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엔 무명의 화가(?)가 있어요
우리 마을에는 그 시절의 이름치고는 다소 창의적인 이름을 가진 이진희 학생이 있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결석 한번 하지 않는 모범생이죠.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지방대 출신 최초 사법연수원 수석 김진수 변호사처럼 진희 학생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단지 안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6년생 이진희. 우리 나이 86세.
그녀에게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효성 지극한 딸이 있습니다.
그녀가 소하2동 주민자치 프로그램 서예반에 입학한 지는 10여 년. 3년 전부터는 사군자를 복수 전공하고 있죠.
그 딸은 노모가 보다 더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캘리그라피 반에 등록하여 어머니의 학교 생활을 보살피고 있지요. 가끔 서예, 사군자 반에 들러 따끈한 차와 간식을 나눠드리며 은근히 효심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과보호에 노파심일 뿐이죠.
그 반에서 최고령이지만 누구와도 잘 어울리며 사랑을 받는 인기맨이며, 강사로부터 ‘이진희 작가’라는 별호로 불리울 정도로 우등생이기 때문이죠.
분기마다 수강신청을 할 때면 인기 과목은 늑장을 부렸다간 낭패 보기 십상.
접수 시간은 오전 9시지만 두 시간여 전부터 줄을 서야 하죠.
두 과목이나 수강하는 그녀를 위해 딸이 힘을 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출장요리사인 딸은 그날 일당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그녀를 대신해 줄을 섭니다.
“엄마, 천천히 오셔. 내가 줄 서 있으니까요.”
그녀의 딸은 그날도 엄마의 기를 팍팍 살려주죠. 따끈한 차와 간식을 준비해 가서 접수를 기다리는 서예반, 사군자반 어른들께 대접하니까요.
그녀의 접수를 마치고 나서야 딸은 허겁지겁 캘리그라피 접수를 합니다.
안전하게 등록을 마친 모녀는 손을 꼭 잡고 북새통 속을 여유있게 빠져나갑니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날은 당신의 발로 걸어서 화장실 한번 가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친정어머니의 쓸쓸한 모습이 더욱 아리게 그려집니다.
이진희 학생보다 한 살 아래인 우리 엄마는 오늘도 요양병원 병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평생교육 1호 도시 광명시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 수가 3만 9,382명으로 전체 인구대비 11.9%를 넘어서며 고령화 사회에 이미 진입한 상태이며, 노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광명시는 급증하는 노인인구 추세에 맞춰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노인복지과를 신설, 다양한 복지욕구에 대응하고 있다네요. 앞으로 주민자치 프로그램에도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발굴이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평소 노인정에 가기도 힘들 연세에 신명나게 주민자치 프로그램에 다니시는 그녀의 모습이 여간 훌륭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연세에 허리도 굽지 않고 꼿꼿한 모습과 무엇보다 표정이 온화하고 평안한 비결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외출을 삼가고 집에 계시라는 딸의 당부로 집에 계신다는 그녀를 찾아뵈러 가는 날은 바람이 꽤 차가웠습니다.
사전에 딸과 약속을 해둔 터라 저의 방문을 기다리고 계셨던 이진희 어머니는 설레는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거실 한쪽 서실을 방불케하는 넓은 탁자엔 서예도구와 화선지가 펼쳐져 있고 방바닥엔 연습한 종이들이 그득했습니다.
지근거리에 사는 딸은 시간 날 때마다 찾아뵙고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며 함께 캘리 연습을 한다더니 그날도 모녀가 탁자에서 묵향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진희 씨는 평생을 광명에서만 사셨답니다.
소하동에서 태어나 하안동으로 시집을 가서 살다가 다시 친정 마을이 있는 소하동으로 건너와 살기 시작한 지가 50년이라고 해요.
슬하에 2남 4녀를 두고 엄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몸은 고탈팠지만 다복하게 살다가 25년 전에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셨다고.
70대 초반까지 직접 기른 각종 채소와 안양 남부시장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개운아파트 놀이터나 농협 앞에서 노점상을 하셨다는 어머니.
건강 비결을 여쭈니 뭐 특별할 것이 없다면서도 구십 가까운 인생 역정을 끝없이 풀어놓았습니다.
“욕심을 일찍 버리고 마음의 부자로 산 것밖에 없어. 계산에 어둡고 남에게 해코지는 안 하고 살았지. 그리고 아들 딸들이 가까이 살면서 잘 챙겨줘서 그런가? 남을 도우며 사는 것도 돈이 많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야.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고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는 것도 남을 돕는 것이지.”
늦은 나이에 배움을 시작한 것은 70대 초반에 여성회관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부터라고.
