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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이만수 전 감독. 그는 야구 덕분에 받은 사랑을 야구를 통해 갚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6월 하순이었다. 당시 SK는 7위에 머물러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주전 가운데 부상자가 태반이었다. 투수진은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무엇보다 외국인 선수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즌 전 최정, 박정권과 함께 중심타선을 구축하길 바랐던 루크 스캇은 부상으로 시즌을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2년 계약을 맺었던 조조 레이예스는 부진을 거듭하다 아예 6월 23일 웨이버 공시로 한국을 떠났고, 시즌 초반 기대를 모았던 로스 울프 역시 6월 하순까지 단 1승만을 거둬 ‘올 시즌 KBO리그 외국인 투수 최소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300만 달러 트리오’로 불리던 외국인 선수들의 집단 부진에 이만수 SK 감독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이 감독은 “세상에 그치지 않는 비는 없습니다. 언젠가 이 비가 멈출 겁니다”하며 되레 불안하게 SK를 바라보는 기자를 안심시켰다. 한발 나아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은 건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참고 또 참는 자리가 감독직 같다”는 말로 마음속에서 자라는 아쉬움과 격정의 싹을 스스로 잘랐다.
돌아보면 이 감독은 참 할 말이 많은 사령탑이었다. 변명거리도 많았다. 숨겨진 진실의 이야기는 말로 담을 수만큼 넘쳤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기보다 침묵으로 일관했고, 열정적으로 분노를 표시하기보단 참고 또 참았다.
당시 이 감독은 기자에게 “우리 팀이 4강에 오르든 바닥으로 떨어지든 내 자신과 맺은 세 가지 약속은 꼭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이 감독은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약속을 설명했다.
“우선, 감독직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요. 감독 재계약은 하늘에 맡길 생각입니다. 정직하게 말해 전 재계약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선수들과 똘똘 뭉쳐 그라운드에서 싸우고 싶어요. 두 번째 누가 신임 감독이 되든 진심으로 축하해줄 생각이에요. 제가 감독직을 그만두면 제 감독 역사는 끝날 겁니다. 하지만, 'SK'라는 구단에서 봤을 때 전 지나가는 역사에 불과해요. SK의 새 역사가 쓰이는 순간은 축복받아 마땅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임 감독이 오면 진심으로 축복하고, 행운을 빌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떠날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기자는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을 듣지 못했다. 한창 대화 중일 때 한 코치가 선발 오더를 들고 이 감독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나중을 기약하며 이 감독과 헤어졌고, ‘세 번째 약속을 듣겠노라’는 다짐은 바다에 빠진 소금 인형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감독의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을 들은 건 SK 새 감독 발표가 나고 하루 뒤인 10월 22일이었다. 이 감독은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난 괜찮습니다. 우리 SK는 더 좋은 팀이 될 겁니다”하며 “정든 팀을 떠나 아쉽지만, 이제 야구로부터 받은 사랑을 야구를 통해 되돌려 드리는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구단주와 만난 이만수 감독. 결과는 SK 감독 시절 이만수(사진=SK)
어제(21일) SK가 새 감독을 발표했습니다. 김용희 육성총괄이 1군 감독으로 승격했는데요. 감독님은 계약 종료와 함께 팀을 떠나게 됐습니다. 8년간 몸담았던 팀을 떠나게 돼 아쉬움이 크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활짝 웃으며) 괜찮아요. 시즌 때도 박 기자한테 말했지만, 난 감독직에 미련이 없어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만 했어요. 제 후임으로 좋은 분(김용희 감독)이 오셔서 더는 미련이 없습니다. 진심이에요.
대개 팀을 떠나는 감독님들을 보면 선수, 코치들과 헤어지는 걸 무척 가슴 아파하시던데요. 감독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자랑스러운 선수, 코치들과 헤어지게 돼 마음은 아픕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우리 SK는 더 좋은 팀이 될 겁니다. 올 시즌 막판 우리 SK 선수들이 펼친 분투와 가능성을 많은 분이 보시고, 감동하셨을 줄로 압니다. 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들 덕분에 ‘지고도 행복한 감독’이 됐어요. 그걸로 전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언제 재계약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그제(20일)였어요. 최창원 구단주님께서 직접 전해주셨습니다.
