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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서울형 민주시민교육사업
「나와 지역사회 함께 건강하기」 수강기 ③
글: 김태현 작가, 강연가
사진: 한영수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원
서울시가 후원하고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서울형 민주시민교육이 9월 3일(목)과 10일(목)에 종로구 사직동 주민센터에서 개최된 데 이어, 지난 19일(토)에 경찰청 인권센터 박종철기념관과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명동성당, 향린교회 등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총 23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프로그램의 개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주축이 된 이번 민주시민교육은 2014년에 서울시가 제정한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조례에 따라 2015년에 선정된 14개 프로그램 중 (사)평화박물관추진위원회 명의로 지원‧확정된 프로그램이다.
나와 지역사회 함께 건강하기
이 프로그램은 ‘나를 성찰하고 사회를 알고 함께 만들어갈 때 나 자신과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의도로 기획되었으며, 참여자로 하여금 지역사회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총 4회로 편성된 프로그램 중 9월 3일(목)과 9월 10일(목)에 실시된 1, 2강의 주제는 ‘몸 치유’ 및 ‘마음 치유’였고, 3강은 ‘사회 알기: 민주주의 현장탐방’이라는 주제로 9월 19일(토)에 실시되었으며, 4강은 ‘함께 해보기: 직접민주주의 실습’이라는 주제로 10월 3일(토)에 실시될 예정이다.
특히 3강은 강의실 밖으로 나가 경찰청 인권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 박종철 기념관에서부터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과 명동성당을 거쳐 향린교회까지 민주주의의 대표적 명소들을 4시간가량 탐방하는 형식으로 편성되어 시민교육의 현장성을 강화했으며, 4강은 마을예산을 직접 짜보는 실습을 통해 직접 및 참여민주주의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성되었다.
고문의 추억 :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
토요일 오후의 남영역 인근 골목 안, 칙칙한 색상을 한 건물 한 채가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강 첫 탐방지인 이곳은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및 축소 은폐 사건’이 발생한 곳이자 남산(안기부), 서빙고호텔(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함께 ‘간첩 만들어내기’로 악명을 날렸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
인권 말살의 기억을 가진 인권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
1층에 위치한 영상실, 오늘의 강연자 두 분 중 한 분인 김성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회장님의 간단한 인사말에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한 6월 항쟁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87년 6월 항쟁 당시의 거리 모습, 시위대와 대비되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의 모습, 그리고 객석의 가벼운 신음들.
삼삼오오 영상실을 나서며 15분가량의 영상을 본 소감을 한마디씩 흘려보냈다.
“눈물이 난다.”
“뭉클하다.”
“이걸 추억이라 불러야 하나 감회라 불러야 하나.”
“잊어버린 것 같았는데, 오열의 반복이다...”
영상실을 나선 참여자들이 본격적인 탐방을 기다리며 현관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영수님의 카메라 앵글이 별것 아니라는 듯한 몸짓, 외면하는 듯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포착해냈다.
영화 ‘남영동 1985’의 실제 주인공이자 시대가 낳은 상징적 두꺼비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 함께 바로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말로 다 못할 고초를 겪어야 했던 연성수님과 권형택님이었다.
고문의 당사자, 연성수님과 권형택님
떠오른 인권 말살의 기억을 회상하고 계시는 걸까, 아니면 기억 지우기에 몰두하고 있는 스스로를 애써 외면하고 계시는 걸까... 푸르던 젊은 시절을 고통으로 함께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따로 떨어진 곳에서 지우기인지 외면인지를 함께하고 있었다.
고문의 추억이 담긴 건물 내부 탐방은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님이 맡아주셨다.
“민주화운동을 해 오신 여러 선배님들과 시민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종철이랑 친한 친구였습니다. 저는 촌 출신이라서 뭘 잘 못하고 어리버리했는데, 그 친구는 재능이 참 많았어요. 기타도 잘 치고, 타자는 또 얼마나 잘 치던지. 그때는 타자만 잘 쳐도...”
