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이 책은 순천도호부 여수면 학동(1)에서 살다가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2)로 이사하여 살았던 최창호(崔昌昊), 최창민(崔昌旻) 형제가 쌍효자(雙孝子)로서 정려(旌閭)를 받기까지 모든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고문서를 순서대로 번역하여 정리한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로서 유교적 덕목인 충신, 효자, 열녀를 장려하기 위하여 국왕이 정려를 하사하였고, 정려가 내려지면,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벼슬까지도 받을 수 있는 등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효자정려를 받기 위한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책에서 소개하는 것과 비슷한 문서는 매우 많이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쌍효자처럼 최초로 발의한 문서에서 시작하여 정려가 내려지고, 또 그 이후에 그 사실이 수록된 서적은 물론, 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뒷받침하기위해 첨부된 근거 문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헌이 완전하게 망라되어 전해오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남편과 의리를 지키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특히 유교철학이 지배하던 동양사회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국왕에게로 향하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심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오륜(五倫)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효자와 열녀를 찾아내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입구에 정려를 세워서 지나는 사람들이 보고 배우도록 장려하고, 또 그 이름이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는 정려를 세운 사례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매우 깊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활성화되고 체계화 되었으며, 정려의 실물(實物) 또한 전국 곳곳에 대체로 온전한 형태로 잘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는 편이다.
쌍효자는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22세로 최창호는 족보에서 이름이 한호(翰昊)이고 자는 문신(文臣)이며, 최창민은 족보에서 이름이 한민(翰旻)이고 자는 문호(文浩)로, 문종 때 명신 연촌(烟村) 최덕지(3)의 후손이다.
연촌공은 1445년(세종 27) 무렵 남원 부사로 재직하면서 남원도호부 지사방(只沙坊)에 군량미 창고 북창(北倉)을 세웠고, 오수천(獒樹川) 건너 북쪽에 주암촌(4)을 개척하여 장남 최주(崔淍)를 그 마을에서 살도록 함으로 인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하여 왔는데, 연촌공의 증손 암계(巖溪) 최연손(5)은 1480년(성종 11) 생원시 장원 및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연촌공과 함께 주암서원(6)에 배향되었고, 연촌공은 사액서원인 녹동서원(7)에도 배향되었다.
쌍효자의 증조부 최당(崔溏)은 주암촌에서 살다가 1800년 무렵에 순천도호부 소안면(8)으로 이사하였는데, 가정에 화(禍)가 닥쳐서 주암촌을 떠났다는 단편적 기록밖에 없어서 이사를 하게 된 구체적 배경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무렵에 유현산(乳懸山)에 있었던 13세 최종립(9)의 묘소를 임실읍 대곡리 양지촌(陽地村)으로 이장한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1840년(헌종 6) 쌍효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당시 나이가 최창호는 15세, 최창민은 6세에 불과하였으므로 말하자면 고아로서, 이른바 소년가장(少年家長)이 되고 말았다.
쌍효자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여수면 학동(呂水面鶴洞) 창원정씨 가문으로 시집간 누님밖에 없었으므로, 누님이 살고 있는 학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호구단자에 의하면 솔거노비(10) 한 구(11)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살림살이가 심하게 구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창호는 학동에서 사망하였고, 최창민은 1880년(고종 17) 조카들을 데리고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莊峙里)로 이사하였는데, 그보다 앞서 1859년(철종 10) 주암서원에서 간행한 족보 <주암보(舟巖譜)>에 쌍효자의 할아버지 최성선(崔成善)의 묘소가 망덕산(望德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 묘소를 지키기 위하여 장치리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쌍효자 후손은 1970년대 이후까지 그곳을 거점으로 살아 왔으며 마을 뒷산에는 선산(先山)과 함께 쌍효자비(雙孝子碑)가 세워져 있다.
쌍효자의 효행은 학동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정려를 받기위한 활동은 쌍효자가 살았던 순천이 아니고, 남원에서 시작되었으며, 도천장(道薦狀)에 서명한 유생들도 전남지역보다는 전북지역 출신이 월등히 많고, 심지어 남원에서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암계공 교지(敎旨)마저 근거서류로 제공할 정도로 남원 쪽 일가들이 적극적이었다.
쌍효자는 순천에서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였으나, 남원에는 많은 일가들이 양반 가문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남원 일가들 입장에서도 가문에서 정려를 받은 효자가 나온다면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하여 활발하게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쌍효자의 주소가 순천이므로 남원에서 순천으로 통문(通文)을 보내 추천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전라도 주요 지역 유생들이 연명으로 추천하는 이른바 도천장이 만들어져 순천도호부사 결재를 받아 전라도 관찰사에게 올라가므로 이른바 도천효자(道薦孝子)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으나, 당시는 조선 말기로 어수선한 국가적 분위기로 인하여 정려를 받지는 못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쌍효자 형제도 사망하였다.
