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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 말(1346)에서 조선 초(1434)까지 전주에서 살았던 명현(名賢) 월당(月塘) 최담(崔霮)의 문집이다.
월당공은 문성공계전주최씨 중랑장공파 4세로,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낭장 벼슬에 있으면서 1377년(우왕 3) 고려 문과에 급제하자마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았는데, 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 한벽당(寒碧堂)을 비롯한 당시의 여러 흔적이 지금까지 전주 일원에 전해오고 있다.
이 문집은 전남유형문화재 제183호 <녹동서원소장목판및고문서류>의 일부인 목판(木版)을 이용하여 1805년(순조 5) 6월 녹동서원에서 발행한 <연촌집>에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는 <참의공유사(1)>를 근간으로, 한벽당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과 여러 사람의 문집에 실려 있는 글, 그리고 전주최씨 가문에 전해오는 글들을 망라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특히 한벽당은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명승지로 조선전기부터 이미 유명하였기 때문에 많은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시(詩)를 짓거나 그림을 그려서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한벽당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전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나 글만 읽어서는 그것이 과연 전주에 있는 한벽당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고, 또 비록 그것이 전주에 있는 한벽당을 주제로 삼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월당공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일단 전주에 있는 한벽당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 확인되는 것만 고른 다음, 그 중에서 다시 문체(文體)에 따라 특징이 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월당공이 지은 글과 이익신(李益信) 선생 등 다른 사람이 지어 준 글은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져,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 있었던 존양루(存養樓)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었던 완동구제(完東舊第)에서 전해오고 있었는데, 월당공이 돌아가신 직후 1436년(세종 18)에 막내아들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가 정리한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존양루는 연촌공이 남원 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낙향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자경문으로 삼고, 순덕 고절한 정학지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지은 서루(書樓) 이름이며, 완동구제는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한 생육신 원호(元昊)와 교류하면서, 연촌공이 전주로 옮겨와 거처하던 살림집으로 오늘날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전주최씨 종대(宗垈) 자리에 있었던 건물 이름이다.
하지만 그 두루마리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방화(放火)로 모두 불타고 흩어져 버렸는데, 전쟁이 끝나고 1621년(광해 13) 기정(棄井) 최정(崔珽)이 전주와 영암에서 불타 흩어지고 남은 문헌을 수습하여, 월당공과 관련된 문헌은 <참의공유사>로, 연촌공과 관련된 문헌은 <연촌유사(烟村遺事)>로, 그리고 율헌(栗軒) 최득지(崔得之)의 묘비명을 <소윤공묘갈(2)>로 각각 정리하였다.
<참의공유사>는 월당공이 지은 시(詩) 2수(首), 그리고 전 성균관 대사성 정곤(鄭坤)이 지은 <제공찬시병서(3)>와 함께 수록된 찬시(讚詩) 10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책(冊)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제공찬시병서>는 월당공이 돌아가신 3년 후 1437년(세종 19) 5월, 연촌공의 부탁으로 정곤이 지은 글이어서, 월당공의 일생을 매우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술 시점이 월당공이 돌아가신 직후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더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그 후 <연촌유사>는 양정재(養正齋) 최방언(崔邦彦)에 의하여 다시 한 번 보강되었으나 <참의공유사>와 <소윤공묘갈>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기정공과 양정재공 두 분은 문헌을 인쇄하여 부수(部數)를 늘려 또다시 전쟁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이른바 불후(不朽)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비용 문제로 인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805년(순조 5) 영암에 있는 사액서원인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연촌유사>를 본문(本文)으로 삼고, <참의공유사>와 <소윤공묘갈>, 그리고 생육신 원호의 묘비명에서 발췌한 글 <원직학갈명(4)>을 부록으로 포함시켜 <연촌집>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인쇄하고, 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의 문집 <산당집(山堂集)> 1책(5)을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는데, 전해오는 책의 숫자가 많아서 여러 도서관과 많은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다.
이 때 만들어진 인쇄용 목판은 <녹동서원소장목판및고문서류>라는 이름으로 1992년 11월 30일 전남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어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합경당 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맨 처음 연촌공이 월당공의 유고(遺稿)를 두루마리 형태로 정리하여 만든 이후 지금까지 월당공 문집은 단 한 번도 단행본으로 만들어 진 적은 없었고 이번이 처음인데, 종래부터 다른 책의 부록으로 수록되면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참의공유사>라는 제목을 버리고, 월당공의 호(號)를 사용하여 <월당집(月塘集)>이라는 새로운 제목을 사용하였다.
