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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奎報 - 涵 …… 商老 - 墩 - 良玉 - 幹 - 元榮 |
그는 1674년 11월부터 2년 7개월 동안 함경도 안변에서 유배살이를 하면서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北竄錄』을 남겼다. 『北竄錄』은 1책 필사본으로, 그가 유배를 떠나기 직전인 1674년 10월 29일부터 解配되어 고향 尼山에 도착하는 1679년 12월 26일까지 총 5년 2개월 동안의 생활을 담고 있다. 일기 뒷부분에는 유배를 떠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上疏文과 상소에 연명했던 21인의 명단, 유배지에서 송시열 및 지인들에게서 받은 편지들, 그리고 유배생활 중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과 물품 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을 편의상 <부록>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일기 첫머리에는 1731년에 작성된 金致垕 서문이 실려있는데, 이필익 손자의 청으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이 서문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이를 미루어보면 현재 전하는 『北竄錄』은 이필익의 친필 원본을 그의 손자대에 다시 정리하여 필사하고 서문을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원래의 일기를 요약 생략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의 유배생활을 파악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
유생 이필익이 安邊으로 유배길을 떠나게 된 것은 2차 禮訟에서 송시열을 옹호하며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낸 데서 연유하였다.
예송은 현종에서 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었다. 이는 학문적으로 율곡학파와 퇴계학파 간의 宗法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성리학 이념 논쟁이 정치적으로 정권 주도와 관련되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논쟁은 남인이 효종을 長子로 대우하고, 서인이 次子로 보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1차 예송에서 는 서인의 기년복설이 채택됨으로서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 후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남인 정권이 들어서 서인세력을 제거하였다.
그 과정에서 숙종 즉위 직후 송시열에게 현종릉의 誌文을 짓게 하자 곽세건(郭世楗, 1618∼1686)이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논하였다. 즉 “1차 예송에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王統을 문란시켰는데, 그에게 誌文을 짓게 함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서인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송시열은 파직 삭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인들 사이에서 송시열 구명 운동이 일어났고, 이필익 또한 경기 유생들과 함께 송시열을 옹호하고 郭世楗을 비판하는 上疏를 올릴 때 소두(疏頭)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기를 통해 상소에서 유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숙종 즉위년 9월 초에 도성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경기도 廣州 王倫村에 들러 친구인 金榦을 만나 곽세건이 상소한 일을 논의한 끝에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며칠 후에 김간이 그의 아우와 함께 명고서원(明皐書院) 이름으로 통문을 돌렸고, 이필익 또한 수원 향교에서 통문을 돌려 명고서원에 모일 것을 通諭하였다.
그러나 이 때 모인 유생들은 25명 정도에 불과하여 상소를 실행하지 못하고 재차 통문을 돌려 9월 22일 2차 모임이 이루어졌다. 그 때의 상황을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2일 새벽에 中學의 都會하는 곳으로 말을 달려갔더니, 여러 고을에서 모인 사람들이 30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혹은 부모님 병환을 핑계대고, 혹은 처의 병환을 핑계대고 혹은 감기라고 하고 혹은 胸痛이라면서 단자를 올려 핑계대고 빠진이들이 계속 이어졌다. 뜻을 같이하는 21명만이 가까스로 상소 모임을 이룰 수가 있었는데, 모두들 나에게 疏頭가 되라고 청하였다. 합당하지 않음을 극히 잘 알았지만 회피한다는 혐의가 있어 강하게 거절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이에 따르면 상소를 올리는 일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주위의 권유로 그가 소두(疏頭)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상소문은 9월 29일 승정원에 접수되었는데, ‘예법에 대해서는 더이상 논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어겼다 하여 유배령이 내려지고, 다음날 유배지가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유배 명령을 받은 즉시 출발하여 먼 유배길을 떠나게 되는데, 관직이 없는 유생이었기 때문에 관직자의 유배길과는 달리 형조에서 관장하였다. 한밤중에 직접 형조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 3시 무렵에야 압송관인 漢江丞 文厚白을 만나 罷漏 직후에 곧바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문후백은 楊州까지 압송을 담당하여 刑吏들에게 인계하고 돌아갔고, 양주에서는 다시 군관을 정해서 다음 고을까지 압송하는 등 릴레이 방식으로 유배지까지 압송하였다.
그는 함경도 永康까지 올라갔다가 도중에 유배지가 安邊으로 바뀌는 바람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영강을 거쳐 다시 안변까지 총 2,824리를 23일만에 도착하였으니 하루 평균 122.8리를 달린 셈이었다.
의금부노정기의 평균 일정이 하루에 80∼90리에 불과하고, 실제로 관직자들이 하루에 30∼40리를 갔던 것과 비교하면 그의 유배길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유배길은 관직없는 유생이라는 점과 함께 정치적인 문제로 유배길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금이라도 혐의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하였던 자기 의지의 표현이었다.
3. 안변(安邊)에서의 유배생활
1) 유배인 관리와 점고(點考)
그가 유배지 安邊에 도착한 것은 1674년 11월 22일 밤이었는데, 안변에서는 이미 유배인을 맞이할 준비를 완료해 두고 있었다. 그가 유배지에 도착할 때의 상황을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밤에 안변부에 들어갔다. 덕원에서 50리이다. 곧바로 作廳에 가서 刑吏를 불러보니, 도배문서(到配文書)는 날짜를 비워놓고 이미 작성되어 있었는데, 이제 날짜를 맞추어 기록하여 파발로 보낸다고 한다. 거처할 곳도 이미 西門 밖 金禮吉 집으로 분부해서 정해두었다고 한다. 나를 이끌어 그 집에 이르니 김예길이 절하며 ‘집을 수리청소해 두고 기다린 지 여러 날입니다’라고 하였다.…옷을 벗고 잠자리에 드니 이미 여러 닭들이 새벽을 알린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안변에서는 유배인을 맞이하기 위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도배문서(到配文書)로 유배인이 유배지에 잘 도착했음을 조정에 보고하는 문서이다.
