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세동점(西勢東占)이후 일본의 개국과 막부정권의 붕괴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에 일본 지식인층에서는 ‘문명으로서의 중화’와 ‘제국으로서의 중화’를 구별해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일본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있어서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새로운 국가 만들기에 들어간다. 서세동점의 격류 속에서 패러다임 전환기를 거쳐 가는 관동지방, 특히 도쿄지역을 중심으로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는지 조사 한다.
(1)도쿄(東京)
일본의 혼슈 동부에 있는, 메이지 시대 이후 사실상 일본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행정 구역 상으로는 도쿄 도에 속하지만, 도쿄 도는 다마 지역이나 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의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어, 도시라는 뜻의 "도쿄"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도쿄에는 일본 각 정부 부처, 일본 천황이 기거하는 황거 등이 있다
도쿄라고 하는 명칭은 1868년 9월(메이지 원년 또는 게이오 4년 7월)에 반포된 칙서인 "에도를 칭하여 도쿄라고 삼음"(江戸ヲ称シテ東京ト為スノ詔書)에 따라, 에도의 마치부교(町奉行)가 관할하던 지역을 관할하는 도쿄 부(東京府)가 설치된 것에서 유래한다. "東京"이라는 한자는 교토에서 볼 때 "동쪽의 도읍지"라는 의미를 뜻한다. 메이지 중기까지는 '東亰'라는 표기 또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이 "도쿄"라는 발음으로 굳어진 것은 메이지 시대 중기였고 이전에는 "도케이"(トウケイ, 한자 표기는 東京)라고 불리어왔다. 흔히 도쿄와 요코하마를 묶어 말하는 게이힌 공업 지대(京濱工業地帶), 케이힌 급행 철도, 게이오 철도 등에서 "케이"(京)는 과거 도쿄를 읽던 다른 이름인 "도케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한 신정부 수뇌진은 에도로 천도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당시 교토의 귀족들과 관인들의 반발이 컸던 이유로 일단 "에도 또한 도읍지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에도 또한 (일본의) 도읍지가 된 이상 천황은 에도(도쿄)에서도 행정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라는 빌미로 천황의 이동이 계획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11월(메이지 원년 10월)에 도케이 성(구 에도 성)에 들어갔고 그 후 한번은 교토에 돌아온다. 1869년 5월(메이지 2년 3월)에 다시 도쿄로 이동하였으며 대정관(太政官) 또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천황과 정부가 교토로 돌아오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면서 사실상의 '도쿄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도쿄 천도' 자체는 일본 법령에 의해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일본에서는 도쿄를 수도로 직접 정한 법령 또한 존재하지 않으나 간토 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12일에 발표된 다이쇼 천황의 칙어 중에 "도쿄는 제국(일본 제국)의 수도로 하고"(東京ハ帝国ノ首都ニシテ)라는 문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교토고쇼는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경내의 시신덴(紫宸殿)에는 천황이 있는 곳임을 나타내는 어좌가 안치되어 있다. 이에 따라 천도를 부정하는 의견 또한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국 헌법에 따라 주권을 천황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선언을 하였기 때문에 국권의 최고 기관인 국회의 소재지인 도쿄를 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 또한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최근 들어 수도 기능을 도쿄에서 도치기 및 후쿠시마 지역(나스(那須)), 기후 및 아이치지역(도노(東濃)), 미에 기오(畿央) 지역 등지로 이전하려는 계획(일본의 수도 기능 이전)이 부상하면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 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것은 학문상의 명칭으로 당시에는 고잇신( 御一新) 등으로 불리었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에 대해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고 있지만 종료 시기에 대해서는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1873년 지조개정(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으로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1889년 헌법 제정으로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었다고 본다.
-배경
대정봉환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동맹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쵸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