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한자명칭 :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 주소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內)
문화재청 설명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眞興王 巡狩碑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을 말한다. '巡狩(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封地(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巡行(순행)이라고도 하며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巡狩管境(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拓境(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북한산비는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이며,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신라의 함흥지방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알려져있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이번에 소개하는 북한산비와 함께 창녕비(국보 제33호), 그리고 북한지역에 위치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모두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음)가 있으며, 그동안 고려 태조 왕건이나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후기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에 의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북한산 순수비 진품>
<순수비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하여 적어 놓았다. 윗부분 일부는 마모가 심하여 읽을수 없고, 군데군데 글자판독도 어렵다.>
<옆면의 3줄 새김중 오른쪽에는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추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 라고 씌어있고 왼쪽에는 정축년(1817년)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고 새겼다. 가운데 줄에는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이라고 새겨져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판독과는 무관한 낙서(?)로 보인다.>
<뒷면에는 6.25전쟁중 상흔으로 보이는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북한산 비봉에는 문화재청에서 모의 비석을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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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신묵의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비의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