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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아 에서 시기쇼아라로 이동하고 있다.
시기쇼아라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위치한 무레슈 주의 도시로, 해발 고도 380m 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이 국경 방어 차원에서 초청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장인과 상인이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1337년 왕실 거처가 되면서 시로 승격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의 주권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루마니아 왕국으로 넘어갔다.
199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가 있으며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기쇼아라성문 입구
루피아에서 시기쇼아라까지는 53.1km 다.
규정된 속도로 이동한다고 해도 51분이 소요될 것 같다.
E60번 국도를 따라 계속 북상하고 있다.
시간은 정오가 넘어가고 있다.
버스는 어느덧 시기쇼아라 성 앞 주차장에 도착하고 있다.
여기서 부터 도보로 이동하고 있다.
시기쇼아라 성문을 지나
성 내부까지 도로가 연결 되어있었으나 오르막이다.
오르막길은 비교적 완만 했으나 더위로 기진맥진해지고 있다.
행동이 느슨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지쳐가고 있었기때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해도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나무 그늘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전방에 시계탑이 보이고 있다.
시기쇼아라 시계탑
시기쇼아라를 상징하는 탑이다.
그러나 집중되지 않았다.
분위기를 알아차린 가이드는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건물의 외벽은 예전 그대로 모습이나 내부는 약간 개조되어있었다.
식당은 “드라큘라” 하고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소설 “드라큘라”의 주인공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났던 곳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선 했으나 범죄자를 가혹하게 처리했다.
악명을 얻은 이유다.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났던 곳
현재는 식당
식당 내부
식당주인은 블라드 체페슈가 소설 “드라큘라”에 등장한 주인공인 것처럼 이슈화하고 있었다.
블라드 체페슈가 “드라큘라”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드라큘라로 인정하고 있는 듯 했다.
지역주민이 특히 그랬다.
관광객 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었다.
관광 객은 모두가 이 식당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일행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 갔다.
드라큘라 배역
블라드 체페슈
그런데 분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식당의 벽은 드라큘라 화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갑자기 식당에 전등이 꺼졌다.
동시에 오색찬란한 빛이 작열하고 있다.
금방 이라도 괴물이 뛰쳐나올 것 같다.
효과 음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으스스 하고 공포 스럽다.
요괴
산상교회로 올라가는 곳
히스테리 한 웃음 소리와 괴기스러운 금속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순간 주변이 조용 해졌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뛰쳐나올 것만 같다.
긴장이 지속 되고 있다.
몸도 긴장되어갔다.
식당 안에 있는 일행들 일부가 2층으로 올라가고 있다.
우리도 덩달아 일행들을 따라갔다.
2층은 캄캄했다.
식당 입구
지척을 분간할 수없다.
주변을 살피며 더듬거렸다.
지척을 구분할 수없어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면서 연기가 안개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묘가 나타났다.
묘는 봉이 파괴되어 관이 노출되고 있었다.
뚜껑도 없었다.
그림같은 식당
산상교회를 방문하기위해서
그림같은 집을 가슴에 담고
그래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관 속에 누워있는 시신이 눈을 부라 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났다.
일부 일행은 도망 가기도 했다.
시신이 움직이기시작했다.
기겁하며 달아났다.
시신이 옷깃을 잡아당기며 금전을 요구했다.
한 토막의 희극이었다.
가게도 지나야 한다.
이 모든 연극은 식당측의 연출이었다.
순간이나마 드라큘라와 함께한 것 같은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계단을 오르며
하이스쿨 앞에서
묵언 수행이다.
정심식사를 마치고 시기쇼아라 역사지구와 올드 타운으로 이동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역사지구는 중세시대 요새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1280년에 “카스트룸 섹스”로 알려진 이 도시는 길드가 성행 했던 곳이다.
길드는 중세시대 동업조합이다.
동업조합은 같은 종류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조직한 조합이다.
길드의 활성화는 곧 상업의 발달을 의미한다.
이곳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해 자유도시로 성장했다.
시기쇼아라는 라틴어로 ‘카스트룸 섹스(Castrum Sex)’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작센인이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세운 7개의 성채도시 가운데 여섯 번째라는 뜻이다.
이후 몽골제국의 침입에 대비해 시기쇼아라 성채는 끊임없이 보강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산상교회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상교회 정문
탑과 성벽은 중세시대 모습 그대로다.
중세 길드들은 저마다 성과 탑을 쌓고 관리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8개의 성과 탑이 각기 ‘신발 장인의 탑’, ‘정육업자의 탑’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시기쇼아라는 1367년에 자치도시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교역도 성행했다.
제작년대 1467년
성채의 규모가 넓혀지고 오스만투르크족의 침공에 대비해 보강이 이뤄졌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시기쇼아라는 점차 쇠락하고 말았다.
세차례에 걸친 대 화마때문이었다.
이후 지진이 또 한차례 강타했다.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산상교회 소개
산상교회 내부
19세기에 길드 조직이 몰락 하면서 한때 14개에 이르던 탑 가운데 일부가 훼손되었다.
오늘날 성과 탑은 시계탑을 포함해 9개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은 중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방어기능을 충실히 이행한 성벽과 탑, 광장과 교회, 붉은 지붕의 집들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계탑은 시기쇼아라 역사지구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자치권을 획득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9개의 탑 중에서 가장 큰 탑이 시계탑이다.
그래서 시계탑은 시기쇼아라를 상징하고 있다.
1894년 오스트리아 건축가에 의해 건설된되었다.
지붕은 다채로운 색으로 장식되어있으며 64m 의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있다.
