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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1)
'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1)
-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예수운동의 역사적 자리
1.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 한국기독교연구소 정연복 편집위원 ⓒ 박지훈/에큐메니안
1) 역사적 예수상을 그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상(像)들 중 일부는 설득력이 있지만 일부는 너무 상상력에 의존한다. 예수에 관한 물음은 계속되지만, 이 물음이 역사적 예수, 즉 일반적인 예수상(像) 배후에 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는 누구인가를 확언해 준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역사적 예수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의 현재 삶에 주는 함축적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역사적 사실들을 넘어 그것의 의미들을 추구하기 위해 씨름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앙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은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할지 알려준다.
2)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에 의해 기록된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그가 죽은 지 75년 이내에 쓰여진 것들이다. 핵심 문제는 바로 예수에 관해 네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네 복음서를 수직적으로 연속적으로, 즉 시작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으면 대체로 네 복음서에 통일과 조화와 일치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특정 단락에 초점을 맞추어 대조·비교하면서 수평적으로 읽으면 우리에게 강력하게 다가오는 인상은 불일치가 될 것이다. 그러한 차이들은 각각의 문서들의 논리적이고 일관된 신학에서 나온다. 달리 말해 복음서들은 특정한 신앙 공동체의 해석이다.
마가의 틀은 마태와 누가에 의해 확대되었는데, 이들은 예수 출생 이야기, 어린 시절 이야기, 현현 이야기를 덧붙였다. 요한복음은 이 틀을 더욱 확대시켜 서문과 또 다른 현현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렇게 덧붙여진 이야기들로 인해 예수의 역사, 즉 떠돌아다니던 교사, 치유자, 악귀추방자 예수의 역사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3) 우리가 새롭게 재구성하는 예수는 물론 최종적인 진짜 예수일 리는 없다. 단지 현재까지 가능한 최상의 증거들에 입각한, 집단적으로 또한 가장 엄밀하게 연구 결과들을 축적한 분석을 거쳐, 비교적 일관성 있는 예수상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나사렛으로 되돌아가 마침내 만나게 될 예수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예수다. 그 예수가 어떤 예수이든지 간에, 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 우리가 숭배하며 칭송하는 예수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진정한 역사적 예수가 뒤집어엎을 것에는 기독교 정통의 그리스도, 곧 신조(信條)들의 그리스도도 포함된다. 심지어 복음서들의 그리스도 역시 나사렛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진지한 노력에 방해가 된다.
4)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죽은 후에도 계속 자신들과 함께 한 것으로 경험했다. 예수의 계속적인 현존에 대한 경험이 예수 전승의 전달자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들은 예수가 과거에 누구였는가에 관해 기록하기보다는, 현재에 누구인가에 관해 기록하고 있고, 과거에 말씀하고 행동했던 예수가 아니라 현재에 말씀하고 행동하고 계신 예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말씀들과 행동들을 그들 자신의 시대 및 공동체의 특수한 요청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다시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배후에 들어가서 역사적 예수에게 이르려는 것이 현재의 복음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복음서들이란 역사도 전기도 아니라는 것, 단지 특수한 시대, 특수한 장소, 그리고 특수한 공동체를 위한 해석들이라는 것뿐이다.
5)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의 먼지 나는 길을 걸어다녔고,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쳤고, 체포되어 처형된 진짜 인간, 역사적 연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실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에 관해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들 중 어떤 것들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한 실례로, 예수 탄생 이야기는 종교적 창작이다. 이것은 그 이야기가 무가치하다는 게 아니라, 문자적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로 이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예수 출생 이야기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육체에 관한 생물학적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의 의미에 관한 신앙고백으로 이해한다. 처녀 출생은 성인 예수에 대한 신앙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신앙이 시간상 거꾸로 투사되어 유아기의 예수에 소급된 것이다.
6) 처녀 출생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즉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수태됨으로써 예수의 신적인 본성이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예수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출산에 대한 여성의 공헌을 부정하는 완전히 가부장적 세계에서 비롯된 성차별적 생각이다. 예수 출생의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보아 전설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고전적 신학은 이런 전설들의 내용을 기독교의 기본 신조들 속에 집어넣었고,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런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사실인 양 가르쳐왔다. 오늘날 인간의 발전된 지식은 그런 구절들이 객관적 진리를 설명한다는 주장이 가당치 않음을 드러냈다.
