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반과 상실의 크로키
-잃어버린 인간과 에덴이야기-
✓창세기 2―3장의 전체 구조
초기 상태: 에덴동산에 들여보내진 사람(2,5-17)
변화1: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분리됨(2,18-25)
변화2: 금지의 위반과 이어지는 상황(3,1-19)
마지막 상태: 에덴에서 나감(3,20-24)
지난 시간 1부(초기 상태와 변화1)에 이어,
이번에는 2부(변화2와 마지막 상태)를 살펴보자.
✓ 3– 변화2: 금지의 위반과 후속 상황(3,1-19)
A- 뱀, 여인, 아담(17절)
a/ - 뱀
“간사한” 혹은 “교묘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뱀은 사람과 가장 가깝다.
이 수식어는 “알몸”을 뜻하기도 한다(2,25의 아담과 여인도 알몸이다).
– 뱀이 말을 한다?
․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처럼 뱀은,
․ 아담의 단순한 말의 대상이 아니다.
․ 뱀의 상징성 :
․ 인간이 처한 상황 바깥에 그리고 인간이 언어를 획득한 방식 바깥에 있는
일종의 두뇌인 동시에 동물성에서 나온 하나의 목소리.
․ 아담이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한 채 동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자기와 동류의 인류인 여성을 알아차리고 외친 감탄의 ‘시’로 어떻게 통과 하는지 상기해 보라.
b/- 뱀이 여인에게 한 말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말이다.
․ 모종의 속임수 : 금지된 것을 하게 하기위한 암시와 설득력과 교활성
․ 지금까지 아담의 말은 두 형태[이름을 짓거나 감탄하거나]일 뿐
․ 뱀의 말은 에덴의 나무들에 관한 사용법과 관련된 하느님 명령과 대치된다.
작업하기: 야훼 엘로힘의 명령(2,16-17)과 아래의 것들을 비교하기
뱀이 인용한 말(3,1): 어떤 변화가 있는가?
어떻게 ‘하나를 제외한 모든 나무’가 ‘어떤 나무도’로 바뀌는지 주목하라.
여인이 엘로힘의 말씀을 요약하여 인용하는 방식(3절):
․ 무엇이 바뀌는가?
․ 여인의 첨삭 : 금지의 인용을 축소, 금지의 동사 하나를 추가.
․ 뱀의 말과 여자의 말 : 금지된 부분은 ‘모든’ 선물을 가질 정도로 비대해진다.
․ 금지된 부분의 기능 : 증여자인 엘로힘과의 대화(말의 관계)를 상기시킴.
다시 말해, 사람은 살기 위해 먹지만 또한 언어적 관계로 사는,
말의 주체라는 사람의 이 이중적 차원을 상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c/- 뱀의 대답(45절)에서 두 번 등장하는 ‘알다’ 동사를 주목하라
․ 그리고 여기에 세 번째 ‘알다’ 동사를 덧붙일 수 있겠다.
․ 곧 뱀은 엘로힘께서 안다는 것을 알고, 엘로힘께서 독점한 앎을 획득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뱀이
․ 나무들을 선물로 주시며 금지하시면서
․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가르면서 그리고 말을 할 수 있게 하면서
야훼 엘로힘께서 아담과 세우신 관계를 말장난으로 변질시키는지 보이는가?
․ 절대타자가 지식을 독점한다는 생각과 지식을 획득하려는 갈망은 그분의 말씀 과의 관계를 가리운다.
d/- 위반(6절):
․ 과일은 더 이상 증여자의 말의 시니피앙(기표)이 아니라,
‘본다는 것’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작업하기: 보인 그대로의 과일의 세 가지 특성을 적어보라.
그리고 2,9에서 언급된 두 가지 특성과 비교해보라.
․ 유혹의 동시작동체계 :
먹다-보다-이해하다(혹은 보다-알다-알다)
․ 여인과 아담의 관계가 말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특기하라.
말의 자리를 유혹하는 과일이 꿰차버린 것이다.
e/- 눈이 열리면서 발견한 앎(7절):
․ 알몸은 숨겨야 한다는 것.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됨.
․ 여인과의 관계는 보이는 것으로 축소
․ 타인의 시선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됨.
․ 이것은 아마도 ‘선과 악’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선과 악을 알려고 했던 꿈을 대신하는 것이다.
B. 새로운 상황에 따른 행위자들 간의 관계 수정(8-19절)
a/ 조사(8-13절):
주 하느님은 정원에서 돌아다니는 소리로 지시됨 :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관계를 지시하며,
사람은 대화를 피한다.
조사는 일련의 사실들을 거슬러 오르면서 진행된다.
알몸 – 위반 – ‘당신이 내 곁에 두신 여인’의 영향 – 뱀의 유혹과 기만.
