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 골퍼의 순기능과 방식
유명 골프 잡지 <골프다이제스트>가 2000년 세계 각국의 골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는 눈길을 끌 만하다. ‘친구들과 라운드할 때 적은 돈이라도 내기를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한국에서는 78%에 달했지만 일본에서는 59%, 미국 42%,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은 6∼7%에 그쳤다. 좋게 말하면 한국인 특유의 ‘승부욕’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한국 사람들은 내기 자체를 좋아한다. 고스톱 게임이 있는 게임 포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한때 해외여행 중 외국 공항에서도 화투판을 벌이던 것이 한국 사람들이다. 하지만 국내 골퍼들의 속내에는 내기골프는 포기하기 어려운 불문율이다. 갓 골프에 입문한 초심자든 노회한 싱글골퍼든 불문가지다.
국내 골퍼들의 그런 성향을 보여 주는 통계는 얼마든지 있다. 에이스회원권거래소가 자사 인터넷 회원 4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내기골프를 ‘아예 안 한다’는 회원은 1%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매번 한다’는 응답자가 25%, 9차례 17%, 8차례 18%, 7차례 17% 등으로 5차례 이상이 전체의 88%를 차지했다. 내기골프로 딴 돈의 용처에 대해서는 ‘캐디 피에 보탠다’(47%)는 응답에 이어 ‘식사나 술을 산다’(34%), ‘돌려준다’(15%)는 응답이 뒤를 따랐고 ‘주머니에 챙긴다’는 답은 3%에 그쳤다. 우선 대부분의 골퍼에 해당하는 내기골프의 순기능부터 들어 보자.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올림픽CC 사장을 지낸 K씨. 50대 중반의 그는 아들을 현역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 골퍼로 키웠는데, 어릴 때부터 함께 라운딩하면서도 “일부러 내기를 붙여 승부근성을 키웠다”고 말할 정도다. “아들은 타수에서 아버지에게 밀리면 한 달 용돈이 줄어드는 까닭에 기를 쓰고 퍼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지인들과 라운딩 할 때도 똑같은 방법을 쓴다. 골프는 실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스피릿 80%’의 게임이어서 동반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죽을 쑤면 스코어가 하향 평준화되기 일쑤다. 이러한 느슨한 라운딩을 막아 주는 데 내기골프만 한 ‘명약’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는 보통 1만 원짜리 스트로크를 즐겨 치는데, 돈을 따면 캐디피나 식사비로 지불하거나 기름 값으로 멤버들에게 돌려주지만 2만 원은 꼭 남겨 챙겨 온단다.
“골프 하느라 집을 많이 비우니 아내에게 늘 미안하거든요. 골프 끝나고 저녁에 자장면 한 그릇 함께 먹고 영화 한 편 보는 여유가 있어요. 1년에 스무 번 정도는 영화 구경을 해요. 아내도 기대감 때문에 가방을 싸 주기도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골퍼들의 최종 목표는 ‘굿 스코어’다. 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자연을 벗삼아 친구들과 한담을 즐기는 것도 즐겁지만 스코어를 쉽게 양보할 바보는 없다.
악착같은 부성애로 박세리를 LPGA 최고 골퍼로 키워 낸 박준철 씨도 어릴 때부터 딸에게 일부러 내기골프를 시켰다. 내기 상대들은 주로 아버지 친구들로, 담력과 집중력을 키워 주려는 의도였다.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엄청난 돈이 걸린 프로 게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배짱을 길러 주기 위해서였다.
박세리에 이어 LPGA에서 맹활약 중인 많은 골퍼에게 어린 시절 내기골프 경험은 공통분모에 가깝다. 골프 애호가로 소문난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도 내기골프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회장은 당시 고위층 인사들과 1주일에 꼭 한 차례 이상 ‘수요회’라는 모임을 가졌는데, 필드에 나설 때마다 내기를 즐겨했다. 타당 1,000원짜리 내기골프로, 라운드 후 스코어 카드를 보며 타수를 정산하는 식이었다. 골프의 묘미를 모르는 이로서는 3,000원을 딴 뒤 아이처럼 즐거워했다는 대기업 총수의 미소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이 회장의 내기골프에 대한 지론은 “대충 적당히 하는 골프가 아닌 플레이의 묘미를 돋우면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 골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기골프의 순기능을 말한 것이다.