육중한 철문과 탐방을 인도하는 김학규 사무국장님
“이 철문은 지금은 고정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탱크 굴러가는 것 같은 굉음을 울리면서 여닫혔습니다. 피조사자들이 두건을 뒤집어 쓴 채 이곳으로 끌려오는 순간부터 간이 쿵 내려앉게 만드는, 그러니까 겁을 주는 음향장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어서 그는 참여자들을 중앙 현관이 아니라 피조사자 전용으로 설계된 건물 뒤편 쪽문으로 인도했다.
“대문을 통과한 피해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끌려왔습니다. 철 계단이 보이시죠? 경찰은 탐방객의 안전을 핑계 삼으면서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만, 여길 올라가 보시면 왜 그런지 금세 이유를 아시게 될 겁니다. 한 분씩 천천히 올라가 보실까요?”
사람의 길, 빨갱이(?)의 길
탐방객들이 하나 둘 계단으로 다가섰다. 반지름이 1m도 되지 않고 최소한의 빛만 들어오게끔 설계된 계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극, 텅, 텅, 차가운 마찰음이 가슴을 찔러왔다. 더럭, 겁이 났다.
조금 오르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성수님은 그때까지도 우두커니 계단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마도 오래 전에 가슴을 찔러왔던 소리를 듣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을 알아차렸던지, 임은빈 민청련 사무국장님이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 계단 보니까 제 심장이 벌렁거려요.”
“응. 나도... 근데 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갔던 거 같은데.”
정말로 그랬을까? 경찰이 독종 빨갱이를!? 기억 지우기 아니면 외면이 틀림없어 보였다. 전의식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을 ‘인권을 말살당한 기억’이 의식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무의식 층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계시는 건 아닐까... 가슴이 아려왔다.
“여기 얼마나 계셨어요?”
“응. 나 말이야? 한 21일. 아...”
임은빈님의 물음에 답하는 연성수님의 음성이 심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지하 감옥 던전을 떠올리면서 오르는 계단은 곧바로 5층까지 직행할 수 있을 뿐, 각층으로 통하는 문 따위는 없었다.
“계단을 오르고 나면 방향감각을 잃습니다. 몇 층에서 조사를 받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죠. 이 건물은 7층인데, 9층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피해자도 계시니까요. 말하자면 이 계단은 바깥과 이곳을 철저하게 단절시키는 세탁 장치였던 셈입니다.”
5층. 넓지 않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수없이 많은 ‘인권 말살’과 ‘간첩 만들기’가 자행되었을 16개의 방들이 탐방객들을 향해 음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 문에 보시면 아파트 철문처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도어 스코프가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 도어 스코프는 안에서 밖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도록 거꾸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감시용이죠.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등 스위치도 여기 밖에 있습니다. 밤에 밖에서 전등을 껐다가 켰다가 하면, 이렇게요, 그러면 공포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고문 기술자들이 그런 장난을 많이 쳤다고 합니다.”
탐방객들이 김학규 사무국장님의 설명을 듣는 동안,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복도를 걷는 사람이 있었다. 권형택님이었다. 예전, 두건을 쓴 상태로 계단을 올라선 다음 세었던 발걸음 수를 다시 세고 계시는 걸까.
“그리고 천정 모서리에 보시면 검은 유리가 비스듬히 달려 있죠? 저 안에는 피조사자의 행동을 녹화하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치들 역시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먼저 종철이가 죽은 방으로 가보시죠. 저쪽입니다.”
단 하나 보존되어 있는 고문의 현장, 509호실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성수님의 발길이 바빠지고 있었다. 509호실 문 앞, 권형택님이 이미 도착해 복도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얼굴, 방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는 핏기가 서려 있었다.
“선배님, 느낌이 어떻습니까?”
“그 뭐... 그렇지 뭐... 그때 그 느낌이 오네. 허허.”
