참여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C. S.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예기치 못한 기쁨>(홍성사, 2003)
지난 1968년은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이른바 메이지(明治)유신을 일으킨 지 100년이 되는 해였는데, 그 해에 지나간 100년 사이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어떤 책이었나 조사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신앙 책과 나쓰메 소세키(夏目溯石)의 문학작품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로서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나쁜 면은 잘 알고 있으나,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밥이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면서 아시아 제일의 강대국이 된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잘 하지 않는데, 나는 그 힘의 원천이 위 두 분의 책에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즉 그 두 분의 책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국민의 정신에 가장 많은 영향을 공급해 주어서 그 힘이 근대 일본을 일으켰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어떤 책이겠는가는, 곧 100년 뒤 이 나라가 어떤 꼴의 나라일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줄 것이 틀림없다. 달마다 보도되는 베스트셀러도 중요하겠지만, 100년간의 베스트셀러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노명식, <함석헌 다시읽기>(인간과 자연, 2002)
맹세하건대, 나의 행동의 동기가 된 것은, 야심이나 이익이나 개인적 성공이 아니라, 오직 의무감, 명예, 그리고 조국에 대한 헌신이었다. 나는 조국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 임무가 공식적으로 내게 부여되었을 때, 그리고 때마침 건강상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나의 남은 눈마저 사실상 잃게 되어, 의사들이 내게 이 임무를 맡을 경우 곧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리라고 예고했을 때, 나는 이 경고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의사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들리는 신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운명의 명령에 의해 두 개의 제비가 내 앞에 놓여졌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는 실명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의무였다. 나는 시력 상실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나의 가장 엄중한 의무를 포기해야만 했다 …… 그러므로 나는 아직 내가 조국의 복리를 위한 큰 일을 할 수 있을 때,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시력을 쓰기로 결심했다.
밀턴,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명>(1654)
차기벽 교수(성균관대/정치학)는 함석헌 선생님과 간디를 비교해 본다고 한다. 함 선생과 간디는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 차 교수의 설명이다. 사상적 깊이와 높이에 있어서는 함 선생님이 간디를 앞서고 있지만, 현실의 정치권력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 다시 말해 리얼 폴리틱스(Real Politics)에서는 함 선생님은 간디의 상대가 안 된다는 분석이다.
간디는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참으로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항영독립운동을 하면서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인 전략전술을 구사해내는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이를테면 단식을 할 때는 전세계의 언론을 불러모아 여론을 일으킨다. 간디는 현실정치의 본질을 꿰뚫어 요리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함 선생은 운동에 있어서도 이상주의적 사상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펼치면서 선생님은 단식투쟁을 했지만, 그것은 그의 집에서 아니면 저 산 속의 고요한 곳을 찾아 혼자 했다는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지식인으로서 적극 참여한 바 있는 차 교수는 "선생님, 단식을 하려면 광화문이나 종로바닥에서 하지 원효로 집에서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전했지만, 함 선생님은 그런 쇼를 부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전집을 만들면서 나는 선생님을 늘 뵙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혼자이셨다. 선생님의 사상과 행동, 운동은 언제나 조직적이지 못했다. ... 선생님은 형식과 제도와 체제가 더 심화되고 구조화되면 그것이 곧 폭력화 되고 정치 권력이 되고 국가와 국가주의가 된다는 사상을 가지셨기 때문에, 선생님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였을 것이다. ...
나는 선생님을 뵈면서 선생님은 참으로 순진한 어린이로구나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질문명으로 오염되고 있는이 시대에, 선생님은 현대의 그 형식과 폭력에 맞서고 있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님 앞에 앉으면, 아무 것으로도 꾸미지 않고 아무런 형식도 없는 선생님의 순수에 나 자신도 그런 분위기에 빠져들곤 하는 것 같았다. ...
--김언호, <책의 탄생: 격동기 한 출판인의 출판일기 1985-1987>(한길사, 1997)
특정 활동이 개인적으로 나타날수록, 그리고 공공에 드러나지 않을수록 장기적으로는 보다 큰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유대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이들 관계가 비공식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네스 미노그가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로 엮어진 문명보다 오히려 개인들이 더욱 강력한 실천적 협조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지녔다.