내기골프 어떤 것이 있나?
가장 흔한 내기골프 방식은 ‘스트로크’와 ‘스킨스’ 게임이다. 그 외에 전통적인 내기 방식과 변형된 룰이 적용되는 내기 방식을 모았다.
◇매치 플레이= 골프 경기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590년간 계속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방식의 내기골프 방식. 홀당 일정한 내기 금액을 걸어 놓고 해당 홀에서 가장 잘 친 골퍼가 상금을 가져가는 게임. 애버리지 스코어가 비슷하지 않을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전체 홀을 통틀어 가장 많은 홀을 진 사람이 식사를, 두 번째 많이 진 사람이 캐디피를, 세 번째 많이 진 사람이 카트피를 내기도 한다.
◇어니스트 존= ‘정직한 사나이 존’이라는 뜻이다. 친선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날의 목표 스코어를 저마다 신고한다. 90타를 신고한 이가 ‘95’로 마쳤다면 5타 초과로 1,000원×5=5,000원의 벌금을 낸다. 하지만 같은 골퍼가 거꾸로 핸디를 속이고 ‘95’로 신고했다 ‘88’을 쳤다면 거꾸로 신고한 내역의 2배의 벌금을 내게 돼 2,000원×7=1만4,000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정직한 ‘자진납세’가 아니라면 더 큰 손해를 당할 수 있다. 벌금은 신고한 타수로 경기를 마친 사람에게 주고, 나머지는 캐디피나 식사비로 지불해도 된다.
◇낫소= 전통적인 내기골프 방식 중 하나. 18개 홀을 전반, 후반, 합계 셋으로 구분해 승패를 겨루는 방식이다. 스트로크나 홀 매치에서 모두 적용 가능하다. 물론 언더 핸디캡으로 겨룬다. 매 홀에서의 스코어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전반에서 잘못했더라도 후반과 합계에서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전반, 후반, 합계 각각에 볼 하나를 걸면 ‘원 볼 낫소’가 된다. 금액은 500원이나 1,000원 정도가 좋다. 전반과 후반을 500원, 합계를 1,000원으로 걸면 ‘551열차’라고 한다.
◇라스베가스= 내기골프에서 가장 도박성이 높다. 크게 잃기도 하고, 크게 따기도 한다. 두 사람씩 편을 갈라 벌이는 플레이다. 한 홀에서 A=5, B=6, C=4, D=6의 결과일 때 라스베가스의 계산 방법은 두 사람 중에서 타수가 적은 쪽을 10단위 숫자, 타수가 많은 쪽을 1단위 숫자로 계산한다. 결국 AB 짝은 A=5, B=6이니 56이 되고, CD 짝은 C=4, D=6이니 46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한 홀에서 10타의 차이가 난다. A가 버디3, B=6, C=6, D=8이라면 36대 86이 돼 50점을 실점하게 된다. 타수당 액수가 크면 ‘대형사고’가 날 가능성이 커 액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
◇하이로= 라스베가스를 약간 변형한 내기 방식이다. 직전 홀의 타수에 따라 2개 조를 만든 뒤 해당 홀에서 2명의 점수를 합산해 이긴 조가 상금을 차지하는 라스베가스처럼 직전 홀의 타수로 조를 나누는 방식은 같지만, 2명의 타수를 합산해 이긴 조에게 상금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한 조에서 2명 중 잘 친 사람의 점수를 10자리에 놓고 못 친 사람을 1자리에 놓아 그 차이만큼 점수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파5홀의 경우 오너팀이 버디와 파를 하면 45점, 다른 팀이 둘 다 파를 했다면 55점으로 10점 차이가 난다. 이때 점당 5,000원을 걸었다면 5만 원씩을 건네야 한다.