그는 공포가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연성수님이 가만히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평소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표정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시민들과 후배들 앞이라 태연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심장에 각인되어 있다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고문의 기억을 머리가 어쩔 수는 없지 않은가.
“형택아, 방이 좀 컸던 거 같은데...”
“예. 좀 큰 방이 있어요.”
“그때 근태형 여기 있을 때, 너 나랑 복도에서 마주치지 않았냐?”
“그래요?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너 본 거 같은데. 너, 그거 기억 나냐? 그때...”
두 사람은 다른 탐방객들과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고 있었고, 탐방객들은 조용히 나누는 그들의 기억을 엿들으며 과거로 끌려들어갔다. 면적 13㎡, 폭 15cm가량의 창문, 나사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책상과 의자, 간이침대는 그렇다 쳐도, 길이가 120cm밖에 안 되는 욕조는 정말로 섬뜩해보였다. 그 욕조는 칠성판과 함께 물고문, 전기고문에 쓰였던 도구가 분명했다.
“형택아, 한번 들어가 볼까?”
“예, 허허. 그러시죠.”
......, 그리고 ......
“이제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으로 가시죠. 다른 방에 비해서 두 배 정도 큰 방인데요, 저기 512호실이 바로 김근태 의장님이 고문당하셨던 현장입니다.”
뱀이 두꺼비를 삼킨 현장, 512호실
“연사부, 이방 같은데?”
“응. 여기 맞아... 형택아, 너 괜찮냐? 난 심장이 막 뛴다야...”
뱀도 두꺼비도, 고문의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없는 현장
그러나 김학규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흔들리던 연성수님의 표정은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설명이 끝나자, 권형택님과 기억을 나누던 연성수님이 당시를 회상하며 과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채로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군복을 줘요. 기를 꺾으려는 의도였겠죠. 난 안 입었지... 놈들이 ‘허’ 하고 내려다보더니 바로 취조실로 집어넣는 거야. 난 바로 단식을 선언했지. 열흘 단식을. (시간을 벌어야 했거든.) 물도 안 마셨어... 근데 닷새쯤 지났나? 도저히 목이 타서 참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저기 화장실 물을 조금씩 먹어가면서 버텼지. 저 위에 CCTV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근데 이놈들이 모르는 척 하더군. 허허...”
그의 이야기는 사료史料였다. 아니, 연성수라는 인간 자체가 바로 역사였다.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시민들과 민청련 후배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탐방객들에게 설명만 해주었을 김학규 사무국장님의 눈빛 역시 반짝반짝.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깨어나 보니까 두 놈이 들어와서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중에 한 놈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 정말 사탄같이 생긴 거야. 몸은 비쩍 말랐는데 눈에선 사악한 빛이 줄줄 흘러내리고. 아, 사람이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그 순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 두려운 마음보다는 신기하다는 마음이 먼저 들데? 허허... 또 한 놈은 살이 뒤룩뒤룩 쪄가지고 불독처럼 양 볼이 축 늘어졌는데, 이놈은 영화에서 보던 일제 악질 순사, 딱 그대로인 거야. 그놈이 마구 두드려 패면서 사람 마음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게 만들어놓고, 그러면 사탄같이 생긴 놈이 슬그머니 들어와서는 온갖 감언이설로 구슬리는데, 그 수에 안 넘어가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고통스러운 기억, 그러나 구수하게 풀어내는 그의 입담 덕에, 잔뜩 경건, 진중해 있던 탐방객들의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두 놈이 감시를 하면서 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거야. 딸이 이번에 대학 가려고 입시를 본대. 그런데 엄청나게 걱정을 하는 거야. 그놈들 하는 말이 우리랑 똑같은 거야. 사악하게 악마 짓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랑 똑같은 거야. 그래서 아, 저놈들도 인간이구나, 했지. 허허허...”
한숨을 팍팍 내쉬며 듣고 있던 어느 시민이 질문을 던졌다.
“그때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버티셨어요?”
