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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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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못 들면 인공기도 못 들어야 최소한 상호주의입니다.”
국회에서 어느 야당의원이 평창 동계올림픽개막식을 앞두고 책임총리를 자처하는 사람을 발언대에 세워 놓고 질타하는 중이었다. 본회의장의 전광판에는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기 위하여 온 북한 여자 하키 팀 4명의 사진과 ‘김일성 김정일의 배지’를 보란 듯이 가슴에 달고 있는 북한 관계자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땅에서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흔들지도 말고 애국가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저들 독재자의 배지를 다는 것을 못 본체 하였는데 이것이 이치에 맞는 일인가, 더욱이 전 세계인이 보는 공식 올림픽 방송에서...”
야당의원이 따지고 있다.
헌법 제 4조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에 맞지 않은 행위는 일체 용납할 수 없다는 야당의 주장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남북의 화해협력, 나아가서 평화통일을 위하여 북의 모든 행동을 눈감아 주어야 한다는 여당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남·남 갈등의 현장이다.
“둘 다 옳은 말이네요.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모두 한반도 기를 달고 아리랑을 불러야 한다는 정부·여당도 옳고, 6.25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환상적인 평화통일에 속고 있는 것이라 안 된다는 야당의 말도 맞는 것 같네요.”
TV를 보고 있던 백암선생의 아들이 한 마디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후일 역사가 답 해 줄 것이야. 5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아니 100년 후에도 결말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약 통일이 되더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공산독재 적화통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민주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야. 전쟁 없이 화해 협력으로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것은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니 최대한의 경제적, 외교적 압박과 상황에 따라서는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야.”
아버지 백암선생은 여·야 논쟁의 핵심을 찍어 지적하신다.
“6.25같은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지요. 어떻게든 참고 양보하면서 화해 협력을 통해서 통일을 해야지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쪽에서는 3대 세습 독재체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쪽에서 양보하고 적화통일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자유민주통일과 적화통일이 양립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주기적인 정권교체, 시장경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북한은 공산주의, 김씨가의 독재와 영원한 집권, 반시장경제를 유지하면서 남북한이 서로 싸우지 않고 이름만 통일된 남북연방국가가 될 수 있다면 양쪽을 다 같이 만족시키는 길이 아닐까? 그렇게 될 때, 이름은 한국? 조선? 통일 연방국가의 대통령은 누가 되고? 이런 통일국가가 내전 없이 영원히 갈 수 있을까? 이율배반적인 자유민주체제와 1인 독재 체제는 아무리 끼워 맞추려고 해도 양립하거나 혼합이 될 수 없는 운명이야... 남북의 합창단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입을 모아 합창을 하고 있는데... 남한 가수들은 자유통일을, 북한 가수들은 공산통일을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체 하고... 완전히 다른 통일을 같은 통일인양 서로 속이고 있어...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모델이야.”
6.25가 터졌을 때 백암선생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8.15광복이후 70년의 생활이 기록된 칩(chip)이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는 시인이며 화가이다.
평창올림픽기간은 설 연휴를 끼고 있다. 개막일에 몹시 춥던 날씨가 약간 누그러지긴 했지만 춥기는 마찬가지이다. 백암선생의 가족은 동해안 여행길에 나섰다. 복지회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내, 아들 내외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생과 유치원생인 손자들 이렇게 6명이다.
서울-양양간 150.2km의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홍천을 지나서 부터는 터널~터널~터널, 터널의 연속이다. 하늘을 보기 어렵다. 총 63개의 터널을 오뉴월 감꽃 꿰듯이 한 실에 꿰고 양양을 지나 속초로 간다. 시원한 동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설악산 대청봉이 구름 속에 눈만 내어 놓고 있다.
속초시는 짙푸른 동해바다를 동쪽에, 한국 제1의 명산 설악산을 서쪽에 끼고 사시사철 전국의 관광객과 등산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백암선생 일행은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이는 리조트 에 하루 먼저 와서 체크인을 한 작은 아들 5인 가족과 합류하여 짐을 풀었다. 감자바위의 고장 감자떡국과 해산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한 다음 설악산 소공원에 갔다.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들 우르르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달려간다. 백암선생에게 케이블카는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40여년 등산경력에 전국의 명산, 대찰을 거의 답사하였고 설악산의 많은 능선과 계곡을 수시로 누비고 다녔으니 권금성 케이블카 정도는 밑에서 보기만 해도 훤하다. 가만히 앉아서도 케이블카를 타고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는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눈을 감으면 권금성 정상의 바위들과 천불동계곡이 한 눈에 보이니 굳이 케이블카를 탈 이유가 없었다.
속초 중앙시장에 들려 넘쳐나는 해산물과 눈 모자라 다 볼 수 없는 풍물을 구경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고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어린이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6.25전쟁 중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이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차례를 올리고 속초항 ‘아바이 마을’과 고성통일전망대 관광에 나섰다. 아바이 마을은 민족의 분단, 눈물의 바다, 실향민의 설움, 억척같이 이어온 삶이 생생하게 새겨진 현장이다.
“할아버지, 6.25때 할아버지는 몇 살 이셨어요?”
“은성이는 지금 몇 살이지?”