作廳의 형리가 관장하여 중간 경유지 및 배소에 도착한 날짜를 기록하였는데, 정해진 규정을 잘 준수하여 지체하지 않고 잘 도착해서 인계받았음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변에서는 문서를 형식에 맞추어 미리 작성하고 날짜 부분만 빈 칸으로 두어, 유배인이 도착하면 곧바로 채울 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필익이 안변에 도착 하자마자 곧바로 경유지 및 안변 도착 날짜를 기록하여 파발로 보고할 수 있었다.
둘째는 보수주인(保授主人) 및 거처할 집을 미리 정하여 준비해 두는 것이다.
보수주인은 유배인을 감시하고 지키는 역할과 함께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유배인의 유배생활은 누구를 보수주인으로 만나는가에 크게 좌우되었다. 안변에서는 金禮吉을 보수주인으로 정하고 그의 집에 거처하도록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유배살이는 안변부의 관리와 통제 하에 2년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은 관청에서 엄격하게 통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재지 사족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죄인의 처지를 짐작케 할 수 있는 점들은 몇가지 보인다. 유배지 고을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 서원이나 향교의 행사와 같은 공식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點考를 받아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점고는 관찰사와 고을 수령이 유배인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행한 행정 절차였다. 고을 수령의 점고는 한 달에 한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대체로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치르고 난 후 모든 관속들을 점고할 때 유배인에 대한 점고도 행해졌다. 점고는 유배인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수령은 사대부 유배인에 대해서는 특별히 가혹하게 할 의도가 아니라면 생략하는 일이 많았다. 정약용도 『목민심서 』에서 직접 불러 점고하기 보다는 鄕丞과 刑吏를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는 사대부 유배인에 대한 우대 또는 배려에서 나온 조처로 생각된다.
이필익의 경우에도 유배지 수령이 직접 불러서 점고한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대부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안변 부사도 그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로 도성의 지인들로부터 그를 잘 보살펴달라는 요청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를 관청으로 불러 엄격하게 점고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형리가 보수주인을 통해 동정을 살피는 정도로 유배인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가 행해졌던 것이다.
반면, 관찰사의 점고는 엄격하게 행해졌다. 관찰사의 순행길이 안변에 이르게 되면, 그는 관청에 나아가 대기하고 있다가 點考받아야 하였으며, 안변부사도 이를 위하여 철저한 준비로 대처하였다. 때문에 관찰사의 점고는 그로서는 무척 괴로운 절차였다. 그는 1674년 11월 23일부터 1677년 7월 1일 解配될 때까지 2년 7개월 동안의 유배 기간 중 點考를 위하여 관청에 나간 것은 모두 4차례 정도였다. 점고한 날짜와 사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사의 유배인 點考 상황
點考 날짜 / 점고 / 사유 및 내용
ⓛ 1675년 4월 10일 觀察使가 府에 와서 봉점을 위해 대기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음날 점고함
② 1676년 9월 26 관찰사가 교체되어 신임 관찰사가 到界하여 점고함
③ 1677년 3월 20일 관찰사의 순행이 취소되었으나 逢點을 대기하기 위해 관부에 감
④ 1677년 4월 19일 관찰사가 본부에 와서 봉점하고 다음날 귀가
위의 표를 보면 점고는 정기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관찰사가 안변에 순행올 경우에 행해지고 있다. 유배인에 대한 점고는 관찰사의 순행 업무 중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점고는 1675년 4월 9일 관찰사가 안변에 왔을 때였다. 그날 刑吏는 이필익에게 告目을 보내어 관찰사가 本府에 들어왔으니 급히 들어오라고 전갈하였다. 그는 저녁에 급히 官府에 들어가 대기하였으나, 관찰사의 公事가 매우 번잡하여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관부에 들어가서야 관찰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관찰사는 그에게 稷米 1斛, 白米 5두, 太 5두를 선물하였다.
두 번째 점고는 1676년 9월 관찰사가 교체될 때에 있었다.
9월 24일 관찰사 呂令公이 체직되어 돌아가고, 이틀 뒤인 9월 26일에 신임관찰사 閔黯이 안변 경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봉점을 위해 대기하였다. 그러나 민암은 軍官을 시켜 대신 點考를 행하는 바람에 관찰사를 만나지도 못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고생스러웠으나 어찌하겠는가?’라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관찰사가 직접 만나 상대해주면 사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월하게 넘어가겠지만, 軍官이 점고하는 바람에 원칙대로 진행되었고, 그만큼 굴욕감을 더 느꼈던 것이다. 첫 번째 점고에서 관찰사가 직접 만나주고 선물까지 하였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점고였다.
세 번째 점고는 1677년 3월 관찰사의 순행 때문이었는데, 중간에 관찰사가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점고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는 관찰사가 순행온다고 하여 點考를 위해 관아에 들어가는 길에 관찰사 행차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안변부사가 혹시라도 탈이 날까 염려하여 밤에 사람을 보내 급히 관아로 들어올 것을 재촉하였다. 그는 밤에 부모님 기일 茶禮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관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네 번째 점고는 1677년 4월 19일에 있었는데 순사가 본부에 와서 들어가 逢點하고 다음날 돌아왔다는 사실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이상 네 번의 점고는 이필익이 유배된 죄인의 처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첫 번째 점고 때에는 관부에 들어가 대기하였으나 관찰사가 바빠서 만나지못하고 다음날 다시 들어가야 했고, 두 번째 점고 때에는 관찰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軍官에게 엄격한 점고를 받아야 했고, 세 번째 점고 때에는 관찰사가 중도에 돌아가서 점고가 취소되었는데도 집안의 제사를 뒤로하고 한밤중에 관청에 들어가야 했다.