“고문당하면서 물 먹은 거, 맞은 거, 그런 거는 별거 아니고, 어머니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연로하신 어머니가 혼자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저놈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쓰면 족히 10년은 감옥에서 썩을 테고, 그러면 다시는 어머니를 못 보겠구나, 그치만 버티면 2, 3년쯤 살 거고, 그러면 어머니를 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버텼어요... 형택아, 넌 어땠냐?”
권형택님도 자신의 기억을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그 당시에 여권주라는 친구가 같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건장하고 점잖은 친구라면서 정치를 하면 당수는 아니고 보스 정도는 할 만한데, 뭐 그렇게 말해주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말이죠, 에... 잠을 못 자는 게 제일 힘들었고, 또 자술서, 그걸 쓸 때 힘들었어요. 내가 자술서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못 썼거든.”
그의 말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술서 이야기와 건물 설계에 대한 이야기, 기차 이야기, 자유 이야기, 그리고 다시 연성수님.
“난 여기가 어디쯤인지 대충 짐작은 했어요. 이 작은 창문으로 기차소리가 들렸거든. 어딘지 알 것도 같았어요. ...... 사람들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 창밖 턱에 새가 앉아 있는 거야. 그걸 보는 순간, 난 자유를 느꼈어요. 그런데,”
목이 메는지 그의 이야기가 멈췄다. 잠깐의 숨 돌림과 조금 더 긴 울컥거림. 그런 후에 한층 담담해진 어투가 이어졌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 우리도 힘들었지만, 밖에 있던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정말로 힘들었다는 거.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해요. 안에 있는 우리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참고 견디고 나름 수까지 써 가면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밖에 있는 아내들은...”
고통의 공간, 채워지는 다짐
활력과 생기의 아이콘답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백완승님이 한숨 같은 기억을 조그맣게 옹그렸다.
“나도 5‧18때 성북서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잖아...”
“하지만 우리 아내들, 민청련 여성 동지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는 아이 들쳐 업고 생업도 내던진 채 두 발이 터지도록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우리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던져가면서 독재세력들과 싸웠거든요...”
“여러분, 그들이야말로 진짜 민주투사였습니다. 민청련 남자들은 민청련 여성들에 비하면 정말로 편하게 싸운 거지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잃어버린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전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후 민주정부 수립 과정에 우리 남자들이 여성 동지들의 헌신적이었던 투쟁을 망각하고, 그 잘난 존심 싸움을 하는 통에 민심도 잃고, 이름 없는 시민들까지 나서서 피눈물로 쟁취한 민주주의도 잃어버린 겁니다.”
연성수님과 권형택님, 두 마음이 풀어내는 고통 따라 시민들과 두꺼비들의 마음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고, 그럼에 따라 고통만 가득했던 방안은 민주주의를 향한 다짐으로 채워져 갔다. 뱀에게 먹혀버린 두꺼비들이여, 그런 두꺼비들을 가슴 아파하는 시민들이여, 고통을 딛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진일보를 향해서!
5층을 둘러본 탐방객들은 ‘박종철 기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 4층으로 내려가 6월 항쟁 당시의 사회상을 담은 사진들과 등사해서 만든 피(삐라), 고문치사 사실을 외부에 알린 이부영 전 의원의 자필 편지, 그리고 박종철 열사의 유품 등을 관람한 후에 놀이동산의 공포 체험장 같은 건물을 나왔다.
“여기 주춧돌에 김치열이라고 새겨져 있죠? 이 사람은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서 중앙정보부 차장과 검찰총장에 내무부장관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건물의 내력과 친일 경찰에 관해 안내하는 김학규 사무국장님
“그래서 이 건물은 단순히 고문의 현장만이 아니라, 친일의 역사부터 지금에 이르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혹시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는 분 계세요?”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평가받던 김수근입니다. 그 사람이 지은 건물로는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서울지방법원 청사, 옛날 남산타워호텔, 세운상가, 혜화동 샘터 사옥 같은 게 있습니다. 정말로 대단했었죠. 그런 사람이 치욕적이게도 이처럼 정교한 장치로 가득한 인권 유린 건물을 지었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하죠.”