2. 예수운동의 역사적 자리
1)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 중 어느 것도 예수의 세계가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였다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 사회의 전형적인 경제적·정치적 역학관계를 알게 되면 예수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적 세계는 중대한 사회변화의 날카로운 긴장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의 땅은 기원전 63년, 즉 예수가 태어나기 약 60년 전에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로마제국의 통치와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이 결합되었음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방식과 정체성이 도전을 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민족적 정체성은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세계주의적 비전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농업이 상업화되어 농민들은 자기 소유의 땅을 떠나게 되었다. 예수의 세계는 반란의 세계였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 유대인들의 반로마 폭동이 일어났다. 그가 죽은 후 40년이 지난 다음에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로마제국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킴으로써, 예수의 소박한 종교 전통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이처럼 예수는 분수령을 이루는 시대에 살았다.
2) 예수는 혁명이 막 일어나려고 했던 땅에서 농민들의 불안과 동요의 분위기 속에 살았다. 만약 참된 예수상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 당시 불이 지펴지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폭발하여 공개적으로 폭동이 되기까지는 한번도 기록된 적이 없는 농민들의 불안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게하르트 렌스키는 기술과 생태학을 기준으로 인간 사회를 수렵과 채집 사회, 단순 원예 사회, 진보된 원예 사회, 농업 사회, 그리고 산업 사회로 나눈다. 로마 제국은 철제 쟁기의 제조, 동물이 끄는 장비, 물품을 옮기는 데 바퀴와 돛을 이용한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농업 사회였다. 로마 제국은 또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격차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거대한 분열의 한쪽 편에는 지배자와 관료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합해서 인구의 1퍼센트밖에 안 되면서도 적어도 국토의 절반을 소유했다. 또 같은 편에 세 개의 다른 계층, 즉 토지의 15퍼센트 정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성직자들, 군대 장군들에서 전문 관료들에 이르는 신하들, 그리고 상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아마 하층 계급에서 신분이 상승되어 상당한 재산과 심지어 어느 정도의 정치 권력까지 얻은 사람들이다. 다른 쪽에는 우선 농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인구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들이 거둔 일년 수확의 대략 3분의 2를 상류계급 유지에 바쳤다. 만일 그들이 운이 좋은 경우라면, 간신히 가족을 부양하고 가축을 기르며 사회적 책임을 지고 나서도 다음 해! 에 쓸 종자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립 수준에서 살 수 있었다. 운이 나쁜 경우에는 가뭄, 빚, 질병이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서 공동 경작이나 소작농 혹은 그 이상의 심각한 처지에 빠졌다. 그 다음에 인구의 약 5퍼센트를 차지하는 장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에서 재산을 다 잃은 사람들로 구성되므로 사회 계층상 농민들 아래에 속한다. 그들 아래에는 천민계층과 소모계층이 존재하는데, 전자는 그들의 혈통, 직업, 또는 신분으로 인해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며, 후자는 대략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로 거지와 탈법자로부터 불량배, 날품팔이꾼, 노예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소모계층이 존재한 것은 그 끔찍한 호칭이 암시하듯이 농경 사회가 죽음과 질병, 전쟁과 기아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이 고용 적정수준이라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하층계급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목수였다면 농민과 천민계층 혹은 소모계층 사이의 위태로운 자리에 위치한 장인 계급에 속했다. 더욱이 예수 시대 유대 민족의 95-97%가 문맹이었기에 예수 역시 문맹이었을 것이며, 그는 구전 문화에 속했던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의 전통의 근원적 설화들과 기본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일반적인 소망들을 알고 있었을 뿐 정확한 성경 본문이라든가 명확한 인용문, 그 시대의 서기관(書記官) 엘리트들의 난해한 논증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3) 농민 문화와 종교는 하나의 반문화(anticulture)로서 그들을 억압하는 종교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에 대해 똑같이 비판적이다. 급진적 평등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예수가 주장한 하느님 나라의 급진적 평등주의와 모두에게 열린 공동식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우며, 비록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그러한 비전과 프로그램은 그것이 솟아 나온 모체, 즉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이라는 고대와 나아가 전 세계 농민들의 꿈속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4) 예수는 아마도 기원전 4년 직전에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인구가 200-1,2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형제·자매가 최소한 여섯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누가와 마태가 보도하는 예수 출생 이야기에서 제기되는 핵심 질문은 “우리는 신을 어디에서 발견하게 되는가? 시이저 안에서인가, 아니면 예수 안에서인가? 제국의 영광 속에서인가, 아니면 농민의 가난 속에서인가? 위로부터 아래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것 속에서인가, 아니면 아래로부터 위로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해방하는 것 속에서인가?” 하는 것이다.