관찰사의 點考는 횟수는 적었지만 엄격하였기 때문에 안변부에서도 철저하게 준비하여 관찰사가 중간에 돌아가버린 경우에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유배인을 대기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유배인의 사적인 상황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 점고는 2년 7개월 동안의 유배기간 중에 4차례에 불과하였으며, 안변부에서 별도로 점고를 행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관찰사 점고를 제외하면 관청에서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친지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유배지의 사족들 및 다른 유배인들과 새로운 교유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왕래하며 담화를 나누고 가끔 國島, 釋王寺 등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날을 보냈다. 이는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향촌에 거주하는 일반 사족들의 일상생활과 크게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2) 가족과의 동거
유배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이 가족과의 관계이다. 유배살이는 자신의 근거지에서 이탈되어 강제적으로 먼 곳으로 옮겨가 살아야했기 때문에 가족과의 생이별을 감수해야했다. 국가에서는 家屬들이 유배인을 따라가 함께 거주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형률의 근간을 이루었던 『大明律』에서는 “流刑을 범한 자는 처첩이 따라가고, 父祖子孫 중에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준다. 遷徙, 安置人의 家口도 이에 준한다” 고 하였고, 1449년(세종 31)에는 『대명률』의 규정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유배인들은 조선초기부터 家屬들이 유배지에 따라와서 거주하는 것이 법으로 보장되었으며, 실제로 유배지에서 함께 거주하는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17세기 후반에 유배생활을 한 이필익의 경우에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유배형이 내리자 급히 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 100리 이상씩을 달리는 험난한 길이었기 때문에 家屬들을 동반할 형편이 못되었다. 때문에 그는 유배지에서 정해 준 보수주인 김예길의 집에서 혈혈단신으로 유배살이를 시작하였으나, 3개월 후인 1675년 2월 22일 처와 아들이 유배지로 찾아왔다.
일기에서는 유배지에서 가족과의 상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낮에 거처에 돌아오니 鄭大任이 家人을 데리고 와있었다. 극히 놀랍고 기뻐서당황스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묻기를 “지난번 편지에서는 상의해서 천천히 오겠다고 하더니, 어찌 이렇게 급히 길을 나섰으며 奴馬와 양식을 어떻게 마련하였습니까?” 하였더니, 처가 “갑산의 조세환씨가 저를 보러 와서 빨리 길을 떠나라고 몹시 재촉하므로 저 또한 그렇다고 생각해서 다시 소식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단을 내려 왔습니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부터 이미 이필익과 처 사이에 가족이 모여사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족이 모여살기 위해서는 수원집의 가산을 정리하고 유배지에서의 생계대책이 마련되어야 했기 때문에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처가 예정보다 일찍 서둘러서 유배지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필익의 처는 왜 이렇게 급하게 유배지로 뒤따라 왔을까?
앞의 인용문에 따르면 조세환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가 결합된 결과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의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앞서서 여러 친구들이 내가 힘들 것을 염려하여 모두들 첩을 얻으라고 권하면서 아무개의 딸과 중매를 드는 사람이 있어 某日을 기일로 하였는데, 겨우 6, 7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처가 이 때에 왔기 때문에 형세상 미칠 수가 없어 좋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배를 잡고 웃을 만하다. 말 5필과 노비 6명이 한꺼번에 오니 당장 입에 풀칠할 양식이 심히 걱정스럽다. 그러나 산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는가?
이필익은 혈혈단신으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옆에서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주위 친구들이 첩을 들일 것을 권하였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첩을 얻기 6, 7일 전에 처가 유배지에 도착함으로써, 계획은 취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환이 재촉하고 처가 급히 유배지에 도착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염려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필익은 유배지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첩을 통해 해결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처가 유배지에 도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배초기부터 처자식이 유배지에 따라오는 문제를 논의하고, 또한 실제적으로 처가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예정보다 일찍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상황은 조선 중기 여성의 생활과 활동 범위가 후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리학적 질서가 고착화하고 가문을 중시하는 18, 19세기로 갈수록 사족 부녀자가 근거지를 떠나 유배지로 남편을 따라가는 이와같은 모습은 사회 분위기상 쉽게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 유배지에 도착하게 되자 그는 새로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즉 가속의 규모가 자신을 포함하여 처와 아들, 노비 6명까지 모두 9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할 과제를 안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식구가 거처할 집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주변의 집들을 물색한 끝에 학포(鶴浦)에 위치한 黃榻 소유의 초가집 5間을 구하여 4월 2일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황탑의 집은 급하게 이사하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거처는 못되었다. 집의 규모도 넓지 않았고, ‘借屋’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빌린 집이었다. 때문에 이필익은 유배기간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하여 보다 안정적인 거처를 확보해야 하였으며, 새로운 가옥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가옥을 신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필익은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일기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달에 초가 한 채를 짓고자 하였다. … 동네 頭頭人을 불러 곡절을 말하니, 모두 “술 몇 말을 빚어 마을 젊은이들에 돌려 먹이고 목재를 收取하면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調軍이라는 것입니다. 조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 계책에 따라 이미 조군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이에 따르면 그는 집짓는 일을 동네 대표자들와 상의하였는데, 술 몇 말을 제공하면 마을 젊은이들을 조군(調軍), (調發軍人)으로 동원하여 목재를 확보해 주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청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었다. 즉, 집짓는 일이 한창 추진되는 때에 高山察訪이 학포 마을 사람들을 역인(驛人)으로 10일 동안 調發 즉 징발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필익은 고산찰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집짓는 사정을 알리면서 驛役의 調發을 정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찰방은 이를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驛吏에게 집짓는 일을 도와주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10일 동안의 驛役에 동원되는 대신 이필익의 집을 지어주는 것으로 역을 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10일 동안 驛役과 왕래하는 날짜를 계산하면, 이필익의 집을 지어주는 쪽이 덜 부담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役의 부담을 감소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흔쾌히 그의 집짓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이필익은 유배지에서 지방관의 도움으로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가옥을 신축하여 9월 8일 새집으로 이사함으로써 가족들과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4. 유배지에서의 생계대책과 후원
1) 유배지의 지원과 전답 경영
유배인이 혼자의 몸일 때는 保授主人 집에 얹혀살면 최소한의 생계는 해결 되었지만, 家屬들이 유배지에 따라와서 동거할 경우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자구책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이필익은 처와 아들이 노비 6명을 거느리고 유배지로 찾아오자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으로서 생계대책을 고민해야 했다.