월당공은 1346년(충목왕 1) 4월 5일 동정(同正) 최을인(崔乙仁)의 외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는데, 1354년(공민왕 3)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월당공은 9세의 어린 나이로 고아(孤兒)가 되었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1362년(공민왕 11) 17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급제하고, 또 다음 해 1363년 전주박씨 박종수(朴從壽)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참관 벼슬에 올라 내시부에 출사하였다.
1377년(우왕 3) 4월, 32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장남 송애(松厓) 최광지(崔匡之)와 차남 송파(松坡) 최직지(崔直之) 또한 1389년(창왕 2) 9월, 생원으로 문과에 응시하여 나란히 급제하였는데, 그 때 두 아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
권근(權近)의 문집 <양촌집(陽村集)>에는 1399년(정종 1) 12월 권근이 지은 <증박청도여묘시서(6)>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자인 송파공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외삼촌 박진(朴瑨)에게 지어 준 유시(遺詩)를 가지고 서울의 저명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찬시를 지어 받아 시집을 만들면서, 스승 권근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고 가문을 빛내게 된 것은 실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서 그리 된 것입니다.
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
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대부들은 모두 혼인하면 처가살이를 했으므로, 월당공 역시 전주박씨와 혼인하여 박종수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을 것이고, 아들들도 모두 외가에서 태어났을 것인데, 월당공과 아들들의 공부에는 박종수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수 본인은 비록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경덕재(經德齋)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특별한 친교(親交)를 가지면서 신진사대부로서 활동하였고, 전북 임실에 있는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다만, 송애공, 송파공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셋째 율헌공이나 막내 연촌공의 경우에는 연로한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송애공과 송파공이 문과에 급제한 1389년에 연촌공은 겨우 5세에 불과하여, 아직 책으로 공부하기에는 어린 나이이고, 연촌공이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송애공과 송파공은 이미 벼슬에 나가 있었으므로 두 형님과 연촌공의 공부 환경은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당공은 낭장 벼슬에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바로 그 해에,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면서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고 말았다.
대개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이유는 벼슬에 나가 출세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월당공은 이미 벼슬에 나가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하자마자 바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것을 통하여, 문과 급제는 높은 벼슬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문과 급제자라는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부터 월당공이 조선의 개국공신이라는 잘못된 기록물이 종종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호사가(好事家) 내지는 조상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월당공은 조선 개국에 관여한 사실이 전혀 없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11년 전(1377)에 월당공은 이미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여,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효도하면서 숨어 사는 선비로서 조용하게 20년을 살았는데, 그 동안(1392)에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6년(태조 5)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으로 벼슬에 나갔으나, 2년 후 1398년(태조 7) 지진주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진주(珍州)는 지금의 충남 금산군 서부지역으로, 고향 전주나 마찬가지인 고을이다.
2년 후 1400년(정종 2)에는 지진주사 벼슬마저 버리고 전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작년(1399)에 있었던 장인 박종수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당공은 아들 4형제 중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고, 율헌공 또한 문과에는 급제하지는 못하였지만,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
또한 월당공은 1416년(태종 16) 71세로 노직(老職)으로 검교 호조 참의 집현전 제학에 제수되었으니, 스스로 벼슬을 탐내지는 않았지만 벼슬과 인연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월당공은 사람을 대할 때면 언제나 겸손하고 공손하여, 길을 가다가 하급 관리나 손자, 조카들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자세를 바로 한 다음 인사를 받았으며, 시골에 흩어져 있는 친척집을 두루 방문하면서 문중의 화목을 위해 노력하였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작은 잔치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잔치 자리에서 흥(興)이 오르면 잔을 들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혹 자리에서 글씨를 쓸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종이 양쪽 끝을 잡게 한 다음 똑바로 서서 팔을 들고 붓을 놀려 글을 썼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 80세가 넘어서까지 매우 건강하여 누구를 만나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며, 말을 타거나 내릴 때에도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타고 혼자 내렸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릴 때에도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1434년(세종 16) 6월 17일 가벼운 이질에 걸려 그다지 괴로워하지도 않았지만, 25일에 홀연히 돌아가시었는데 향년 89세 이었다.
