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민족대회 일정만 갖고도 강행군이라고 모두 아우성이었는데 그렇게 밤을 밝힐 기력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북의 문인들은 남쪽 작가들을 대하는 심정으로 우리 일행을 대했다.
시인들은 감흥이 나면 즉흥시를 낭독했다. 수많은 노래를 함께 불렀는데 남쪽이 고향인 오영재, 남대현과는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더 많았다. 동요 <따오기>부터 시작하여 흘러간 대중가요인 <울고 넘는 고모령>까지…. <조선은 하나다>, <동지의 노래> 등 북의 노래를 부를 땐 미국 동포사회에서 하는 대로 가사를 좀 바꿨더니 “원작자의 의도가 살지 못한다”며 반대하는 작가도 있었으나 “시대가 달라졌으니 가사도 따라가야 한다”며 동감하는 작가도 있었다.
민문예협 일행은 오영재, 남대현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생각하다가 남쪽이 국민하교 졸업식에서 하던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까지 끄집어냈는데 열 여섯 살 때 북으로 넘어온 오영재는 2절, 3절 가사까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냈다.
이 졸업식 노래는 우리가 떠나올 때까지 남쪽 출신 문인들과 가장 즐겁게 여러번 부른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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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 잔치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셨는데, 목이 쉬도록 노래를 많이 부르고, 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이는 오영재였다.
그는 <반달>을 부르면서도 울었다. 어릴 적 고향집에서 동생들과 부르던 노래라고 했다. 혹 고향 소식을 들을까 하여 <통일예술>에 시 대신 회상기를 냈다는 오영재는 범밈족대회에 참가하는 해외동포단에 혹시 가족이 있을까 해서 그 명단을 열심히 들춰 봤지만 오씨 성을 가진 이조차 없었다고 서운해했다. 사흘에 한 번은 어머니 곽앵순 씨의 꿈을 꾼다는 그는 광주 사범 출신인 오유길 씨의 차남으로 장성에서 태어나 오씨네 마을인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민군으로 나갔다가 “가난한 고향 집에 돌아가서 별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북으로 왔을 뿐, 당시 나에겐 아무 이념도 없었다.”는 그는 누가 봐도 꾸밈없고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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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주에게서 “민문협은 남쪽과 북쪽 어느 쪽도 기울어지지 않는 중립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친북입니까?”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의 옆에서 필자는 웬지 모를 죄의식까지 느낀 적이 있다.
<통일예술>에 북쪽 작품이 남족 작품보다 더 많이 실렸으니 오해받으면 어떡하냐며 걱정하던 다른 문인의 말을 들을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친북이니, 친남이니, 중립이니 하는 분단적인 용어들이 사라져야 통일이 가능한데 우리는 아직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잇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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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떠나기 전날인 21일 오영재 집에서 환송회가 열렸다.
평양 광북동 거리에는 지난해에 완공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섰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는 특별히 눈에 띄었다.
현기증니 날 정도로 높고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하게 지은 다른 대부분의 아파트와는 달리 4,5층 정도의 높이에 입체적으로 아담하게 지어진 아파트였다. 예술인, 학자,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곳으로 최영화의 아파트도 여기에 있었다.
오영재와 이웃사촌인 최영화가 나서서 자기 집처럼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아래층에 거실, 부엌 방 한 개, 화장실이 딸린 목욕탕이 있고 위층에 방 네 개가 있는 널찍한 아파트였다. 거실에는 텔레비전, 대형 녹음기가 놓여 있고, 동양화 한 폭이 벽에 걸려 있는 이외에 거추장스러운 가구들은 눈에 띄지 않아 무척 정갈해 보였다.
우리 일행은 “평양의 호화주택에서 환송회를 받게 되어 무척 고맙다.”고 농담을 했다.
오영재는 손님 대접을 한다고 아래층 베란다에 싱싱하게 열려 있는 오이와 풋고추를 몽땅 따다가 명태찜, 계란찜, 송어 구이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 만찬상에 고추장과 함께 올려 놓았다.
2층 서재에 붙은 베란다에서는 봉숭아 몇 송이가 막 피어나고 있었는데 이 꽃들도 수난을 당했다. 세 살짜리 딸 아이가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면 무척 좋아할 거라는 필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꽃을 죄다 따서 내 손에 담아주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 잔치에서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우리의 소원> 등 통일 염원의 노래를 부를 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손을 잡았다. 서울에서 선배 예술인, 연극패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옛 시절이 생각났다. 평양에서 만난 북의 문인들과 그들의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45년간의 장벽은 일주일간의 만남, 아니 단 하루만의 만남으로도 허물어질 수 있다고 감히 외치고 싶었다. 헤어질 무렵에는 빗속에 서서 모두 울었다. 남과 북, 북과 남은 아직도 멀리 서로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
민문협 회장 김영희씨의 한겨레신문에기고한 글이 1990년 9월 4일(화요일) 신문 3,6면에 실렸다. 그녀는 민문예협이 발족될 때 문화 예술부문의 교류를 협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한겨레신문에 자유기고가로 이 글을 기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