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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첫째부활과 천년왕국. 제 2 장 첫째 부활에 대한 고찰 - (1)
제 2 장 첫째 부활에 대한 고찰
무 천년설에 있어서의 난점이 천년왕국을 부인하는데 있다면 전 천년설의 난점은 바로 부활에 관한 해석, 다시 말하면 첫째 부활에 관한 해석에 있다고 본다. 첫째 부활이란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부활을 의미하고 있는가? 주 재림시 살아 남아 있는 모든 성도들도 과연 영화로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하며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인가? 과연 천년왕국은 이 첫째 부활자들이 살기위해 예비된 새 하늘과 새 땅인가?
이같은 문제들은 종말론을 연구하는 일에 끊임없는 도전으로 우리 앞에 부닥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시원스러운 종말론의 매듭을 지을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서 이 부활 문제에 대하여 그토록 불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부활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존 학설에 편견됨이 없이 연구를 계속해야 할 줄로 안다.
1. 성경에 나타나 있는 첫째 부활
⑴ 첫째 부활의 성경적 근거
우리들은 '첫째 부활'이란 말을 잘 쓰고 있지만, 이 첫째 부활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오직 한 곳에만 있을 뿐이다. 그 성경적인 근거가 바로 계 20:4절에 있는 말씀이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는 말씀이다(계 20:4-6). 성경 안에는 부활에 관한 기사는 많아도 첫째 부활에 관한 기사는 오직 이곳 한 곳에만 나와 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그 어느 곳보다도 첫째 부활에 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와 있는 계 20:4절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⑵ 첫째 부활자에 대하여 두 종류의 성도로 명시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계 20:4절에서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 여준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한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 안 왕노릇 할 "첫째 부활자"들을 본 것이다. 이들은 이미 주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친 성도들이기 때문에 지상에 속해 있는 몸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천상에 있는 보좌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요한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나머지 죽은 자들도 보았 지만 천년왕국에 참여할 이 첫째 부활자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 나와 있는 첫째 부활자는 두 가지 종류의 모습으로 보여 준다. 첫 번째의 첫째 부활자의 모습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밝혀 주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신분이 밝혀 주는 대로 순교 성도들이다. 영혼들이 살아났다면 그것은 부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의 영혼은 보통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의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이기 때문에 순교자들 임에 틀림없다.
이들에 관한 기사가 계 6:9절에 나오고 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늘의 보좌에 있는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저들의 피 값에 대한 호소를 간구하고 있는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종적인 심판을 단행하시는데 이들은 그 후에 세워지는 새로운 축복의 땅,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들이 첫째 부활자로 계20:4절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한 성도들로 그들이 바란 더 좋은 부활의 보상이 첫째 부활로 나타나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히 11:35).
㉡ 그러면 다른 또 하나의 첫째 부활자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준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두 번째의 경우, 우리는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란 말만 있다면 이들을 주 재림시 살아있는 생존 성도들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뒤에 "살아서"란 말에서 이들이 생존 성도들이 아니라 죽은자들의 살아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말의 원문의 뜻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에제산"으로 나와 있으며 영어 성경(리빙바이블)이나 일본어 성경에도 "다시 살아나서"또는 "살아 돌아와서"란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들에 대하여 그 범위가 첫 번째 순교자들 보다 국한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란 말씀은 이들이 순교 성도들이기는 하지만 적그리스도 통치하에서 그의 핍박 가운데서 승리하고 순교한 성도들을 의미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이 계 6장에서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말씀 중에 나타나 있는 그들의 형제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신 환난 중에 순교할 하나님의 종들을 의미해 주고 있다(계 6:11). 이들은 계 11:7절에 나오는 두 증인의 순교에서 그 순교의 대상자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할 첫째 부활의 대상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란 말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주종류의 순교자를 함께 언급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먼젓번 "영혼들"이란 말에서 이들은 아직 살아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두 번째 순교 성도들 "표를 받지 아니한자들"과 함께 살아나기 때문에 둘을 함께 묶어서 "살아서"란 말, 곧 부활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첫째 부활자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외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첫째 부활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문제의 해답을 먼저 문제가 제시된 곳에서 밝혀 주고 있는 해답을 찾아야 그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 해석의 기초적인 상식을 문제 해결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는 계 20:5절에 나오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 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구절을 불신자들의 둘째 부활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 사도 요한은 계 20:4절에서 순교자 들의 첫째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부활자들이 받을 최상의 상급을 말씀해 주면서 이들 순교 성도들이 아닌 그 나머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시기에 대하여 이곳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왜 이곳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첫째 부활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곳에 심판 받을 자들의 부활이 언급되겠는가? 그 나머지 죽은 성도들은 이들 순교자들처럼 첫째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축복의 대열에서는 떨어졌지만 그들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하늘 안식의 복"을 계속 누리다가 천년이 찬후에 흰 보좌 심판시에 생명의 부활자로 살 아날 것이다(계 14:13). 이곳에는 특별히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순교 성도들에 대한 첫째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 천년왕국의 백성들을 보여주신 것은 아니다.
