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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키워드로 쓴 복음 (01) 사랑 받음(Loved)[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사랑 받음
“그래, 주일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애야?” 우리가 교회에서 집으로 차를 몰아 오면서 나의 여섯 살 난 딸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배웠어요.”
“그걸 다 아니? 좀 더 이야기 해 보렴 – 네가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너를 더 많이 사랑하실까?”
뒷좌석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 딸은 질문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파악하고는, “에~, 그럼요?”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착할 때도 사랑하시고, 네가 장난꾸러기 일지라도 사랑하신단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항상 사랑하신단다. 아빠가 널 사랑하듯이 말이야.” 나는 미소를 머금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나도 내 아이들의 행실에 상관 없이 그들을 사랑한다. 만약 내 작은 딸이 성인이 되어 십계명을 모두 어긴다 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나의 귀여운 딸일 것이고, 나는 그 귀여운 애를 사랑할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처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은 분노조절문제an anger management problem를 통하여 걸러진다고 배워왔다. “맞아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분노를 발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늘 조심하십시오.” 혼합되지 않은 복음에 관한 설교를 듣기가 희귀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 중 갈고리와 자격요건이 달리지 않는 것을 듣기도 드문 일이다. 그것은 조건이 달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태산 보다 더 큰 사랑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화가 나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산이 흔들리고 언덕이 무너져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사 54:10).
당신은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성경 구절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의 분노는 잠깐이요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2]는 구절을 말하는가? 나도 그 구절을 좋아한다. 나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내 딸을 괴롭게 하는 질병에 대해 화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신의 죄를 2,000년 전에 단번에 모두 처리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죄를 전혀 알지 못하신 분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죄가 그분 안에서 완전히 정죄를 받게 하기 위함이다(롬 8:3[3]). 세상의 죄를 자신의 몸에 모두 짊어지심으로써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고 그 잔을 완전히 비우셨다. 주님의 은혜는 당신의 죄보다 훨씬 크다.
십자가는 진노가 다 소멸되었고 사랑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십자가는 “내 자녀들을 보내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주님께 받은 이 은혜에 대해 우리가 기여한 공로는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의 사랑을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렸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다가오셨을 때, 우리는 그 분을 죽였다. 그러나 우리의 진실한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과를 지불하셨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거나 회개하거나 새 출발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오물 가운데 있을 때, 다가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셨다.
그런 끈질긴 사랑을 받기 위한 자격 요건을 당신이 어떻게 갖출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당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거기에는 하지만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지만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하여 우리의 마음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다.
땅에서 인간의 사랑은 사랑스러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로 우러나는 것이며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심은 주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성품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시므로, 주님께서 하시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분노도 주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왜 그 일을 하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요,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동인(動因, motive)이다.
변함없는 사랑
인간의 사랑은 타락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오염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이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렘 31:3-개역개정)
내가 너를 사랑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치지 않고 너를 사랑할 것이다.
사랑을 기대하라, 사랑을 기대하라, 더 많은 사랑을 기대하라!(렘 31:3, 메시지 성경)
인간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 13:7). 주님의 사랑은 결코 지치지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인간의 사랑은 쉽게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늘 변함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를 떠받치는 반석이요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저 태양을 천 개 모을 정도의 강렬함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할지라도 지나치지 않는다. 밤 하늘에 별들을 달아두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주만큼 광대하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이 존재하며, 당신이 죄인이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영원히 그 사랑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이 말이 당신을 감동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의 마음은 햇살로 가득해지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조금씩밖에 받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은 켄타우루스 자리 알파별[4]Alpha Centauri의 날씨와 같다.”그래요, 그 사랑은 놀랍다는 것을 알아요. 저도 알고 있다구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신하들에 대한 왕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즉, 공적이고 거리감이 있고 냉랭한 사랑이다. 욥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무지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 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욥 36:16, 개역개정).
아, 욥이여, 당신은 알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부터 구하려고 애쓰시는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려고 축복의 잔칫상으로 당신을 초청하시는지 당신은 아는가?(욥 36:16, 메시지 성경)
욥은 경건하고 고상한 사람이었으나 인과응보의 두려움에 매인 신자였다. 그는 영적인 보험을 위해 자주 희생 제사를 드렸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가족의 나쁜 행실이 상쇄되기를 바랬다. 일이 잘 될 때 욥은 자신의 선행이 보상받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일이 잘 안될 때 욥은 당황하여,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욥은 자신과 자신의 선함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였다. 욥과 그의 제사가 미신적 종교의 상징이라면 그의 친구 엘리후는 복음전도자에 해당된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욥 37:14). 별들을 보라. 천둥소리를 들어보라. 숲을 걸으며 높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라. 우주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너를 돌보심을 선포하지 않는가?