5) 기독교인들은 요한복음(1:14)을 따라 예수를 인간의 몸을 입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만 그 몸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마가만이 예수의 존재를 목수로 말한다(“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마가 6:3). 독립적인 단일 자료임이 분명한 이 본문은 예수의 가족과 목수 직업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목수”(마가)로 읽든지 “목수의 아들”(마태)로 읽든지,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세상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목수로 번역된 그리스어 테크톤(tekton)은 사회·경제적으로 정확히 어떤 계층이었을까? 우리는 목수라는 용어를 현대식으로 생각해서 기술이 있고 수입이 좋고 존경받는 중산층의 일원으로 해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테크톤"은 경멸적인 용어다.
'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2) - 예수운동의 목표, 예수의 비유
3. 예수운동의 목표 - 농민 공동체 회복
1) 예수는 도시생활의 죄악을 피해, 그리고 회개와 금식과 기도를 위해 처음에는 그의 스승 세례 요한을 따라 광야로 갔다. 세례 요한의 추종자로서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되었을 테지만 얼마 후 요한이 제시한 선택들을 거부했다. 예수는 그리스화한 갈릴리로 돌아와 금식보다 잔치를 벌였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곳마다 출현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먹보와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부른다(마태 11:16-19; 누가 7:31-35). 그는 파티광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사라지자마자 기독교 공동체는 다시 금식하는 관습을 실천했다(행전 13:2-3).
2)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에서 정화시키고 용서하여 광야로부터 약속된 땅으로 돌려보냈고, 그곳에서 응징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임박한 도래를 기다리게 했다. 근본적으로 요한은 정화된 개인들의 거대한 체계, 즉 이스라엘 전체에 떨어질 짹깍거리는 시한폭탄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요한 때문에, 예수는 그의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미 하느님의 능력이 계시되기를 기대하고 열망하던 사람들의 거대한 조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예수는 요한의 처형을 계기로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묵시문학적 역사 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의 역사참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방향전환이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실현할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를 통해 현재의 삶의 구조들에 도전한다.
3) 예수는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개종시켜 교회를 세우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하느님이 가까운 장래에 직접 역사에 개입할 것을 기대했던 종말론적 예언자였지만, 예수는 이 세상이 조만간 끝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하지도 않았고 세례를 베풀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만찬이란 것을 제정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가 전통 기독교와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은 매우 적다.
예수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당시 1세기 세계에서 정치, 윤리, 경제 문제를 종교와 분리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나라”는 만약 시이저가 아니라 하느님이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다스리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점령과 원조, 억압과 지배, 차별과 소외와 정반대다. 예수의 이러한 주장은 제일차적이면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치유행위, 그것 없이는 어떤 다른 차원에서의 치유도 일어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치유행위였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면서 그들과 함께 현존함을 경험했던 예수의 청중들은 그것이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예수가 무덤의 문을 두드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대한 명실상부한 비유였다.
4) 예수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 즉 전체 농민계층을 포함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적빈 상태에 이르러 구걸행각에 나서야 했던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개인적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감각으로 듣는 게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이 메시지를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말한다면, “오직 노숙자들만이 죄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정곡을 찌른다. 개인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더라도, 불의한 사회 체제에 참여한 우리는 누구도 죄 없고 깨끗한 양심을 가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의 것이다”라는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결론은, 하느님 나라는 개인적 악보다는 체제적·구조적 악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이다.