◇후세인=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이름을 빌린 게임으로 후세인으로 지명된 1명의 골퍼와 나머지 3명의 골퍼가 대결하는 것. 매 홀 2위의 스코어를 기록한 골퍼를 후세인으로 정한 뒤 후세인의 스코어를 3으로 곱한 숫자와 나머지 3명 골퍼의 스코어를 합친 숫자를 비교해 금액을 정하고, 후세인이 잘 쳤으면 후세인이 돈을 먹고 못 쳤으면 3명에게 돈을 준다. 다시 말해 파4 홀에서 후세인이 파를 했을 경우 3으로 곱하면 12점이 된다. 또 나머지 3명 중 2명이 파, 1명이 보기 플레이를 하면 3명의 합친 점수가 12점이 돼 후세인이 이기게 된다.
◇울프(WOLF)=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즐겼다고 해서 일명 ‘그레그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이 게임은 첫 홀에서 정해진 순번대로 홀마다 스코어에 관계없이 오너가 울프가 된다. 홀마다 티샷 할 때 울프는 가장 잘 친 사람을 한 사람 골라 자기편을 삼고 나머지 두 사람이 반대편이 되는 매치 플레이 방식이다. 그러나 마지막 타자의 티샷은 볼 수 없어 주의해야 한다. 파5홀에서는 세컨드 샷을 보고 자기편을 고른다. 오너 편이 파와 보기를 하고 반대편이 모두 보기를 했다고 치자. 분배 방식은 평균타수(1타)로 하거나 하이로(하이는 이기고 로는 비김) 방식을 택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룰 하나. 파 3홀에서 울프는 자기가 친 샷이 핀에 가까우면 ‘독립선언’을 할 수 있다. ‘외로운 늑대’가 되어 후세인처럼 1대3의 대결이 되지만 승률은 훨씬 높아진다.
◇조폭골프= 스킨스 방식에서 파생된 내기골프로, 보기를 하면 이전의 홀에서 딴 돈의 절반을, 더블 보기를 하면 딴 돈의 전부를 승자에게 모두 빼앗기는 게임이다. ‘어깨’들이 골프를 할 때 마지막 18번 홀에서 일부러 더블보기를 해 보스가 판돈을 독식하도록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스트로크 방식에서 나온 조폭골프도 있다. 타당 5,000원이라고 할 때 네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트리플 보기가 나오면 다음 홀은 자동 배판이다. 다음 홀에서 다시 트리플 보기가 나오면 4배판이 된다. 트리플 보기를 한 사람은 그동안 딴 돈을 모두 내놓아 다음 홀의 승자가 가져간다. 반대로 버디를 잡아도 딴 돈을 토해 내야 한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버디를 하면 서로 딴 돈을 맞바꿔야 한다.
◇기타= 다른 내기 방식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 내기 방식이다. ·딩댕동 : 한 홀에서 3가지 내기를 할 수 있다. ‘딩’은 티샷을 가장 멀리 한 사람이, ‘댕’은 가장 먼저 그린에 공을 올린 사람이, ‘동’은 맨 먼저 홀컵에 공을 넣은 사람이 각각 이기는 게임으로, 이 같은 내기를 홀마다 되풀이한다. ·OECD : 스킨스 게임에서 애초 상금으로 내놓은 본전을 다 챙긴 순간 OECD에 가입하게 해 그 뒤부터는 오비(O)·벙커(E)·스리퍼트(C)·더블보기(D)를 범할 때마다 그동안 챙겼던 스킨을 토해 내게 하는 방식이다.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상금을 독식하기 쉬운 스킨스의 결점을 보완하는 데 그만이다.
하지만 내기 골프에도 매너가 있다. 내기골프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 한도의 금액을 정하되 스트로크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삼가는 게 좋고 특히 지고 있는 쪽이 내기 중단을 선언하면 이를 수용하는 게 매너다. 그리고 한국인 정서상 초청 골프에서 초청자가 싹쓸이해 가져가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어 경기가 끝난 후 상대방 기분을 봐 가며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도 좋다. 지나치게 자기에게 유리한 룰을 정해 상대방을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도 신사적인 행위가 아니다. 돈을 잃는다고 해서 입을 꾹 닫고 있거나 괜히 캐디에게 짜증과 시비를 거는 것도 매너에 어긋난다. |
출처: Golf & Life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