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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久山의 日王 모독 사건과 대종사의 일경 覺書 요구 거부
원불교신문 [960호] 1998년 03월 27일 (금)
박용덕〈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3.1 만세운동과 파리장서(Pari 長書) 사건
일제치하 성주(星州) 사람들의 기개를 유감없이 드러낸 사건은
유학자 송준필과 김창숙에 의해 주도된 파리장서(Pari 長書) 사건이다.
충숙공 송희규가 벼슬을 버리고 고산동에 낙향한지 4백년만에
일문의 단합된 올곧은 충의열의 기개가 3.1만세운동으로 표출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공산 송준필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안동 향교로 달려가
그곳 유림들과 을사 5적을 참하는 소(斬五賊疏)를 올렸으며,
한일합방(韓日合邦)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코자 하였으나
가친(家親)의 만류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공산은 광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가 부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부친상 이후 그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지내다가
기미년 3.1 만세운동을 기하여 그 기개를 떨친다.
공산(恭山)을 중심으로 종택(宗宅) 백세각에 모인 친족들은 모두 그의 문하생들로
독립청원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공산은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림(儒林)에서 한 사람도 참여치 못한 사실이
수치스러운 일임을 설파하고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제출키로 하였다.
그는 제자 송규선을 거창의 거유 곽종석에게 보내 그 뜻을 전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토록 하는 한편, 3남 수근을 장석영에게 보내 상의토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내통고문을 작성하여 문하생들로 하여금 유림(儒林)의 서명을 받도록 하였다.
10여일만에 전국 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은 독립청원서는
성주 유생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상해로 가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발송하였다.
4월2일 성주 장날, 수천 군중은 목이 터지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로 공산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독립청원 운동까지 탄로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이때 고산동 송씨 문중으로 투옥된 사람은 거의 공산 문하생들이었다.
송규선과 조카 회근은 1년 6개월, 문근, 수근, 우선, 훈익 등은 각기 1년의 옥고를 치뤘고,
인집(송성찬 교무 부친)과 천흠은 궐석재판으로 1년과 10개월의 선고를 받았으나 피신하였다.
이들 모두 고산동 사람이며 독립유공인으로 추서되었다.
4쪽으로 된 구산 송벽조 교무의 재판기록인 「형사재판서 原本」 일부
대종사, 민족의식 있는 제자에게 한 날 한 시에 법호 줘
1919년 봄, 고산동 백세각에서 공산 문도들이 주동하여 파리장서 연명운동을 적극 전개하는 한편
성주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때,
재 너머 소성동에 사는 동문생 구산은 그들의 의거를 지켜보았다.
이 해 그는 장남 정산의 일로 노심초사하였고,
동년 여름 그는 전라도로 가 대종사를 만나고 가을에 영광으로 이사하였다.
구산은 49세되던 해(1924), 부친이 별세하자 바로 전무출신하여 영산출장소 교무로 일하였다.
구산은 유생으로서 완고한 일면도 있으나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불법연구회에 입회한 뒤로 민족의식 있는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933년 5월5일, 대종사는 원평지부에 모인 이들에게 법호를 주었다.
동학 농민운동에 참전하고 기미년 만세운동에 적극 지원한 바 있고
23년간의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개종한 기독교 장로 한의사 조송광 원평지부장에게 경산(慶山),
장백산맥을 넘나들며 북만주 백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4년간 옥고를 치루고
전무출신한 원평지부 교무 박대완에게 영산(靈山),
그리고 송벽조에게는 그의 아들 정산의 9방위를 따 「구산(久山)」이란 법호를 주었다.
구산은 유학에 박학하고 청소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유허일과 절친하여 곧잘 시문과 도담을 주고받았다.
유허일이 입교한지 3년만에 수위단원으로 피선될 때도
구산은 연조로나 여론이 자신에게 훨씬 유력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6세나 연하인 그를 밀어 수위단원이 되게 하였다.
구산은 60세되던 해 진안지부(현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였다.
기미년 만세 운동이래 가슴 속에 묻어놓았던 그의 민족의식은 마령지부 교무 재임시 표출된다.
마령지부 宋교무의 日王 모독 투서사건
일제치하 교단 수난사를 통해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마령지부 송벽조교무의 日王에 대한 무기명 투서 사건이다.
원기24년(1939) 초여름 기묘년 가뭄은 대단했다.
