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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7-8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응답 받고 누구는 응답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는 응답 받고 누구는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각자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개 사람들은 열심히 뜨겁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면, 기도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한 말은 사단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성도들이 뜨겁고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 주어지거나,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성도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 요14:14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 15:16에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3) 또한 16:23-24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금식하며, 물질을 드리며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이 있음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예수께서 바로 나를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고,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 . . . . 약5:17-18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루 세끼 밥 먹고사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도하면 하늘 문이 닫히기도 하고, 다시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기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했을 때는 응답은 커녕 아무런 변화도 없더니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엘리야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쓰임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습니다. 크든 작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 쓰임 받든지, 집사로 쓰임 받든지, 아니면 평신도로 쓰임 받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 받은 종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틀린 말인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이 말도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편애하는 분이 아닙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을 많이 한다고 더 사랑하고 일을 조금 한다고 조금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만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달란트만큼 하는 것입니다. 달란크가 없는 사람이 달란트가 많은 사람과 똑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가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목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키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대로,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 . . . . 그것은 예배의 문제 그러면 왜 누구의 기도에는 응답이 넘치고, 누구의 기도에는 응답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이든지 기도한 사람이 문제이든지 둘 중의 하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문제라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으면 인간 편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기도하는 주된 내용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교회 부흥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대부분의 제목은 물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관련 있습니다. 직장에서 잘되게 해달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잘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물질적으로 어려움 없이 사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대부분의 것이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여호와의 능력이 어떤 사람과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야훼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나니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전심으로”라는 말은 신약에 와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분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서 “전심”라는 말은 바로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를 찾으십니까? 어떤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까?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배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와 예배자,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배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목이 터저라고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는 이유는 예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목이 터저라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예배에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고서는 예배를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한 번도 예배를 빼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못했다면, 단 한차례도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차례의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그것은 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신앙 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고, 못 받고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배에 사업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를 성공적으로 드릴 수만 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한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삭은 한 해 농사를 지어서 백 배나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누가 한 해 농사를 지어서 백 배나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한 해 사업을 통해서 백 배나 되는 사업 신장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땅에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는 일마다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가 친척이 전혀 없는 이방인의 땅에 살면서도 이방인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그러면 이와같이 이삭의 복을 받으며, 기도 응답을 받으며,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예배, 응답을 받기에 합당한 예배에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응답 받을 만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응답 받을 만한 기도, 응답 받을 만한 예물, 응답 받을 만한 찬송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응답 받을 만한 예배 1) 강원도 산골에 사시는 한 집사님은 서울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직장관계로 강원도로 이사간 집사님은 어릴 때부터 출석하던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강원도 골짜기에서 서울까지 매 주일마다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일 새벽 4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시외버스를 타면 10시에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고 교회에 도착하면 겨우 11시 예배에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2) 신학교 시절에 함께 어려움을 같이 하던 과장님이 있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봉사하고 계시는데 그분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훈련이 있는 경우는 제외하고 반드시 주일마다 서울로 올라오곤 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교회 학교 부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절을 가리지 않고 토요일 저녁이든지, 주일 새벽에는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타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장님의 정성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직장을 신학교로 옮겨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교회를 들어서면서부터 은혜를 받기 시작합니다. 찬송 한 절 한 절을 부를 때마다 은혜가 넘치고 목사님의 설교 한마디 한마디가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고 돌아서서 다시 몇 시간을 걸려서 겨우 집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고 누구의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3) 금옥 제일 교회에 다니는 이정애 권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금옥 제일 교회 창립멤버로 금호동에서 삼양동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서두릅니다. 누구보다 먼저 교회에 도착하셔서 준비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배에 늦는 사람은 대부분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엎어지면 코 닿을 때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늦는 사람은 꼭 그만큼 늦습니다. 많이 늦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시간을 지키는지 언제나 꼭 같은 시간만큼만 늦는 것입니다. 5분이 늦는 사람은 언제나 5분이 늦습니다. 10분이 늦는 사람은 언제나 10분이 늦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밤늦게까지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어떻게 주일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다 보고 어떻게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토요일이면 비디오 테이프를 몇 개씩 빌려다 보곤 합니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응답하실 만한 예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거리상의 이유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 멀리서 교회에 도착하기까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들이 지겹고 가기 싫은데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집을 나서면서부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생에 단 한 번의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응답 받을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답 받을 만한 예물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 물질적인 필요와 관계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만한 예물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이 담겨져 있는 예물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 제사의 변형이 오늘날 예배입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예물이 있었습니다. 죄를 대신하는 예물이 있었습니다. 감사의 예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소득의 일부를 드리는 예물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러한 예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했었습니다.
예물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많은 지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 사함의 은혜와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과 마음이 담긴 예물을 받으시고 그들을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말은 많이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응답하실 만한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면서도 응답 받을 만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예 드리지 않는 것이 낳았을 법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이 드렸음에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의 반을 드렸음에도 오히려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예물을 드리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노파는 겨우 두렙돈 하나를 드렸음에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교회 앞에는 약국이 있는데, 그 약국 주인은 그 교회 성도들을 그렇게 싫어한답니다. 그래서 약국 주인에게 왜 그렇게 교회 성도들을 싫어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약국 주인이 짜증스럽게 대답하는 말이 주일만 되면 성도들이 그 약국에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왜 몰려드느냐? 약을 사기 위해서 몰려드는 것이라면 약사가 그렇게 싫어할 이유는 없었겠지요. 약국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 원 짜리 잔돈을 바꾸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헌금시간에 천 원을 내기 위해서 미리 약국에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한국에서 천 원을 가지고는 별로 살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천 원 짜리 한 장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한국은 추석명절입니다. 만약 아이들에게 용돈으로 달랑 천 원만 준다면 아이들의 반응은 눈에 보지 않아도 선합니다. 아마도 기가 막혀할 것입니다. 천 원이면 귤이 네 개입니다. 콜라 한 병도 안되고, 먹을 만한 배는 그나마 하나도 살 수 없습니다. 천 원 짜리는 거지들도 받지 않는 세상입니다.
광주에 있을 때 교회에 있다 보면 거지들이 동냥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럴 때마다 천 원 짜리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거지는 천 원 짜리를 주면 “내가 거지냐?”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머니 한쪽 구석에서 꾸겨진 채로 쳐 박혀 있던 천원짜리 한 장을 하나님께 드려놓고는 30배, 60배, 백배, 천배,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도록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사업장이 잘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복이 넘치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목사입장에서도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배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마음은 안 그런데 하다 보니까 늦었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마음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준비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했다면 응답 받을 만한 헌금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쁘다 보니까 준비 없이 시간 떼우는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어쩌다 보니까 예배 시간에 헌금 드리는 것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만 드리더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단돈 천 원을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만한 합당한 헌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천하를 다니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을 만나면, 당신이 축복하실 만한 성도를 만나면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