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따르면, 시조 모경(牟慶)은 중국 홍농(弘農) 출신으로, 북송 흠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자겸의 모반 음모를 저지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홍농후(弘農侯)에 봉해졌으나 금나라가 송경(宋京)을 침입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납치해 가자 고려에 도움을 청하러 나왔다가 송나라가 패망하자 고려에 귀화하였다. 고려에서는 그를 후대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내리고 모평군(牟平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모경(牟慶)의 아들 모광정(牟光炡)은 고려 의종 때 밀직부사를 역임했고, 모광정의 아들 모정린(牟挺麟)은 명종 때 전서를 지냈다. 부자 평장사로 이름을 떨쳤던 모여장(牟汝長)은 모정린의 증손이다. 모여장의 아들 6세손 모호(牟皓)는 삼군도총제 부원수가 되어 원나라 침공 때 전공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모순(牟恂) : 조선 전기의 문신. 부친은 첨정(僉正) 모세택(牟世澤)이고, 장인은 정존(鄭存)이다.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와는 과거시험을 치를 때 알게 되어 교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6위에 급제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 좌우헌납,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사헌집의(司憲執義),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좌사간(左司諫), 의정부(議政府)의 사인(舍人)과 검상(檢祥) 등을 지냈는데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로 재임하던 중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1443년(세종 25)에는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서 체찰부사(體察副使)의 임무를 띄고 일본(日本)의 도적들이 납치해 간 조선 백성을 찾아오기 위해 7월말에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11월초에 돌아왔다. 이때 적왜(賊倭)를 잡은 공로로 두 자급(資級)이 올랐다. 1446년(세종 28) 전제소별감(田制所別監)에서 회양부사(淮陽府事)를 제수받았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으나,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진주(晉州)로 유배를 가 사봉면(寺奉面) 방촌리 뇌동에서 세상을 떠나니 괘종산에 장사하고 후손들이 대대로 방촌리 등건(登巾)에 살았다. 효자로 이름나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효자 통정대부 행 좌사간 함평모공순지려(孝子通政大夫行左司諫咸平牟公恂之閭)”라 음각된 비석이 있다.
모세번(牟世蕃, 1640년 ~ ?) : 모세무의 동생. 1669년(조선 현종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모경관(牟景觀, 1709년 ~ ?) : 1750년(영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내고, 1757년(영조 33)부터 1759년까지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지냈다.
모달겸(牟達謙, 1749년 ~ 1821년) :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경양찰방(景陽察訪)에 임명된 뒤 179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郎)을 지냈고, 1793년 황해도사(黃海都事)·훈련주부(訓鍊主簿)를 거쳐 1803년 보시관(補試官)에 임명되었고, 1806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온릉영(溫陵令)을 지냈다. 181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재임시에는 민막(民瘼) 및 과폐(科弊) 구제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바른말을 잘하고 권신간배들을 가차없이 탄핵하여 ‘모장령의 직언(直言)’이라는 말을 들었다. 1812년 예조좌랑, 1813년 사헌부장령과 전주의 복시관(覆試官)을 역임하였으며, 1814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면서 청백한 관리생활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1]
모수명(牟受明) : 조선 말기의 서예가. 호 기초(箕樵). 전남 함평 출신. 초서와 해서를 잘 썼다.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이때 3개월 내에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수업료 200냥을 받지 않았다 한다. 그의 서체(書體)를 모체(牟體)라 한다.
함평(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백제의 다지현(多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다기현(多岐縣)으로 고쳐서 무안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조선 태종 9년) 모평현(牟平縣)을 함풍현(咸豊縣)과 합하여 함평현(咸平縣)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