구단 단장, 사장이 아닌 구단주가요?
네. 구단주께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해주셨어요. 함께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구단주께서 아주 정중하게 ‘재계약을 못 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기업 경영에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 직접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구단주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한데요.
여러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셨어요. 구단주님과 저와 나눈 사적인 대화는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구단주님께서 SK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원체 야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높은 분이라, 전 구단주님과의 만남에서 SK의 밝은 미래를 봤습니다.
‘차기 감독이 누가 될 예정이다’ 이 말씀도 들려주셨나요.
구단주님께서 “차기 감독으로 누가 좋을 것 같습니까”하고 물어봐 주셨어요. 김용희 감독에 대해서도 물어보시고. 제가 그랬습니다. “김용희 감독은 참 좋은 분이자 야구인입니다. 김 감독이 되면 SK를 잘 이끌어가실 것 같습니다”라고요.
앞서 구단주에 대해 ‘원체 야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높은 분이라, 전 구단주님과의 만남에서 SK의 밝은 미래를 봤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어제 SK가 김용희 감독을 선임하며 ‘시스템 야구’와 ‘팀 아이덴티티’ 확립을 화두로 내세웠습니다. 갑자기 ‘구단주 의중이 반영된 화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데요.
구단주님은 미국 메이저리그 시스템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감독에 따라 팀 색깔이 바뀌면 명문구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미국처럼 시스템 야구와 팀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그 속에서 항구적인 구단 운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계세요. 그리고 그게 ‘프로야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정확히 프로야구를 보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요.
최창원 구단주는 개입보단 응원, 비판보단 격려를 앞세우는 구단주란 생각입니다. 그래선지 감독님께도 시즌 중 든든한 후원군이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구단주도 감독 계약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기간 동안 우리 팀엔 ‘골’이 있었어요. 그 골을 제가 팀을 떠나 메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구단주님께서 무척 미안해하시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늘 기억하며 살 생각입니다.
“김용희 감독 취임식 때 참석해 진심으로 축하해줄 예정” SK 김용희 신임 감독(사진=SK)
SK 감독직을 수행하신 3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매일 일기를 쓰시면서 그 많은 이야기를 글로 남기신 것으로 아는데요. SK를 떠나셨으니 할 말은 하셔도 될 듯합니다.
예전에 감독실에서 제가 했던 말 기억나죠?
네?
제가 그랬잖아요. 제 자신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다고요.
아, 네 기억납니다.
첫 번째 감독직에 연연하지 않겠다. 두 번째 신임 감독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조용히 팀을 떠나겠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제 두 번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에요. SK 유니폼을 벗었으니 이제 전 야인(野人)이에요. ‘누가 좋았니, 나빴니’ ‘이땐 이랬니, 저랬니’ 이야기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팀을 위해서도 그건 좋지 않다고 봅니다. 아, 구단주님께서 그런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어떤···.
새 감독 취임식 때 꼭 참석해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요?
네.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승낙하셨나요?
그럼요.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취임식이 정확히 언제인지 연락받진 못했지만, 취임식에 참석해서 진심으로 새 감독을 축하해주고, 응원할 생각입니다.
2007년 SK와 인연을 맺으신 후 수석코치, 감독을 맡으며 8년간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으셨습니다. 행복했던 때도 있고, 좌절을 맛보셨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감독직에서 물러난 지금부터 SK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자칫 후임 감독과 팀에 부담을 드릴 수 있어요. 떠날 때는 말없이 가고 싶습니다(웃음). 행복했던 기억만 마음속에 묻은 채 떠날 생각이에요. 이해해 주세요. 아, 행복했던 순간이라면 어제가 되겠네요.
어제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늘 감독하며 바랐던 게 우리 코치 중에서 SK 감독이 나오는 거였어요. 우리 팀이 아니면 다른 팀 감독으로라도 갔으면 했어요. 코치진 미팅 때마다 “난 천년만년 SK 감독할 수 없다. 여러분 가운데 꼭 감독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아, 그런데 어제 기쁜 소식이 들렸어요. 두산 신임 사령탑으로 김태형 감독이 선임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활짝 웃으며) 정말 제가 감독이 된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김태형 감독은 SK에서 감독님과 3년간 한솥밥을 먹은 분입니다.