“그 사람,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들, 젊은이들이 이곳에 오면 이 이야기를 꼭 합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능력이 엉뚱하게 쓰일 수 있다고, 그런 얘기를 해주곤 합니다.”
“이 건물을 부수려는 시도는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경찰 동호회인 경우회 있잖습니까, 한때 거기서 웨딩홀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함세웅 신부님이 엄청 노력해서 가까스로 막아냈죠.”
김학규 사무국장님의 안내가 끝난 뒤, 김성환 회장님 주도로 박종철 열사 및 고문 희생자에 대한 묵념 시간을 가졌다. 묵념을 끝낼 즈음, 덜컹 덜컹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음을 내는 대문을 지나 가슴을 후비는 철 계단을 올라선 다음, 온갖 고문으로 인격적 파멸 상황에 놓였던 피해자들, 그들에게 기차소리는 고향이 아니었을까, 엄마와 아빠와 아내가 아니었을까.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도착한 남영역. 고개를 들어보니 무고하게 끌려가서 유명을 달리했던 민주인사들이 기차 편에 가족들에게 실어 보냈을 수많은 안부들이 대공분실 벽면을 뒤덮고 있었다.
“엄마,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버지, 며칠 있다가 내려갈게요.”
“여보, 애들이랑 잘 지내지? 미안해...”
떠나지 못한 안부
유월민주항쟁의 진원지 : 성공회 대성당
두 번째 행선지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오늘의 두 번째 강연자인 이난현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 자문위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남영동에서 가져온 분통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참여자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민주, 민주, 민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 강의 조정 중인 김성환님, 이난현님 ▲ 김승국님
▲ 홍진희님 ▲ 이광일님
▲ 이승현님 ▲ 이병걸님
▲ 이광희님 ▲ 모향숙님
“안녕하세요. 두 번째 강의를 맡게 된 이난현입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성당을 둘러보시기 전에, 오늘 마침 중요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인데, 일본 홋카이도로 끌려가셔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돌아가신 115위의 유해가 이제야 고국으로 돌아오셨답니다. 홋카이도 아사지노를 출발해서 처음 끌려가셨던 길을 되밟아 오셨는데, 슈마리나이, 비바이,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를 거쳐서 부산에서 진혼제를 치렀고요, 이제 서울로 돌아오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장례식을 치르고 내일 파주 용미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신답니다. 그분들 잠시 뵙는 게 어떨지요?”
“신원은 모두 확인이 되셨나요?”
“몇 십구만 확인되었고, 확인 안 된 분들이 훨씬 더 많답니다.”
친일의 현장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마주친 일제강점기의 고통. 참여자들의 얼굴은 더 굳어져갔다. 온 나라가 일본 아베 정권의 도 넘은 우경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귀향을 반겨줄 이가 적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참배를 위해 설치된 천막 앞에는 달랑 ‘울산노동자 겨레하나’ 명의의 화환 하나만 놓여 있었다. 환향녀가 떠오르는 을씨년스러운 조국, 역사의 반복...
죄송합니다. 고국 땅에서 고이 잠드소서
강제노동 희생자 참배를 마친 후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석이 자리하고 있는 성당 뒤편으로 이동했다. 김성환 회장님이 영국성공회와 대한성공회 소개를 시작으로 유월민주항쟁의 간략을 설명했다.
“영국성공회는 캔터베리를 중심으로 교단이 짜여 있고, 세계 각 지역에 관구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주로 강화도에서 포교활동을 했는데, 대한성공회 역시 캔터베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현재 주교로 계신 김성수 주교님의 고향도 강화도입니다. 성공회는 신부의 결혼을 허용할 만큼 로만 가톨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움직일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내주기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성공회가 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만, 장소를 제공해주었다는 것,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을 내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성수 주교님은 그전에 NCC에서 활동을 하셨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주장해서 장소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유월항쟁의 신호탄을 이곳에서 쏘아 올릴 수 있었던 겁니다. 신호탄은 분단을 상징하는 42번의 종소리였습니다. 신호탄이 울리자, 모든 사찰과 교회가 42번의 종을 울렸고, 차량들도 경적을 울렸었죠.”