“11살이예요.”
“4학년이지?”
“예”
“그래, 그 때 할아버지도 4학년, 11살이었어.”
2
“쿵! 쿵!~~~”
60여 년 전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소년의 청각 신경에 새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어릴 적 소리로서는 몇 안 되는 소리 중 하나이다.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들에 나가 잔 일을 하던 중이었다. 군청 농사계장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는 평일이고 휴일이고 간에 틈만 있으면 논에 나가 풀을 뽑고 벼를 가꾸었다. 며칠 전부터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돌더니 직장마다 빈자리가 생기고 상점들도 문 닫은 데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아버지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적군이 북상면쯤 온 것 같다고 하셨다. 쿵! 쿵! 하는 대포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니 빨리 피난을 가야겠다고 하시며 서둘러 논일을 거두고 집으로 갔다. 집은 거창읍에 있으니 약 1km쯤 되는 거리였다.
논은 군내에서 제일 넓고 기름진 들, 이름 그대로 넓은 들이라는 뜻을 가진 ‘한들’에 있었다. 문전옥답이다. 한들 한 가운데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높이가 10여m, 장정 서 너 명이 팔을 벋어야 둘레를 잴 수 있는 수 백 년 된 느티나무이다. 뜨거운 여름 일하다가 지치면 그 나무그늘에 누워 한숨 자는 사람들의 금싸라기 같은 휴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그 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년이 일하던 논 6마지기가 있었다. 논 1마지기는 볍씨 한 말의 모 또는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로, 지방마다 다르나 약 150~300평이다. ‘쌀 나와라 뚝딱!’하면 몇 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 쌀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이다. 해마다 쌀과 보리가 몇 섬씩 나오니 먹는 것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당시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양식이 없어서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가 어려웠다. 요즈음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월동(越冬)’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야생의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추위와 굶주림을 못 이기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으니 인생사 겨울을 무사히 지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이월 다가고 춘삼월이 되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산야에 온갖 꽃이 피어 벌·나비가 춤을 추는 호시절이 되어도 살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양식이 다 떨어져서 새 곡식이 나올 때 까지 버티기가 어려웠다. 없는(가난한) 사람들은 들에서 나물을 캐어 먹고 산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다. 초근목피(草根木皮)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들어 보지도 못한 송기(松肌)라는 단어까지 있던 시절이었다. 송기는 소나무의 속껍질이다. 곡식가루와 섞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먹는다. 송기떡은 어떤 맛일까?
겨우내 눈 속에 묻혀 있던 보리가 자라 온 들이 파랗게 되고 노고지리(종달새)가 하루가 다르게 높이 올라가지만 보리를 수확하여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멀었다.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배고파 울고 넘던 고개. 없는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보릿고개’는 높고도 길었다.
소년의 외할아버지는 큰 부자였다. 열여덟 살의 어린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로 사위에게 논 6마지기를 주셨다. 외할아버지는 대대로 살아오는 무릉리에서 술도가(양조장)와 방앗간(정미소)을 경영하였으니 면내에서는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제일의 부자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이 전체 산업의 70%를 차지하고 전체 인구의 7할이 농민이었다. 상업이나 광공업 등 다른 산업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였다. 요즈음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못사는 ‘후진 농업국’일 뿐이었다. 그런 농업사회에서는 쌀이 제일이고 쌀을 찧는 일은 최고의 산업이며 방앗간 주인은 당연히 부자이다. 게다가 농사에 절대 빠질 수 없는 막걸리는 농업노동에 있어서 힘의 원천이다. 막걸리 없는 농사는 생각할 수도 없다. 막걸리를 생산하는 술도가는 돈을 끌어 모을 수밖에 없다. 여하튼 한 면에 하나씩밖에 없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둘 다 가졌으니 소년의 외할아버지는 갑부였다. 해마다 논을 사서,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논이 있었다. 마을 앞 도로를 지나 개천을 건너면 넓은 들이 있고 그 들에는 정씨 집 논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할아버지의 논이 많았다. 그 개천은 한들을 지나 내려오는 물이라 양이 많은데 비해서 폭이 좁아 깊은 곳도 있다. 소년은 외갓집에 가서 놀 때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헤엄을 쳐서 건너기도 하고 물에 빠져 혼이 나기도 하였다.
외갓집은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딸도 귀했다. 재산은 넘쳐나는데 먹고 입을 사람이 없다. 농사일은 머슴들이 하고 정미소와 양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일가친척은 없고 모두 타성이었다. 온 마을 수 십 가구가 외할아버지의 그늘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 많은 재산은 이름만 외할아버지의 것이지 모두 동네 사람들의 공동재산이나 다름없었다. 후덕한 외할아버지는 자식이 귀한 대신 이웃을 자기가족처럼 아끼고 덕을 베풀어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하였다. 원근 각지에서 칭송이 자자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10년대이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일제의 수탈과 압박이 점점 심해져 조선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일제의 군수, 면장, 순사(경찰) 등의 수탈이 심해지고 그들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부잣집을 헐뜯고 고자질한 대가로 미끼처럼 던져 주는 밥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의 순사는 민간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순사가 나타나면 사람이 잡혀가고 죽고 집안이 망한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울 때 ‘순사 왔다’하면 울음을 딱 그치겠는가? 그 전에는 ‘호랑이 왔다’해야 울음을 그치는데 순사가 호랑이 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그 살벌한 세상에서도 외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존경 받고 살았으니 면서기나 순사가 함부로 접근하고 행패를 부릴 수가 없었다.
