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난장> 세미나팀에서는 참가자들의 작품을 읽은 후기를 쪽글로 나누고 있습니다.
3/12 교재를 읽은 후기를 참가자들끼리만 나누기에는 너무도 풍성하여 공개하기로 용기 내었습니다.
살짝 엿볼까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아버지, 당신이 진정 자랑스럽습니다
조익상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작자는 직접 아버지가 되어 1인칭으로 발화한다. 그렇게 ‘나’로서 고백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보면, 아들과 아버지가 온전히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직 영화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다. 연말 연초에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들린다. 그저 영화의 만듦새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생각나는 만화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아 있는 만화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그 중에서도 한 작품의 아버지가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특별한 아버지일 ‘안토니오’가 바로 그다.
‘아버지’라는 새로운 사상가로 변신
안토니오는 90세에 요양원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만화는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아버지의 일생을 어린 시절부터 다시 훑어간다. 이런 구성은 그의 삶 곳곳에 그의 자살의 이유가 박혀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안토니오는 스페인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랐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8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20세에 도시로 탈출하다시피 떠난다. 바로 이듬해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스페인 내전으로 알고 있는 그 전쟁이다. 그 후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졌다. 이 전쟁통의 연속을 그린 분량이 이 작품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한글판 제목이 보여주듯 안토니오는 아나키스트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 친구와 동료들의 영향 속에서 뿌리내린 그 사상이 그의 인생 모두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나도 이것을 실감나게 깨달은 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다닌 지 얼마 지나서, 제목 때문에 읽는 사람과 그 탓에 오히려 읽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접하고서였다. 작품의 선택에 어떤 정치적 선이 그어져 있는 셈이다. 그 선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원제(‘비행의 기술’ 혹은 ‘비행의 예술’·El Arte de Volar)를 이야기해 주며 달리 읽힐 여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평론가로서 그 선을 넘어서 대화하기 위해서는 나도 작품을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다. 안토니오가 전쟁 후 스페인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아나키즘에서 변절하는 과정으로 읽혔던 부분이,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읽혔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나눴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도저히 낄 수 없게 된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대목부터다. “납탄 반지 이후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반지는 바로 혈육이었다….” 아들을 안고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의 탄생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상이나 독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아이의 밝은 미래만을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 이 애만은 내가 걸어온 길을 피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새로운 사상가가 된 것이었다. “신도, 주인도, 국가도 없다!”가 아나키스트의 근본 강령이라면, “오직 자식이 있다!”가 아버지의 근본 강령일 것이다. 그 강령과 함께 안토니오는 전혀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모순된 삶을 산다. 윗사람을 배신해서 그의 회사를 빼앗고, 빼앗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가정에 소홀해지고, 소홀해진 틈을 타 바람을 피게 되고, 그러면서도 아들의 교육이 걱정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료에게 회사를 빼앗기는 일이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이 막장 드라마 같은 대목이 너무나 뭉클했다. 물론 묘사와 연출·대사와 내레이션 등 모든 만화의 요소가 탁월하지만, 줄거리로만 놓고 보자면 크게 의미가 와 닿을 것이 없는 삶인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밝혀둘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아들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회고를 바탕으로 직접 스토리를 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의 온갖 치부를 샅샅이 그려낸 이 시기 이 대목은 너무나 뭉클하다. 그렇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그 진정성도 물론 값지지만, 정작 나의 뭉클함은 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
대상에 대한 서술은 대상 못지않게 서술자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법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작자는 직접 아버지가 되어 1인칭으로 발화한다.(이 의미는 작품을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게 ‘나’로서 고백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보면, 아들과 아버지가 온전히 겹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겹쳐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막장스러운 부분이다. 미화하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부분을 모두 그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 그가 던적스럽게 살았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모순적으로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직접 앓았다. 그것이 곧바로 아버지의 삶에 대한 긍정은 아니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긍정’한 것은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후회였다. 그러면서 가장 ‘부정’한 것은 아버지를 후회하도록 만든 세계 그 자체였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살을 비행(飛行)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에 아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식으로 나타난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부정을 긍정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한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안토니오는 그렇게 해방을 경험했다. 그 해방은 아들에 의해 더 명확해졌다. 불편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깊이 껴안고 인정한 스페인과 유럽 독자들(그리고 어쩌면 한국도!) 덕에 작가는 이런 말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정의와 평등, 그리고 사랑과 번영이라는 날개를 가지고 정직하게 날고 싶어했지만 그 날개는 처참하게 찢겨졌다. 그러나 마침내 오늘날, 그분은 삶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픽션이라는 창공에서 긴 실루엣을 남겼다.” 이처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윤리에 기반한 아버지에 대한 ‘위로’와 ‘긍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와 역사 쓰기라는 공동의 과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직면’을 통한 ‘해방’은 흔치 않다.