우리들이 선 갈보리의 자리에서 보면 십자가보다 더 놀라운 경이로움은 없다. 희생제사와 헌물을 강조하는 욥의 종교는, 항상 이것을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모든 시도를 일격에 부서뜨린다. 십자가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너를 돌보신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을 치료한다.
오늘날의 욥에게 엘리후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만히 서서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 보라. 너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너를 사랑하셔서 문제로부터 안전으로, 기근으로부터 그의 풍성한 잔치자리로 데려 오고 싶어하시는지 모르겠느냐? 이것은 너희 희생이나 헌신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은총에 대한 복음이다.
몸을 수그리는 사랑
은혜의 복음이 나타날 때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이 “최신 유행”, 이 “새로운 가르침”이 사람들을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위험한 곳이라면, 가서 머무르기에 더 나은 곳은 없다. 왜냐하면 은혜가 당신을 인도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께서 몸을 수그리는 사랑을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의 복음은 진실로 주님의 사랑의 복음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편에서 보는 것이요 은혜는 내려오는 사랑이다.
도움이 되도록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내 자녀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자. 내가 즐기는 것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의 사랑을 알고 싶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 내게로 올라오거나 내가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니까 내게 주도권이 있다. 내가 내려간다. 내가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과 만나기로 선택한다: 방 바닥에 내려가서 그들과 씨름 놀이를 하고; 나 혼자라면 결코 읽지 않을 이야기들을 읽어주며; 놀아주고 간지럼 태우고 세발 자전거를 밀어주는 등 지칠 때까지 이런 일을 한다. 이것이 행동하는 사랑이요 부모라면 그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다. 주께서는 왕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사랑하신다. 이것이 은혜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계시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는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하고 건강하고 복 받으며, 완전한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온 비유 중 최고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당신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같이 계시하신다. 그 아버지는 당신이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당신을 안고 입맞추신다. 당신은 미리 준비한 대사를 가지고 와서 좋은 의도로 종들 중의 하나로서 섬기겠다고 마음 먹지만, 주님은 당신의 그런 생각들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으시다. 주님은 그저 당신을 원하신다.
사랑은 은혜와 같은 것이다. 당신이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당신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말은 당신이 만약 은혜를 받아들일 짬이 없을 정도로 당신의 희생과 헌물을 주님께 바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면, 당신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시간을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은혜를 거절하면 당신은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행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행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 대신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당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요, 대신에 주님으로 인해 당신이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도록 훌라후프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은 훈련을 결코 시키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이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는 분도 아니고, 당신이 실패한다고 해서 덜 사랑하는 분도 아니다. 당신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든지 한 사람도 인도하지 않았든지, 주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죄 가운데 죽은 자였을 때도 사랑하셨고, 당신이 구원 받았을 때도 그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5]
은혜의 복음은 최신의 교훈이나 한물간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영원하다.
율법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욥에 대해서는 그쯤 하기로 하고, 모세에 대해서 말해보자. 옛 언약 아래서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 까닭은 그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율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법으로 정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모두 명령이 된다. 율법은 사랑 없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주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하는 이가 필요함을 알려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를 맺고 싶어하셨지만, 우리는 규칙을 더 좋아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귀하게 아끼는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보인 태도는, “우리가 할 일을 말씀만 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행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종교라고 하는 명확한 규칙을 관계라고 하는 모호한 자유보다 더 선호하는 까닭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규칙을 구하고 있으며, 그 규칙들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안정감과 정체성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정신은 이런 두려움을 이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걸 하라 그리고 저것은 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실 거야.” 이런 메시지가 팔리는 상품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네 가지 열쇠,” 또는 “친밀함에 이르는 일곱 단계”들이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영적인 아이들을 학대하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이미 우리의 소유가 된 사랑에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다.
규칙을 선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안전하게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시다.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규칙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무와 책무를 전파하였고, 한 영혼의 개종자를 얻기 위해 땅과 바다를 넘어 여행하는 열정적인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요 5:42)”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사랑에 관해 가르치는 거짓말에 우리가 결코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이유다. 종교가 가지고 있지 않는 바를 종교는 당신에게 줄 수 없다.