이런 외할아버지에게도 어둡고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아들을 보지 못하면 혈통이 끊어지니 조상을 볼 낯이 없고 제사를 지내줄 자손이 없어 폐족이 되니 재산도 명예도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부자라도 자손이 귀하니 그 많은 재산은 남을 먹이고 입히는데 쓰는 남을 위한 재산에 불과하였다.
대를 잇기 위하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혼을 하였으나 아들 소식은 없고 몇 년이 자나서야 첫 딸을 보게 되었다. 다음을 기다렸으나 역시 딸이었다. 나이는 30이 넘어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아들을 보아도 그 아들이 어른이 될 쯤 이면 자신은 50이 넘고 환갑까지 살기도 어려울 터인데...앞이 안보이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은 평균 수명이 짧아 환갑을 넘는 사람이 드물었고 환갑날은 큰 잔치를 하여 온 동네의 축제일이 되기도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첩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부인에게서도 아들은 없고 딸이었다. 두 부인에게서 딸만 셋. 실망과 걱정이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울화병(鬱火病)을 얻게 되었다. 더 이상 자녀를 얻기는 어려워졌고 시름시름 병석에 눕게 되니 양자라도 데려야한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오랜 고심 끝에 10촌이 넘는 먼 집안 조카 정흥선을 양자로 데렸다. 흥선은 족보상으로만 집안이지 먼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고 부모와 삼촌 그리고 동생들이 많아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외할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흥선을 양자로 데려와 비단옷을 입히고 신부 감을 골라 장가를 보냈다. 하루아침에 부잣집 외동아들이 된 흥선은 원님 아들 부럽지 않게 호의호식하게 되고 친부모 친형제와 가까운 일가친척 모두가 한 두 해만에 가난을 벗어나는 행운을 맞았다. 외할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깊어 갔다. 서둘러 딸 하나라도 빨리 출가시켜야 했다. 마침 큰 딸이 방년 16세. 막 피기 시작하는 모란꽃이요 청초한 난초였다. 원근 각지의 중매쟁이들이 사랑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부잣집 맏딸로 애지중지 귀염을 받으며 자랐지만, 흔히 부잣집 자녀들이 하듯이 사람을 깔보고 사고치고 좌충우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행랑채의 머슴들 아이도 돌봐 주고 부엌일도 거들어 주는 일꾼이기도 하였다. 유명한 훈장님을 가정교사로 모셔 일찍이 ‘언문’과 천자문(한문)을 떼고(마스터하고)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 등 소설을 필사하고 손수 창작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필사한 소설이 6.25때까지도 당세기(고리짝, 상자)로 4짝이나 집에 남아 있었다.
언문은 한글이라는 명칭이 있기 전의 우리글 이름이다. 훈민정음은 세종 28년(1446)에 창제 공포되었으나 400여 년간 ‘언문’ 또는 ‘통시글’이라는 이름으로 천대 받았는데 1910년경 주시경 최남선 등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어 한자를 밀어내고 널리 쓰이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500여 년 전에 탄생했으나 양반사회에서 서자 취급을 받아 오다가 100여 년 전에야 정식 이름을 얻고 오늘날 세계 제1의 글이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18세가 되던 해 사돈을 보게 되었다. 사돈은 30리 떨어진 산골 동네에서 청빈하게 살아오는 서당 훈장이었다. 고려 말의 명문대가였던 이씨 가문의 후손이라 집은 가난해도 가문을 중시하는 외할아버지에게 가장 맞는 사돈이었다. 일가친척들은 집안 대대로 머슴을 데리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이지만 밤에는 글공부를 하고 재실에서 공맹(孔孟)을 논하는 문인들이었다. 사돈은 젊을 때 논밭에 묻혀 살아 손톱이 두껍고 손마디가 울퉁불퉁해지긴 했어도 재실 대청에 근엄하게 앉아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수하들을 훈계할 때면 그 권위가 온 마을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가을에 시제(時祭)를 지낼 때 사돈이 없으면 일이 되지 않았다. 원근 각지의 향교와 사당(祠堂)에서 초대를 받아 외지 출입이 잦았다. 아들 셋, 딸 하나. 흰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사돈이 출타하였다가 돌아올 때면 5리 밖에까지 아들이 마중을 나가 기다리는 효자집안이었다. 사돈의 조부는 조정으로부터 정문(旌門)을 하사 받은 조선의 효자로 손꼽히는 어른이셨다.
정문할아버지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중에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꿩이 날아와 무릎에 앉았다. 아버지가 살생을 바라지 않으므로 놓아 주었더니 다시 날아와 앉았다. 이와 같이 세 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삶아 드렸더니 아버지는 병이 낫고 천수를 다 하셨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 있다.