--모리스 버만 <미국 문화의 몰락>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에 ‘무교회학파’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임세영 교수와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만, 마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를 망라하면서도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저변에 깔고 있었듯이, 무교회 기독교신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전공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그룹이 등장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드리는 이 말도 20대 후반의 청년층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언필칭 진리의 종교라면 비기독교인에게도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 9월 12일 노평구선생 1주기 강연 중에서
사실 사회적으로 기독교인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고착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예전에는 예수쟁이라고 하면 싫어하면서도 그 신실성은 믿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금융거래에서도 목사, 장로, 교인이라고 하면, 절차를 더 까다롭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신뢰, 도덕적인 신뢰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월간 <기독교사상> 서진한 주간 (2003년 3월호)
* 현재 우리(악마들)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오해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우리가 보는 바 영원에 뿌리를 박고 모든 시공간에 걸쳐 뻗어나가는 교회, 기치를 높이 올린 군대처럼 두려운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 그(크리스천)가 어떤 노선을 취하든 너(악마의 졸개 웜우드)의 주된 임무는 한 가지다. 애국심이든 평화주의든, 그것을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일부로 생각하게 하거라. ……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 하는 인간은 우리(악마들)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 수록 더 그렇지.
* 원수(하나님)는 아무리 죄 문제라 하더라도 환자(크리스천)가 너무 깊이 천착하길 바라지 않지. 일단 회개했으면 되도록 빨리 관심을 밖으로 돌릴수록 좋아한다구.
* 초창기에 회심한 인간들은 단 하나의 역사적 사실(부활)과 단 하나의 신학적 교리(구속)만으로 회심했다. …… 복음서는 나중에 생긴 것으로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쓰여진 게야.
* 우리(악마들)가 바라는 바, 정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인간들이 기독교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악마들) 수법이야.
--C. S. 루이스(Lewis)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김교신 선생의 '기도'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진대
내 입에서 설교를 끊으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위에 있을진대
한 줄 원고도 이루지 못하게 하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옵거든,
주여,
그 때에 다음달 호의 원고를 쓰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김교신전집> 제7권, 45쪽. 1939년 3월 14일자 ‘일기’에서.
나는 박쥐보다 관료들을 더 싫어한다. 나는 경영의 시대이자 행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가장 큰 악은 찰스 디킨즈가 즐겨 그렸듯이 지저분한 ‘범죄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 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입고 손톱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지옥에 대한 상징으로서 경찰국가의 관료 조직이나 아주 비열한 사업을 벌이는 사무실 비슷한 것을 택하게 되었다.
--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아무리 기를 쓰고 악을 써서 외쳐 보았어도 우리는 이스라엘 역대의 선지자들 이상으로 외칠 역량이 없음을 깨달았다. 교회의 강대상과 교권자의 궤변에 대해, 사자보다 우렁차게 외친 모세의 율법이 있었고, 다윗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등의 질책이 있었다. 사도들의 교훈과 그리스도 자신의 날카로운 외치심이 진동하고 있다.
그러나 교권자들의 고막을 흔들기에는 마태복음 23장(바리새인을 독사의 자식으로 꾸짖음)도 오히려 약할 뿐이요, 예레미야의 한숨 소리도 종교 유희에 몰두하고 있는 교회인에게는 창구멍으로 새어드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
이는 외침이 약한 까닭이 아니요, 일부러 귀를 막았거나, 또는 생명이 고갈하여 감각을 잃은 자들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성서조선>은 나 홀로 크게 외치려고 자부하지도 않고, 오직 믿음으로써 살아 존재하고자 할 뿐이다. 오늘과 같은 때에는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를 파악하고 존재하는 일, 그 일 자체가 사업이요 외침이 된다.
(김교신 <교회와 우리의 관계>. 193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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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한 분들이 남기신 글이네...
샘도 멋진 글 맘을 변화시키는 글 꼭 쓰시길...
기도 많이 하세용^^
노평구 선생님은 기도만 하는 사람 싫어하셨어요. 한국 사람 민족성이 너무 감정적이어서 걱정하신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