천년왕국의 백성들은 그 전장인 계 19:6절 이하의 찬양에서 보여 준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는 말씀에서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은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주빈으로 참석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계 19:6-8).
2. 공중 휴거의 진상
우리는 공중 휴거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공중 휴거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된다는 사실은 성경적이 아니다.
⑴ 성도들이 공중 휴거시 변화체인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말은 아무 곳에도 없다.
성도들의 공중 휴거 사건의 성경적인 근거는 데살로니가 전서 4 장, 한 곳에만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찾게 된다(살전 4:16,17).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구름 속으로 끌어올리는 공중 휴거에서 끌어 올리우심을 받는 성도들의 육체에 대하여 결코 "변화"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다 변화란 말을 적용시킨 것은 이 변화란 말을 엉뚱한 곳에서 가져다가 접목시켜서 만들어 낸 인간 작품이다. 이 변화란 말은 고전 15:50-54절에 있는 "변화"란 말씀을 끌어다가 인위적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나중에 상세히 설명을 더하겠지만 살전 14:16,17절과 고전 15:50-54절은 서로 맥으로 연결시킬 성경적인 짝이 아니다. 이 양자간에는 무려 일 천년간의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⑵ 살아 있는 성도들은 살아 있을 당시의 그대로의 몸을 가지고 휴거해야 성경적이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은 부활한 성도들이나 부활체로 변화 받은 성도들이 살아갈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이 부분의 상세한 해석은 천년왕국란을 참조). 만약에 천년왕국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백성들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고 성도들에게는 예외가 된다면 무 천년설로 돌아가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같은 천년왕국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며 사실상 필요성도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문자적으로 언급해 주고 있는 이스라엘을 그대 로 인정하는 세대주의 신학을 답습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새로운 왕국에서의 생활이 유대인만을 위한 생활인 양 기술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배제시키고 있는데 세대주의 에서는 이 사실을 그대로 수용한다. "메시야 왕국"의 백성은 오직 유대인들뿐이며, 이방인 성도들은 다만 부활한 몸으로 혹은 변화된 몸으로 참여한다는 주장이 세대주의 신학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배격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이들의 이같은 해석에 동조하고 따른다는 말인가?
천년왕국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다른 또 하나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이대로의 몸을 가지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 땅 위에서의 새로운 생활, 천년왕국의 복된 생활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부활한 몸으로라면 천년왕국에 소망을 둘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것은 천년왕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변화 받아 부활체가 되는 부활의 최종적인 소망을 기다리는 이유는 천년왕국에서의 생활을 이루려 함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생활을 목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천년 세계에서의 생활상을 보자.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테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사 65:19-23).
