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6일 오전 9시, 서울 근교의 명찰로 널리 알려진 진관사(은평구 진관동)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진관사 경내의 칠성각에서 진귀한 물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진귀한 물거은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의 진수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였다. 그러면 왜 서울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삼각산 진관사에서 그런 자료가 발굴 되었는가? 이제 그 신비속으로 들어가 보자
진관사는 독립운동 자료가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찰이었다. 최근에는 정갈한 사찰음식을 제공하는 비구니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진관사는 고려 현종 2년 (1011)애 창건되어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자 명찰이다. 또한 수륙재를 조선 초기부터 국가 차원에서 거행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수륙재는 수륙무차평등재를 줄인말로 수륙회 혹은 무차대회 라고도 불린다. 수륙재는 물이나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등 혼령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재하는 것이 목적인 불교의식 중의 하나이다. 수륙재는 조선시대에 와서 널리 알려져 오래도록 봉행되었는데, 진관사는 조선시대 수륙재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이다. 국행수륙재를 여는 사사로 지정되어 매년 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진관사에서는 수륙사가 건립된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국가 행사로서의 수륙재가 열렸으며,이후 태조의 재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의 모든 재가 이곳에서 올려졌다. 이런 역사를 갖고 있기에 진관사는 수륙재를 복원하여 전통불교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결과 2013년 12월, 진관사 수륙재는 국가로부터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조선시대 1442년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독서당 건립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그래서 진관사는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의 불교 신행을 담당하는 사찰로 사격이 고양되었다.
진관사는 이런 역사를 갖고 있지만 6·25 전쟁으로 나한전을 비롯한 3동만 남기고 사찰 전각의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비구니 진관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재건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즉
1960년대 초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수행하면서 포교하는 사찰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진관사는 춘성, 탄허, 석주 스님과 같은 큰 스님들이 자주 왕래하는 절이기도 했다.
2009년 5월 진관사 경내에서는 서울시 문화재 33호인 칠성각을 보수수리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인 칠성각의 내부에는 칠성도와 탱화가 소장돼 있다. 칠성도와 탱화가 서울시 유형문화재이기 때문에 칠성각이 온전한 건물로 유지돼야 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칠성각은 1907년에 지어져 건물이 노후하여서 서울시 후원을 받아 해체, 복원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2009년 5월 26일 오전 9시 무렵, 진관사의 총무인 법해 스님은, 공사하는 인부가 칠성각에서 이상한 것이 나왔다며 가져온, 한지로 싼 작은뭉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뭉치는 칠성각의 벽을 해체하기 위해 뜯어내고 있는 불단과 기둥 사이의 골조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법해 스님이 그 한지를 살그머니 열자 보자기에서 태극 무늬를 볼수 있었다. 그래서 법해 스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주지 소임을 보는 계호 스님을 급히 찾았다. 보자기를 놓아둔 대중방으로 주지스님이 오도록 연락하였던 것이다. 잠시 후에 나가원의 대중방으로 달려온 계호 스님과 법해 스님은 보자기 전체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런데 그 보자기는 보통의 보자기가 아니고 89×70㎝ 크기의 대형 태극기였다. 그리고 그 태극기 안에 담긴 서류 뭉치는 3·1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에서 생산된 상해판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 「경고문 」 「조선독립신문」등으로 6종 17점에 달하였다. 이와같은 독립운동 관련 자료뭉치를 본 계호 스님과 법해 스님은 그 당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보자기를 자세히 보니 태극무늬가 보이더라구요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렸죠. 태극기 안에서는 아주 곱게 접은 신문들이 나왔습니다.(계호스님)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요, 처음엔 이게 뭐야? 했지만 태극무늬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더욱이 불에 그슬리고 여기저기 찢긴 자국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구요(법해스님)
계호스님과 법해스님은 이렇듯 흥분과 놀라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소식을 듣고 잘려온 진관사의 대중 비구니 스님들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따. 진관사 전체가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진관사 스님들은 칠성각에서 나온 자료 뭉치가 아주 특별한 자료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과 관련있을 것으로 보이는 태극기의 원본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피와 땀이 밴 채 나온 태극기였기에 주체할 수 없는 신비감이 들기도 하였다. 발굴된 문건 자료는 금방 배달된 신문과 같이 전혀 손이 안 타고 깨끗한 상태였다. 마치 금방 접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90년간 고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간 흥분의 순간을 보낸 진관사의 비구니스님은 발굴된 자료가 보통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평소 진관사를 왕래하던 동국대 문명대 명예교수에게 연락했다. 진관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발굴되었으니, 즉시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문명대 교수는 평소 진관사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진관사에서는 문명대 교수에게 사찰에 대해 정리해 달라고 부탁하여,『삼각산 진관사의 역사와 문화) 』(2007)라는 책자를 펴낸 연고가 있었다. 문명대 교수는 불교문화재 분야의 전문가로서 문화재위원을 수년간 역임한 대가였다. 진관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1시간 후에 달려 온 문명대 교수는 흰 장갑을 끼고 유물을 확인하였으며, 자료에 응급조치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진 촬영을 하고는 문화재 기술자인 김표영(지류연구원 원장)에게 의뢰하여 태극기와 신문류에 대한 전문적인 보존 조치를 강구하였다. 진관사 스님들인 이러한 조치를 거친후, 오동나무 박스와 한지를 구해서 자료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였다.
