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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장 1-12절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경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성탄절이면 어김없이 설교되고 있는 본문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성탄절에 대한 말이 나왔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면 성탄절도 교회 역사 안에서 개혁의 내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개혁의 내용이었느냐? 간단히 말하면 성경이 명하지도 않은 절기요, 성탄절이나 부활절과 같은 모든 절기는 주일의 정신 안에 깃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는 이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김영규 교수님의 책인 17세기 개혁신학 안에 있는 내용인데, 일단 칼빈의 경우 의식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었고, 그런 도덕법 안에 제4계명이 자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교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교도들의 경우 주일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주일만 지키고 도덕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의식법에 속한 유대절기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가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618년 8월 25일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을 목회자들에게 강요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 있느냐? 성례를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할 것, 사적으로 병자에게 성례를 집행할 의무, 필요에 따라 사적인 세례집례의 허용, 이미 세례 받은 어린애들은 주교에게 데리고 가 견신례(Confirmation)와 주교의 축복을 받을 것, 그리고 마지막이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을 지킬 것 등이었습니다.
심지어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s and Sports on the Lord’s Day)을 출판하여 목회자들로 하여금 읽도록 강요한 사건이 제임스 1세 때(1618)와 챨스 1세 때(1633)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 안에는 명목상 주일날 오락을 허용한 것은 민생복지에 목적을 두었다는 것과, 당시 오락과 스포츠의 금지는 주일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성일에도 타당한 것이었으나 왕명포고문서는 주일성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요일 저녁 기도 후, 일요일 오후, 혹은 모든 신적인 예배 종결 후 그런 오락이나 스포츠를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청교도인들(Puritans)과 엄격한 이들(Precisians)은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런 내용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응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순응하지 않은 자들(non-conformist), 즉 퍼스의 5개 조항에 대하여 거절하고 오락의 책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진 자들의 정신이 있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주의가 지향해야 할 정신이 바로 이들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 아래 거절되었던 것이 성탄절과 부활절과 같은 절기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정신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사정상 수요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수요일 예배는 드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기가 아닌 모이기를 힘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따라(히10:25)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 힘써 배워야 할 목적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곁가지가 좀 길어졌지만,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 자주 설교되고 있는 본문이고 그만큼 낯설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주의 깊게 본문을 살펴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단순히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의 경배를 따라 우리도 예수를 경배해야 한다는 것만이 본문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여기 보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최고 황제가 있었고, 다른 지역을 분할해서 대리자 역할을 하던 왕들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유대 땅은 누가 다스렸는가? 헤롯이라는 인물이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박사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헬라어로는 mavgoi[마고이]입니다. mavgo"[마고스]라는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일반적인 뜻이 뭐냐 하면 마술사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마술을 행하여’라는 단어가 mavgo"[마고스]의 동사형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도 ‘마술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헬라어로 mavgo"[마고스]의 목적어 형태입니다.
그럼 동방으로부터 온 이들이 마술사인가? 김성수 목사님(합신)의 설교집을 보면 이 mavgo"[마고스]라는 단어에 대해 고대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꾸었으나 그 내용을 잊어버리자 나라 안의 모든 박수와 술객을 불러모아 꿈과 해석을 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은 왕이 꾼 꿈을 해석하고 하늘의 징조, 별들의 운행을 지켜보면서 역사의 흐름을 읽고 개인이나 국가의 생사화복을 점쳤으며, 귀신의 힘을 빌어 특별한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에 이들의 신분은 왕의 자문을 맡고 국가 대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두뇌 집단,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점쟁이나 무당과 비슷하지만 그 지위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이라는 책을 쓴 우르시누스라는 개혁자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마구스는 폐르시아어인데, 철학자나 교사를 의미한다.” 물론 단순히 철학자나 교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이런 내용과 함께 설명합니다. “이런 유에 속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원수 마귀와 맺어진 언약 혹은 협약에 의거하여 시행되는 것이며, 거기에는 특정한 말이나 의식들이 수반되는데 그것들을 반복하거나 행함으로써 사람들이 마귀에 대한 약속된 것들과 또한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구하고 얻어야 할 것들을 얻고자 하며, 또한 마귀의 도움을 받아 불필요한 일들을 알고 행하여 자기들의 악한 정욕을 드러내거나 뽐내려하며, 생활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마구스는 페르시아어인데, 철학자나 교사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의 무지를 느끼고서 사탄의 도움을 구하였다.”(p.803)
칼빈 주석도 보면 “이 박사라는 칭호는 페르시아와 갈대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주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이 동방 박사들을 단순히 마술사, 즉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술사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을 속여서 행하는 그런 마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별을 보고 왔다고 말하기 때문에 점성술사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좀 고급스럽게 표현하자면 천문학자인데, 단지 우주를 보면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서 역사의 흐름을 읽고, 개인이나 국가의 생사화복을 점치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럼 왜 예루살렘으로 들어 왔는가?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러니까 그들이 동방에서부터 유대 땅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이 있다는 것을 별을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이 본 별은 매우 특별한 별입니다.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한 동안 그 별을 볼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게 되고, 나중에는 헤롯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면서 당시 유대 지역을 관할하던 헤롯을 친히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금 별을 보게 되면서 아기 예수에게까지 가게 되는데, 이렇게 볼 때 지금 이 별은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된 매우 특별한 별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점성술사인데, 그들이 그 특별한 별을 보고 그 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만큼 그들의 점성술이 뛰어난가? 실제로 하늘을 ㅂ고서 역사의 흐름을 읽고, 개인이나 국가의 생사화복을 꿰뚫어 보는 그런 자들인가? 그런 일이 실제로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있다 설명하더라도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 즉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인가? 왜냐하면 점성술을 통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고, 또한 경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합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르시누스의 설명을 통해서도 봤지만 그 일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 일은 마귀와 결탁된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점성술과 같은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사실로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9절에서 1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뿐만 아니라 마술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마술을 행하는 것에 대해 기독교인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고, 심지어 노회의 어떤 행사나 수련회를 통해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어떠한지를 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굳이 이런 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미 마술 자체가 속임, 거짓으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런 면에서 지금 동방 박사라 칭하는 저들의 경배는 신앙적인 경배라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본 그 특별한 별이 도구가 되어 그들을 이끌어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인가? 복음에 대해 들어본 자들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 즉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보고, 그것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떤 특별한 별을 보고서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하여 유대 땅까지 오게 되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별, 마치 이 땅에 전무후무한 왕의 탄생이 있을 것으로 그들은 판단해 그 왕께 경배하고자 그 먼 길을 그렇게 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 가지는 뭔가? 