명문가의 사돈을 보게 된 외할아버지는 애지중지 기른 첫 딸을 마음 놓고 시집보내는 마당이라 아낄 것이 없었다. 한들의 옥답 6마지기와 함께 평생 입고 쓸 옷가지이며 비단·광목, 가재도구를 넘치도록 장만하여 바리바리실어 보냈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혼사가 아들을 장가들이고 며느리를 맞이하는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맏딸을 출가시켜 큰일 하나 치룬 소년의 외할아버지는 울화병 9년에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그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지금의 45세는 청년이지만 당시는 중년의 나이이며 50이면 노인이고 60을 넘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흥선은 원래 심성이 착하고 과묵한 아이였는데 머슴살이 3년에 더욱 소심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부잣집 양자로 들어서고 양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이제 자기세상이 되었다. 말이 많아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찌들고 가난했던 모습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지난날의 고된 노동에 대하여 한풀이라도 하는 것인가? 조자룡 헌 칼 쓰듯이 돈을 펑펑 쓰며 교만해졌다. ‘가시가리’를 전세 내어 전국의 명승 대찰을 유람 하였다.
가시가리는 ‘대절(貸切)’이라는 뜻의 일본말인데 ‘대절한 차’ 즉 지금 말로는 택시이다. 1930년대 그 시절 시골 도로에는 짐차(화물자동차)나 객차(정기버스)가 드문드문 지나갈 뿐 소형차는 없었다. 짐차는 나무를 때서 움직이는 목탄차였는데 연통에서 연기가 퐁퐁 나오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쇳덩어리였다.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북한에는 목탄차가 있다고 한다. 최고 속도는 시속 40km, 오르막길에서는 10km밖에 못가니 ‘말 구루마(마차)’보다 조금 나았다. 그 시절 운반은 대부분 우마차(牛馬車)가 맡았고 간혹 장거리 대량 운반은 짐차가 맡았다. 차는 성능이 열악하고 도로는 울퉁불퉁한 자갈밭이라 타이어나 튜브가 ‘빵꾸(펑크)’나기 일쑤이고 도로 가에 차를 세워 놓고 2~3시간씩 고치는 경우가 예사였다. 차에는 반드시 스페어타이어를 차 밑에 달고 다녀야 하고 운전석 옆에는 조수가 항상 타고 있어야 한다. 도시락이나 주먹밥 같은 비상식량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고장이 나면 오도 가도 못하고 서비스센터나 사람을 부를 데도 없고 부를 방법도 없다. 100%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조난이다. 산간벽지에서 일기마저 나쁘면 죽음뿐이다. 그에 비하면 사람을 실어 나르는 객차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 역시 고물이기는 마찬가지여서 2~3백리 장거리는 달리다가 도로가에 멈추어 서는 것이 예사였다. 그럴 때는 승객이 모두 내려 시커먼 연기를 뒤집어쓰고 죽을힘을 다 해서 밀어 주어야 차가 움직였다.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혼사에도 차는 구경하지 못하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신랑은 말을 타야 했다. 차는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10년이 지나도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나 오늘 차 타 봤다.”
소년은 30리 밖에 있는 친척집에 객차를 타고 다녀왔다는 게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 반에서 차를 타 본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 무섭더나?”
아이들은 소구루마(牛車)를 타도 덜컹덜컹 흔들려 겁도 나고 신이 나서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러운데 하물며 그 큰 객차를 타고 겁나게 빨리 달렸다고 하니 상상이 안 되고 친구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이처럼 차가 귀한 시절이라 소형 승용차는 물론 영업용 가시가리는 있는 줄도 모르고 대구 같은 대도시가 아니면 아예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는데 흥선은 이미 10여 년 전,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귀한 가시가리를 타고 새 색시와 전국을 휘젓고 다녔으니 그 비용이 오죽했겠는가? 집안 조카아이까지 집사 겸 심부름꾼으로 데리고 다니며 호의호식하였다. 부잣집의 가장이 된 흥선은 양가(養家)의 어머니와 그 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이제 그만 두었다. 양어머니는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고 둘째 딸도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대강 형식을 갖추어 출가시켰으니 홀가분하였다. 둘째 딸의 혼사는 분주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생가의 가난한 일가친척들이 떼거리로 드나들어 주위에는 먹고 쓰는 사람만 있고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 흥선은 해마다 논을 팔았다.
1945년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의 세례를 받았다. 조선에서 기고만장하던 일본인들이 발가벗고 목숨만 부지하여 제 나라로 도망가기 바빴고,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이 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오는 귀국선 뱃머리는 설움과 기쁨으로 눈물에 젖었다. 10년간 흥청망청하던 흥선의 부잣집 살림도 물밑이 보였다.
3
살목이라는 마을이 있다. 집에서 10리 밖 거창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소년의 진외가(陳外家)집 즉 아버지의 외갓집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우선 몸만 피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갔다. 커다란 륙색(rucksack)에 쌀과 수저 등 당장 필요한 물품을 챙겨 넣고 3남 1녀가 딸린 여섯 식구가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진외가에는 아버지의 외사촌 형님 내외분과 22살 되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젖먹이 손자가 있는데 전답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집이었다.
“잘 왔다. 그런데 전쟁이 어찌 된다 카더노?”