이스라엘이 관계보다 규칙을 선호한 점은 역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하나님께 사랑 받고 구원 받고 복을 받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옛 언약은 2,000년 전에 창 밖으로 멀리 가버렸지만, 그들은 그 소식을 적은 메모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쬐는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해가 되려고 하는 달과 같은 사람들이다.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교회가 생각난다. 에베소 교인들은 믿음도 있었고 수고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했다(엡 3:14~19). 그 차이를 알겠는가? 우리의 사랑은 위로 향하여 올라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먼저 주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주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동사이기 전에 명사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성공을 위해 그분이 어떻게 헌신하셨는지를 알게 되면, 당신은 확신에 거하게 된다. 당신의 믿음은 힘을 얻고, 당신은 주님의 사랑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기 시작하게 된다. 인생은 초자연적인 모험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잃으면 믿음은 희미해져 간다. 당신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범인mere man이 된다(고전 3:4). 그렇게 되면 사랑이 필요한 모든 일들 곧, 결혼생활, 자녀 양육, 사람들과의 노동은 의미 없는 일과가 된다.
에베소 교회에도 이런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교회의 일에 너무 바빠져서 자신들이 처음에 받은 사랑을 떠나 표류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바로잡아 주셨다(계 2:1~7). 우리의 첫 사랑은 누군가? 주님이시다! 주님이 빛이시다. 주님이 모든 것의 원천이시다. 주님이 모든 그늘 위에 빛나는 태양이시다.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행위로 유명한 교회였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기본적으로, “너희 하는 일을 멈추라. 너희가 어디로부터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처음에 하던 행실을 하라”고 하셨다. 에베소교회가 잃은 처음 행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교회를 운영하면서 처음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우리를 바쁘게 할 프로그램도 없고, 운영해야 할 팀도 없고, 훈련해야 할 지도자들도 없었고, 싸울 일도 관리할 홈페이지도, 실행할 비전도 없었다. 우리는 그 여유로운 시간에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사랑 받으며 살았고,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서로를 사랑했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방법을 찾았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이해는 약간 뒤섞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법을 알고 있었다. 후에 교회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우리의 주의를 딴 곳으로 빼앗기는 시점에 이를 정도로 바빠졌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는 마르다보다는 마리아에 더 가까웠다.
마리아의 선택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열쇠다. 바쁜 마르다와는 달리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의 일을 선택했다. 그 일은 은혜의 다른 모습인 사랑을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말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알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잘 모른다. 마리아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스한 사랑의 가정에서 양육된 자녀들이 인생에서 더 성공적인 경향이 있는 것처럼, 마리아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마 그녀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양육했거나 교회를 세웠거나 7년 임기의 시장이 되었으리라. 나는 잘 모르지만 성공의 확률은 높았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녀의 거실로 들어오셨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시며 그녀를 사랑하셨다. 어떻게 그녀가 실패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 받는 자녀들처럼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엡 5:1)
마리아처럼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한 두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성공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했다. “내가 산을 움직인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렇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거둬들여야 할 추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함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우리의 아빠의 일에 동참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
아시아에 살면서 나는 가난한 선교사들인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성공적인 사역을 한 그들 중의 많은 분들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내 자산이 거의 바닥났을 때쯤, 나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절망 가운데 나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기를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나의 영혼에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흘러 넘치게 하셨습니다. 나는 주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들었고, 그 때 즉시에 모든 것이 변했어요. 갑자기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납부하지 않은 고지서도 대수롭지 않았고요. 대장간의 모루 쇠 같이 내 머리를 짓누르던 문제들은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심오한 계시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니! 내가 어떻게 실패하겠습니까?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아버지께서 내 편이심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불확실성의 파도 위를 춤추게 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환경의 풍랑을 비웃게 한다.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 사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어느 것을 선택할지라도 승리할 것을 알고 있는 승자의 미소를 짓게 한다. 그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 지라도 말이다. 자연계에서는 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누가 자연적인 삶 속에서 살고 싶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더 나은 세계를 훨씬 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구하시는가? 큰 바다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마시게 하심으로써, 또한 주님의 은혜라는 햇살 속으로 우리를 이끄심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원수 앞에서 우리에게 잔칫상을 배설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문제를 다루실 때 우리에게 주님과 주님의 사랑에 대한 더 위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의 몫은 우리의 환경이라는 열등한 현실을 계속해서 조종하기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주님의 사랑이라는 더 높은 현실 속에서 걸을 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선택이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만든다.
마리아의 선택과 바울의 선택과 하나님의 성공적인 모든 자녀들의 선택은, 사랑 받으며 살기로 한 선택이다. 그 선택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여, 너는 나를 압제하지 못한다. 너의 당근이나 채찍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달리며 주님의 기쁨을 느낄 때, 아이여, 나는 뛰겠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계시는 변화를 가져온다transformational. 그것은 죽은 결혼을 다시 살리며, 깨진 가정을 치유하며, 당신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 아버지의 일이니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문제 될 것은 없으며 나는 이 사역에 동참하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감격한다는 생각으로 매진할 수 있게 추진력을 줄 것이다.