그들의 점성술이 뛰어나서 그렇게 왔다기보다는 그 이면에 성령의 숨은 역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과 관련해 이렇게 주석합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성령의 계시의 숨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학문에도 무슨 근거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외적이고 새로운 환상의 도움을 꼭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뒤에 가서 “본인들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경배를 그리스도에게 드리러 온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 습관대로 그저 최고의 왕에게 드리는 경의를 그에게 표하러 왔다... 어쩌면 그들은 이분이 동방제국을 휘어잡는 날 자기들과 친선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 은근히 그의 마음을 사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지금 이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서 왕의 탄생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의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 특별한 별을 본 것도, 또 그 별의 의미가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임을 안 것도, 나아가 그 별을 따라 경배의 목적으로 찾아 나선 것도 그 모든 이면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경배가 신앙적인 경배를 위해서 왔느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서 경배하러 왔는가? 그렇게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동방으로부터 박사라고 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을 찾았을 때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시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의 경우는 자신이 현재 유대의 왕으로 있는데,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고 하니 소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소동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뜻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온 예루살렘의 소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온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탄생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이 소동은 헤롯의 소동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배하러 온 자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의 동방 박사와 더불어 누가복음에 나오는 목자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왕의 탄생을 듣기는 들었으나 아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기다리던 메시야의 대한 소망보다는 또 다른 일에 대한 소동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소동에 대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는데,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백성들이 이 기쁜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지만 이 왕의 탄생 사건이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에 몹시 당황해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백성들의 경우 숱한 역경을 당하는 데 익숙하고 질질 끄는 수난에 마음이 굳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에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 아닌가 싶어 그들은 이 변화를 두려워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가 더 적합한 반응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즉 새로운 왕의 출현으로 인해 헤롯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소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만큼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매우 희미해져 있었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왕에 대한 소식이 메시야로서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헤롯은 종교지도자들을 부릅니다. 4절을 보시면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아마 왕의 탄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헤롯은 이 일이 유대인들의 메시야 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왕의 탄생이 그런 메시야와 관련된 내용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불러 묻느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서기관을 불러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지금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메시야에 대한 분명한 구약 성경에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서 5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미5:2) 그의 출생이 어디라는 것까지 분명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지막까지를 볼 때,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주목해야 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분명 성경에 대한 지식은 뛰어납니다. 어디에 어떤 말씀이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데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제더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단지 지식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듯 한 인상을 받는 경우들이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강조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체라는 생각, 그리고 예정론에 대한 것,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신학적인 강조들이 분명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이 가르침 자체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고, 나아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뚜렷한 정신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이런 지식이 우리의 신앙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실에 있어 분리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개혁주의라고 할 때 바른 신학으로서 바른 교회를 세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바른 생활로서 연결되는 신학으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교리를 따라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개혁주의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지식적인 면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더불어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목사들도 자신을 돌아봐야 할 말씀으로 있습니다. 분명 목사들의 경우 성경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일반 성도들보다 훨씬 더 박식합니다. 어떤 분들은 얼마나 많이 성경을 암송하고 있는지, 척척 인용도 엄청나게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내용으로서 성도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진정한 경외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목사로서 그것조차 말하지 않는다면 목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교리 위에 서 있지 못하다면,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과연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통해 가장 좋은 해석은 개혁주의 교리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주체되심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고, 예정론이나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교리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일하시는가?” 이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6절로 오시면 미가서를 인용한 부분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고 말하고 있지만, 미가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미5:2a)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대하여 유다 족속 중에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작은 마을이 큰 마을로 여겨질 수 있는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b) 지금 마태복음은 이러한 내용을 약간 변경시켜 옮겨 놓고 있는 겁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동네요, 작은 동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때문에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는 동네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본래 어떤 분이신가? 그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인성을 입고 오셔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너희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탄생지조차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것처럼 있다면,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높여주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실, 나아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목자 없는 양과 같다가, 즉 영적인 아사 상태에 있다가 그분으로 인하여 가장 좋은 것을 먹게 된다면 그것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말씀의 인용은 하지만, 그런 은혜에 대한 감사함은 없는 겁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도 어떤 면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저들의 영적 실상이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로 오시면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에 말을 듣고는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러나 다음 주에 살피게 될 내용을 보면 지금 이 말이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경배하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그 마음은 자기 자신 외에 또 다른 왕을 용납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마태복음 2장 16절에 보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는 모조리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왕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왕이라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 2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결박을 끊어버리고자 애쓸 뿐입니다(시2:2-3).
