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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네이영성학교 강의록
김정진 마티아 수사
<제1 강의>
주제: 일상의 하느님 체험? (일상의 영성)
제 고향은 전북익산의 나바위 성지입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은 자연스럽게 생활에 배이게 되었지요.
제 어린 시절 이야기 한 자락하고 강의를 시작할까합니다.
시골이기에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가 파하면 모두 모여 함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중간에 노는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기찻길 옆 말무덤이라고 칭하는 묘가 있는 소나무 그늘입니다.
그곳에서 보면 나바위 성당과 화산의 십자가 탑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지요 언젠가 놀다가 우리들 사이에 성당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무슨 이야기 중에 나온 지 모르지만(아마도 콩서리 문제라고 봅니다) 제가 하느님은 이 세상 곳곳에 아니계신 곳이 없이 다 계시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그럼 왜 내가 지금 발로 밟는데 왜 아프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느냐고 하면서 쿵쿵 묘 주변을 밟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 때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요. 속으로 “그게 아닌데…….
하느님은 정말 모든 곳에 다 계신데.....”
그 사건이후
40년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언어만 달라졌을 뿐......
그분은 그냥 계신분인데 무슨 체험이 필요합니까?
내 존재가 있든 없든 간에,
내가 의식하려고 하든 그냥 생각 없이 일상에 머물든 그러하지 않던 간에.....
이유는
모세가 “당신을 어찌 말해야 합니까?”하니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하신 그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어려운 문제를 긴 시간 여러분 앞에서 말해야 되는 고통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일상의 하느님을 말하기 위해선 전제 되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 여러분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자연 안에 충만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이 있습 니까?(내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결과)
2) 여러분은 바로 내 자신이 하느님이 머무시는 작은 우주란 느낌에 잠겨 있던 적이 있습니까?(신학적 용어로 신적합일)
3) 여러분은 하느님의 현존이 그리워 가슴이 애려 본적이 있습니까?(아가페와 에로스 가 혼합된 사랑?)
하긴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하느님 체험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 인지 돈오돈수인지.....
각자의 경험 나름이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세 가지의 체험이 없으면서 일상의 하느님을 말한다는 것은 그냥 이해된다는 말인데...
단순한 이해들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 앞에선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 결과로 불쌍한 사제들만 고백소에서 고통을 당해야 되고....
신앙이 자유와 평화를 준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인정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고 위의 세 가지 경험은 이런 강의시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소중합니다만, 그 지식이 삶에 지혜가 되어 구체화 되는 데는 긴 시간 아주 긴 시간과 시행착오의 경험 안에서 쌓이는 경륜이 어느 날 갑자기 확인되는 경우가 있지요.
오늘의 주제인 일상의 영성을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평범한 하루의 삶에 스며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들의 일상을 시간대로 죽 나열해 보고 내가 하느님이면 매순간 어느 부분에 당신을 의식하고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실지 생각해 봅시다.
---> 잠에서 일어나 ---> 하루의 생활 ------> 잠자리에 들고----->무의식(수면중) 생활 --->다시 일어나서 평범한 일상으로...
이 일상 가운데
나는 몇 번이나 얼마동안 이나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기억하려는 시간이 있는가?
내가 가장 쉽게 그분의 현존에 잠길 수 있는 시간대는? 를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의식인 꿈에 대한 해석입니다.
지식이 쌓이는 만큼 비래해서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도 교묘해 지기에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또 그러기에 부담 없이 타인을 속이게 됩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진솔하기에 천진한 어린이인 무의식이 향하는 방향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은 하루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내 삶의 전부일 수 도 있다고 봅니다.
어찌 보면 20대 시절의 일상들과 30대 40대 50대의 일상들이 서로 다른 색깔로 서로 연결되어 여름날 소나기가 지나간 뒤 만들어 지는 무지개가 되어 내 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젠 잠시 제 이야기를 접고
각자가 자신의 하루24시간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개입(gratia increata 창조되지 않은 은총. 성령)과 나의 의식적인 그분 사랑에 대한 합일(gratia creata창조된 은총. 성령의 작용)이 얼마나 이루어지는지를 표시해 보시고...
지금까지 내 삶에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하느님과의 관계들을 확인해 봅시다.
하루24시간의 도표를 그리시고 그 표에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시간대화 횟수 그리고 좀 더 노력하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는 시간대를 표시한 후 그 표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느낌으로 닥아 오시는지요?