<국제시장>이 ‘아버지 세대를 위한 영화’라는 감독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섞여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그 세대를 위로하는 감독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식 ‘아버지 사상’을 몸으로 살아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우리 아들딸들의 기억과 역사가 영화의 역량과 한계를 넘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새삼 궁금하다. 우리가 윤리를 외면하지 않고서 아버지 세대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최한나
태어난 고향도 고향같지 않고
바실리오.. 총알연대.. 마르티네스 .. 아그드 사람들
요양원 할아버지들까지 정붙이는 이들은 다 금세 떠나고
힘겹게 넘는 삶의 담벽들을 겨우 다 지나니 그에게 남는 건
이념의 붕괴와 허물어진 담벽 조각들밖에 없었다
바로 옆에 떨어지는 폭탄을 겨우 피해다니는 전장에서
그가 외쳤던 사유가 기억에 깊이 파였다
"죽음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리라"
그가 '행복한 놈'으로 날 수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읽고>
이명선
회사를 그만 두고 좌절감에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실패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일종의 배신감이었다. 대학 생활 몇 년간 준비한 공부는 운이 좋게도 (지금으로선 불운하게도) 졸업 전 빛을 발해 합격했고, 사실 크게 원하지 않은 회사였지만 또 다시 바늘구멍을 뚫을 자신이 없어 입사하게 결심하게 됐다. 하지만 곧 이어진 혹독한 수습 기간은 지금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괴로웠다. 마치 군대처럼 ‘까라면 까’식의 조직문화는 날 조직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 했다. 기업의 부품이 되기 싫어, 나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왔지만 나는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하는 꼭두각시여야만 했다. 좌절은 이루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니더라. 내가 그토록 이루려고 발버둥 쳤던 일이 현실과 다를 때 오는 거였다.
요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나오는 얘기가 일본의 사토리 세대다. 잃어버린 20년동안 일본의 젊은이들은 거창한 직업적 꿈, 쉽게 말해 개천에서 용 되기 위한 몸부림을 접었다. 발버둥 쳐 누군가 위로 올라섰다 해도 그곳에서 또 다른 불행의 서막이 마주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집착을 버렸던 게 아닐까. 지금의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이 험하니 악착같이 노력해 성공하라’. 그렇게 길러진 이 시대의 청년들은 내일만을 위해 공부했고 내일만을 위해 또 악착같이 스펙을 쌓지만 대부분 자발적 노예가 되고 만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에 대해 탄식하던 우리들의 술자리는 늘 서로를 위한 위로로 끝을 맺는다. 자본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희생당하는 거라며.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 안토니오의 삶도 좌절의 연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안토니오는 또래보다 삶의 철학이 뚜렷해 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재와 파시즘에 대항하는 혁명의 전위에 나섰다가 녹록치 않은 현실에 좌절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격정의 전선에 들어갔던 그는 결국 현실이란 장벽에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고 한 안토니오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변절자가 돼었고 결국 죽어서는 34유짜리로 취급받게 된다.
개인은 어쩌면 사회, 정확하게는 체제와 권력에 의해서 소비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꿈과 정의를 쫓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던 개인은 결국 거대한 힘에 짓눌려 죽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따라서 이 같은 실패자들의 기록이 더욱 의미있다.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평을 쓴 홍세화 작가의 글이 이 부분을 가장 적날하게 표현됐다. “여기,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눌려 패배를 거듭한 한 인간, 그럼에도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 본성으르 마지막까지 움켜쥐었던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자유나 평등, 사랑과 같은 우리의 본성이 거대한 수레바퀴에 눌려 패배할지라도, 서로를 기억하고 위로와 용기를 주며 우리의 자리를 조금씩 늘려가기를 희망해본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신재경
원제대로 <비행의 기술>이라거나 <날개>, 뭐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여보았으면 어떨지 생각도 해본다.
어려서부터 날고 싶어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자살을 아들이 이겨내는 과정이기도 하고.