5) 20세기 최고의 가치는 아마도 개인주의일 테지만, 1세기 최고의 가치는 “집단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치는 혈연관계와 성별관계에 기초했다. 우리가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중해 연안의 가족적 가치들에 대한 몇 가지 공격적인 말씀들이다. 예수는 가족을 무시하고 다른 종류의 공동체, 즉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공동체를 선호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이미 주어져 있는 가족이라는 단위, 혈연이라는 단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와 결혼한 아들 내외, 그리고 미혼인 딸의 다섯 식구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확대된 핵가족으로 이루어진 표준적인 지중해 지역의 가정을 생각해 보라. 예수는 자기가 그것을 분열시키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어떤 식구들은 예수를 믿는 데 반해 다른 식구들은 거부할 때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할선이 어디에 어떻게 강조되어 그어지고 있는지 눈여겨 보라. 그것은 정확하게 세대 사이를 가르고 있다. 이 공격은 신앙과는 무관하고 권력과 관련된다. 이 공격은 부모를 아들과 딸과 며느리보다 높이는 지중해 지역의 가정에 그어진 선에 대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가정에도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되고 나아가 권력이 남용되므로, 가정은 결코 안락한 평온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는 가정을 공격한다. 예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집단은 지중해 지역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족 관계 현실과 대조적인 것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된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데, 하느님 나라는 권력을 좇아 나는 검은 망령이요 죽음의 그림자인 저 ! 끔찍한 권력 남용을 부정한다.
6) 음식과 식사에 관한 교차문화적 인류학을 통해 살펴보면, 예수의 열린 공동식사가 얼마나 끔찍한 사회적 악몽이 되었을지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가 주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동식사, 즉 사회의 수직적 차별과 수평적 분열의 축소판이 되는 식탁을 초월해서 함께 나누는 식사다.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열린 공동식사 과정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즉 차별 없는 사회를 축소시켜 그려내는 차별 없는 식사의 과정인 하느님 나라는 고대 지중해 지역의 문화와 사회에서 기본적 가치가 되는 명예와 수치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동식사는 급진적 평등주의, 즉 구성원들 사이의 어떠한 차별도 용인하지 않으며 그들 중에 어떤 계급조직도 불필요하다고 보는 절대적 인간 평등 사상의 구현이며 상징이다.
7) 지중해 연안의 문화에서는 모든 관계가 보호자-피보호자라는 연결고리에 지배되었다. 당시에는 매우 적은 수의 상류계급과 매우 많은 수의 하류계급이 있었다. 사회를 하나로 묶어 준 것은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의 다양한 고리였다. 즉 힘없는 사람들은 그들 위에 있는 보호자에 대해 피보호자일 수 있으며, 그 보호자들은 그들보다 더 강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피보호자일 수 있었다. 당시의 중개인들(brokers)은 그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피보호자였고, 그들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호자였다. 이 체제는 가장 잘 운영될 때에는 하류계급의 개인들이 배려될 수 있는 희망을 제공했고, 가장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들의 의존성과 억압을 영속화했다. 예수 가족은 예수가 나사렛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곳에서 치유의 제의를 확립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예수는 그 제의의 보호자가 될 것이고, 가족은 그 중개인들이 될 것이며, 그의 명성이 농민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감에 따라 환자들은 치유되어야 할 피보호자들로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예수가 죽자, 그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자리잡고 책임! 을 맡았던 것을 발견하게 됨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가 왜 계속 이동했는지를 해명해 줄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마가 1:35-38). 예수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했는데, 동네의 병든 사람들이 치유를 받기 위해 베드로의 문 앞에 모여들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이라면, 이 때 베드로의 집은 예수의 치유를 위한 중개소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날 아침 일찍 호젓한 곳에 나아가 기도했으며, 베드로가 예수를 쫓아와 돌아가자고 했을 때,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예수와 베드로는 사명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마가는 예수가 베드로와 반대 입장에 있었음을 보여주려고 이 이야기를 창작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한 장소에 묶어두어, 그의 보호자를 병에 걸린 피보호자와 중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면에 예수는 중개자가 필요 없는 하느님 나라(unbrokered Kingdom)를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었기에, 계속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영적 선물과 물질적 선물의 동등한 나눔, 기적과 밥상의 동등한 나눔은 한 장소에 중심을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소의 계급화는 예수가 선포하는 철저히 개방된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는 보호자로서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자신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안에서 개인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하느님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그래서 어떤 기존의 중개인들이나 고정된 장소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는, 중개가 불필요한 철저한 평등 공동체다.