사랑은 이 책의 첫 장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삶이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삶보다 더 낫다. 내 삶과 주님의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언제고 주님의 사랑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만 우리는 진실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큰 진리와 퍼들글럼의 지혜
근래에 나는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내 아이들이 나에게서 배웠으면 하는 가장 큰 교훈이 무엇일까?”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삶의 가장 큰 진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신의 가장 큰 진리는 다음의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다: 내 삶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 당신의 가장 큰 진리는 당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진리다. 그것은 당신을 서 있도록 붙들어 주는 등뼈backbone와 같은 것이며 배의 진행 방향을 잡아주는 용골keel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상상력에 불꽃을 튀겨주는 것이며, 당신의 엔진을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과 같은 것이며, 당신이 잠 들 수 있는 평안이다.
아마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마슈 위글 종족인 퍼들글럼Puddleglum the Marsh-wiggle을 생각해 보라. 퍼들글럼은 나니아 연대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의 하나다. 그는 어둡고 우울하며 유명한 염세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폭풍 가운데서는 잘 움직인다. 만약 당신이 C.S 루이스의 은 의자Silver Chair를 읽었다면, 내가 무엇에 관해 말하는 지 알 것이다.
그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 퍼들글럼과 그의 친구들인 질과 유스터스가 언더랜드라는 어둡고 지하동굴에 있는 덫에 갇히게 된 것을 깨달았다. 사악한 마녀는 그들이 찾고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향료와 음악의 도움을 받아 그는 거짓말로 된 거미줄을 짜면서, 나니아는 단지 가상현실의 세계에만 존재하며 그의 왕인 아슬란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믿게 하려고 마녀는 애썼다. 질과 유스터스는 그 마녀의 영향에 빠져들어갔지만 꾸준한 퍼들글럼은 대담한 선언과 함께 마법의 주문을 깨버린다:
우리가 꿈을 꾼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봐,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해 봐… 당신의 나라의 이 어두운 구덩이가 우리가 아는 모든 세계라고 생각해 봐. 자, 그건 꽤 초라해 보이는군… 그것이 이제 내가 게임 세상 곁에 서려는 이유야. 우리를 이끌어줄 아슬란이 없을 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아슬란 편을 들 거야. 나는 나니아가 더 이상 없을지라도 나니아의 시민처럼 살아갈 거야.[6]
퍼들글럼의 가장 큰 진리는 아슬란과 나니아가 자기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확신을 따라 행동하면서, 퍼들글럼은 마녀의 거짓말을 거부하고 마녀의 사악한 냄새를 풍기는 불을 밟아버리고서 곤경에서 벗어났다.
퍼들글럼이 매우 총명하게도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당신의 가장 큰 진리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희미해지지 않는 빛이다. 그것은 당신이 있는 곳과 당신이 있어야 할 곳 사이를 연결하는 무너지지 않는 다리다. 만약 퍼들글럼이 자신의 가장 큰 진리에 대해 그렇게 분명한 확신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잃었으리라. 그와 그의 친구들은 지하 세계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장 큰 진리는 무엇인가? 당신의 중심을 붙드는 확신은 무엇인가?
나는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큰 진리로 붙들고 사는 몇몇 확신들을 만나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순종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태도라고 한다: “핵심은 선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중심을 아시니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나님께 당신의 최고의 것을 드리세요; 주님은 이미 당신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또는 열매를 중요시한다: “당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증명하십시오.”