이사야가 예언한 이같은 생활은 천국의 생활은 물론아니며 신약 시대의 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새로운 왕국에서의 생활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왕국을 구약적으로는 "메시야 왕국"이란 말로 불려지고 신약적으로 "천년왕국"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의 생활은 물론 이 나라 에 들어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통적인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손에 꼽을 만한 소수 민족인 유대인들만이 성경에 예언된 이 같은 생활을 하고 그 수효를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같은 생활을 못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들 은 도대체 그 나라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간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왜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는가? 불과 몇백만에 지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생활의 배려는 이처럼 자상하게 예언되어 있고 사람이 능히 셀 수 없는 수 10억의 성도들의 생활상은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나라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똑같은 몸으로 들어가서 똑같은 혜택을 받으며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생활을 똑같이 천년 동안 누리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적이다. 그래야 복음적이다. 신약 시대 후로는 이 땅에서건 천년왕국에 서건 천국에서건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이런 차별의 담벽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너진지 오래 되었는데 왜 천년왕국에 가서까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천년 세계는 구약 시대의 연장이란 말인가?
⑶ 유대인들도 이방 성도들과 함께 공중 휴거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종말에 부활 성도나 변화 성도나 생존 성도들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해답을 내리기에 매우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으로 휴거 된다. 이 때 성도들의 몸은 당연히 변화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대로의 육체를 가지고는 공중으로 휴거 될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성경에 약속된 복된 생활에 참여할 것인가? 왜냐하면 천년왕국의 생활은 영적인 생활이 아니라 육적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같은 난 문제에 대한 돌파구가 육적 이스라엘을 천년왕국 백성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쯤되면 쓰나 다나 세대주의 신학에서나 주장하는 문자적인 유대인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 그러나 성경에서는 유대인들도 사실인즉 주 재림 때 공증으로 휴거 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4:31절을 보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 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은 성도들의 모음이 왜 주님의 재림 시기에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그의 백성들을 공중으로 옮기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누구를 공중으로 옮기시는가? 첫째로, "그 택하신 자들"로 나왔다. "그 택하신 자들"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도 유대인들의 무리들도 이 가운데 들어간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하여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롬 11:5).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이들 택하신 자들이 공중휴거에서 누락될 것인가? 다음에 이 천사들로 "하늘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전혀 예외가 없다는 단정적인 표현이다. 그의 택하신 백성이 이 모음에서 단 한명이라도 빠져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이 공중 휴거에서 빠져야 하는 것인가?
⑷ 휴거되지 못한 모든 인류는 지구와 함께 파멸하게 된다.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왜 공중으로 이끄는 공중 휴거가 있는 것인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단순히 주를 공중에서 영접하기 위한 목적 때문만은 아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라면 공중이 아닌 지상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는 그 때에는 지상 에서는 도저히 주님을 영접할 수 없는 시기이기에 공중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영접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지상에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에 그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공중으로 이끄시는 공중 휴거가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왜 우리가 공중으로 휴거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를 알려면 주의 재림과 그 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해석이 수반해야 한다.
㉠ 예수님의 재림은 일곱 나팔 중 일곱 번째 나팔이 불 때에 있게 된다. 이 나팔은 물론 천사장이나 하나님의 나팔은 아니다. 일곱 번째 나팔은 그 나팔 소리 자체가 어떤 심판이나 재앙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이 일곱 번째 나팔은 일곱 대접 심판의 신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일곱 번째 나팔은 그 안에 일곱 대접 심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그 일곱 대접 심판중 여섯 번째 대접을 유브라데 강에 쏟을 때 이루어진다.
이같은 주 재림의 모습이 계16:12-16까지에 걸쳐서 나와 있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 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일곱째 나팔로 전개되는 일곱째 대접 심판은 인류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리시는 종말적인 심판이다. 이런 심판이 계 16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주님의 재림은 이같은 일곱 대접 심판 중 여섯번째 대접 심판으로 내리시는 심판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아마겟돈전쟁이 치러진다. 이 아마겟돈 전쟁의 자세한 모습은 계 16장이 아니라 계 19장에서 보여 준다. 주님은 하늘 군대로 표현된 환난 중 순교자들의 무리들과 함께 내려오신다. 이 때 구원받을 유대인들은 웃시야 왕 때 지진을 피하여 산으로도망하던 것같이 동서로 갈라진 매우 큰 골짜기로 도망해야 한다(슥 14:4,5). 스가랴서에서 지적해 준 그 산골짜기가 유대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될 것이며 구원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남은자의 민족 적인 회개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말씀하셨다. "그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다(마 24:17-22).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산을 교회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산은 마지막 시기에 유대인들이 도망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 회개하여 최종적인 구원을 얻을 장소로 슥 14:1-5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그 산골짜기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이처럼 말씀해 준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야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2:8-10).