8) 예수의 의도는 로마의 식민주의와 도시화 때문에 심한 압박 속에 있던 농민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억압 세력의 발꿈치 밑에 있었던 1세기 팔레스틴에서, 우리는 농민 계급이 저항 방법에 대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음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했을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농민 저항에서 개방된 비일상적 형태와 은폐된 일상적 형태를 구분한다. 폭동이나 반역의 형태로 나타나는 공개적 저항은 항상 농민 동요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한 동요의 대부분은 표면 밑에 감추어져 은폐된 것이며, 공격 대상이 되는 세력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예수가 행했던 것은 정확히 공개적 저항과 은폐된 저항의 경계선에 위치했다. 한편으로, 그의 저항은 저항가들이나 예언자들이나 반도(叛徒)들이나 메시아들의 저항처럼 공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단순히 말 못하는 척하고 마음으로만 복수하는 것보다는 훨씬 공개적이었다. 예수가 개방된 상태에서 함께 식사하고 무상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행위는 은폐된 저항과 공개된 저항, 비밀스러운 저항과 개방적인 저항, 개인적 저항과 공동체적 저항 사이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9) 예수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위대한 비전을 삶으로 실천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자신과 함께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복수하는 하느님의 행동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세례 공동체로 조직했듯이, 예수도 하나의 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독려하는 공동체(a companionship of empowerment)라고 부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예수의 선교는 도전하고 독려하는 생활양식에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예수운동의 핵심은 개방된 밥상을 함께 나누고, 무상의 치유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물질적 자원을 나누는 일(먹는 일)과 영적 자원을 나누는 일(고치는 일)의 결합이 예수의 선교의 실질적 핵심이다. 이러한 과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영성을 함축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회와 종교를 틀잡았던 보호자와 중개인, 중재인과 피보호자의 계급제도 대신, 예수는 하느님과 개방적이고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렇게 살도록 했다. 하느님 나라는 소외된 개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여자들을 독려하여 하느님과 직접 접촉하게 하는 공동체적 삶을 위한 것이었다.
10) 농민운동으로서의 예수의 프로그램은 적빈자와 가난한 자, 자기 땅을 잃어버린 사람과 아직 땅을 갖고 있고 그럭저럭 생존해 온 사람 사이의 엄연한 경계선을 목표로 했다. 빚 담보로 인한 권리의 상실, 토지의 상실, 그리고 가난을 가져온 배경에는 물론 1세기 초 로마의 평화라는 벼락경제가 있었다. 이것은 새로 성벽을 쌓고 각각 약 25,000명의 거주자를 가졌던 두 개의 도시로 구성된 남부 갈릴리에서 두드러졌다. 그 중 하나는 파괴 이후에 다시 건축되었고(세포리스), 다른 하나(티베리아스)는 완전히 새로 건축되었는데, 이 둘은 예수 생애의 처음 20년 동안 20년의 간격과 20마일의 거리를 두고 세워졌다. 이 도시들이 그 주변에서 농민들의 삶과 토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해 보라. 유랑자들과 집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예수의 프로그램은 이들 두 개의 계층, 즉 부자와 가난한 자가 아니라, 적빈자와 가난한 자라는 두 개의 계층을 상호 치유하게 함으로써, 소작농의 삶을 밑바닥으로부터 보다 나은 삶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상호 교류 속에 출현한다. 하느님 나라는 유랑자들과만 함께하는 게 아니라, 유랑자와 집 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한 쪽은 먹거리가 필요하고, 다른 한 쪽은 치유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철저한 메시지 및 삶의 양식과 우리 대부분의 일상생활의 요구들 사이에 긴장을 갖고 사는 것이다.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마이클 조던의 농구경기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조던이 될 수는 없어도 그 사람 안에서 인간 육체와 관련된 놀라운 가능성을 엿본다. 그리고 아마도 당신 자신을 이전보다 더욱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인간의 삶과 관련된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우리가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안정적인 집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의 요구와 (길을 떠도는 유랑자들처럼) 반문화적 삶의 철저한 도전 사이에서 창조적 긴장을 갖고 살게 된다.