아버지의 외사촌 형님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으신다.
“아무도 몰라요.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애요.”
군청에 다니는 아버지는 소식이 빠를 것 같았지만 모르기는 마찬가지. 모든 사람이 처음 당하는 전쟁이라 너나 할 것 없이 우왕좌왕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유언비어만 늘어 나 어지러웠다.
이튿날 아침이 되니 하늘이 갈라지는 듯이 쌩!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연이어 쌩! 쌩! ... 하얀 알루미늄 조각 같은 것 4개가 화살 같이 반짝이며 줄을 지어 거창읍 쪽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소년은 정신을 차려 다시 보니 비행기인데 보통 비행기와 다르다. 앞은 송곳 같이 뾰족하고 럭비공처럼 생긴 통을 양쪽 날개 끝에 달고 있다. 물 찬 제비같이 날쌔고 화살같이 빠르다. 누군가가 ‘호주기(壕州機)’라고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비행기라는 말이다.
호주기가 거창읍을 폭격하고 있다. 북상면에 있던 적군이 하룻밤 새에 거창읍에 와 있는 모양이다. 어제 저녁에 피난 나오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하였다. 저 폭격기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찰나,
“쌩!”
“앗!”
이번에는 구경하고 있는 동네사람들의 머리 위에 호주기가 내리 꽂히더니 금방 하늘로 까마득히 치솟고 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길이고 논두렁이고 할 것 없이 제 각각 아무데나 엎드렸다. 소년도 응급 결에 길 옆 도랑에 엎드렸다. 다음 순간 두 손으로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자세를 취하였다. 몇 달 전 보이 스카우트의 야영 대회에 갔다 온 형이 가르쳐 준 자세이다.
“잼버리(jamboree)~~잼버리~ 잼버리~~ 잼버리~”
중학교 1학년인 형이 대한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여 즐겨 부르던 노래인데 소년도 귀에 익어 저절로 배웠다. 형은 세 살 위이지만 어른 같았다. 소년단 배지(badge)를 단 카키색 제복에 머플러를 두르고 미군 모자처럼 생긴 뾰족 모자를 쓰고 뽐내며 동생들을 모아 놓고 소년단에서 배운 것들을 그대로 가르쳐 주곤 하였다. 천재지변으로 폭풍을 만나거나 전쟁 중에 폭격을 받으면 눈알이 튀어 나오고 고막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엎드려야한다면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 공군이나 UN군의 비행기는 흰옷 입은 민간인에게는 폭격하지 않는다는 말만 믿고 집 밖에 나와 구경하고 있던 마을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하였다. 그런데 실은 호주기가 거창읍에 있는 적군을 보고 기관총을 쏘았던 것이다.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는 저공비행으로 각도가 약간 낮아졌기 때문에 생긴 소리인데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을 보고 갈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저마다 식구들이 은신할만한 굴을 뒷산에 파기 시작하였다. 소년도 아버지를 따라 삽으로 파고 흙을 나르고 잡일을 거들었다.
진외가집에는 대구에서 놀러 온 조카가 있었다. 머리에 노랑나비 액세서리를 단 예쁜 모자를 쓰고 얼굴이 하얀 초등학교 6학년의 여자아이였다. 촌아이들과는 달리 옷차림이 세련되고 말도 야무지게 잘 하였다. 소년은 도시 아이를 처음 봐서 노랑나비 아이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노랑나비는 며칠 전에 아버지가 데려다 주고 갔는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전쟁 중에 조카가 다칠까봐 진외가집 아저씨는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울거나 겁에 질려 있지도 않았다. 소년의 형제들과 잘 놀았다.
며칠이 지나니 파던 굴이 제법 깊이 들어갔다. 옆에는 진외가집 굴이 나란히 파 들어가고 있었다.
“야! 뚤폈다.”
진외가집 형님이 작은 구멍으로 삽을 내 밀며 좋아하였다. 두 집 식구가 굴속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연결되었다. 이제 웬만한 공습이 있어도 며칠씩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렵게 판 굴이 별로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이튿날부터 호주기가 안보이고 대포소리도 멀리 가 버렸다. 거창 읍내가 조용하다. 적군이 들어와서 공산치하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 밤 읍내 집에 가서 쌀과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씩 가져 왔다. 그러나 그 일도 며칠 가지 못하였다. 집 주인이 없는 빈집에 식량이나 쓸 만한 물건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털어 가 버리고 읍내에는 공산군이 설쳐대기 때문에 아무리 밤이라도 집에 함부로 왔다 갔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집에 들락거리기는커녕 지금 있는 곳에서도 더 있지 못하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다 잡아 가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쟁터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뿐만 아니라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회사원 등 월급쟁이들은 잡히면 다 죽는다고 한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인민군 보다 ‘바닥 빨갱이’가 더 무서웠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과 면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세상이 바뀌니 좌익으로 돌변하여 개인적인 보복을 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평소에 불만과 증오심을 가졌던 불량배들은 물을 만난 고기들처럼 제 세상이 된 듯이 붉은 치안대 완장을 차고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동네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심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자 죽기 아이마 살기네!”