한편 여수면(呂水面) 학동은 1897년(광무 1) 여수군(麗水郡)이 설치되면서 쌍봉면 시목리(柿木里)가 되었는데, 1902년(광무 6) 여수군에서 만든 읍지(邑誌)에 쌍효자가 도천효자로 수록되었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제국주의 지배하에 들어가므로 인하여 유교적 가치관은 더 이상 장려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당연히 국가에서는 더 이상 정려를 하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말기 유신(儒臣)들이 모여서 모성공회(慕聖公會)라는 단체를 구성한 다음, 조선 말기에 조정으로 올라온 도천장을 심사하여 적정한 수준을 갖춘 경우에는 찬양문(讚揚文)을 만들어 주어서 임금이 내려주던 정려를 대신하도록 하였는데, 그러한 절차를 거쳐서 세워진 정려가 우리나라 여러 곳에 많이 전해오고 있으며, 쌍효자 형제의 정려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
1932년 신현태(12)는 서울에서 유현(遺賢) 110명, 신금(紳襟) 120명, 효자(孝子) 480명, 효열(孝烈) 415명을 수록한 책 <독수륜강록>을 발행하였는데 최창호는 효자편에 수록되어 있다.
쌍효자 정려가 처음에는 여수군 쌍봉면 시목리에 있었으나, 그 지역이 도시화로 개발 되면서 없어지고, 현재는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장재마을 뒤 선산(先山) 아래에 <찬양문>, <도천장>, <수의찬문(繡衣讚文)>을 각각 1.5배로 확대하여 원래의 자형(字形)을 그대로 살려서 앞면에 새기고, 또 한글로 번역하여 뒷면에 새겨 세운 쌍효자비가 정려를 대신하고 있다.
문서를 정리하여 보면,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기 위하여 40대인 나이를 50대로 높였다거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창민의 아들을 최창호의 아들인 것으로 호구단자를 꾸미는 등 일부 자료 왜곡 흔적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정도 왜곡은 당시에는 상당히 흔하였던 것으로, 지금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정려를 받기 위해 애를 쓴 흔적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이처럼 정려를 받기 위한 모든 활동이 적나라하게 들어날 정도로 잘 갖추어진 문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가 변천하여 이제는 효자나 열녀를 보는 눈과 가치관도 크게 바뀌었는데, 특히 열녀의 행실은 당시에는 추앙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누군가 그런 행실을 한다면 여성학대로 간주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범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를 이해하며 살펴본다면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2018년 1월 31일 분당에서
쌍효자 최창민 현손 최순주(崔順周) 지음
* 각주.
(1) 順天都護府呂水面鶴洞. 전남 여수시 학동(여수군 쌍봉면 시목리)
(2) 光陽縣津下面莊峙里.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장재.
(3) 崔德之. 자 우수(迂叟), 가구(可久). 호 연촌(烟村), 존양당(存養堂). 시호 문숙(文肅). 조선초기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1405년(태종 5) 식년시에 급제, 1446년(세종 28) 남원 부사를 마지막으로 영암으로 낙향하여 존심양성을 내걸어 호를 “존양당”으로 바꾸었다. 1450년(문종 1) 예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다음해(1451) 겨울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낙향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일편야사>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원호(元昊)에 의하여 <몽유록>,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조의제문>으로 되살아나 조선 조정에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4) 南原都護府只沙坊舟巖村.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5) 崔連孫. 자 자윤(子胤), 호 암계(巖溪). 1480(성종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진사시도 합격했으며, 1489(성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는 사간원 등에서 언관으로 일하고, 연산군 때는 지방관으로 평양 서윤과 함양 군수로 있다가 중종반정 후 다시 내직으로 일했으며, 강릉 부사, 도승지,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도승지 교지 등이 가보로 전해오고 있다.
(6) 舟巖書院.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에 있는 서원. 1984년 4월 1일 전북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연촌공 최덕지와 암계공 최연손, 그리고 율계 장급(張及), 사촌 장경세(張經世)를 배향하였다.
(7) 鹿洞書院.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 있는 서원. 최덕지와 손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과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을 배향하였다. 1630년(인조 8) 존양사(存養祠)로 건립되어 1713년(숙종 39) 녹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된 것을 1977년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8) 順天都護府蘇安面. 전남 순천시 가곡동, 용당동 일대.
(9) 崔宗立. 호군절충장군중추부사. 쌍효자의 9대조.
(10) 率居奴婢. 같은 집에서 데리고 사는 종.
(11) 노비를 헤아리는 단위.
(12) 申鉉台. 인물정보를 찾을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