인류의 종말에 적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을 침범하여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환난을 안겨 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하셨다. 이들이 남은 자들이며 이들은 그들로 회개케 하시기 위해 부어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장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독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이 롬 11:26,2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이 바로 이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 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에 서 나타나 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신다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며 그때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을 의미해 주는 말이다.
이 전쟁에서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모든 군대들을 아마겟돈에서 완전 섬멸하기 때문에 이 전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아마겟돈 전쟁을 전후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공중 휴거가 있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장소는 이 땅 위가 아니다. 하늘 공중이다. 이 때 하나님의 예비처에 있었던 모든 성도들과 후 3년 반의 환난 기간을 통과한 일부 여자의 남은 자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고 주재림시 회개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모두 함께 공중으로 휴거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아마겟돈에 내려 오셨던 예수님은 그 임무를 마치고 그의 하늘군대들과 더불어 공중으로 올라 오셔서 공중에서 우리와 만날 것이다. 이 때 이 지상에는 단 한 명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곧 이어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 계 16:16절에서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 마무리는 계 19장으로 미룬다(계 19:11-11). 그리고 곧 이어 일 곱 번째 대접 심판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란 어떤 재앙인가? 계 16:17-21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어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고 했다.
이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은 이 지구의 싹쓸이 심판임을 알수 있다. 먼저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큰 지진이 일어난다. 이 지 진이야말로 이 지구의 폭발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는 하나의 시한폭탄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 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주신 것이니라"고 하셨다(벧후 3:6,7).
지구의 표면인 땅을 지각(地殼)이라고 하는데 이 지각은 지구의 총 체적의 1.5%에 불과 하다. 무려 98.5%에 해당되는 체적(體積)이 '멘틀'이라고 하는 불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불을 마지막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날, 하나님의 불의 심판의 날에 이 지구가 어떻게 되느냐의 해답이 바로 계 16:17절 이하에 나오는 심판의 모습이다. 먼저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구의 대 폭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다음에 나오는 기술들은 그같은 지구의 폭발로 말미암은 지구안의 여러 가지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국의 성이 무너진다고 했다.
만국의 성이란 이 세상의 모든 화려했던 도시들을 총칭한 표현이다. 서울시도 그 하나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각 섬도 없어진다고 했다. 각 섬이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육지들을 말하는데 이런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육지를 의미한다. 지구 표면은 78%가 바다로 덮여져 있다. 이 육지, 말하자면 온 세상의 모든 대륙이 전부 사라져 버린다. 어디 그뿐인가? 산악도 간데 없더라고 했다.
산악이란 육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산들인데 이 중에는 '백두산'이나 '에베레스트산'도 그리고 '아라랏산'도 포함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변이가 일어날 때 또 함께 하늘에서 한 덩어리의 무게가 무려 백근이나 되는 큰 우박까지 쏟아져 이 지구 위에 내려 붓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심판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인류의 마지막 심판이다. 이 심판은 계시록에서는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 지상에서 살아 남을 자란 단 한 명도 없다. 이 일에 대하여 스바냐 선지는 벌써 2,600년경 전에 이처럼 그 상황을 예언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습 1:2,3).
이 때 지구 안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의 운명은 어찌 될 것 인가? 이사야는 이처럼 예언했다.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 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민족들 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베어서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사 33:11,12).
이 때 지구가 폭발하는 중에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처참한 모습을 이사야는 또 이처럼 예언해 주고 있다. "땅의 거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 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 비틀하며 침망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사 24:17-20).