진외가집 형님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큰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었다. 신혼살림을 한지도 몇 년 안 되고 남에게 인심 잃을 짓도 하지 않았지만 매우 불안해하였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으로 이어온 과수원과 전답을 가꾸어 오던 모범적인 농민인데도 불안하였다. 언제 의용군으로 끌려갈지 모르고 아니면 바닥빨갱이들의 질투와 모략을 받아 재산을 뺏기고 인민재판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형님의 걱정은 아버지의 처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바닥빨갱이들에게 알려지면 끝장이다. 시간을 다투어 위기를 모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다. 밤이 되어 잠들 시간인데도 소년과 가족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아버지가 식구들을 남겨두고 혼자 먼 부산으로 떠난다고 한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것만 같았다.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전쟁 중에 다 죽을 것 같았다.
소년은 울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주먹밥 두 덩이만 가진 채 혈혈단신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가 2십리쯤 가다가 돌아왔다고 하셨다. 막상 길을 떠나고 보니 무사히 부산까지 가기도 어렵고 뒤에 남은 가족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개울가에 앉아 구름을 타고 흘러가는 달을 보면서 온갖 생각을 다 한 끝에 이왕 죽을 바에는 가족과 같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돌아 왔다고 하셨다.
이튿날 아버지는 토굴에 숨어서 하루를 보냈다. 다행이 낯선 사람은 한 사람도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소년의 여섯 식구는 더 깊은 산중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산길을 3십리 가면 읍에서 더 멀리 떨어진 산골에 아버지의 첫째 고모가 살던 ‘모전’이라는 동네가 있다. 아버지는 큰 륙색에 쌀을 넣어 짊어지고 어머니와 형과 소년은 각자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들었다. 어머니는 이제 겨우 젖 뗀 동생을 업고 6살짜리 여동생의 손도 잡고 걸었다. 달밤이다.
-와이키키해변에 나뭇잎으로 앞을 가린 토인들이 달밤에 춤을 추고 있다. 검은 수평선, 밀려오는 파도,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
소년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지난달 사생시간에 배운 하와이의 풍경이다. 그날은 감기로 열이 있어 학교에 가지 못했는데 이튿날 등교해 보니 애들이 하와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섬에 대해서 배웠다고 자랑을 하며 책에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고된 피난길. 이 길이 꿈같은 와이키키 해변의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모두들 다리가 아프다.
“여서 좀 쉿다 가자. 조금만 더 가만 되는데... 저 아래 찻길이 있고 그 건너 작은 마을이 희미하게 보이지? 거 까지만 가만 된다.”
아버지도 무거운 쌀을 지었으니 몹시 힘들어 하셨다.
날이 밝아 온다. 6살짜리 여동생이 주저앉았다. 형이 무거운 보따리를 소년에게 넘겨주고 여동생을 업었다. 소년은 보따리 2개를 들고 뒤에 쳐져서 간신히 따라 갔다.
4
화진포에는 초속 10m의 강풍이 살을 찢는다. 넓은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700m거리를 두고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 그리고 김일성별장(화진포의 성)이 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2년간 하계휴양지로 사용하였고 이승만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남북한 분단의 격동기 8.15에서부터 6.25까지의 시간을 한곳에 모아 놓은 것 같다. 바다와 호수, 송림과 해당화가 잘 어우러지는 천혜의 별장지이다. ‘이런 좋은 곳에서 김일성이 휴양을 하면서 6.25전쟁을 구상하여 남북한을 잿더미로 만들었구나. 그의 뇌세포 중에서 0.001mg도 안 되는 세포 1알이 발작을 일으켜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백암선생은 피난생활을 회상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일행은 고성 통일전망대로 향하였다.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안보공원 관람권’을 구입하고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후 차량으로 10km를 더 갔다. 도중에 군부대의 검문소를 지나고 DMZ박물관도 지났다.
통일전망대는 나지막한 언덕위에 있다. 1층에는 기념품판매점이 있고 2층이 전망실이다. 군사분계선 너머 금강산과 동해바다가 한 눈에 보였다. 대형 모형지도가 있고 현장을 파악하기 쉽게 지명이 잘 표시되어 있다. 백암선생이 20여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어딘가 김일성 사진도 있었는데 지금은 치워버린 것 같다. 관광객들 사이를 뚫고 다니며 야외 망원경으로 금강산과 북녘해안을 보고 카메라에 담는데 30분 이상 걸렸다.
“여기, ‘6.25전쟁 체험전시관’도 있네. 들어가 볼까?”
모두들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참혹한 전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1950년으로 시간을 돌려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무섭고 분하고 지긋지긋하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백암선생의 머릿속 기억저장고에서 6.25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온다.
“얘야, 이리 와서 같이 한 숟가락 뜨자.”
소년의 어머니가 마당가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보고 같이 밥을 먹자고 불렀다.
“안 묵을라 캐도 자꾸 묵어라 칸다.(안 먹으려고 해도 자꾸 먹으라고 한다.)”
모전누나가 못이긴 듯이 슬슬 다가오면서 하는 말이다. 배가 고프지만 미안해서 겉으로는 안 그런 체 하였다.