(하느님도 이 상황에 무관하지 않다는 뜻)
말씀을 어긴 것과 진실한 말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종합평가.
그런데 하느님은 사람이 당신께 말하는 것을 믿으신다.
b/ 하느님의 선고(뱀에게는 단죄만 하신다):
각 행위자들에게 순서대로, 앞으로 각기 땅과 사람과 맺게 될 관계 명시.
뱀 : 동물들 가운데 가장 땅과 가깝게 배치되며,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 상처를 입히면서 항상 붙어 다니는 두 후손 사이에 적개심이 있다.
뱀은 제일 위쪽인 머리에 상처 받고,
사람은 땅에 가장 가까운 아래 부분인 발꿈치를 공격당한다.
사람의 후손은 승리할 가능성과 함께
동물성(말은 차치하고 사물들을 즉각 체험하려는 성향)과
인간성(말의 주체들 사이의 관계) 사이에 있다.
여인 : 어떤 질책도 어떤 단죄도 없으며, 여인이 맺게 될 관계들이 명시된다.
*인류와의 관계는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그녀는 고통 속에서 자식을 낳는다.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서로를 충족시키는 두 열망이 비대칭을 이룬다.
여인은 남편을 갈망하는 반면, 남자는 그녀를 ‘지배’할 것이다.
이것은 여자에 대한 남편의 권력에 근거를 주는 말이 아니라,
여인에게 그가 남편에게 갖는 갈망이
남편이 자신에서 갖는 갈망과 다름을 깨닫게 해준다.
이 비대칭은 그들을 서로에게 타자가 되게 하며,
그들을 말의 교환(대화)으로 초대한다.
아담 : 위반에 대한 비준
주 하느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과일에 대한 ‘목소리’의 유혹에 넘어간 것에 대한 비준이다.
그런데 땅이 저주를 받으며, 사람은 저주 받지 않는다.
이 저주는 하나의 말씀으로 땅에 각인된다.
곧 이 말씀은 사람의 필요에 유모가 젖을 주듯이 즉시 대답하지 않고 일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이것은 허망한 회기가 아니다. 곧 (나왔다가 돌아가는) 이 둘 사이에는 사람을 위한 말을 내포하고 있으며, 저항하는 땅과의 투쟁 속에 의미심장한 한 역사가 있다.
4. 마지막 상태: 에덴 바깥, 살아있는 인류(3,20-24)
a) 작업하기:
․ 이 단락에서 생명에 관련된 요소들과 에덴 바깥에 놓임에 관련된 요소들을 찾아보라.
․ 이 두 요소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아담에게 관련된 것과 여인에게 관련된 것을 구분해 보라.
․ 아담과 여인은 생명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b) 에덴 밖에서 살아갈 아담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21절).
에덴 바깥은 지옥처럼 파멸의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자리이며, 맡겨진 땅을 일구는 자리이며,
승리의 약속과 함께 투쟁의 길 위에 있는 자리다.(15절)
c) 아담과의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불림 받은 여인은(ish / isha) 아담에게서
하와(‘살아있는 자’)라는 이름을 받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회고적 측면에서 ‘과거형’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담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버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담은 생명나무에 접근 불가능으로 규정된다.
여인은 어머니가 되고 생명을 준다.
아담은 생명의 원천으로 자부할 수 없을뿐더러,
생명을 퍼트리지도, 생명을 지배하지도 못한다.
에덴 바깥으로 쫓겨난 두 가지 동기 :
*첫째 동기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이 아니라, 접근할 수 없다.)
*두 번째 동기는 땅을 가꾸기 위함이다.
(아담이 흙[아다마]에서 나왔는데, 이 흙은 단지 에덴동산의 흙만은 아니다.)
땀을 흘려야 땅에서 양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18-19절)
생명나무는 영향권 밖에 있으며,
저항하는 땅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필요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부부가 위탁받고 책임져야 하는 생명=여인의 역할+아담의 역할
d) 하느님의 개입은
“아담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22절)에 근거한다.
‘우리’를 이해하려면
‘엘로힘들’(메소포타미아인들의 개념에 따른 천상 궁전을 가득 채운 신들)과 ‘야훼 엘로힘’(단수로써 여기서 말하는 분의 고유명사)을
텍스트가 구분하고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로써, 야훼 엘로힘은 아담이 획득한 지식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다.
(하느님은 아담의 관점에 서서 말씀하신다)
곧 그 지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의 획득이 증여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관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곧 그 지식은 그가 받은 것을 감사하며 받는 것이 아니라 질투와 속임수로 획득한 것이라는 점이다.