시기쇼아라 시내
다시 산상교회로 이동하고 있다.
산 위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산상교회라 불린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는데 불교에서 108번뇌가 생각났다.
모든 고뇌와 번뇌를 이곳에서 내려놓고 활기찬 발길을 옮기고 싶다.
교회는 시기쇼아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345년부터 1525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숙소 머큐리호텔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딕 양식 건물이다.
시기쇼아라는 199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지구가 있으며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14세기 경 오스만 투르크족과 전쟁으로 도시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
지금은 언덕 위의 구시가지에 중세시대 건물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산상교회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빨간 색 지붕 일색이다.
식전 시내 탐방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
시기쇼아라는 중세 유럽과 비잔틴 문화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매력을 더욱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돼있고, 독일 이민자들이 만든 독일어 학교와 교회 등에서 독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트란실바니아는 로마 군단이 철수한 뒤에도 이민족의 침략이 잦았다.
민족 구성원은 마자르 족이 주류다.
투르다 소금광산
소금광산 괭도
9세기 말 마자르 족은 이 지역을 점령하여 헝가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는 헝가리가 오스만 투르크족에 패한 뒤 독립하여 오스만투르크족으로 부터 자치를 허용받았다.
종교 전쟁이 잦았지만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는 통일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의 일부를 되찾긴했으나 루마니아에 거의 흡수 되었다.
트란실바니아는 시비우에서 북동쪽으로 65㎞, 부쿠레슈티에서 북서쪽으로 175㎞ 떨어져 있다.
소금광산 괭도
투르다로 이동하고 있다.
투르다는 아리에슈 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디에르나”의 명칭은 다키아인들의 정착 지에서 비롯되었으며, 로마인들의 카스트룸이 되어 “포타이사” 라고 했다.
이 “카스트룸” 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했으며, 후에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시 외곽에 로마가 개발한 암 염갱이 현재도 남아 있다.
이곳이 투르다소금광산이다.
소금광산 지하
투르다소금관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투르다소금관산은 투르다 협곡과 아푸세니 산맥으로 이어지는 아리에슈 하곡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고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시기쇼아라에서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그런데 투르다소금관산으로 이동 할수록 날씨가 급변하고 있다.
여우비가 흩날리더니 갑자기 굵은 빗방울로 변해가고 있다.
정상 고도가 600m 이상이다.
이상하게도 이곳은 분지로 돼있다.
분지 곳곳에 갈대가 무성하다.
그리고 습지가 많다.
염분이 잔존하고있기때문이다.
과거는 이곳이 바다라는 증거다.
버스가 주차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버스에서 하차해 갱도로 이동하고 있다.
갱도입구에 많은 관광객이 늘어서있다.
그러나 현지가이드가 입장 표를 미리 구입한 까닭으로 쉽게 갱도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현지가이드와 영어로 소통하며 이동하고 있었지만 이해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국내가이드의 도움을 받았다.
소금채취현장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갱도내 천정은 소금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손으로 연분을 떼어내 맛을 보니 소금맛 그대로다.
현지가이드의 갱도 현장설명이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해는 제한 적이었다.
갱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이동하고 있다.
지하는 120m 깊이다.
소금광산 내 호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 본 지하광장은 지구인의 마지막 거처같다.
인류의 생존가능성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같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곳은 중세시대부터 소금을 채취 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소금채취가 중단 되었다.
염분이 고갈 되고 현실성이없기때문이다.
이후 방치 되다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치즈 저장소 및 대피소로 사용 되었다.
1992년에 지역 의회는 관람차, 미니 골프 코스, 미니 볼링장, 스포츠 경기장, 원형 극장, 지하 호수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테마파크로 바꿨다.
지하광장 내 보트
오락시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지하 갱도 내의 호수다.
호수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호수가에 보트도 있다.
지하광장을 관람하고 갱도에서 유턴해 버스주차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주차장 까지는 지역 토산품을 팔고 있는 상가밀집구역이다.
평일이라서 상가는 한가했다.
우리가 유제품에 관심을 보이자 상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코리아 인 이냐고 도 물었다.
“Yes” 라고 하니 엄지척도 잊지 않았다.
소박했다.
자매 님과 함께
버스를 승차해 쿨루지 나포카로 이동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1시간 정도다.
쿨루지 나포카는 루마니아 북서부 클루지 주의 주도다.
로마시대는 “나포카” 라는 이름으로 다키아 지방의 주도가 되었다.
중세 말기부터 근대에 걸쳐서 오스만투르크족과 오스트리아에 지배 당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 영토로 편성되었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문화 중심지로 14세기에 건립된 고딕 건축물인 미하일 교회 등이 있는 곳이다.
성 미카엘 성당은 1860년에 새워진 루마니아에서 두번째로 큰 고딕 양식 성당이다.
성당에 들어가 성호를 긋고 천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섬세하다.
그러나 로마교회와 차이가 있었다.
기교가 단순하고 신성에대한 믿음이 절제되고 검소했다.
이것은 오스만투르크족의 이슬람교 강요와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때문일 것이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여행하는 동안 과거 동 로마제국의 자취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동 로마제국의 변방이다.
쿨루지나포카 마차시 동상
이것이 과거의 정체성이 지워진 이유다.
그럼에도 로마제국의 잔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인은 로마의 지배에 대해 긍지를 갖고있다.
로마제국의 문화가 지금까지도 꽃을 피고 있는 이유다.
이곳은 과거 동 로마제국의 영역이다.
그래서 동 로마제국의 자취를 발견해보고 싶었다.
작은 소망이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뛸 듯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