모전마을에는 아버지의 첫째 고모와 어른들은 일찍이 다 돌아가시고 친척이라고는 고아로 자란 남매가 토굴 같이 낮은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다. 오빠는 19살, 동생은 15살, 소년에게는 형과 누나이다. 남매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겨우 한글만 알고 숫자를 셀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둘 다 심성이 착하고 총명하여 마을사람들의 도움과 칭찬을 받으며 살아 왔다. 끼니를 굶는 날이 많았고 점심은 아예 없었다. 소년의 가족은 동네 빈방을 1칸 얻어 짐을 풀었다. 아이들 소리가 나니 대 여섯 집 절간 같던 마을이 모처럼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아버지와 소년의 형제들은 깊은 산에 가서 칡도 캐고 머루나 다래를 따서 식량에 보태었다. 계곡에서 피라미와 가재를 잡았다.
모전 누나가 시퍼런 추자(호두) 열매를 주워서 돌로 찧어 알맹이를 빼 주었다. 채 익지 않아 맛이 없지만 먹을 수는 있다. 추자를 일부러 따면 안 되지만 저절로 떨어진 것은 먼저 보는 아이가 주인이다. 소년은 밤이나 감은 잘 알지만 추자는 처음 본다. 방학 때 외갓집에 가면 새벽에 다른 아이들 보다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감똘개(감꽃)를 주머니마다 볼록볼록 주웠다. 실에 꿰어 목에 걸고 하루 종일 한 알씩 아껴 먹었다. 떨어진 땡감도 많이 주웠다. 감똘개는 바로 먹을 수 있지만, 땡감은 떫어서 바로 먹지 못하고 항아리에 재를 풀은 잿물에 며칠 잠겨 두었다가 먹으면 된다. 그런데 추자는 귀하기 때문에 제사 때 맛 본 적은 있지만 열매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추자가 이렇게 생겼구나. 살구 같은 겉살은 먹지 못하고 속에 있는 딱딱한 씨를 깨어 그 안에 있는 것을 먹는다. 신기했다.
산골이라 쥐, 개구리, 두꺼비와 뱀도 많았다. 잡초가 제멋대로 자란 초가집 마당이나 천정에는 뱀과 쥐가 수시로 드나들고 심지어 쥐는 방세도 안내고 들어 와서 주인과 같이 산다. 소년은 마당가에서 작은 뱀을 막대기로 때려 한 마리 잡았다. 꿈틀거린다.
“살무사네. 살무사는 잡으만 세 동갈이 내서 직이야 덴다... 그래야 뱀이 천당에 가고 사람도 복을 받는데이.”
모전 누나가 하는 말이다. 그대로 하였다. 돌로 찧어 세 동강이 내었다. 훗날 알고 보니 살모사는 독사이고 촌사람들이 물리면 병원에도 갈 수 없어 죽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확실히 죽이라고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그 당시는 모르고 한 짓이지만 소년은 평생 잊지 못하고 죽은 뱀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막내 동생은 좁은 방안에서 밤낮 기어 다녀야 하였으니 무릎에 똑까시(심한 가시)가 박혀 고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 방바닥은 검고 낡은 돗자리였으니 그럴밖에 없었다.
한 여름도 가고 더위도 숙으려졌다. 반은 죽으로 버텨낸 쌀도 떨어졌다. 5리쯤 떨어진 큰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서 인구조사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인민위원회인지 보도연맹인지 하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여기서도 더 있지 못하고 떠날 때가 되었다.
이번에는 밤에 숨어서 이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길에는 많은 사람이 다니고 폭격 맞아 불탄 집들이나 부서진 탱크, 군용차, 포탄, 심지어는 찢어진 시체들도 보면서 걸었다. 온 천지가 쑥대밭이었다. 쌀이 없으니 짐은 가벼웠다. 소년의 가족은 도로와 산길을 섞어가며 몇 십리 걸어서 큰집 동네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사촌들 할 것 없이 온 동네가 집안인 ‘중동’마을은 낯선 사람이 와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다. 처음 피난 갔던 살목마을과는 반대쪽, 거창읍을 가운데 두고 반 바퀴 돌은 셈이다. 거창 집까지는 10리, 산길로 작은 재를 하나 넘으면 되는 곳이라 훨씬 마음이 놓였다.
먹을 것이 귀하기는 마찬가지, 아버지는 큰집 논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셨다. 소년은 동네 조무래기들과 놀기 좋았다.
“앗싸, 놓쳤어. 그 녀석 꽤 빠르네.”
머리가 수세미 같이 헝클어져 있고 남루한 옷을 입은 또래의 아이가 풀 섶에서 기어 나온 뱀을 잡으려다 놓치고 막대기로 여기저기를 두드리고 있다.
“니 어데서 왔노?”
소년이 묻는다.
“서울서 왔는데... 너는?”
“내사 거창서 왔는데 여어가 우리 큰집 동네다마.”
소년은 우쭐하였다. 아이는 서울에서 부모와 같이 피난을 오다가 북새통에 엄마 손을 놓치고 혼자 떨어져 여기까지 굴러 왔다는데 그런대로 잘 얻어먹어 몸은 성하고, 심한 고생은 하였으나 대신 마음이 강해져 풀 죽은 기색은 거의 없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동네 재실에 가자고 하였다. 어느 선생님이 와서 노래를 가르쳐 준다고 하며 모두 배워야 한단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자국
오늘도 ... 꽃다발 우에
역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어느새 소년도 자랑삼아 따라 하게 되었다.