지진주사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돌아온 월당공은 전주시 교동 전주천변에 살림집과 독서실, 그리고 한벽당을 지어 놓고 글을 읽고,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풍류를 벗 삼아 여유롭게 살았는데, 지금도 한벽당 뒤편에 그 때의 유적지 일부가 전해오고 있다. 이를 통하여 월당공은 호탕한 군자로서 벼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여 삶에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월당공이 지은 정자 한벽당은 정유재란 때 전주에 쳐들어 온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렸고, 월당공이 살았던 유적지도 모두 타성인(他姓人)의 손에 넘어가버렸는데, 1827년(순조 27) 뜻있는 일가들이 성금을 모아 터전을 다시 회복하고, 정자를 복원하여 새로 지어 전해오게 되었는데, 한벽당은 1971년 12월 2일 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월당공의 호(號)와 관련하여 생존 당시부터 “월당”이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참의공(參議公)으로 불리다가 후손들이 “월당공”으로 호를 만들어 불렀다는 주장이 있는데, 월당공이라고 적시하여 기록한 것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은 1864년(고종 1) 발행된 <동치중랑장공파보>이다.
또한 정자 한벽당에 대해서도 최익현(崔益鉉)은 주자(朱子)가 지은 시(詩) “삭성창석릉 도영한담벽”(8)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월당루’로 불리다가 후세에 이르러 ‘한벽당’으로 바꾸어 불리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제공찬시병서>에 적힌 “월당루(月塘樓)”라는 기록과 함께, 월당공이 지은 시(詩)에서
월당유색우여신月塘柳色雨餘新
을 “월당루의 버들은 비온 뒤에 더욱 새롭고”로 번역하여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정자의 이름이 비록‘한벽당’이라고 할지라도 주인의 호(號)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월당루’라고 시를 지을 수 있으므로 시문에 적혀 있는 ‘월당루’라는 단어로 인하여 당시에는 ‘한벽당’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또 위의 시를 “달빛 비친 연못가 버들은 비온 뒤에 더욱 새롭고”로 번역하여 그 시(詩)가 정자의 이름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문헌에서 등장하는 가장 오래 된 “한벽당”이라는 이름은 이의건(李義健)이 광해군 때(1608∼1623) 지은 <억완산한벽당(9)> 이라는 시로 정유재란 때 불타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한벽당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로, 그 시를 통하여 임진왜란 이전에도 이미 한벽당이라고 불리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한편 전주최씨 가전 문헌 중에서 “한벽당”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헌은 1743년(영조 19) 발행된 <건륭보>이다.
역자(譯者)는 원래 한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비전문가이지만, 그래도 조상이 남긴 흔적을 보통사람들은 읽을 수도 없는 한문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능력에 넘치는 일에 도전하여 나름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현판에 적힌 글자는 모두 정자(正字)가 아니어서 역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판독(判讀)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마침 전주에서 살고 계신 우보(牛步) 최병철(崔炳哲)님께서 사진을 찍고, 또 판독까지 하여 보내주셔서 초서(草書)와 전서(篆書)에 약한 역자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협조하여 주신 우보님께 감사드린다.
턱없이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인하여 오역(誤譯)이 발생하지 않는 기적이야 일어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오역만은 제발 없었으면 천만 다행이라고 여기겠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
2016년 7월 분당에서
월당공 23세손 최순주(崔順周)
* 인물정보.
권근(權近, 1352~1409) : 안동권씨. 초명 진(晉), 자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소오자(小烏子). 친명정책을 주장하고, 조선 개국 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공을 세웠다.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사성, 세자좌빈객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연촌공 형제의 스승으로 전해 온다.
박종수(朴從壽) : 월당공(月塘公)의 장인. 자 인부(仁夫). 조선전기 기록에는 박종수 보다는 박인부로 기록된 곳이 많다.
박진(朴瑨) : 대호군공파 4세 원외랑공(員外郞公)의 사위.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月塘公)의 처남. 청도 군수, 영암 군수 등을 역임. 효자정려가 전주 향교 앞에 전해오고 있다.
원호(元昊, 1396~1463) : 원주원씨. 자 자허(子虛), 호 관란(觀瀾), 무항(霧巷). 시호 정간(貞簡). 생육신.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원주로 은거하였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서쪽에 집을 지어 “관란재”라 하고 아침저녁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고, 마친 뒤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莊陵)이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일편야사>를 지은 연촌공을 복건자로 <몽유록>을 지었다.
