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남도 라이딩(고동산-순천만-선암사)
- 제1일 : 고동산 임도 27km
- 제2일 : 순천 동천~순천만~선암사
11월 마지막 주말 가을의 끝자락이라도 부여잡고자, 행여 아직 단풍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자전거를 뒤에 달고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찾은 곳은 순천과 승주 사이의 고동산(해발 709m)으로 조계산, 모후산과 나란히 호남정맥에 속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이렇다 할 명승지도 고찰도 없지만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밋밋한 철탑의 봉우리를 장식하는 동네 뒷산 보다는 좀 더 큰 산이다. 단아한 산세를 따라 물 흐르듯 임도가 나있고, 주변의 편백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피톤치트를 발하며 폐부를 자극하여 주말 산악자전거 여행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낙안읍성 근처 857번 지방도에서 농로로 접어들면 산자락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수정마을이 나온다. 남도 마을에도 벌써 김장을 하느라고 시골마을이 제법 부산하다. 수정마을을 휘돌아 산밭을 돌아서서 고동치까지 약 4km는 만만치 않은 업힐이다. 멀리서도 가파른 임도가 보이면서, 저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까 싶다. 상체를 낮춰 땅바닥 보면서 한참을 가야 고개정상에 다다른다.
드디어 고동치 정상. 아! 이 순간이 참 즐겁고 행복하다. 이때 느끼는 희열은 비록 짧지만 강렬하다. 그렇기 때문에 또 수없이 고개들을 넘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고동산 라이딩의 큰 고비를 넘기는 셈이다.
그 다음 올망졸망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지만 적당히 즐길만하다. 시작이 반인 셈이다. 항상 처음 고비가 어렵고, 첫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 다음은 즐길만한 여유도 생기는 법이지 않던가? 육체도 그렇다. 처음 업힐에서 준비 안 된 몸이 힘겹게 느껴지지만, 일단 강하게 심장이 뛰고 나면 그 다음 유연해지는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다.
고동치를 넘어서니 적막산골이다. 보이는 것은 산과 골짜기와 나무뿐, 세상일 절로 잊을 수 있겠다. 이 나무들 위에 속세의 온갖 고뇌를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슨 생각하면서 자전거 타느냐고 묻는다면 아무 생각 없이 타는 거다. 생각 비우기이다. 업힐을 오르며 가빠진 숨을 몰아쉬면서 내 안의 나쁜 공기도, 헛된 생각, 염려도, 욕심도 다 내뱉는 것이다. 다만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되새기면서...
산 중턱에서 세 갈래 길에서 지도와 다른 길로 진행하게 되어 당황하기도 했지만 다시 예정된 궤도에 오르게 되니 더욱 극적인 맛이 있었다. 여행에서는 한번쯤 길을 잃어보기도 해야 참맛 아니겠는가? 때론 예정된 길을 벗어났을 때 더 기막힌 경치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인적하나 없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장안치에 이르니 오늘의 업힐은 모두 끝났다. 이제는 속도를 즐기며 안전하게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받는 다운만이 남아 있다.
좀 더 서둘러 일찍 라이딩을 시작했으면 저 아래 상사호로 직진하여 호수를 끼고돌아 순천만까지 라이딩해도 좋을 듯 하였지만 이미 날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홍림마을을 지나 남정천을 달려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해가 져물었다. 순천시내로 들어가서 숙소를 정하고 주차장에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나와서 손님을 맞으며 자전거를 안전하게 거치할 곳을 안내해준다. 이런 친절은 또 처음이다. 여장을 풀고 허름한 식당에서 조기매운탕으로 허기를 달래는데 남도에서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비용도 두 사람이 술 한잔 곁들였는데도 만팔천원 나왔다. 이만원 드리며 거스름돈 받지 않겠다고 하니 인심 넉넉한 아주머니 아주 좋아하신다. 남도의 따스함이란 단지 기후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순천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천을 따라 순천만으로 향했다. 갈대밭이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순천만의 가까움을 알리는 듯 하더니 이내 드넓은 갈대세상이 펼쳐진다.
지자체에서 조성한 생태공원으로 들어서서 갈대사이로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용산전망대에 이르니 순천만의 대광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위대한 스케일이다. 대자연이 가꾸어 놓은 갈대정원,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넘어서 엄숙함에 이른다. 이 경이로움을 놓쳐버릴까 봐 사람들은 카메라를 연신 들이댄다. 내가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광경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듯, 비로소 소원을 이룬 듯 마음 뿌듯하기 그지없다.
이곳에 사람들만 모여드는 것이 아니었다. 새들도 엄청 모여든다. 흑두루미, 민물도요, 노랑부리저어새, 청둥오리 등, 본래 이들의 터전이다. “휘모리장단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지나 다시 자전거를 타고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인 ‘무진길’을 달려서 순천으로 돌아왔다.
주말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은 해질 무렵 선암사에서 달랬다. 최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을 읽은 터여서 이곳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곳이 더욱 맘에 들었던 것은 자전거의 출입을 막지 않아서였다. 지금껏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사찰마다 입구에서 통제당한 경험 때문에 미리 전화해보았더니 이곳은 괜찮다는 것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물론 경내에서는 자전거를 한 곳에 두고 걸어서 관람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일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이나 입구에서 절까지의 숲길이 최고의 명품길 아니겠는가? 관람객에게 피해가 없다면 걷기의 연장인 자전거를 굳이 막을 필요가 없는데, 필요이상으로 통제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순천만에서도 대대포구에서 학산까지 가는 해안길이 명품길인데 새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전거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새들이 날아드는 곳은 길에서 적어도 2~3백미터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 자전거에 대해서 적대적인(bike unfriendly), 통제만이 능사인 줄 아는 행정 관료주의는 빨리 탈피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이다.
아무튼 선암사에서 우리나라 돌다리 중 명작으로 꼽히는 승선교와 계곡에 맞대어 그림처럼 지어진 강선루를 보면서 인공적 건축물이 자연과 어떻게 조화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삼인당 연못과 선암사 경내도 중요하지만 꼭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선암사 해우소이다. 변소간으로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정호승은 그의 시 <선암사>에서 이렇게 읊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 뒤깐에서 시인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증표시는 하고 싶었다. 나의 생체물질로...
익숙한 말씨, 익숙한 정취의 남도 산사를 빠져나와 저물어가는 들녘을 달리고 달려서 다시 나의 거주처로 돌아왔다. 고향 남도 들녘에서 따스함과 포근함과 넉넉함에 취해 본 가을의 끝자락 주말여행이었다.
첫댓글 인생삶에 동행자와 함께라는것이 무척이나 부럽습니다.
혼자가 아닌 부부가 함께 함은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
남도가 고향이군요.
유명한 순천만 떠난다는 것도 용기랍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자연의 아름다움
초겨울 라이딩은 철새들이 환영해준답니다.
겨울의 한강도 철새들을 만나러 자주갔었지요.
즐거운 여행.감사^*^ 함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