시간을 좀 더 하느님을 위해 사용할 공간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공백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기에 이젠 만성이 돼서 별로 실감할 수 없는 말이 되었지만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표현 하고자 할 때 이 말 외엔 적절한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우린 일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해 내기보단 그 반대인 내적 평화를 상실하는 시간들을 확인하는데 더 익숙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하느님 은총에 대한 느낌이 돈오돈수인지 돈오점수인지 자신의 체험여하에 따라 달라지지요
그러나 마음의 불협화음이 나타나는 매순간 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여!
잘난 체 하는 마음 제게 없삽고... (나 자신의 성장과정과 형성된 성향을 인정함)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현실을 받아들임)
한다한 일들을 쫓지도 아니하고...(세상적 가치관에서 탈피)
내게 겨운 일들도 하지 않나이다. (내 삶에 자리를 정확히 인식함)
차라리 이맘 고스란히 가라앉아 (위의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함)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 인 듯 (하느님이 나를 알고 계심을 확신함)
내 영혼 마치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시편 131) (망설임 없이 즉시 하느님의 품으로 도망침)
하며 탄식하는 시편작가의 맘이 되어 자주 하느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의 유산을 지키고 음미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 잠시 시편작가가 생각하는
젖떼 인 아기의 생활 습관을 살펴봅시다.
젖을 뗀다는 것은 이제 엄마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시작하는 단계이지요. 엄마 치마폭을 놓는다는 것은 처음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기이지요.
그러기에 조금만 불안한 낌새를 느끼면 즉시 엄마 치마 품에 숨어들어 안정은 확보하는 시기입니다. 저에겐 할머니 치맛자락이 그랬기에 아주 쉽게 시편작가의 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내 안에 평화를 상실하게 하는 조짐이 보이면 조용히 이 시편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제2강의>
주제: 일상의 삶이 나의 것인가?
한 시절에
제가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그 시작이 “바~닷가에~ 모래알 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은”이란 노래를 자주 부른 적이 있었지요.
요즘엔,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냐.”란 가사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일상의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하느님 사랑인 성령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이해하는데 저는 아주 긴 2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수도회의 성격상 피정지도를 전문으로 하는 수도회의 일원으로서 피정지도를 거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잘 알면서 자신의 삶에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버티는 긴 시간들은 어찌 보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던 손오공이 제 모습이었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져 제멋에 겨워 활개 치던 나에 약점들을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안에 어찌 이용하시는지를 깨달으면서
당신이 원하시면 인간의 악에서도 선을 창출하시는 분의 능력 사랑에 항복하게 되고....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로마 8:28) 하신 사도바오로의 그 깨달음을 나의 깨달음으로 이해하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선 영원한 침묵이신 그분의 침묵이 내안에 스미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도원 밥을 28년간 먹은 결과로 이젠 임에 침묵을 닮아가면서 조용히 그분의 뜻을 음미하며 평화를 잃지 않고 잔잔히 살아가는 의무만 남았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맘에서 제 일상 안에 나타난 하나의 흐름을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에 청주 미평에 고난회 관상수녀님들이 생활하는 수녀원이 제가 주도적 역할을 하여 지어졌고 지금은 도심한가운데서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의 향기가 하늘로 오르지요.
수녀님들은 오늘과 같은 환경을 꿈꾸며 17년 동안 하느님께 기도하며 지냈답니다. 그들이 기도를 시작한지 17년이 지나서 그 기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공동오락시간엔 그들의 소망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한 상황을 영화화한 한 비디오테이프를 보아가면서.....
저는 고난회 관상수녀원이 한국에 진출하려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한국에 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같은 창립자를 모시며 사는 여인들이 오면 그들을 돌봐줘야하기에....
결국 수녀님들은 청주교구로 진출했고 저는 한두 번 행사 때 가고는 수녀원 근처엔 얼씬거리지 않고 지냈지요.
서로 일면식도 않은 채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수녀님들이 기도를 시작하시면서 이미 그 기도의 응답을위해 저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여 훈련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1)89년 여름 일곡동 수도원의 수해복구 공사 책임을 맡으면서 공사에 대한 자신감과 잠재능력이 인정되면서(개인적으로는 이 공동체 안에서 내 자리를 확인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러한 자부심이 주님이 주신 은총이라 생각했고.)
2)일곡동 명상의집 하자보수를 하면서 건설업자들의 눈속임을 확인하게 되고
3)우이동 명상의집 내부수리를 하면서 공사에 사용되는 재료들을 선택하는 안목이 생기고(공동체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주었다는 만족과 노동과 기도의 완벽한 조화를 실천할 수 있는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한 수도생활)
4)강원도 조산리 집을 지으면서 순간의 공사 중에 매 순간 내려야 하는 결정의결과가 생각지도 못한 추가 공사를 만들게 되는 것을 실감하고 (내안에 내재된 능력을 맘껏 발휘할 기회를 이 수도회를 통해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함)
5)두 달간의 휴가를 얻어 시골집을 지으면서 가장적은 돈으로 실용적인 집을 짓는 법을 터득하고(출가할 때 예수님과의 거래중의 일부가 성사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
6)강원도 삽존리 공사를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실행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넘치게 됩니다.(이런 소임이 바로 내 성소란 생각에 수도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커짐.)