얼마나 실감 있는 지구 폭발의 묘사인가? 얼마나 상세한 표현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날들을 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하셨다. 이 감하시는 주님의 약속이 모든 택하신 자들의 공중 휴거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중 휴거에서 누락된 모든 인류는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이런 엄청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같은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중 휴거란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는 사건인데 첫째로는 주의 재림 직후에 있을 일곱 번째 대접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그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한 피난으로서의 뜻이 있고 또 하나는 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려는 데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반드시 휴거 되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실이 바로 이 일곱 번째 대접 심판에서 그들도 구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가 이 상태대로 천년왕국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는데 이같은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 이 지구는 인간의 죄로 오염된 상태로 내려오고 있다. 이 오염은 이미 창세기로부터 나온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 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 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씀에서 보여준다(창 3:17,18).
바울도 자연계의 탄식의 소리를 듣고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것을 우리가 아나니"란 말씀에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도 인간의 죄로 인하여 더럽혀져서 회복 불능의 상태에 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롬 8:20-22). 이 상태로는 천년왕국의 복된 세상을 이룰 수 없다. 모든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이사야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말로 표현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것이라고 이처럼 말씀해주고 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서의 생활이 영적인 생활이 아니라 분명히 육적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란 말에서(20)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는다는 말에서(21) 인간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다는 말에서(22) 그들의 소생도 그들과 함께 복을 받을 것이란 말에서(23) 찾게 되는데 이같은 세계의 표현은 천국도 아니요, 그렇다고 신약 시대의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정녕코 이 땅 위에 세워질 새로운 세계,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재창조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창조할 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우리는 여기서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 새로운 창조사역을 바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둘째날 창조에서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창 1:6,7). 하나님께서 둘째날의 창조로 인하여 땅에 있는 물만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뉘었을 뿐 아직 땅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셋째 날에 가서 비로소 땅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뭍이 드러나라"고 하신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의 말씀이 된다. 이 말씀에 의하여 이 땅에는 놀라운 지각변동(地殼變動)이 생겼다. 온 땅을 뒤흔들고 땅엣 것들을 밖으로 터쳐 나오게 하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난 것이다.말하자면 계 16장에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실 때 일어난 현상의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이 때 큰 지진으로 인하여 높은산도 형성되고 낮은 땅도 이루어지고 더 낮은 바다도 만들어져서 오늘의 세계 지형이 형성된 것이다.
계 16장에서 일곱 번째 대접 심판으로 이 지구는 만국의 도성도 이미 무너졌으며 각 섬도 사라져 버리고 각 산악도 없어졌다. 이제 이 지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둘째 날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이같은 지구의 형질(形質)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뭍이 드러나라"는 창조적인 말씀의 명령만 내리시면 이 세상은 새로운 세계로 그 모습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구 멘틀 속에는 무진장한 매장물들이 있다. 그 속에는 금, 은 등 천년왕국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보화들이 있으며 뭍이 드러 나라는 말씀과 함께 그것들이 이 땅 위에 그 모습을 들어 낸다면 실로 엄청난 보화가 널려진 세상이 될 것이다. 