추석이 오고 밤이 많이 익었다. 동네 집 근처에 아름드리 밤나무가 많았다. 굵은 밤이 벌어지고 송이채 떨어져 있는 것이 많아 밤 주우러 다니는 것도 하루의 일이었다.
누런 구렁이는 시도 때도 없이 담을 넘어 다니고 있었다. 참새도 많고 쥐도 많다.
추석도 지나고 맑은 가을날이다.
골목 담장 밑에 인민군 한사람이 피를 흘리며 앉아 있고 두 명이 상처를 헝겊으로 싸매 주며 돌보고 있다. 얼굴이 앳된 소년 패잔병들이다. 적군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불쌍한 동네 아이로 보였다. 어느 아주머니가 밥을 주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뒷산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또 한 패가 지나갔다. 그러기를 며칠째, 마침내 조용해 졌다.
아버지는 거창 집에 다녀오셨다. 이웃집들도 많이 돌아 왔으니 우리도 가자고 하며 이튿날 동네를 나섰다. 그 동안 거창 집은 어찌 되었을까?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집은 뼈대만 남아 폐허처럼 되어 있었다. 살림살이는 하나도 없고 창호지는 다 찢겨 방안이 훤히 보였다.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밥 해 먹은 흔적이 남아 있고 군용 물품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집을 대강 치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이튿날 소년은 아버지와 형과 함께 한들 논에 갔다. 벼가 누렇게 익어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한 짐씩 베어서 어깨에 메고 와서 훑었다. 쪄서 찐쌀을 만들어 반찬도 없이 먹었지만 구수하고 맛있다. 고마운 논이다. 그 전쟁 중에 아무 탈 없이 묵묵히 벼를 길러 준 땅이다.
5
관광 3일째. 날씨는 맑고 춥다.
설악산이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어 웃고 있다. 울산바위 촬영휴게소에서는 많은 카메라가 일제히 울산바위를 쳐다보며 핥고 있다.
“할아버지, 저 큰 바위덩어리는 너무 멋져요... 저런 바위산이 어떻게 생겼을까?”
“아주 먼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 1만 2천봉을 만들 때 천하에 잘생긴 바위는 모두 모이라고 하였는데 경상남도 울산에 있던 저 바위도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지...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빨리 갈 수가 없으니 늦게 도착하였지.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자리가 차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저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어. 저 미시령 오른 쪽에 있는 신선봉은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간신히 1만 2천봉 안에 들어갔지. 울산바위는 속상하지만 지금은 금강산 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어. 금강산의 봉우리들은 찾는 사람이 없어 외롭고 쓸쓸한데 울산바위는 사시사철 수많은 등산객이 찾아와서 감탄하고 즐거워하며 전국의 바위꾼들이 암벽등반의 보물로 아끼고 받들고 있으니 오히려 뽐 낼만 하지.”
일행은 꼬불꼬불 고개를 올라 ‘대관령옛길’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전망대에서 강릉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강릉 맞네. 저~기 보이는 큰 건물이 북한사람들이 묵었다는 호텔인 모양이야. 테레비에서 본 것 같아...”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였지만, 백암선생은 속이 뒤틀렸다. 그들은 6.25를 일으키고 지금도 적화통일만 생각하고 있는 집단이 아닌가? 우리가 수 십 년간의 피땀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애써 마련한 올림픽 잔치에 터럭만한 공도 없는 그들이 무임승차하여 특급호텔에서 대접받고 잠을 잤다고 하니 백암선생은 비위가 상하고 마음 한구석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왕 그렇게 된 바에야 평창올림픽이 남·남 갈등을 풀어 주고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조그마한 돌다리라도 놓아 주었으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떼 목장을 지나 대형 올림픽 주차장에 파킹하였다. 모든 관광객은 타고 온 차에서 일단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몸만 주경기장이 있는 횡계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횡계는 대관령면소재지이다. 올림픽 기간의 한 복판이자 설 이튿날이라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희고 검고 붉고 누런 사람들이 뒤 섞여 어지럽고 경기장 안보다 바깥 눈꽃축제장이 더 볼만했다. 썰매 장, 이글루, 각종 동물 형상들 그리고 다양한 먹거리가 즐거움을 한껏 더해 주었다.
“와~ 와~”
아이들의 함성이 터졌다. 백암선생은 5각형 올림픽 스타디움을 멀리서 보는 것으로 수십 종의 경기를 다 보았다고 치고 실제 경기는 한 장면도 보지 않았다. 눈꽃축제장에서 손자들이 즐겁게 뛰고 노는 모습을 보며 함께 놀아 주는 것이 경기구경보다 훠~ㄹ씬 좋았기 때문이다.
“이야! 이야!”
“여~기, 여기! 이것 봐!”
“하하하하...”
첫댓글 전쟁의 참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요즘 정치권은 걱정이 앞서네요.
좋은글 감사히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