그는 가속이 도착한 다음날 곧바로 안변 관아에 所志를 올려 쌀 1斛, 콩 1斛, 馬草 1駄를 얻어 奴馬가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과 가속들의 4, 5일 양식을 마련하였다. 다음날인 24일에는 안변에 살고 있는 五里村 奴子 厚發과 婢子 不禮를 使喚하기 위하여 官威를 빌어 잡아왔다. 이렇게 그는 관청의 도움으로 노비 2구과 4, 5일 양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회적인 시혜였기 때문에, 가족들과 거주하기 위한 장구적인 대책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에 그는 가속들과 함께 살 집을 鶴浦에 마련하면서 본격적으로 생계대책을 추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배지 고을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3월) 29일. 府伯이 처음에 屯田 數日耕을 허락하였다가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서 허락하고 뒤에 후회하였다. 계란유골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안변부사 徐文尙(1630∼1699)이 그에게 둔전 수일경을 지급 하였는데, 암행어사 행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둔전 지급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결국 지급되었던 둔전은 다시 회수되었던 듯, 그는 학포로 이사간 직후에 다시 경작지를 확보하게 된다.
(4월) 3일. 화등리는 驛村이다. 驛吏 이태복, 평민 황대해 김립 등 3,4인이 찾아 왔다. 농사짓는 일에 대해 언급하고 또 竝作할 길에 대해 물었다. 이태복이 나를 위해 劃策해 주어 우연히 驛畓 25마지기, 田 1일경을 얻었다. 다행이다.
그가 학포 花登里로 이사한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집에 방문하였는데, 마침 驛吏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들에게 생계를 위하여 농사일에 대해 문의하였는데, 마침 함께 왔던 驛吏의 주선으로 驛畓 25마지기와 驛田 1일경을 확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如愚洞에 사는 李子誾이란 사람에게서 粟苗가 심어져 있는 큰 밭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전답에 파종한 농작물은 黍粟豆太 등으로 7월에 수확하였다. 마을 사람은 지난해에 비해서 절반도 못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여덟 식구가 한해를 지내기에 족하다며 매우 흡족해 하였다.
그 해에 이들 전답에서 얻은 수입은
ⓛ 역촌에서 획급받은 馬位畓에서 800穧(볏단), 馬位田에서 粟 6車
② 이자은이 제공한 밭에서 3車
등으로 총 합계가 50斛(『경국대전』 1小斛=15斗) 가까이 되었다.
그는 1677년 1월에는 농사일을 위하여 農牛까지 구입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유배지에서 가옥을 신축하고 역촌에서 馬位田畓을 획급받아 경작하고 農牛까지 갖추는 등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였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한해 50斛 정도의 수입을 토대로 가족들과 함께 유배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안변부에서 還穀을 지급받았다. 일기에 의하면 1677년 3월 15일 奴子 厚發의 이름으로 所志를 올려 鶴倉에서 환자로 稷 2斛, 太 2斛, 耳麥 3斛 등 총 7斛을 받았고, 4월 14일에도 奴子 후발의 이름으로 本倉에서 還上로 租米太 6斛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생계책 마련 외에도 안변부사(관청)는 新曆, 술, 곡물, 찬물 등 각종 생활 물품을 수시로 제공하였다.
일기에 보이는 기록을 중심으로 안변관청에서 제공된 물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변 수령(관청)의 물품 제공 상황>
날 짜 내 용 물 품
1674.12.2 문안 술 1壺
12.3 부사가 보냄 油 1升
12.15 찾아옴 술, 新曆
12.23 各種
12.24 안부 술 1壺, 詩
12.27 석왕사 유람길에 보냄 닭 2首, 太 2두, 술 1壺
1675.1.1 설날 歲酒盛饌, 시
1.15 藥飯大饌
1.18 술, 시
1.20 방문 술
2.3 본부에서 보냄 藥物, 饌物
2.23 본부에 소지를 올려 요청함 米太 各1斛, 馬草 1駄
3.5 罷榜 후에 본부에서 보냄 食鼎 1坐, 把子 2浮
3.15 본부에서 보냄 書院稷 1斛, 醬 1두
1676.3.17 본부에서 받아옴 租 1斛
8.18 집짓는 데 보내옴 窓戶樞鐵
9.20 부사가 帖으로 보냄 魚饌數種, 휴지 3권, 盤子 2立, 소주 3선
10.29 본부에서 帖으로 보냄 大米 5두
1677.1.30 본부에서 보냄 淸 2승, 진말 3두, 어물 4종, 秋露 3膳
합계 미 1곡, 대미 5두, 조 1곡, 직 1곡, 태 1곡 2두, 술, 찬물, 마초, 각종 잡물
안변부사가 보낸 물품들은 대체로 술과 음식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는 생계유지를 위한 粮資라기보다는 변방에서 유배살이를 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정표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필익이 요청할 경우에는 생계에 필요한 벼, 쌀, 콩 등의 곡물을 곧바로 보내주고 있다.