마귀도 없고 선악과도 없는 세상, 회복된 에덴에서 죄와 저주와 질병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새로운 세계는 반드시 이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 서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⑸ 변화 받지 않고도 휴거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공중 휴거의 필수 조건으로 성도들의 변화를 들고 있다. 그러면 정말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휴거가 불가 능한 것인가? 휴거란 말은 "하르파죠"로 훔쳐 간다, 끌고 간다, 채어 간다의 의미가 주어져 있다.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방법으로 성령께서 누구인가를 어느 다른 장소로 옮겨 갈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만약 공중으로 우리를 옮겨 갈 경우, 우리는 변화된 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정말로 그래야 하는가? 그러면 먼저 이 말이 표현된 살전 4:17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란 말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변화란 신령체인 부활체가 된다는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아마도 사실로 말하면 휴거 사건보다 변화 사건이 더 큰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린다"고만 말씀하고 있을 뿐 변화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일까? 우리들 살아남은 자가 변화체가 되어 신령한 몸으로 변신되는 사건은 놀라운 사건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공중으로 이끌려 올렸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처럼 경이적인 변화의 사건이 있는 말씀은 "우리 살아남은 자"와 공중에서 주를 영접 하게 하신다"는 간격에서 어떤 변화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그러면 신령체로 변화 받은 성도들이라면 이제 모든 소망을 이룬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이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갈 곳은 당연히 천국이어야 한다. 왜 공중에 올라가 주를 영접해야 하며 또 천년왕국을 이루기 위해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공중으로 휴거 되는 "공중"이란 장소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성경에 명시된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중이란 곳이 하늘 어느 한 장소임은 말 할 것도 없다.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뭉개 구름처럼 바람에 불려 다니는 그런 곳은 아닐 것이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별의 군상이 있다. 별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형태를 우리는 은하계라고 부른다. 하늘이라고 하는 궁창에는 그 은하계의 수효가 우리들이 식별할 수 있는 것만도 50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한 은하계에 운집된 별의 수효란 가히 천문학적 수효가 아닐 수 없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린 공중이란 바로 이 넓고도 광활하기 그지없는 궁창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어느 한 별 하나가 주를 영접할 수 있는 공중의 한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벌써 23년이 지난 1969년 일을 회고해 보자. 미국의 항공우주국(NASA)은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0분, 아폴로 11호를 달에 쏘아 올렸다. 그 우주선에 탄 우주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암스트롱' 등 몇 명의 우주인들이다. 이 '암스트롱'은 분명히 우주를 왕복하고 돌아온 인간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권능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과학적 산물인 로케트를 타고 말이다. 이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왕복하기 위해 신령체로 먼저 변화 받아야 할 조건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의 몸을 가지고 달나라에 갈 수 있었고 임무를 다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을 때도 그대로의 몸으로 돌아왔으며 아직까지 그대로의 육신적인 몸으로 이전과 전혀 다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과학의 힘으로 능히 우주를 왕복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말에 그의 백성들을 일곱 번째 대접 재앙에서 건지시기 위한 긴급 상황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 시기 위한 예언의 성취를 위해 "살아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공중으로 이끌어 올리실 수 있는 능력이나 권능이 하나님께 없다는 말인가?
미국에서는 이미 1977년 8월 20일에 우주 탐지선 보이저 11호를 발사했는데 그후 4년만에 20억 키로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우주를 끝없이 여행하고 있는 우주선은 신령체로 변화 받은 것인가? 지금 많은 과학자들은 앞으로 얼마간의 시일만 지나면 지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우주에 건설된 새로운 어떤 별나라로의 이민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실제적으로 그같은 우주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가 인류의 종말에 신령체로 변화 받지 않은 상태로 공중으로 휴거 된다는 사실을 비현실적이라고 반박할 것인가? 하나님의 권능이 인간의 과학의 힘만 못하다는 것인가?
⑹ 변화 받지 않고 휴거 되어야 할 이유는 이렇다.