가부장적 시골에서 땅으로의 정착을 강요받던 소년은 늘 멀리 보고, 날고 싶을 수 밖에 없었다. 도시 생활이라고 다르랴. 이어 터진 내전은 권위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공화군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날짐승에게 국경과 속박이 없듯 왜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겠는가. 자동차에 날개를 달고 달리면서 청년은 전쟁 중이지만 따뜻함과 자유를 동시에 경험한다.
프랑스로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함께 날자'는 이상은 전쟁 후 동료가 생존을 위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버려진다. 스페인으로 돌아가 더 이상 비행을 꿈꾸지 않게 된 중년은 가정으로의 정착을 스스로 강제한다. 경제적 실패 후 찾아온 절망은 그 가정을 파탄낸다.
남은 게 없을므로 이제 다시 '날기'를 꿈꾸어도 되련만 요양원으로 들어간 노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두더지'라는 이름의 우울증이다. 영원이 가라앉기 위해 시도도 해보지만 결국 구원은 모든 것을 놓고 '날면서' 이루어졌다.
주인공이 뛰어내린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다시는 땅을 딛지 않으려 신발을 두고, 이 삶의 마지막을 돕던 지팡이는 단정하게 창틀에 기대어 놓고 밝은 창밖으로 날개를 펼쳤을 것 같다. 노인이 하고 싶던 말은 'adios'가 아니라 'hola'일 게다.
개인사와 스페인 근대사를 병치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꺼삐딴 리>가 생각났다. 비교하면 주인공이 많이 섭섭하려나. '변절'이나 '전향'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치열한 삶은 늘 존중받아아 한달까.
신원제
“페나블로는 곧 담의 마을이 되었다.”
페나블로, 담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안토니오가 유일하게 자유를 느낄 수 있던 순간은 언덕 위 나무에 앉아 지주의 아들이 타고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볼 때뿐이었다. 담도, 경계도 없는 세상에서 달리는 꿈. 하지만 나무로 만든 자동차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망가지고, 친구 바실리오는 상상 속의 모터가 아닌, 진짜 모터로 달리는 차를 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죽고 만다. “담을 무너뜨립시다”라는, 단순하지만 절실한 바람이 안토니오를 아나키스트의 삶으로 이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읽으며 <랜드 앤 프리덤>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저마다 볼품없는 옷을 입은 신입 민병대원들이 제멋대로 흩날리는 모래 바람 사이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상관의 명령에 농담 따먹기나 하며 총을 제대로 치켜세우지도 못하는 그들에겐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전쟁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참 순수해 보였다.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누가 자신의 적인지가 명확했기 때문에, 명분과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싸움이 계속될수록 그들이 깨닫는 건, 자신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투명한 전선 위에 서 있는가이다.
“자, 이제 됐다. 날아오를 시간이……”
안토니오는 결국 담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프랑코 독재 정권, 팔랑헤 당원, 파시스트 연합……, 젊은 시절 그를 괴롭혔던 그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담은 여전히 견고했다. 민주주의는 관료제라는 이름으로 그의 삶을 더 가까이에서 옥죌 뿐이었다. 총알을 녹여 만든 납탄 동맹의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다시 하나의 총알이 되어 동료의 머릿속을 관통하고 말았다. 안토니오의 가슴에서는 죄책감인지, 회한인지 모를 두더지가 자란다.
안토니오의 삶을 실패한 삶이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와 똑같이 그를 거대한 역사의 희생양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렇기에, 증언은 쉽지 않다. 증언자는 생존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느낄 수밖에 없는 수치심, 그리고 역사를 단순하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나누고 싶은 욕망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하지만 증언자의 윤리만 중요한가? 그 증언을 경청하는 자의 윤리는?
우리는 어쩌면 때 묻지 않은 소년이 순결한 아나키스트가 되고, 죽음으로 그 세상의 부조리를 알리며 끝맺는 이야기에 만족하고 싶은지 모른다. 알타리바는 경청하는 자이자, 그 스스로 증언자가 되어 아버지의 삶을 우리에게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보여 준다. 거기엔 섣부른 긍정도, 어설픈 변명도 없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발견하게 되는 건, 겹겹이 쌓이는 현실의 벽과 생존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오는 삶의 피로, 그리고 적을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싸움들뿐이다. 담을 무너뜨리고 싶던 소년은 결국 삶에서 평온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추락하는 길을 택한다. 그의 인생에서 이미 숱하게 반복된 추락, 하지만 이 마지막 추락만은 그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우리에게 그의 삶을 경청하게 한다. 그래서, 그건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