4. 예수의 비유 - '전복적 지혜'의 교사 예수
1) 예수가 한 말씀으로 기록된 말씀들을 하나하나 검토한 결과, <예수 세미나>는 복음서들 중 실제로 예수가 한 말씀은 20% 미만으로 결론지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의 진정한 비유와 경구(警句)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로 하여금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비유와 경구들의 메시지는 죄인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환영받는다는 기쁜 소식의 선언이다. 예수의 비유와 경구들에 따르면, 사회적 역할들, 즉 변두리에 소외된 사람들의 역할과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의 역할이 뒤바뀌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2)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한 농부였지만 박식하고 서기관적 학문을 쌓은 사람들은 좀처럼 다다를 수 없는 구변적인 탁월함을 가졌다. 오늘날 우리가 굳어지고 냉랭한 본문들 속에서 그의 말을 읽게 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그의 최초의 청중들이 간직하고 있는 구전 기억이 기껏해야 충격적인 이미지, 깜짝 놀라게 하는 유비, 강력한 결합, 그리고 말하거나 행하는 데에 한 시간이나 그 이상 걸렸을 비유의 개략적인 줄거리뿐이라는 사실이다.
3) 비유들의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 예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다. 현자들 가운데 예수만큼 독창적으로 이 특정한 담화 형태를 발전시킨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가 진정으로 가르쳤을 20여 개의 비유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 세상의 종말이나 종말에 따르는 충격에 관해 말한 게 없다. 예수의 비유들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들 사이의 대조적 관계는 충격적이다.
4) 지혜 전승의 재발견과 더불어 학자들은 예수가 지혜 교사, 즉 현자였을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능성은 예수 당시 갈릴리에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선생들이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가 말한 것 가운데 많은 것들이, 예수가 젊은 시절에 그리스 문화에 젖은 갈릴리에서 만났을 견유학파 철학자들의 가르침 속에도 병행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로써 예수를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5) 오늘날 예수를 교사, 특히 전복적 지혜의 교사로 새롭게 이해하는 것에는 학계에서 거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세계 전복’의 말씀을 포함한 예수의 가르침은 전통적 지혜의 관점과는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부분이다. 예수는 세상의 안전과 검약을 추구하는 에토스, 보상과 징벌에 기초해서 구성된 현실 관념, 억압적인 위계체계, 의인과 죄인을 규정하는 범주들 등을 함축하는 전통적 지혜의 밑바탕을 뒤흔들었다. 교사로서 예수는 전통적 지혜를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기성문화 속에서 안위하거나 정체성을 찾기보다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삶을 살아가라고 청중을 향해 촉구하는 전복적인 현자다. 카리스마적 존재이며 전복적인 현자, 예언자, 그리고 갱신 운동의 창시자로서, 예수는 자신이 살던 사회적 세계의 역사적 형태와 발전 과정을 변혁하려 했다. 자신이 속한 사회적 세계의 변혁에 초점을 둔 선교를 펼친 영의 사람으로서의 예수상은 우리에게 제자직의 의미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제자는 ‘뒤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진지하게 추구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 즉 영 속에서 사는 삶, 역사 속에서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6) 그의 비유들과 경구들의 장면은 전적으로 일상적인 사건, 화제, 일상적 시간, 장소, 인물들로 이루어진다. 그가 자신의 비유들에서 묘사하는 풍경과 등장 인물, 그리고 경구들에 사용하는 표현은 사실주의적이었다. 오늘날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주요 논제를 히브리 성서에 근거해서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를 인용하며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사상의 세계로부터 개념들을 차용하지도 않았다. 그의 말씀들 가운데는 신학적 진술이나 철학적 일반론이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의 언어는 매우 상징적이다. 문자적이지 않고 은유적 언어였다. 예수의 언어 역시 당시의 진부한 전형적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특징들을 과장하고 일반화하고 부풀려서 청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게 만든다. 일단 미끼에 걸려 청중들이 예수의 이런 상투적 언어에 고개를 끄떡이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의 이야기들은 뜻밖의 결말이 난다.! 다시 말해 예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어 상투성을 깨버린다. 즉 사물이란 외견상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단언한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아냥거림으로 도전한다. 이것은 무서운 수사학적 장치다.
7) 예수는 재담가였다. 그는 직관에서 우러나온 체제 전복적 지식과 해학을 혼합시켰다. 예수는 문맹자였을 테지만 언어의 귀재였다. 그의 스타일과 함께 그의 담화 내용은 그를 사회적 일탈자로 만들었다. 예수처럼 또 다른 새로운 현실, 즉 보통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이 이미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미쳤거나 위험한 사람, 아마도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간주되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마가 3:21).