종말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의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천년왕국"의 생활이다. 그러면 왜 "천년왕국"의 생활이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으로 받아 드려지는 것인가? 그것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회복된 에덴의 생활을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일 천년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소망은 살아서 주님 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시대부터 현금에 이르도 록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면서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연고로 사도 요한은 계시록 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재림시의 공중 휴거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상 필요한 일이지 신령체로 변화 받고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 편이 아니다. 만약 모든 생존 성도가 신령체인 부활체로 변화 받는 다면 천년왕국이란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세계가 되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부활체로 영원히 살아갈 우리의 본향은 천년왕국인 것이 아니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부활체로 변화된 바에야 기왕이면 부활체가 살도록 알맞게 창조된 천국에 들어갈 일이지 이해도 안 되는 천년간의 이상야릇한 생활의 과정 을 거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만약 온 성도들이 변화체로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면 천년왕국에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유대인들뿐이다. 그 이유는 이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유대인들을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형평(衡平)을 잃게 된다. 왜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체나 변화체로 들어가고 유대인들은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교회 성도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차별의 담이 무너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왜 천년왕국에는 이처럼 구별된 차등을 두는 것인가? 천년왕국이란 말은 구약의 메시야 왕국을 말하는데 그러면 다니엘이나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왕국의 백성이나 그 나라의 축복 의 대상은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대주의에서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스라엘을 문자적인 육적 유대인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처럼 꼭 해석해야 한다면 이런 경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홀연히 신령체로 변화되어 천국으로 올라가고 육체적인 유대인들만 남아서 새로운 세계인 천년왕국에서 천년왕국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란 해석이 훨씬 합리적인 해석 방법이 될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수많은 성도들은 혹은 부활체로 천국에서 내려오고 혹은 신령체로 변화를 받았는데 이들이 가정을 가지고 땅을 개간하며 자녀를 생산하고 육신적으로 살기에 알맞은 새로운 세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어떻게 이들의 생활과 적응하며 불과 기 백만도 안될 지극히 적은 수효의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말인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올 일이 아닌가? 수십 억의 거룩한 성도들이 백여만의 유대인들 사회에서 천년 동안이나 이처럼 불편스럽고 괴이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성도들이 지극히 적은 수효의 유대인들 에게 군림하여 왕 노릇한다니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신령체가 되어 거룩한 몸을 가진 성도들이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시종을 든다는 말이지? 아니면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는 말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령체로 변화 받고 부활체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년왕국을 거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면 천년왕국을 거친 육체를 가진 유대인들은 천년 후에 어떻 게 되는 것인가? 부활하는 것일까? 변화 받는 것일까? 천년이 찬 후에 이들도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몸으로 설 것인가? 그러면 변화가 다시 있는 것인가? 주의 재림 때, 성도들의 휴거시에 한 번의 변화 사건이 있고 천년왕국의 생활이 끝난 후, 유대인들을 위한 변화의 사건이 다시 한번 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변화 사건이 그리스도인 따로, 유대인 따로 두 번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같은 변화를 성경 어디서 찾아야 하 는 것인가? 그러면 이 때 부활하는 유대인의 부활은 셋째 부활이 될 것인가? 천년왕국에서 살아갈 백성들은 구별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일 수 없다.
순교자들로 구성된 첫째 부활자들만이 계 20:4,5절에서 말씀 해 주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복을 받고 나머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사들에 의하여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모아 하늘로 이끌려 올려 그들로 새롭게 창조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세계로 내려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천년 동안의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천년왕국이다.
⑺ 휴거와 변화(살전 4:7절과 고전 15:50-54절의 관계)
공중 휴거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고전 15:50-54절에 있는 말씀을 그 연결 맥으로 인용한다. 말하자면 살전 4장에는 "변화"란 말이 없지만 살전 4장에 없는 변화를 고전 15장에서 빌려 오는 것이다. 고전 15:5절 말씀을 보면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여기서 이 마지막 나팔 소리를 살전 4장의 하나님의 나팔로 풀이하고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말씀을 죽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보며, 우리도 변화하리라는 말씀을 생존 성도의 변화로 보고 이 같은 사건이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생존 성도의 변화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휴거 될때 일어 나는 사건이라고 한다. 이같은 해석이 일면 타당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 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상 비슷한 사건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건끼리 연결시켜 접목시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상황이 비슷해 보여도 서로 연결해서는 안될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살전 4장의 경우와 고전 15장의 경우에 있어서 왜 이들 두 성경 구절이 서로 연결시켜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 첫째로 살전 4장의 경우는 주 재림의 경우지만 고전 15장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경우에 대한 언급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전 15장에서 무조건 52절의 말씀만을 취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52절은 사건의 결과를 의미해 주고 있으며 그 사건의 원인과 동기는 다른 곳에서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50절과 51절을 제외하고서는 52절의 바른 해석은 불가능 함을 알아야 한다. 50,51절이 있음으로써 52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50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면 52절에 있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남아 있는 우리의 변화가 언제 일어날 사건인가의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밝혀 주는 바는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이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혈과 육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말씀인가? 