유월민주항쟁진원지에서 설명을 듣는 김치국, 강산 부자
설명이 끝난 후, 참여자들은 유월항쟁 당시를 기억하며 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들이 전투경찰들, 즉 정권을 농락했던 골목길을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필자는 임은빈님, 김치국님, 그리고 장애가 있는 그의 아들 강산이와 함께 걸었다.
“김치국 선생님, 6월에 뭐하셨어요?”
“저는 군에서, 전두환이 수방사 사령관 할 때 근무하다가 막 제대를 했었지요.”
“군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30개월 내내 총검술 한 번 안 하고 온통 폭동진압훈련만 했었죠. 제가 근무하던 당시에는 어느 부대도 출동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전경이 출동했거든요.”
“그 긴 세월을 진압훈련만 하셨다고요?”
“예, 진압훈련만... 인생을 허비한 세월이었지요.”
인도를 따라 걷는 동안, 휠체어에 앉은 강산이는 덜컹덜컹, 울렁울렁. 특히 장애우용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하도 계단을 따라 이동할 때는 모두가 힘을 합쳐서 강산이가 탄 휠체어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2015년 명동성당 가는 길은 ‘국민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을 절감하는 길이었다. 골목길 코너에 접어들자, 임은빈님이 유월항쟁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여기다. 그때는 사과탄이 발밑에서 터져도 고무줄놀이 하는 것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사과탄 뛰어놀던 길과 명동성당
“허허... 그랬었죠. 그땐 시위도 문화였어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여기 이쯤에 노점상연합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머, 그래요?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세요?”
“제가 노점상을 했었거든요. 노점상 연합회, 정말 강성이었죠. 그런데 거리 풍경을 보니까 이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말아먹고 있네요.”
운동권의 아지트였던 먹자골목(패널골목)을 지나 도착한 명동성당. 이곳은 80년대 초반부터 이미 시위의 마지막 집결지였고, 광주민중항쟁을 세상에 알린 출발지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속칭 ‘속이구(6‧29선언)’라는 우회로를 택하게 만들었던 민주화의 성지다.
명동성당 뒤쪽 광장. 참여자들이 하나둘 모이는 동안, 시위 당시 상황실장을 맡았던 김두일님이 그때의 기억을 들려주셨다.
“...... 그래서 순발력 있는 사람들이 시위를 계속 이어가자면서 명동성당으로 집결하기로 하고 급히 매직으로 방을 붙였거든요. 처음에 약 700명이 들어왔는데, 그때 우리 민청련이 들어왔더라면 대중운동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5박6일 동안 시위를 했는데, 호헌철폐 독재타도 외치면서, 참... 개인적으로는 그때가 육체적으로 제일 힘든 운동기였던 것 같습니다.”
“유월항쟁의 의미와 한계를 규정해 보신다면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때 항쟁은 혁명으로 향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사람들, 시민들의 힘이 정말로 컸다, 그래서 현재 굉장히 퇴행적인 시기에 살고 있는데요, 각성할 수 있으면 쟁취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요, 그런 의미와 더불어서......”
협동놀이를 지도하는 이난현님
김두일님의 회상이 끝날 즈음 모든 참여자들이 도착해 경청하고 있었다. 이어서 이난현 자문위원장님이 잠시간 당시를 회상한 후, ‘협동놀이’를 시작했다. 앗싸아~, 첫 강의 때 누렸던 공감의 즐거움을 협동으로 즐겨볼까나!
“여러분, 현대를 살면서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오늘은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놀이를 통해서 느껴보겠습니다. 먼저, 두 분씩 짝을 지어보세요.”