못자리 때부터 물이 바짝 말라 모내기는 커녕 1년 농사가 완전히 폐농할 지경에 이르렀다.
7월14일 오전 9시경 송교무는 일본 천황 앞으로 준열히 꾸짖는 글을 썼다.
초고는 펜으로 썼다가 오후 5시경 조선 백지에다가 붓으로 정서하였다.
7월15일 오전 7시경에 송교무는 하토롱지 2중 봉투 표지에
「大日本帝國 東京大殿內 天皇陛下 下鑑」이라 수취인명을 기재하고
10시경에 우편함에 투입하였다.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작성된 국한문 혼용의 65행 1천2백70자로 된 이 투서 내용을 소개하면
대강 이러하다.
「금상 폐하 등극 이래 조선에 재해가 빈발합니다만,
이와 같은 일은 옛날 중국의 요탕시대에도 있었던 일로
이것은 天意가 聖治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행복을 위해서 昭和를 元德 또는 明德으로 改元하시도록,
또 천의에 화답하기 위하여 恩赦를 내리시도록,
또 사방에 拜元始祭하시는 외에 명산 또는 야외에서 饌物을 바쳐서
천지신명에 대하여 친히 기원하시도록 하소서. 그러하면 그 效가 顯灼할 것입니다」
(소화15년도 『형사재판서 원본』 제1책 형공 제162호 〈이유〉)
소태산 대종사 하루내 이리경찰서에서 고초 당해
---“안되는 일은 안되네. 나는 징역을 가도 도장은 안 찍어”
宋교무의 투서는 재난이 빈발하는 것은 연호가 잘못되어(昭和=燒火) 그런 것이니 당장 바꿀 것과 옥에 갇혀 있는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천지신명에게 기우제를 지내라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주책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고 예의 바른 투서의 문면인 듯하지만
일제의 연호(昭和)를 가뭄의 극치인 소화(燒火‥불 태움)로 비아냥거린 것은
그들의 국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요, 죄 없는 자를 풀어주고,
우리 전래 풍속대로 천지신명께 기우제를 지내라는 것은 조선의 국권 회복을 뜻한다.
천황폐하 앞으로 보내는 무기명 투서는 즉각 경찰에 적발되어
도경은 불온분자 색출 지시를 내렸다.
진안우체국에서 보낸 소인임이 확인되고, 붓글씨와 문장이 능한 점을 감안,
필시 진안 사는 유학자라 단정, 관할 경찰서에 진상을 밝힐 것을 촉구하였다.
일경은 꾀를 내어, 진안군수 명의로 백일장을 열었다.
예상한 대로 군내의 내노라는 선비들이 다 모여들었고, 필적 감정에 의해 구산의 필체로 확인되었으며, 인적사항을 들춘 바 불법연구회 창립주의 사돈인데다, 큰아들은 영광지부장(정산 송규),
작은아들은 교정원장(주산 송도성)이고 본인은 마령지부 현직 교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제가 갖다 붙인 죄목은 중국 제왕에다가 일왕을 비교함은
만방무비 만세일계(萬邦無比 萬世一系)인 천황폐하의 존엄을 비난하고 모독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불경죄로 구산은 1940년 3월13일 최종 판결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실형을 살았다.
구산의 필화 사건은 한 개인의 불경죄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불법연구회의 교리 자체에 불온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두고
그 조직 내부를 수사하였다.
이 사건은 마령지부 뿐만 아니라 불법연구회 익산총부 종법사를 비롯하여
영광지부장 송규, 신흥지부, 개성지부 등지의 교무를 소환하기에 이르러
「회가」 가사를 트집잡아 끈질기게 괴롭혔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보면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북 진안지부 교무의 중임에 있는 송인기(호적명)가 감히 不敬사건을 야기시켜
이 단체에 커다란 소요를 주게 되었다. (중략)
본 건은 송인기 개인의 의사 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법연구회 교리 자체에 不敬不逞思想이 內藏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혐의를 품기에 이르러 목하 전북경찰부에서 극력 내사중이다.
본건은 약진 도상의 불법연구회에 있어서는 실로 유감된 不祥사건이며,
교세 신장에 대하여 현저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관측된다」(『사상휘보』22권)
대종사, 일제 패망 예견, 覺書 거부
일경의 다각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불경 투서사건은
단지 유교사상에 찌들은 송벽조 개인의 사상으로 귀착되었고,
교주에게 제자들을 잘 지도하겠다는 각서를 받는 방향으로 일이 매듭지어졌다.