하느님은 한 인간을 절정에 올려놓고선 이내 계곡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지요.
나름대로 수도회를 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온몸이 부서져라 낮엔 일을 하고 밤엔 잠을 멀리하면서 성체 앞에 앉아 몸부림 쳤는데 그 결과는 40대의 가슴에 부는 찬바람뿐이었습니다.
당면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산속에서 4계절을 보내며
제가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지금까지의 삶엔 하느님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산하게 됩니다.
다시 청주에 있는 척산리 수도원에 홀로 머물게 하면서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다시 하느님께로 가는 일련의 과정을 한편의 드라마로 관람하게 하는 중에 아버지 신부님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7)아버지 신부님이 기도하실 수 있는 조그만한 사랑채 공사를 하게 됨.(한사람의 조그만 자기 포기가 그 여파로 생기는 좋은 결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함)
관상수녀원 공사 책임을 맡기기 위한 하느님의 저에 대한 계획은 긴 시간을 통해서
이 몸을 영적으로 끊임없이 당신을 의식하며 노동할 수 있는 지혜를
건물에 대해선 기술적으로 경험과 지식을 갖게 준비하게 하신 후에.......
청주 관상수녀원의 공사를 시작부터 마침까지 그분의 안배를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청주시 한가운데서 관상수녀님들이 매 시간마다 세상을 위해 당신께 탄원하고, 당신을 찬미하는 기도를 드릴 때 평화롭고 안정적인 찬미의 향기가 오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즘엔 가끔 수녀원 성당에 홀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때면 감실을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움직일 때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그 안에서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제가 받은 하느님의 선물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한 것이란 확신을 제 맘에 간직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제 삶에 체험일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체험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순간까지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나를 어떤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즉 이 시간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성령)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떤 창조된 은총(성령의 작용)을 탄생시켜 하느님 나라에 일조하게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은총의 결과들에 대해서 주목해 봐야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갈라 5:22)
성령의 열매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것은 제법 자라서 큰 나무가 된 것도 있고....
어느 것은 한창 자라고 있는 것도 있고....
어느 것은 아직 움도 트지 못하고 그냥 씨앗으로 머물러 있는가도 있습니다.
이 열매들을 우리각자 자신의 내적상태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중심에서 씨앗이 자라나 얼마나 성장했는지, 평소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표시해 봅시다.
방법은 열 개의 동심원 한 가운데 성령의 씨앗이 있고 그 9종류의 성령의 씨앗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란 모습(내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실행하는)을 1(씨앗)에서~10(충분한 실천)까지의 범위 중에 어느 쯤 인지 표시 합니다.
이 모든 열매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다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아무도 동그란 모양으로 표시되지 못함).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제게 어느 한 가지 씨앗만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고 나머진 그냥 씨앗으로 남아있게 하진 안했다고 봅니다(인내를 8정도 실천하고 산다면 사랑도 8정도 실천할 능력이 있는데 사실은 5정도 실천하고 있다는 말임).
한 가지 성령의 열매가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이 내게 있다면 다른 열매도 똑같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이 제게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모든 열매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다보면 동그랗게 표시되기보단 찌그러진 모습입니다.
못생긴 원을 바라보면서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성령의 씨앗을 확인합니다.
이 씨앗아자라서 꽃이피고 열매를 맺으면 50배 100배로 불어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
내 기쁨이...
내 평화가...
내 인내가 누구에게 평화를 줍니까?
내 친절함이 거부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내 선의가 오해를 받을 때 어찌 반응합니까?
내 성실함이...
내 온유와 절제가 내 주변에 번져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내 일상의 성령의 열매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 하나 하나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정말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고 난 단지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단 사실을 인정하면서 평화가 잔잔히 내 온몸에 번지는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신 성모님의 맘이 우리들의 맘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작은 우주인 이 몸이 성령의 열매가 자라는 토양이란 사실을 인정한다면,
작은 우주가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엔 하느님이 아니계신 곳이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충만된 세상에 머무는 우리네 일상은 이웃에겐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요.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성령의 열매는 나와 이웃이 더불어 공유하는 하느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 할 때 예수님의 탈란트 비유가 새롭게 이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