놀이 규칙은 간단했다. 두 사람의 왼발과 오른발이 가상의 끈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하면서 함께 잘 걸어갈 수 있으면 되는 것.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끈이라는 물리적 재료로 묶여 있다면 구령을 붙이면서 한발씩 떼어놓기만 하면 될 텐데, 가상의 끈으로 묶여 있으니 짝이 언제 출발할 건지, 출발을 하더라도 짝이 얼마만큼 내디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이런 이런... 협동 역시 공감이로군.
발 크기만 재지 마시고요... ^_^
다리 불편한 사람처럼 뒤뚱거려가며 연습한 끝에 겨우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협동? 그까이 꺼.” 하는 찰라, 이난현님의 장난기 어린 명령이 떨어졌다.
“잘하시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네 분씩 짝을 지어서 해볼까요? 호홋...”
네 사람씩 짝을 지어 섰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걸음을 떼는 팀이 없었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발을 내딛으면 가운데 있는 사람은 폴짝 뛰어야 하는 상황. 어이 참... 이거 왜 이렇게 계산이 안 되지?
주변에 앉아 있던 시민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오랏줄에 묶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팔짱만 낀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참여자들을 보면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길 가던 아주머니 한 분은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엉거주춤 서서 용까지 쓰시기도.
“어느 발이 나가야 하는지 어느 발이 기다려야 하는지 천천히 맞춰보세요.”
협동을 해야 해, 협동, 협동...
▲ 이 발을 먼저 떼시고... ▲ 좋았어, 영차 영차
▲ 우리만 협동하느라 이웃 팀과 쿵! ▲ 김두일님의 ‘연행 모드’ 퍼포먼스
▲ 아, 재밌겠다... 아주머니, 함께 하실래요?
같은 팀원끼리 협력하기도 어려운데, 어쩌다 잘 걸어간다 싶으면 이난현님의 계산된 자리 배치로 인해 이웃 팀과 부딪치고, 계산이 안 되어 무작정 걷기만 하는 가장자리 팀원 때문에 가운데 있는 팀원들은 폴짝 폴짝. 또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보조를 맞춰보겠다며 ‘연행 포즈’를 풀지 않는 김두일님... 한마디로 난장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연습에 차츰 보조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럼 뭐하나... 다음 도전과제는 9명인데. 으윽... 그런데 일단 보조를 맞추고 나니 몇 명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두 팀 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성공! A팀 중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하고 축가를 부르자, B팀에서 “협동하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하는 답가가 흘러나왔다. 마치 민주화운동에 각자 매진해온 두 단체가 하나 되는 듯한 느낌. 협동 꽃이 활짝!
9명씩 마주선 다음 보조를 맞춰서 앞 팀을 향해 행진하게 하는 방식은 어쩐지 잘 계산된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잠시 후 그 예상은 적중했다.
“자, 이제 두 팀이 앞을 향해서 함께 걸어갈 겁니다. 준비되셨나요? 출발!”
대오를 형성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출발
▲ 그러나 이 분은 계속 ‘연행 모드’ ▲ 나 좀 구해줘! 하지만 즐거워요~~
혐동놀이는 모든 참여자가 손에 손을......이 아니라 발에 발을 맞대고 일렬로 서서 마음을 맞춰가며 행진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자, 다음 탐방지는 여기서 100m도 안 떨어져 있는 향린교회입니다. 향린교회는 국본이 결성된 곳인데요, 경찰이 명동성당이랑 기독교회관, 성공회성당 같은 곳을 사전에 모두 봉쇄해버렸지만, 유일하게 빠뜨렸던 곳, 거기가 바로 향린교회입니다. 거기서 뵙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여기 이 계성여고도 보시기 바랍니다.”
계성여자고등학교. 경찰에 의해 겹겹이 봉쇄된 시위대를 향해 학생들이 편지가 담긴 도시락을 던져줬다는 학교다.