그가 유배기간 동안 안변부사로부터 제공받은 粮資는 쌀 10두, 大米 5두, 조 10두, 稷 10두, 콩 12두에 달하였다.
안변부사는 유배초반에는 徐文尙이었다가 1675년 5월 安縝으로 교체되어 유배가 끝날 때까지 재임하였다. 이들 두 사람 모두 당색이 서인계열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유배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서문상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時事를 개탄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섭섭해할 정도였다. 그들은 빈번하게 왕래하며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朝報를 보내주어 조정의 소식을 접하도록 배려하였고, 서로 詩를 화답하며 마음을 통하였으며, 함께 國島 유람을 하기도 하였다. 후임으로 온 안진 또한 서인계열 인물로 그와 함께 송시열의 유배길을 찾아갈 정도로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필익은 유배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상당부분을 의지하였고, 그들의 존재는 큰 위안과 힘이 되었을 것이다.
2) 서원․향교 및 각 고을의 지원
이필익의 유배는 정치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그는 관직이 없는 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당색을 같이하는 전국의 서원․향교들이 적극적이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나서서 그의 유배살이를 지원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는 유배기간 동안 자신을 도와준 이들을 일기 뒷부분에 별도로 기록해 두었는데, 이에 근거하면 그의 유배생활 후원자들을
ⓛ 서원․ 향교, ② 고을 수령, ③ 개인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원․향교의 지원>
그는 유배되기 전에 경기도 수원 향교의 校任을 맡고 있었고, 상소를 올릴때 경기유생을 대표하는 疏頭로 참여하였다.
때문에 그가 대표자로서 유배를 떠나자 경기 유생들은 조직적인 지원 활동에 착수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은 도내 서원, 향교에 通文을 돌려 모금운동을 하였는데, 그 결과 金潭, 徐文徵, 安相萬 등 127명의 유림들이 쌀과 목면을 수합하고, 쌀은 수송하기 편리한 中木으로 바꾸어 총 37疋을 마련하였다.
이 가운데 22필은 이필익의 본댁으로 보내고 나머지 15疋과 紙筆墨, 新曆 등을 유배지로 보내주었다. 이들 물품은 그가 유배지에 도착한지 두달이 채 되지 않은 1675년 1월 17일 편지, 통문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후 5월 27일에는 충청도 각지에서 지원물품이 도착하였다.
淸州 유림 17인, 忠州 유림 10인 등 27인이 救活 물품을 보냈고, 연산의 돈암서원에서 白紙 2속과 먹 3笏을 보내왔다. 뿐만 아니라 유배지역의 향교 서원에서도 지원 활동이 이루어져 永興鄕校에서 물품을 보내왔고, 함흥향교와 문회서원, 신덕 서원에서도 각각 4승포 1필씩을 보내왔다.
이들 서원 향교의 지원활동은 유배 초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가 가족과 함께 유배지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서원, 향교의 지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유배된 지 1년쯤 지난 후인 1675년 12월 유배지역의 향교, 서원을 중심으로 다시 모금 활동이 추진되었다. 즉, 함흥향교와 문회서원, 선덕서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남도의 각읍 향교, 서원에 통문을 돌려 그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던 것이다. 통문을 주도한 사람은 고산찰방을 지낸 李益泰라는 사람인데 전주 출신으로 남도 유림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중심이 되어 남도에 통문을 돌리게 되었다.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변에 유배와 있는 이진사는 천리타향에서 사고무친으로 주머니가 텅빈지 오래인데 한해가 저물어가는 때에 묶인 몸으로 살아갈 길이 참으로 난감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림으로서 그를 구제할 길이 없어서는 안되겠는데, 우리 고을은 學宮이 어렵기 그지없어 다만 布 세필을 專人에게 맡겨 정평향교로 遞送하니, 각 고을의 學宮에서는 차례차례로 적소로 轉送해 주시오. 우리 열읍 사림들의 뜻은 다 같아 서 사람을 급히 구제할 의리에 힘쓸 것이니, 고르게 布疋을 내어서 이에 의거해 시행한 후에 통문이 도착한 날짜와 遞送한 연유를 答通해 주기를 바랍니다.