그럼 이것이 세상의 정신으로만 있느냐? 헤롯과 다르지 않는 자들이 지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인 겁니다. 종교지도자들이지만 아기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는 자! 그리고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 달리 말하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말은 잘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지만, 결국 그리스도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요, 신앙에 대한 합당한 열매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데 열매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신앙 자체가 외식적인 그런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과 10절을 보시면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이 헤롯을 만나고 난 뒤 다시금 유대인의 왕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분명 그들은 점성술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섰다는 것은 단순히 점성술로서 여기까지 왔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점만 봐도 앞서 말 한대로 그들의 점성술이 뛰어나서 유대 땅까지 온 것도, 또 그것을 통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을 알았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요, 성령의 은밀한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뻐한 것은 별을 다시금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을 보고 유대 땅까지 왔다가 한동안 그 별을 볼 수 없었지만 헤롯 왕을 만나고 난 뒤 다시금 그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난 아기를 찾았기 때문에 매우 크게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11절도 보시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어떻게 보면 실망할 수도 있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헤롯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그런 집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라면 믿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적인 모습으로라면 왕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함께 있다고 해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한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께만 경배한 것입니다(JS 설교 참조). 그리고는 동방의 풍습 가운데 왕을 알현할 때 예물을 들고 가는 것이 일종의 의식이었는데, 그런 의식으로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칼빈).
어떤 사람들의 경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기 때문에 동방 박사는 세 사람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또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이 세 가지 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왕직과 제사장직 그리고 선지자직으로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뭐냐? 지금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 되실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과, 그런 왕께 이 예물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말씀하시는데, 헤롯의 악한 생각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아기 예수를 보호할 목적으로, 더불어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박 박사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꿈을 통해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아기 예수를 경배하도록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혹 신앙을 가지고 왔다면 분명 잘못된 방식, 즉 점성술이라는 방식으로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서 일하실 수도 있고, 저런 방식으로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으로 하여금 사무엘을 불러내게 한 것처럼, 그러나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귀신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실 수 있는 것과 그렇게 일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도 괜찮다는 것은 분명히 구별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정당한 신앙의 내용을 가진 자라면 율법이 금하는 것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이렇게 이끄신 역사는 비록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저들이 찾았지만, 이방인들조차 그분께 경배해야 할 이 세상 만물의 주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본래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조차 경배해야 할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이 땅의 임금, 다시 말해 유대인이라는 제한적인 사람들의 왕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방인들에게조차 구원의 빛이 비춰지고 있음을 이런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저들이 별을 보고 왔지만, 그래서 복음의 빛을 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 복음의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춰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뜻을 성경을 통해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조입니다. 즉 동방으로부터 온 이방인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경배했다면, 그것도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경배했다면,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경우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지도 않고, 또 경배할 마음도 없었다는 이 사실이 대조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구도 경배하러 가지 않느냐? 종교지도자들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민족에게 약속될 왕을 외국 손님들이 보러 가는데 정작 유대인은 누구 하나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수치스런 무관심이 아니겠는가? 서기관들은 그들에게 가는 길과 태어난 장소를 가리켜 보여 주면서도 그들만 가게 내버려둘 뿐 어느 누구 하나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않고 있다. 혹 그들은 헤롯의 비위를 거스리는 것을 겁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기들에게 제공된 구원을 생각하고 모험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독재자의 비위보다 못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되지 못한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 동방 박사들은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율법이 금하고 있는 그런 일을 서슴없이 하는 자들, 그러면서 그것이 매우 대우를 받고 있는 그런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의 왕으로 불려 질 분이 유대인들에게는 경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정작 메시야가 왔을 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동만 있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더욱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물론 동방 박사들도 빛을 제대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아기 예수가 이 세상을 구원할 자로 알고, 다시 말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고 경배한 것은 아니란 측면에서는 빛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무엇을 더욱 부각시키는가? 모두가 어둠이지만,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의 경우 더더욱 심각한 어둠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떤 면에서 이방인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우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유대인들처럼 영적인 잠자리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 이방인들, 즉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영적 어둠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가 경배를 받으셔야 할 대상인가? 누가 진정한 우리의 왕인가?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우리의 왕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롬13:1), 그것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때문에 세상 눈치 보며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 걸음에 발 맞춰서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명령만을 따라 살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