이러한 신념들과 관련하여 내가 가진 어려움은 바로 그것들이 나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순종, 나의 태도, 나의 희생, 그리고 나의 열매 맺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퍼들글럼처럼 나의 믿음은 다른 것에 있다. 나의 등뼈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의 가장 큰 진린가? 그것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이것은 금방 나를 흥분시킨다.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내가 경험하는 모든 사랑은 변하는 사랑failing love이다. 그 사랑은 깨어지고 부서진다. 그리고 실망시키고 마침내는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그 사랑을 막지 못한다. 왜 내가 부활을 믿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7] 영원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끝까지 당신을 사랑하시든지 아니면 그분은 거짓말쟁이시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지치거나 죽지 않는다. 암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울증이나 AIDS, 또는 알코올 중독 그 어느 것도 못 끊는다. 마귀나 그의 모든 귀신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당신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죽음도 생명도 끊을 수 없다. 당신과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거절뿐이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신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그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이야기의 처음이나 끝에나 동일했다. 그의 사랑은 그림자도 없고 변함도 없다. 그러나 탕자가 돌이켜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확신하기에는,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매일 안아주고 싶었으나, 그 아들은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형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장 큰 진리는 자신의 순종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수년 동안 제가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의 명에 불순종한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동생이 반역자라면, 형은 올바른 삶을 사는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는 못했다. 어느 아들도 아버지로 하여금 억누를 수 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싶어하는 사랑을 자신들에게 할 수 있도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만 당신이 그 사랑을 당신의 마음으로 알기 전까지는 당신을 바꿀 수 없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자유케 된다. 당신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실 수 있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람들 위에 임하셨던 것처럼 당신 위에 임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오순절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의 만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력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과의 만남이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 성령은 사랑의 영이었다.[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죄인을 성자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자로 바꾼다. 바울을 보라. 그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처럼, 바울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 그 사랑의 체험이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갈 2:20)”에 관하여 글을 쓰게 하였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의 사랑을 아는가? 당신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당신은 저 멀리 계시는 왕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랑이 가득한 아빠를 생각하는가? 당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할 때, 찌뿌린 모습이 생각나는가 아니면 웃고 계시는 모습이 생각나는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시작할 때 나 자신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나는 복음에 충실할 것이며 오직 복음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복음을 말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춰 설교자 흉내를 좀 내야 하겠다. 내가 당신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아는가? 당신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잘 나갈 때나 형편이 좋지 않을 때나, 당신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당신이 더 부자가 되든 더 가난하게 되든, 건강하든 아프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며, 죽음도 당신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가?
아마 당신은 욥을 본받아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었거나, 모세를 본받아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얻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후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너희가 하는 일을 멈추라. 당신의 희생과 선행을 의지하는 것을 멈추고, 그리스도와 그의 하신 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맹렬하고 뜨거운 사랑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 바로 당신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라. 그의 사랑은 엄마와 갓난 아이 사이에 있는 사랑보다 더 강하다(사 49:15). 당신은 하나님의 정말 사랑하는 자녀다. 이제 그만 몸부림을 그치고 그의 사랑의 품 안에 안겨라.
사랑의 복음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죄보다 강하며 그 사랑을 얻기 위하여 당신이 할 일은 없다고 선포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는 것뿐이다.
육신적 종교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절의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으로 믿게 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은 당신을 향하여 늘 열려있다고 은혜는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가 나 있으시며 당신을 미워하실 지도 모른다고 종교는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분이 좋으시며 그의 은총은 당신 위에 머물러 있다고 은혜는 선포한다. 당신이 스스로를 정돈하고 깨끗이 한 뒤에라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종교는 말하지만, 그러나 은혜는 외친다, “지금 오라,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한 곳뿐이었으며, 그 장소는 바로 복음 안에 계시되었다. 복음은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간청이 아니다. 복음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열정적인 선포다. 복음 안에 있는 모든 것 - 주의 용서, 용납, 그리고 의로움-은 선하고 진실한 것이다. 왜냐면 당신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항상 당신을 사랑하셨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1] 이 교재는 Paul Ellis가 쓴 The Gospel in Ten Words(KingsPress, 2012)라는 책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2] 사 54:8, 시 30:5
[3]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4]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들의 모임인 프록시마 켄타우리에서 가장 어두운 별.
[5] 설교자들을 위한 팁을 드리자면: 설교자들은 사람들이 진리를 여러 번 들어야만 마침내 그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하라는 면에서 오류를 범한다. 시편 136편의 기자가 보여주는 본보기를 따라 해 보자. 그는 26회씩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주 큰 소리로 울릴 가치가 있는 북소리와 같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므로(엡 3:19)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6] C.S.Lewis, The Silver Chair, Lions, 1953/1980, p. 145.
[7] 렘 31:3, 롬 8:38~39, 고전 13:7~8을 참조.
[8] 롬 5:5, 15:30, 골 1:8, 딤후 1: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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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다면 이 변하지않는 영원한 사랑, 변하지않는 불변의 사랑을 문제는 전하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들어도 이것은 복음이다라고 알 수 있는 복음은 어떤것입니까? 그것은 열심입니까? 또 열심은 율법을 만들덴데.....
아마 우리의 할 일은 균형잡힌 복음의 정신을 잘 아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요, 목회 현실에서 대상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해가며 적용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처절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그 영혼의 쉼을 주어야 할 것이요, 주님의 사랑을 믿고 안일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준엄한 책망으로 주님의 영원불변한 사랑을 드러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더 공부하려는 것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 받고갑니다. 여기서 해를 품은 달이 나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