예수는 말씀과 행동이 분명하게 구분될 수 없는 차원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의 선언들은 흔히 행동과 같으며, 그의 행동들은 흔히 정곡을 찌르는 뭔가를 “말한다.” 문둥병자가 예수에게 와서 “만일 당신이 원하신다면 당신은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는 “그래, 너는 깨끗하다” 하고 응답한다(마가 1:41). 예수가 실제로 문둥병자의 신체적 상태를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병자의 사회적 위치를 변화시켰음은 분명하다.
'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3)
-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과 부활, 예수 그리스도 고백
5.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부활
1) 역사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을 구별할 때가 되었다. 기독교의 이야기 가운데 의심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 사실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그의 시체는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개나 까마귀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활 후 예수의 현현(顯現)에 대한 보도들도 그 장소, 시간, 목격자 등이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런 현현들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2) 예수는 아마도 예루살렘이 순례자들로 가득 찼을 때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몰려들었던 절기들은 소요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유월절은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야바와 그 밖의 다른 대제사장 당국자들은 성전 제의를 책임지던 사람들로서, 예수가 성전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빌라도에게 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빌라도는 아마도 가야바의 지원 아래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의 재판은 전적으로 창작일 가능성이 있다. 얼마 뒤 예수에게 헌신했던 추종자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억과 확신을 조직해서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3) 물론 우리는 예수의 시신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독교 전승의 발전 과정에서 시신 처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시신 처리와 관련된 소름끼치는 장면은, 그랬기를 바라는 기대와 상상 속에, 적절한 매장의 모습으로, 심지어 왕족에게나 해당하는 매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함에 따라, 이에 대한 전승의 보도들도 계속하여 점점 위엄을 갖추게 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전승이 발전됨에 따라, 예수의 매장은 적의 손으로부터 친구의 손으로 옮겨갔고, 부적절하고도 황급한 절차로부터 충분하고도 완전한 절차로 손질이 가해졌다. 이 결과가 마가복음 15:42-46의 잘 알려진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4) 예수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비역사적이다. 만약 그가 어떤 식으로든 매장되었다면, 그는 친구들이 아니라 적들에 의해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을 캐내어 만든 무덤이 아니라, 죽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예수의 몸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얕은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이것은 불유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5) 우리는 부활을 전혀 다르게 보도하는 4복음서의 본문들을 쉽게 조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도와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 결론은 이렇다: 첫째, 부활 이야기는 단 하루만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 죽은 예수가 자기들 사이에서 계속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몇 달이나 몇 년 동안의 제자들의 고민을 반영한다. 둘째, 부활한 예수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는 사실 "환상"(vision)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지도력 싸움에서 생긴 문학적 창작들이다. 셋째, 부활은 예수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 및 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여러 은유들 중 하나다.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도망갔다는 것은 완벽한 사실이며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금요일에 신앙을 완전히 상실했다가 일요일에 기적적으로 그 신앙을 회복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나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깊이 존경한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때, 그들은 신앙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생생하게 지켰고 더욱 심화시켰다.
6) 빈 무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과거에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걸어다녔듯이, 지금도 세상에 현존하여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의 지혜로 경험한다. 갈릴리의 가정들과 촌락 등지에서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밥상을 나누도록 예수에 의해 파견된 선교사들은 예수가 죽던 그 날에 정말로 그들의 모든 신앙을 일시에 잃었을까? 아니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그들은 지금도 예수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가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이처럼 선교사들에게 능력을 불어넣으며 힘있게 현존하고 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 그 길이 바로 부활절 이야기다.
7)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몇 가지 매우 힘든 문제들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예수 같은 분이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었을까? 그 분이 어떻게 제국주의 권력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으며, 그러한 그가 어떻게 아직도 우리의 경험이 증거하는 그러한 분, 즉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과 관련하여 두 상이한 기독교 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다. 갈릴리의 유랑하는 선교사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고 발이 쑤시고 아프도록 이 집 저 집 걸어다니면서 예수의 활동을 계속 잇는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했다. 한편 예루살렘의 보다 학구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그들의 성서 본문을 뒤졌다. 그들의 신앙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이 아직도 살아있는지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도상의 제자 이야기는 그 좋은 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비디오 카메라로 잡을 수 있었을 단 하루의 사건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전체적으로 재고하는 고뇌 과정에 대한 회화적 요약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문자적 보도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지 않지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던 긴 시간의 과정을 묘사한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역사적이다. 즉 이들은 살아 있는 예수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 속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암시, 즉 예수는 그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대행자였다는 암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시작했던 개방된 공동식사를 위해 계속 모임으로써, 그가 그들과 함께 계심을 경험했다. 엠마오 이야기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화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징적 묘사다.