위의 통문에서는 향교 서원 한 곳마다 베 3필씩을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때의 모금 결과는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성과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의 유배생활을 지원하기 위하여 각지의 향교, 서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유배기간 동안 서원, 향교의 지원 내역을 부록부분의 기록과 일기 본문에 의거하여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날짜 / 보낸사람 / 부록 / 일기 본문
1675.1 洛中 유림 125명, 單子, <1675.1.17> 127인이 米斗木丁을 수합하여 37丁, 紙筆墨新曆 보냄
4월 淸州유림 17인, 忠州 유림, 10인 편지, 선물, <1675.5.27> 救活之資를 보냄
5.20 遯巖書院 유림 6인 편지, 선물, <1675.5.27> 돈암서원에서 白紙 2속, 玄丁 3笏을 보냄
5월 永興鄕校 유림 2인, 서원 유림 2인 <1675.5.27> 선물약간
1677.5월 魯崗書院 齋任 2인 편지, 선물 <1677.5.19> 정목 1정
德源書院 細木 2필, 상목 3필
公州書院 세목 2필
錦山書院 세목 2필
玉川書院 세목 1필
安邊校院中 田米 1斛
鶴浦洞中 백미 1곡
德源校中 백미 1두, 전미 2두, 태 2두
咸興校中 3승포 2필, 4승포 3필
<1675.1.5>咸興鄕校, 兩書
院에서 4승포 각 1필 보냄
高原鄕校 포 2필 <1676.11.26> 포 1정
水原校中 校生 米 20두, 訓下生 미 15두, 上齋 미 9두, 儒生 미 8두
定平鄕校 포 2필 <1676.11.26> 포 1정
列名儒生 세목 3필, 常木 11필
합계 15개 향교서원, 洛中유림 125인, 청주충주유림 27인, 열명유생
세목 10필, 상목 14필, 3승포, 2필, 4승포 3필, 포 4필, 백미 1곡1두, 전미 1곡2두, 미52두, 태 2두, 木 38丁, (4승포 3필, 布 2丁), 백지 2속, 먹 3홀, 紙筆墨新曆, 救活之資, 선물약간
의거하여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서원, 향교의 지원 상황 >
날짜 / 보낸사람 / 부록 / 일기 본문
전라방백 이동직 정목 3필
덕원부사 이섬 전미 4두, 대미 4두, 太 5두, 은어 2동, 연어 5미, 대임 3두
임실현감 신계징 백미 3두, 건시 2접, 眞梳 10개, 壯紙 1속, 백지 3속
수원부사 김익훈 편지, 어찬
고산찰방 송최 포 2필, 필 1병
단천군수 김두명 철물 각종
문화현령 최석영 여러번 記問
문천군수 이명빈 미, 태, 어물 각종, 여러번 記問 <1675.2.19> 魚物
<1675.3.2> 선물
남병사 변국한 대소미 6곡, 직 2곡, 태 2곡, 포 7정
길주목사 정시성 포 1정, 지 6권, 필묵, 어물 각종
남병사 민섬 대미 1곡, 전미 1곡 <1677.10.17>大小米 各1斛
함흥판관 권시경 오승포 4필
1674.12.23 巡相 新曆, 粮饌優數
1675.3.2 정평부사 정, 사문관, 한기백, 대년 각각 선물
3.12 고산찰방 米 2두, 太 2두, 甘藿, 加魚, 銀魚 를 보냄
위의 표에 의하면 15개 향교, 서원과 수백명의 유림들이 지원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지역적으로는 그가 거주하는 수원 및 경기지역, 충청지역, 유배지역 등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경상도 지역은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는 그의 당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원 규모는 목면과 베 수십 필, 米太 수십 두에 달하였다. 이는 상당한 규모로 그가 유배생활을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고을 수령들의 지원>
그의 유배생활을 지원한 이들은 서원 향교 외에 각 고을 수령들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각 고을에서 지원한 내역을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각 고을의 지원 상황>
3.18 정평부사가 主人에게 부쳐보냄
백미 3두, 전미 2두, 태 3두, 대구 5미, 명태 60미, 감태 3속
3.18 정평찰방 망건 1부
4.10 관찰사가 帖으로 보냄 稷米 1곡, 백미 5두, 태 5두
1676.1.10
營帖을 가지고 鶴浦 社倉에서 받아옴(관찰사) 米 5두, 太 5두
3.17 營帖을 가지고 府倉에서 받아옴(관찰사) 米 10두
합계 별록: 12고을
일기: 3고을
정목 3필, 포 2필, 8정, 5승포 4필
백미 3두, 전미 1곡 4두, 대미 1곡 4두, 태 2곡 5두, 대소미 6곡, 직 2곡, 지필묵, 각종찬물 등
백미 8두, 전미 2두, 직미 1곡, 미 17두, 태 15두, 대소미 2곡, 어물, 찬물, 각종 물품
위의 표에 의하면, 고을 수령의 지원은 주로 유배지 인근 지역에 집중됨을 알 수 있다.
이들 또한 그와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부록과 일기내용을 종합하면 15고을 수령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함경도 관찰사는 매년 물품을 보내주고 있다. 유배 직후인 1674년 12월에는 新曆과 식량, 음식물을 넉넉히 보내주었고, 1675년 4월에는 稷米 1곡, 백미 5두, 태 5두, 1676년 1월에는 米 5두, 태 5두, 3월에는 米 10두를 보내주었다.