이의건(李義健, 1533~1621) : 자 의중(宜中), 호 동은(峒隱). 세종의 6대손. 인품이 고매하고 평소 약을 모았다가 가난과 위독한 사람을 즐겨 구제했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익신(李益信) : 권근(權近)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양촌집>에 “送同年李益信佐幕全羅覲省”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정곤(鄭坤) : 동래정씨. 호 복재(復齋). 김제 출신. 이색(李穡) 문하에서 배웠다. 전주 교수관으로 생원 한성시, 향시의 법을 행하도록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를 지냈고, 은퇴 후 김제의 시골집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영일정씨. 초명 몽란(夢蘭), 몽룡(夢龍),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였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최광지(崔匡之) : 송애공(松厓公). 중랑장공파 5세 휘 광지(匡之). 월당공의 장남. 1365년(공민왕 14)경에 태어나 1389년(공양왕 1) 동생 송파공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올랐다.
최덕지(崔德之, 1384~1455) : 연촌공(烟村公). 중랑장공파 5세 휘 덕지(德之). 자 우수(迂叟), 가구(可久). 호 연촌(烟村), 존양당(存養堂). 시호 문숙(文肅). 조선초기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1405년(태종 5) 식년시에 급제, 1446년(세종 28) 남원 부사를 마지막으로 영암으로 낙향하여 존심양성을 내걸어 호를 “존양당”으로 바꾸었다. 1450년(문종 1) 예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다음해(1451) 겨울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낙향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일편야사>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원호(元昊)에 의하여 <몽유록>,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조의제문>으로 되살아나 조선 조정에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최득지(崔得之, 1379~1455) : 율헌공(栗軒公). 중랑장공파 5세 휘 득지(得之). 월당공의 삼남으로 1396년(태조 5) 15세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한꺼번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4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문과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413년(태종 13) 조정에 천거되어 내외직에 두루 제수되고 벼슬이 전농 소윤에 이르렀다.
최방언(崔邦彦, 1634~1724) : 양정재공(養正齋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4세 휘 방언(邦彦). 자 미백(美伯). <강희보>를 만든 참판공(參判公) 휘 세영(世榮)의 장남. <강희보 경보>는 양정재공의 글씨이다. 기정공(棄井公) 휘 정(珽)이 만든 <연촌유사>를 보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저명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최병철(崔炳哲, 1946~) : 중랑장공파, 남원종회, 교도공(계손)파 26세. 호 우보(牛步).
최을인(崔乙仁, ?~1354) : 동정공(同正公). 중랑장공파 3세 휘 을인(乙仁). 중랑장공(中郞將公) 휘 용봉(龍鳳)의 장남.
최익현(崔益鉉, 1833~1906) : 경주최씨.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촉구하며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최정(崔珽, 1568~?) : 기정공(棄井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2세 휘 정(珽). 생원공(生員公) 휘 응봉(應鳳)의 아들(몽응공 휘 응룡(應龍)의 조카)로 정유재란 때 불타고 흩어져버린 문헌을 모으고 정리하여 <참의공유사>와 <연촌유사>를 만들었고 영암읍에 존양사(녹동서원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최직지(崔直之, ?~1423) : 송파공(松坡公). 중랑장공파 5세 휘 직지(直之). 월당공의 차남. 1368년(공민왕 17)경에 태어나 1389년(공양왕 1) 형님 송애공과 함께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하다가 1423년(세종 5) 순창 군수로 업무 중에 돌아가셨다.
최충성(崔忠成, 1458~1491) : 산당공(山堂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7세 휘 충성(忠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김굉필(金宏弼), 남효온(南孝溫) 등과 친분을 쌓았다. 병약하여 34세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김굉필의 제자라고 한다.
* 각주.
(1) 參議公遺事. 조선전기까지는 “월당공”보다는 “참의공”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2) 少尹公墓碣. 율헌공이 전농 소윤 벼슬에 올랐으므로 소윤공으로 불리었다.
(3) 諸公讚詩幷序. 여러 사람이 지은 찬시의 서문.
(4) 元直學碣銘. 직제학 원호의 묘갈명.
(5) <산당집>은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1책만 발행되었다. 2책은 1866년(고종 3) 산당공파 19세 연당(烟堂) 최병윤(崔秉潤)이 추가 발행하였다.
(6) 贈朴淸道廬墓詩序. 여묘 살이 하는 청도 군수 박진에게 주는 시집의 서문.
(7) 削成蒼石稜 倒影寒潭碧.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8) 憶完山寒碧堂. 완산에 있는 한벽당을 추억하며.
첫댓글 아이고... 저를 이렇게까지 과분하고 자세하게 소개해 주셨네요. 감사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