“해방전 가학동에 무지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2학년까지 다녔어. 그때는 한국말을 못하게 하던 시절이었지. 가다가나 히라가나를 좀 배웠는데 가끔 내가 일본말을 한마디씩 하는 것을 본 막내아들이 수강신청을 해주어서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어. 2년 정도 수강하다가 돋보기 쓰고 공부를 하다 보니 어질병이 나서 할 수가 없어서 그만두었지.”
그녀는 아직도 손수 밥을 해 드시고 넓은 집을 직접 청소하는 것뿐 아니라 아들딸에게 맛있는 반찬도 해주시고, 옥상 텃밭도 가꾸십니다. 살림이 재밌고 음식 만드는 것도 즐겁다니 그것이 건강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한 주먹씩 약을 드시는 친정엄마가 생각 나서 드시는 약은 무엇이냐고 여쭈었더니 혈압약만 드신다고.
서예는 소하2동 주민자치센터가 설월리에 있던 2002년부터 시작했고, 사군자는 2016년에 시작했답니다. 주민자치센터에서 배우는 서예와 사군자 이야기를 하실 때, 질곡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실 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눈동자는 더욱 반짝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채본이 다 닳도록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신다는 어머니.
채본을 보니 찢어진 곳 여기저기에 테이프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시다 말만으론 부족했던지 안방에서 화선지에 쓴 글씨와 그림을 봉지 봉지 내오셨습니다. 그동안 연습한 종이들인데 버리려고 했더니 막내아들이 버리지 마시라고 했답니다. 그 봉지에 든 화선지를 방바닥에 와그르르 쏟아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연습할 당시의 에피소드를 숨도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연습량에 놀라고 뛰어난 기억력에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내가 상도동 동생 집에 놀러갔다가 본 꽃을 그린 것이야. 이건 옥상에 피었던 수국을 보고 그린 것이고.”
“사진을 찍어와서 보고 그리시나요?”
“아니야. 나는 사진 찍을 줄도 모르고, 그냥 유심히 보고 와서 그리는 것이야.”
하루 몇 시간씩이나 연습하시냐고 여쭈니 틈만 나면 그리니 모르겠답니다. 낮에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그림이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저녁에 잠이 안 오면 그리고,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그린답니다.
사군자를 배우기 전까지는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다면서 사군자 교본의 그림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더 잘그려졌지 않냐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그분은 화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떤 화가가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자신의 그림 앞에 행복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서 사람들은 노인정에나 가지 그거 해서 뭐할거냐지만 이진희 어머니는 이것이 삶의 기쁨이라고. 마음도 여유롭고 넉넉하게 해주는 것 같고 죽을 때까지 할 거라십니다.
이 나이 되면 손이 떨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붓을 잡으니 손목이 유연하다며 붓을 들고 오른 손목을 위아래 좌우로 여러 번 돌려 유연함을 자랑하셨습니다.
소하동 마을 축제 작품 전시회에 제출한 작품이라며 배접한 글씨와 그림을 들어보이며 호탕하게 웃으시는 모습에 절로 뿌듯하고 행복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주민센터 선생님이 ‘이진희 작가’라고 불러주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화원에서 사는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리는데 자신이 그린 꽃은 시들지도 않고 매일 볼 수 있으니 제일 좋으시답니다
“대개 노인이 되면 심심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심심할 틈이 없어.”
100세를 넘기고도 여전히 쉼 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삶을 통해 참다운 원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인생을 위해 해야 할 첫째는 독서요, 둘째는 취미생활, 셋째는 절대로 놀지 말라입니다. 수입이 있고 없고는 상관 없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김형석 교수는 10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지난해 183회의 강연을 했고 60여 편의 신문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또 스테디셀러 《백 년을 살아보니》를 비롯한 100여 권의 도서를 집필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진희 화가(?)와 김형석 교수님.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고 있다는 점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온 방안에 연습지들을 펼쳐놓고 두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하셨으면서도 끝이 날 기색이 없었습니다. 음악 신동(神童)들이 피아노의 음을 귀로 듣기만 하고 그 음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처럼 어머니는 꽃을 눈으로 보고 와서 그대로 그려내시니 사군자계의 신로(神老)라 해야 할까요?
창문 밖으로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까지 이야기가 이어지자 딸이 먼저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엄마,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따스한 봄이 되면 양재동 꽃시장에 모시고 갈게요.”
순간 꽃보다 더 활짝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해맑은 소녀 같았습니다.
“내 자랑만 해서 미안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시는 어머니는 분명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화가입니다. 100세까지 그 너머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군자를 그리셔서 살아생전 꼭 개인전 한번 하시기를 기도하며 그 집을 나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지면서도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저의 친정엄마와 대비되어서였을까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친정엄마께 매일 숙제처럼하는 전화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엄마,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 식사도 잘하고, 어디 더 아픈 데는 없지! 엄마 곧 한번 내려갈게. 엄마 사랑해.”
소하2동 마을기자 박갑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