함경도 관찰사가 제공하는 물품은 대체로 곡물이 중심을 이루며 규모 또 한 적지 않기 때문에 유배지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북청의 남병영을 비롯하여 길주, 고산, 정평, 문천, 함흥 등도 모두 유배지역 인근 고을들이었다. 이들 고을수령들이 제공하는 물품은 면포와 곡물, 그리고 각종 饌物이 중심을 이루었다. 서원 향교의 제공물품이 면포와 곡물이 중심을 이룬데 비하여, 고을 수령들이 보내는 물품은 생계를 위한 면포 곡물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날짜 / 보낸사람 / 부록 / 일기 본문
김간, 김재 겹의 각 1령
洪州 황도, 報
恩 박상호 정목 2필
조시정 유의 1령
이무, 이도 목 1필
유회일 정목 1필
윤희좌 백지 10장, 玄丁 1홀
윤제민 먹 1정
이정길 먹 1정
조인수, 조대수 장지 1(속), 황필, 현정 1홀
조시건 장지 1속
조태개 미 1두
박재 목화 2(근)
박규 목화 2근
박재희, 박재령 柴草 각 1(태)
임흥망 尼魚 1미
최무석 미 2두
박륜 靑梨
한윤창 미 2두, 유의 1
이수징 목화 1근
1674.12.16 김극명, 김만영 柴 1태, 酒肴
12.20 전동흘 周米太
12.25 友 정필주 華蟲 1首, 淸蜜 3승
12.25 本府士人 박륜 靑梨 30개
12.28 永興居 장문형 편지, 雉
12.30 이정 白紙 4속
1675.1.2 석왕사 승인 靑梨 10개
<개인의 지원 및 선물>
그에게 물품을 보내준 사람으로 부록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24인이 등장하는데, 제공한 물품은 주로 목면, 쌀, 종이, 먹, 옷 등물이었다. 이들외에도 부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일기 본문 중에서 확인되는 사람들이 31인에 달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유배지 인근에 사는 지인들과 마을사람들이 해당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물품은 주로 술, 종이, 과일, 어물, 찬물 등물로 정표로서의 성격이 크다. 이들의 물품 내역을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개인의 지원 및 선물>
1.10 김덕신, 정언임, 흥망 白糖, 民魚 1尾
1.11 서준익 新曆 1部
1.16 본부인 한방례, 박승준 柿, 梨, 酒
1.25 이, 조 편지, 四種珍味
1.26 박일개, 박징 평지, 선물
2.4 조시정 衣, 粮資, 饌物
2.6 淮陽牧 애일 山梁 1首
2.14 좌수 이두성 柴 3태
2.15 손후경 酒 1壺, 雉 2首
2.20 여순 酒 1壺
2.27 배영성 粮饌
3.6 李, 진덕신 稷 1斛, 盤子 3立
3.15 평강 박일개 田米 2두, 赤斗 2두
8.18 이지필, 김천원 가옥신축에 蓋草, 藩籬
1676.11.26 함흥 한기천 2丁布
12.10 최석영 석어 2속
1677. 6.10 조세환 扇 7柄
합계
별록: 24인
일기: 31인
정목 3필, 목 1필, 목화 5근, 쌀 5두, 백지 10장, 장지 2속, 먹 2정2홀, 옷 4령, 시초 2태, 어물, 과일등, 전미 2두, 직 1곡, 적두 2두, 포 2정, 柴 3태, 각종 찬물 및 잡물 등
이상에서 부록의 기록과 일기 본문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의 유배 생활을 후원한 각계각층의 지원내역을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그의 유배생활은 유배지 수령(관청), 각지의 향교 및 서원, 각 고을의 수령, 개인 등 네 집단의 후원 및 지원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그는 2년 7개월 동안의 유배 기간 동안 15개 향교 서원, 수백명의 유림, 15개 고을 수령, 개인 55명에 달하는 단체 및 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후원자들의 성향은 기본적으로 당색을 같이하는 정치적 집단, 출신지역 및 거주지역, 유배지역의 인물들 과 개인적인 친분이 바탕이 되었다.
이들이 제공한 물품은 면포, 곡물, 지필묵, 시초, 어물, 과일, 각종 찬물, 각종 잡물 등 매우 다양하여 정확한 규모를 헤아리기 힘들다. 때문에 면포와 곡물류에 한정하여 대체적인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배생활 중의 면포 및 곡물류 지원 상황>
유배지
곡물 미 1곡, 대미 5두, 조 1곡, 직 1곡, 태 1곡2두, 미 15두, 대미 5두, 조 15두, 직 15두, 태 17두
향교, 서원 (15校院+洛中忠淸儒林 152인)
면포 세목 10필, 상목 14필, 3승포 2필, 4승포 3필, 포 4필, 목 38정, 세목 10필, 상목 14필, 목 38정, 3승포 2필, 4승포 3필, 포 4필
곡물 백미 1곡1두, 전미 1곡2두, 미 52두, 태 2두, 백미 16두, 전미 17두, 미 52두, 태 2두
각고을수령(15고을)
면포 정목 3필, 포 2필, 포 8정, 5승포 4필, 정목 3필, 포 2필, 포 8정, 5승포 4필
곡물 백미 3두, 전미 1곡4두, 대미 1곡4두, 태 2곡5두, 대소미 6곡, 직 2곡, 백미 8두, 전미 2두, 직미 1곡, 미 17두, 태 15두, 대소미 2곡
백미 11두, 전미 21두, 대미 19두, 직미 15두, 미 17두, 태 50두, 대소미 120두, 직 30두
개인(55인)
면포 정목 3필, 목 1필, 목화 5근 포 2정 정목 3필, 목 1필, 목화 5근, 포 2정
곡물 미 5두 전미 2두, 직 1곡, 적두 2두, 전미 2두, 미 5두, 직15두, 적두 2두
총계
면포 세목 10필, 정목 6필, 상목 14필, 목 1필, 목 38정, 목화 5근
3승포 2필, 4승포 3필, 5승포 4필, 포 6필, 포 10정
곡물 백미 27두, 대미 24두, 전미 40두, 직미 15두, 대소미 120두, 미 89두
조 15두, 직 60두, 태 69두, 적두 2두
* 1 斛 = 15斗로 환산(경국대전 工典 度量衡條의 小斛을 기준으로 함)
위의 표에 의하면, 그가 유배기간 동안 지원받은 면포는 목면 31필, 38정, 목화 5근, 포 15필, 10정에 달하였고, 곡물은 米 140두, 전미 40두, 직미 14두, 대소미 120두, 조 15두, 직 60두, 태 69두, 적두 2두 등 상당한 규모에 달하였다. 이렇게 각지로부터 지원받은 수십필의 목면, 베, 수백두에 달하는 곡물들은 전답을 경영하여 한해에 수확하는 50여 곡의 곡식과 함께 그가 유배지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3) 還穀과 해배 후 귀향 지체
이필익은 각계각층의 후원과 지원을 바탕으로 2년 7개월 동안의 유배 생활끝에 1677년 7월 해배되어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의 후원과 지원이 해배된 이후에는 오히려 그의 귀향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즉, 그는 유배 중이던 1677년 3월과 4월에 관청의 배려에 의하여 환곡을 받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굴레가 되어 해배되고서도 한동안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일기 기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12월 1일 계묘. 쌀 콩 등 환자곡을 남김없이 모두 납부하고 가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남방의 흉년이 전에 없이 심하여 나서더라도 먹을 것이 없고 人馬 또한 없으니 거느리고 돌아갈 도리가 없다.