에덴의 바깥에 둔다는 것은 아담이(선악과를 먹었던 것과) 같은 태도로 불멸을 꿈꾸면서 생명을 독차지하며 그 열매를 먹을 위험에 예방하는 것이다. 이를 예방하지 못한다면, ‘엘로힘들처럼 되려’는 또 다른 방식이 무한복제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에덴동산 바깥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조건 곧 인간의 조건을 아우른다. 이 조건아래 인간은 생명과 땅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로써 타자에로의 필연적 개방을 유지시킨다. 말하자면, 스스로는 필요와 갈망들을 즉각 만족시킬 직접 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중재들 곧 출산과 노동과 고통을 통과하고, 생명을 제어한다거나 신이 되려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의지하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숙고하기:
이 이야기(창세 2-3장)를 이런 방식으로 읽어보니 어떠한가?
이렇게 읽을 때 당신이 이해하는 방식에는 과연 어떤 변화가 생겼나?
‘죄’, ‘원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위반은 어떤 지점에서 ‘기원’과 맞닿아있을까?
이 이야기는 과연 완전한 실패 곧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얘기하는 것일까?
맺음
지금까지 시도한 것은 독서의 한 방법이다.
이 독서법은 이야기 전체에서 모든 요소들을 끌어내어
이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이 독서에서는 시작(태초)에 대한 한 일화나 과학적 역사적 철학적인 설명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상징 사전과 함께 해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지혜의 글처럼 고려하며 읽어나간다.
지혜의 글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생명과 죽음과 맺는 관계들
그리고 그가 신이 되려는 인간의 꿈을 좌절시키는 한계에서 맛보는 인간 조건의 실제에 직면하게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지혜를 깨우치는 행보를 따라가게 된다.
곧 이 이야기가 알려주는 실낙원을 꿈꾸기보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할 것이 있고 진일보할 것이 있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에덴에서 영영 내쳐진 에덴 밖의 생활은 우리의 현조건과 또 다른 조건을 대비시킨다.
이 다른 조건이 우리에게 기억으로도 향수로도 남아있지 않지만,
무의식 안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으며, 현 생활 속에 자취들이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에덴에서 일어났던 것을 자기 방식으로 얘기하면서,
거기서부터 우리가 우리의 조건을 해석하도록 돕는다.
곧 에덴에서, 인간의 어떤 기본적인 조건들, 우리가 늘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조건들이 제기된다.
근본 규칙은 뺄셈의 법칙이다.
이 규칙은 전부 갖겠다는 우리의 꿈(모두 알고, 모두 갖고, 모두 즐기고, 신처럼 완전하게 되는 것)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러나 전부에서 한 부분을 떼어낸다면, 그 결핍이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타자는 야훼 엘로힘이 될 수 있다.
야훼 엘로힘은 말의 관계 속에서 나를 내 자리에 있게 한다.
혹은 이 타자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이 관계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며,
또한 이 관계는 단순히 앎을 주는 먹는 과일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말의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뺄셈의 법칙은 또한 시샘하는 경쟁자의 독점적 이익(재화)에 있어서의 결핍으로 상상될 수도 있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가장 알몸인 동물의 ‘간사한’ 암시에서처럼) 이 암시는
듣기를 의심으로, 믿음을 질투로 바꾸어 놓는다.
암시는 유예기간도(타인을 위한 자리) 결핍도 없는
완전한 향유의 열쇠를 틀어쥐고자
신처럼 되려는 욕망에 매몰되어 맹목적으로 치닫게 한다.
위반은 단지 처벌이 뒤따르는 저항처럼 얘기된 것이 아니라,
늘 위협받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 기초한 인간 조건의 거부로써 얘기되어 있다.
두 존재 방식(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조건이 필연적으로 뺄셈으로 각인되어 있는 동시에
아직 갖지 못한 완전함(전부)에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책임지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혹은 늘 실망을 주지만(‘그들의 눈이 열리고 알몸임을 알았다’) 늘 반복된다.
‘잘못’도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
곧 질투로 인해, 말을 좋은 말로 받아들이기 보다, 그 말을 한 이유를 캐묻게(의심케하는) 한다.
교만으로 인해,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쟁취하고 소유하려 든다.
거짓으로 인해, 타자를 각색된 내 이미지로 상상하고, 그의 다름을 참지 못하며, 내 진리가 나와 그와의 관계에 의해 정립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 ‘잘못’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기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잘못은 인간의 자유에 맡겨진 인간의 천부적인 난삽함을 보여주며,
그래서 각 세대마다 인간 각자의 삶에 재출현한다.
이를 두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람은 아담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잘못은 각 사람에게는 그의 기원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잘못은 모종의 창조되기를 거부하고,
절대타자로부터 근거하기를 거부하고,
존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기원을 공격한다.
장 들로르므 신부님 강의록(1993-4년)
수정 정리: 마리 테스, 안데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