진관사 비구니스님들은 「독립신문 」에 나오는 '태극기'라는 시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진관사는 조게종단 소속의 공찰이었기 때문에 응급적인 보존을 하고 나서 조게종 총무원에 자료발굴내용을 알렸다. 그 과정에서 당시 총무원 기획실에 근무하던 김용구 팀장은 자신의 대학 선배중 독립기념관에 근무하는 박사가 있으니, 그 박사에게 자문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렇게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의 연구위원인 김주용 선생이 진관사로 와서 자료를 열람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료를 본 김주용은 특히 「신대한신문 」을 보고서 절을 몇 번이나 하였다. 그는 법해 스님에게 이 신문만 갖고도 논문을 몇십 편 쓸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즉, 이 신문을 펴낸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 선상에서 갖는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런 말을 들은진관사 비구니스님들은 발굴된 자료가 진짜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연구를 담당하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가 있다. 진관사에서 발굴된 자료의 분석을 의뢰받은 독립기념관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자료 분석을 정밀하게 하기 위해 김용달 수석연구위원과 김주용 연구위원이 자료분석을 전담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진관사 자료는 전문적인 학술기관의 학자들에 의해서 분석 · 감정을 받게 되었다.
며칠후, 진관사가 위치한 지역구의 국회의원인 이재오 의원이 진관사를 우연히 내방하였다. 이재오 의원은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었는데, 진관사 스님들로부터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운동 자료가 나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는 진관사가 독립운동의 거점 사찰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료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진관사에서는 조게종 총무원의 기획실 홍보팀에게 기자회견 준비를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진관사 법해 스님은 이 자료의 가치, 관련 스님등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교수와 김응철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발굴 자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태극기였다. 불에 그슬린것도 그렇지만, 태극기 중앙에 둥근 천이 덧붙인 상태에서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어 그 모습이 강렬함을 느끼게 했다. 그 무렵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송명호는 태극기 전문가 였다. 송명호는 20여 년 동안 태극기를 수집하고 연구한 전문가였다. 그래서 진관사에서는 송명호 선생을 초빙하여 태극기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수만은 태극기를 접했던 송명호 선생도 진관사 태극기와 같은 것은 처음보았다. 그래서 송명호는 진관사 태극기를 분석하게 되었다. 한편 동국대학교 한철호 교수는 2008년 3·1절을 기해 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최초의 태극기 원형 자료 공개 기자회견에 참가하였다.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태극기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으로,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했던 태극기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추정됐다. 이 태극기의 발굴을 주도한 당사자가 한철호 교수였다. 한 교수는 태극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이 자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발굴작업을 했다. 그래서 진관사는 불교계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교수인 점을 고려하여 한철호 교수에게도 태극기 감정 · 평가를 부탁하였다.
이렇듯 진관사에서 발굴된 자료의 내용, 성격, 특징 등은 관련 전문가들에 의해 심도 깊게 분석되었다. 그런 가운데 진관사의 비구니스님들은 발굴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고, 연구하고, 국민들에게 보도할 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그해 지관사의 여름은 여느 여름보다 더 뜨거웠다. 정시으로 자료에 대헤 기자회견을 하기 전까지 이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은 당연했다. 최초의, 그리고 비장의 자료들이 대거 발굴됐지만 8·15 광복절 이전, 공개하기로 한 그날까지는 대외비로 침묵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200년 진관사 스님들의 여름은 더욱 더 뜨거운 날들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