위의 기사를 통해서, 그는 해배된 지 5개월 후에야 還上 곡식을 완납하고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형세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 남방에 전에 없이 심한 흉년이 들어 가솔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이틀 후인 12월 3일 가솔들은 유배지에 남겨둔 채 혼자서 고향으로 향하였다. 그는 龍仁에 들러 妻母를 만나고 그대로 고향 尼山으로 가서 두 형, 누이와 조카들을 만나고, 다음해 1월 11일에 이산에서 다시 출발하여 수원을 거쳐 유배지 안변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유배지로 향해야 하는 그의 심정은 참담하였으나, 그래도 가솔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에 길을 재촉하여 다시 유배지로 향하였다. 그는 다시 유배지로 돌아온 후에 가을 추수가 끝나면 돌아가겠다고 결심하였으나, 다시 흉년이 드는 바람에 그 해 또한 유배지에서 보내야 하였다. 그는 평소에 고향을 떠나 流落하는 사람들을 괴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보니 형세상 자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일기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해배 이후에도 또다시 유배지에서 환곡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귀향은 더욱 지체되었다. 마침내 1679년 가을에야 남병사의 도움으로 환곡을 완납하고 유배지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일기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 을 추수한 후에 받아먹은 환곡 15석을 다행히 남병사 변국한 영공이 다방면으로 돌보아준 덕택으로 남김없이 畢納하고 비로소 가족들을 이끌고 유배지에서 나오려고 크게 마음먹었는데, 어려운 것이 人馬와 식량이었다. 흡곡 현령 김성최형이 찾아와서 나와함께 본부에 가서, … 나오기가 어려운 형편을 언급하니, (府伯)이 명주 1필, 식량 등의 물품을 지급하는 帖을 써주었다. 다음날 거처에 돌아오니 12월 2일이었다. 흡곡 수령 김모가 行資 등물을 말 한 마리에 가득 실어 보내 왔다. 6일 아침에 비로소 화등리 학포를 출발함에 여러 벗들이 모두 와서 전별하였다.
이 때 남병사 변국한의 도움으로 완납한 환곡 15석은 그가 해배된 이후인 1678년부터 1679년 봄 사이에 새롭게 받은 것이었다. 유배기간 동안의 환곡은 해배된 해인 1677년 12월에 이미 완납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이 계속 흉년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하여 관에서 환곡을 계속 받아먹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는 유배에서 풀린 자유의 몸이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환곡에 매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결국 지인의 도움으로 환곡을 畢納한 후인 1679년 12월 6일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1677년 7월 해배된 후 유배지를 떠날 때까지 2년 5개월이 걸렸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유배지에서 가속들과 함께 거주한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혈혈단신으로 유배생활하는 경우와는 달리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생계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관청의 도움으로 환곡을 받았는데, 이것이 해배 이후에는 오히려 귀향길을 지체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17세기 후반 함경도 안변에 유배된 유생 이필익 『북찬록』을 중심으로 그의 유배생활의 실상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의 유배생활은 정치적인 문제로 유배를 갔다는 점과 가족이 유배지에 따라와서 함께 거주하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그는 2차 예송이라는 정치적으로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송시열을 옹호하다 유배되었다. 때문에 그는 이름없는 유생이었지만, 송시열을 따르고 그와 당색을 같이하는 서원․향교 및 유림, 그리고 고을 수령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유배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적인 후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배지 안변 부사 또한 그와 정치적 성향을 같이하는 동지의 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의 지인들로부터 그를 잘 보살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변부사의 지원과 보살핌도 상당하여 수시로 물품을 보내고 전답과 환곡을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처럼 유배지 수령 및 각지의 후원으로 그는 2년 7개월 동안의 유배기간 중에 상당량의 물품을 지원받았으며, 이는 유배지에 정착하여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의 또 다른 특징은 처와 아들이 유배지로 뒤따라와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였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주위의 권유와 사대부 부녀자였던 妻의 적극적인 행동이 주목되는데, 이는 성리학 이념이 고착화하기 이전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게 됨에 따라 가옥을 신축하고 전답을 확보하는 등 자체적인 생계대책을 마련해야 했으며, 유배지 관청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해배된 이후에는 오히려 관에서 제공한 환곡 문제와 흉년이 겹쳐 몇 년 동안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그의 안변 유배길은 정치적 대립이 극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역량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그는 유배를 떠나기 전에는 수원 향교의 교임으로 무명의 유생이었으나, 송시열을 옹호하다가 유배길에 올랐기 때문에 서인들 사이에서 의리와 용기로 호평을 받고 조직적인 지원을 받을 정도로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유배지에서도 안변부사 등 지방관들과 동지의 입장으로 교유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2년 7개월의 유배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고난의 기간이었지만, 이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역량이 강화된 점은 그의 해배 후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필자 : 金 景 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