어제 (김태형 감독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김 감독 진심으로 축하한다. SK 감독은 아니지만, 두산이란 좋은 팀의 감독으로 가서 정말 기쁘고, 뿌듯하다” 이래 전해줬어요. 김 감독도 “감독님께 3년간 많이 배우고, 잘 보좌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하더라고요. 김 감독은 아마 잘 할 겁니다. 훌륭한 감독이 될 거라고 믿어요.
김용희 SK 신임 감독과는 만나시거나 통화를 하셨습니까.
아직 못했어요. 어차피 취임식 때 볼 거니까 그때 많이 축하해주려고 해요.
“세 번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오스로 떠난다.” 이만수 전 감독이 구단주로 있는 라오스 야구단. 이 감독은 라오스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야구 불모지를 돌며 야구를 전파· 보급할 계획이다(사진=SK)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11월 초 이사를 해요. 지금 집 근처로 갈 거 같아요. 이사 정리 좀 되면 라오스로 떠날 예정이에요.
라오스요?
세 번째 약속을 지키려고 떠날 생각이에요.
시즌 중 말씀하셨던 세 번째 약속이 라오스행이셨습니까.
그래요. 시즌 중 라오스로 야구용품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전에도 필요한 게 있으면 보냈고요. 박 기자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라오스에 하나밖에 없는 야구단의 구단주입니다(웃음). 이제 야인이 됐으니 라오스로 떠나서 야구 보급에 나설 생각이에요.
야구 보급이요?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올 시즌까지 33년 동안 정말 많은 분의 사랑을 받았어요. 고교 시절까지 치면 40년 동안 정말 많은 성원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제가 야구를 안 했으면 이 과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 야구로부터 받은 사랑을 야구를 통해 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아요. 이사 정리만 되면 라오스로 떠나서 야구도 가르치고, 주변 ‘야구 불모지’인 캄보디아나 베트남, 타이 같은 곳에 가서 야구를 보급할 계획이에요.
예정대로라면 어쨌거나 11월에 떠나신다는 뜻인데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생각했으면 빨리 행동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라오스에 지인 분이 계시는데 그분과 함께 열심히 야구 보급에 나설 생각입니다. 그게 ‘야구인’인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봅니다. 이번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봤듯이 야구하는 나라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야구계에도 도움이 돼요. 아시아가 야구로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웃음)
한국야구계에도 남아 하실 일이 많으실 텐데요.
정기적으로 라오스를 오가면서 내년엔 우리나라 전국을 돌면서 ‘야구 투어’를 할 계획이에요. 초·중·고·대학이 많으니까 그 학교들을 돌면서 제 노하우와 경험을 재능 기부식으로 아낌없이 전달해줄 생각이에요.
·SK 감독 시절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만수 감독. 이 감독은 외부로 알리지 않은 채 이와같은 봉사활동과 기부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그것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야구인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사진=SK) |
올 시즌 SK는 비록 4강 티켓을 얻진 못했지만, 전반적으로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감독님이 1군 기회를 준 선수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성장하기도 했는데요. 남은 선수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떠날 땐 아무 말 없이 깨끗하게 떠나야 한다고 봐요. 세대교체 이야기를 하면 제 자랑밖엔 안 됩니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SK의 젊은 선수들이 앞으로 팀을 이끌 차세대 주전이 돼 꼭 팀을 강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겁니다. 전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해요. 네, 잘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야구팬들께 한마디 해주시지요.
그동안 부족한 저를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를 꾸짖어주시고, 비판하신 분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저는 떠납니다만, SK는 영원히 남을 겁니다. 앞으로도 SK와 프로야구에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 50년 동안 야구 덕분에 받은 사랑을 라오스에서 야구를 통해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전국을 돌며 많은 분께 받은 사랑을 역시 야구를 매개체 삼아 갚으려고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