혈과 육이란 곧 썩어질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혈과 육이란 지금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육신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이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데 본문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썩은 것이란 이미 죽어서 무덤에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성도들 을 말한다. 이미 죽어 썩어 있는 시체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여기서 말씀해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도대체 어떤곳을 가리키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 문제만 밝혀진다면 5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 리라"고하신 말씀의 정확한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과연 어떤 나라를 의미하고 있나? "천년왕국"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에 있는 "천국"을 의미해 주는 것인가? 이 문제의 구별은 참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혈과 육"이란 말에서 이 "혈과 육"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의 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날에는 불가불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불가불 홀연히 변화되어 썩지 아니 하는 신령한 변화체로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느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냐? 먼저 천년왕국의 경우를 보자. 천년왕국은 어느 모로 보나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은 천국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세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땅이 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정도 가지며 자녀도 생산하고 수명도 한정이 있으며 토지의 소산을 먹고 살아 간다. 다만 사단이 없고 죄가 없고 저주가 사라진 새로운 세계일 뿐이다. 변화된 신령체와 부활체로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대인들만은 육체를 가진 채로들어가 살아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천년왕국이 아니다) 천년왕국이 영적으로 살아가는 나라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천년왕국에서 영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요 육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만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된다. 그렇다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이 아님이 분명하다. 천년왕국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썩을 요소가 있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천년왕국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마지막 시기에는 심판이 또 있고 죽음도 또 있다.
그러면 혈과 육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란 어떤 나라인가? 썩을 것이 유업으로 받지 못할 썩지 아니할 나라란 어떤 곳인가? 이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를 의미해 주는가? "천년왕국"이 아니라면 분명 "천국"이다. 그 외에는 다른 나라를 성경에서 찾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이 분명 썩어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나라요, 혈과 육으로 살아가는 나라라면 고전 15:50절에서 말씀해 주는 하나님의 나라란 "틀림없이 하늘에 있는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52절에 나오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명시된 말씀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시기에 있을 사건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시기임이 명백하니 주 재림시의 천년왕국 이전인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 후 인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 백보좌 앞으로 나아갈 그 시기가 되는 것이다.
㉢ 그러면 여기서 다른 또 하나의 인용 구절을 보도록 하자. 사도 바울은 이같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자들의 홀연한 변화를 들어 이사야 25:8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처럼 말씀 해주고 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고전 15:53-55).
바울의 이 인용 구절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이사야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준다(사 25:8). 이사야는 분명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바울은 이것을 고전 15:50-52절까지의 사건에 인용했는데 이사야의 예언은 바로 이 사건의 시기를 말해 준것이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시기란 언제인가? 성경은 그 시기가 언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이 계 20장에 나와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불 못이라"고 말씀해 준다(계 20:13,14). 하나님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시기에 대하여 백보좌 심판이라고 대답해 있는 것이다. 왜 이같은 대답이 나오게 되느냐 하면 천년왕국은 죽음이 보류된 시대이지 그 사망이 영원히 사라진시대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신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계 20:7-9).
천년왕국 직후에는 천년왕국에 속한 바다 모래 수와같이 수많은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인하여 소멸함을 당하는 최종적인 심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시기는 바로 백보좌 심판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는"그 시기가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의 시기란 천년왕국 이전 주 재림의 시기인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이 지난 후, 백보좌 심판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 그러므로 여기서 고전 15:50-54절까지의 주석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장은 부활에 관한 여러가지 사실에 대하여 말씀해 주는 장인데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에 관한 것과 첫 사람과 둘째 사람과 의 관계를 말씀해 준다. 첫 아담은 육있는 자요 마지막 아담은 신령한 자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첫 아담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마지막 아담은 신령한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일을 이루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흙에 속한 자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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