‘언니 오빠들에게 보냅니다. 많은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 꼭 보고 싶은 언니 오빠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웃으며 보고 싶습니다. 안녕 - 동생들 드림.’
비록 성당 문화관 증축으로 인해 학생들이 도시락을 던져줬다는 창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학교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당시 시민들의 성원을 느낄 수 있었다.
민주명문 계성여고
국본의 탄생지 : 향린교회
1953년 5월 17일, 쓰레기 더미로 변한 서울 한복판에 평신도들이 모였다. 그들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무능했고 교권싸움과 교파분열에만 몰두했던 기성교회들을 질타하며 작은 교회 공동체를 세웠다.
생활공동체, 입체적 선교공동체, 평신도교회,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 정신에서 보듯 평신도들은 ‘향기 나는 이웃’, 즉 향린香隣이 되기로 했으며, 그 정신에 따라 유월항쟁 당시 전국 2,191명의 발기인을 대표하는 계훈제, 박형규, 최형우, 양순직, 김승훈 등 150여 명의 인사들이 민주헌법국민운동본부 결성대회를 가질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향린, 끝나지 않은 민주화운동
‘국가보안법 철폐’ 현수막과 ‘세월호 애도’ 현수막, 그리고 유월민주항쟁기념 동판이 일행을 맞았다. ‘국가보안법 철폐’ 현수막을 아직까지 걸고 있는 단체는 이곳뿐이며, 그 현수막의 나이는 자그마치 수십 년이란다. 민주의 향기가 듬뿍~~
국본 지도부가 결성선언문을 가다듬었을 2층의 한 공간, 민주명상교육의 대가 연성수님의 지도로 ‘몸 풀기’ 및 ‘이완 운동’ 시간을 가진 다음, 이난현님의 제3강 마무리가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걷느라 고생들 많으셨삼~
“이번 시간에는 나눠드리는 일회용 접시에 의미를 부여해보는 시간입니다. ‘탐방에 대한 생각 나누기’라고 이름을 지어봤습니다. 각자 자신을 생각하면서 생각이 떠오르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그리시면 됩니다. 접시 가운데에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시고, 위쪽에는 다른 사람이 불러주면 좋겠다 싶은 별명을 쓰시면 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유월항쟁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를, 오른쪽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계획이신지를 쓰시고요.”
‘탐방에 대한 생각 나누기’를 진행하는 이난현님
▲ 이게 난가? ▲ 어느새 친해진 임은빈님과 강산이
▲ 너무 예쁜감요? 예, 반칙이거든요. ▲ 여기 우리가 있소이다!
접시에 앞트임 뒷트임까지 모두 해버려(?) 너무 예뻐진 백승완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비교적 유사하게 자신의 모습을 묘사했다. 각자에게 1분의 발표시간이 배당되었지만, 유월항쟁의 기억과 미래 계획이 어디 1분에 풀어낼 수 있는 것이던가.
최소 3분에서 길게는 10분까지 저마다의 기억과 계획들이 발표되었고, 교감이 이어지는 동안 참여자들은 ‘홍동지’라고 불리기를 바란다던 홍진희님의 희망대로 진짜 친구, 진짜 동무가 되어갔다.
“이제 오늘의 일정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분도 좋은데 우리 아람샤샤 그거나 한번 하죠!”
“아, 그럴까요? 여러분, 어떠세요?”
“좋죠오!”
“예, 합시다!”
1강 때 존경을 표하며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풀어주었던 놀이, 아람샤샤. 참여자들은 마치 오징어땅콩이나 술래잡기에 들뜬 아이들처럼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아람샤샤 아람샤샤 굴리굴리굴리굴리 람샤샤, 아람샤샤~~”
탐방 도중 업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권형택님, 그리고 뒤늦게 참석한 서울대두레협동조합의 정병문 이사장님이 문 앞에 서서 참여자들이 표하는 존경을 환하게,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존경의 아람샤샤를 끝으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다섯 시간가량 진행되었던 제3강, 민주주의 현장탐방이 모두 종료되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