8) 부활한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들은 예수가 더 이상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지금, 누가 그 일을 책임질 것인가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극화되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결국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에게서 첫 번째 자리를 빼앗는다. 사랑받는 제자에게 종속되는 또 다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받는 제자는 “의심하는 도마”로 낙인이 찍힌 도마보다 높여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제공하지 않지만, 기독교의 권위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즉 이 이야기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더 힘이 있었는가 하는 경쟁적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신약성서 외부에는 베드로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서도 있다. 예수의 나타남에 관한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아마도 한 세대나 두 세대 동안 존속했던 어떤 공동체를 전제한다. 이것들은 초대 교회에서 힘과 권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전혀 때묻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이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예수의 평등주의 공동체로부터 집단지도체제(12제자), 혹은 특수한 개인들(예를 들면, 베드로나 사랑받는 제자)에게로 권위가 넘어가는 조짐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교회는 남성 중심의 교권체제로 치닫고 있다.
6. 예수 그리스도 고백
1) 만약 예수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떤 사람에게 2-3분 내에 요약해서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는 오랜 동안 그럭저럭 생존을 유지해오다 점점 더 심하게 억압을 받게 된 피점령지의 농민들 사이에 살았다. 이것은 구조적 불평등과 불의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에서 그는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그것을 삶으로써 살아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것을 더불어 나눴다. 그 비전은 무상의 치유와 나눔의 식사가 있는 공동체, 하느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다. 그는 여성과 어린이와 남성, 그리고 나병환자와 적빈자(赤貧者)와 정신질환자들을 똑같이 초대했다. “와서 함께 먹고 고침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십시오”라고 말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 즉 시이저가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게 될 때의 온 세계의 모습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는 주기도문의 의미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비전 때문에 죽었다. 이 세상의 기존 체제에 대한 그의 예리한 도전은 어느 때든 그를 체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겠지만, 특별히 성전에 대한 그의 상징적 파괴행위가 유대교와 로마의 고위 당국자들로 하여금 그를 즉각 처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데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은, 이 문제의 유대인 농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부터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그 능력을 경험했다. 이제 그 능력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본 사람들에게는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게 되었다. 신중한 중립적 역사가 요세푸스가 1세기 말에 다음과 같이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종족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나의 초상화다. 예수는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기존하는 사회의 교권 체계와 가부장적 체계에 대해 “아니오”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선언하고 창조했다. 그는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중개인으로 단순히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유랑했고,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중보자(mediator)가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나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는 어떠한 중보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중보자(중개자)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했다.
2) 예수는 복음서 이야기 전체를 통해 흔히 사랑이라는 것의 일반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분으로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어느 누구라도 종교, 문화, 제의, 질병 따위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는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그렇게 살았다. 마치 그의 사랑의 원천이 인간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었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라 부르며, 내게 하느님을 보여준 분이라고 고백한다.
3)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우리가 역사적 연구를 통해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비범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인물로서, 우리가 그를 한 번 보기만 하면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한다. 정경의 예수(canonical Jesus)는 1세기 말엽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체험 속에서 예수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준다. 정경의 예수 이야기들은 그 역사적 사실성과는 독립적으로 우리의 삶에 강력한 은유적 이야기로 다가오며 기독교적 비전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둘 다 중요하다. 역사는 신앙이 환상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신앙은 역사가 단순한 골동품 연구가 되지 않게 한다.
<참고문헌>
존 도미닉 크로산, 한인철 역,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존 도미닉 크로산, 김기철 역,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한국기독교연구소.
로버트 펑크, 김준우 역,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존 쉘비 스퐁 감독,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마커스 보그, N. 톰 라이트 공저, 김준우 역,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진호 편, 『예수 르네상스 -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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