대종사 앞으로 이리경찰서에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관계 내용이 「대종경」 실시품 10장에 수록되어 있다.
한 제자의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일경이 하룻 동안 대종사를 심문하며
『앞으로는 그런 제자가 다시 없도록 하겠다고 서약하라』고 강요하였다.
대종사는 이렇게 대응한다.
『부모가 자녀들을 다 좋게 인도하려 하나 제 性行이 각각이라
부모의 마음대로 다 못하는 것이요,
나라에서 만 백성을 다 좋게 인도하려 하나 민심이 각각이라
나라에서도 또한 다 그렇게 해주지를 못한다.
나의 일도 그와 같아서 모든 사람을 다 좋게 만들고자 정성은 들이지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어찌 일조일석에 다 좋게 만들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노력은 계속하려니와 다시는 없게 하겠다고 서약하기는 어렵다』
출두 내용인즉 사건의 시말서를 쓰고
제자가 다시 천황을 불경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도장만 찍으면 되는
서류상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였지만, 대종사는 이에 끝내 불응하였다.
평소 일경에 대해 매우 유화적인 태도로 대응해오던 대종사의 다른 일면에 당황하여
경찰서장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하면서 『왜 안 찍느냐』 채근을 하며
한나절을 실갱이를 벌였다.
그러나 대종사는 태연부동 도무지 응하질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잘되도록 주선한 황 순사는 안달이 났다.
황이천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리경찰서로 아는 사람한테 전화를 했어요.
「거기 불법연구회에서 온 선생 왜 안 나오느냐」고 물어 봤더니
「그 영감 농판이여」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도장만 찍으면 그냥 나가는데 안 찍는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하루내 고생하는 대종사를 두고
일경들은 「그 영감 농판」이라고 흉을 보았다.
해 저물 무렵에야 대종사는 이리경찰서에서 풀려났다.
황 순사는 머리끝까지 뿔이 났다.
『아, 종사님 왜 이제 나오시오?』
『글쎄 그렇게 되었구만』 『
아, 그렇게 되다니요! 도장 찍으라는데 안 찍었지요?』
『그랬어』
『아, 그렇게 미련하고 갑갑해 가지고 어떻게 대중을 지도한다고 하시오.
그 도장 찍어도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데 얼른 찍고 나오시제 . 종일 그렇게 고생 하시었습니까?』
『아먼, 그렇제. 내가 미련하고 갑갑하제』
황 순사는 종사님 스스로 미련하고 갑갑한 사람이라 자인하니 옳다구나 싶어
시내에서 총부 조실까지 따라가면서 불평하였다.
묵묵히 불평을 다 들어주고 대종사 되물었다.
『이천! 내가 무엇이 그리 미련하고 갑갑할까?』
『도장 그것 백 번 찍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을 안 찍고 하루를 고생하시니 갑갑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다시는 그런 제자가 없게 하겠다고 도장 찍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한번 양심에 비춰 생각해 보라』
『안 되지요. 안 되어도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법적 책임이 없으니 말입니다』
『안 되는 일 된다고 도장 찍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야.
수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뺨을 맞거나 행패를 당하는 것은 금시 고칠 수가 있으나
남몰래 자기 마음을 살짝 돌려먹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수양은 절대 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징역을 가도 그것은 안 찍어』
대종사는 천황에 불경하는 제자가 없도록 서약하라는 일경의 각서 요구에
끝내 도장을 찍지 않았다.
대종사는 일제의 패망을 벌써 예견하고 있었다.
원기22년 이리교당 기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일본신사가 내려다보이는
동산동 봉술뫼에 올라 한평의 땅도 차지 못하고 물러가는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였고,
이후 그보다 더 무서운 시비곡절없는 큰 풍랑이 한바탕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이를 양심도 없고 법도 없는 「환장세계」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6.25동란이다.
일경의 무례한 행동에 분을 터뜨리는 제자들에게 대종사 말하였다.
『오랫동안 강약이 대립하고 차별이 혹심하여 억울하게 묻어둔 원한들이 많은지라,
앞으로 큰 전쟁이 한번 터질 것이요,
그뒤에는 세상 인지가 차차 밝아져서 개인들이나 나라들이 서로 돕고 우호 상통할지언정
남의 주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일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