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훈의 인천 섬 역사산책(3)』
김석훈(문학박사)
여러분은 백령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두무진, 물범 등이 아닐까요? ~~~ 눈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에 압도되는 기괴한 자연유산도 중요하지만 다음 언급될 인문유산으로 백령도에 대해 풍부하고 입체적 이해가 곁들이면 얼마나 더 좋을까요?
그래서, 고려시대 때 편찬된 『삼국유사』에 기록된 거타지 설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설화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로서 신화(神話), 전설(傳 說), 민담(民譚)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해당 지역과 관련된 다양한 의미를 엿볼 수 있어서 중요 합니다. 먼저 최근의 소식을 담아 백령도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시작할게요.
2019년 백령도는 사곶 비행장을 비롯한 10개 명소를 지정해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정되고,1) 과 거에 비해 교통편이 좋아짐에 따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섬으로 변하고 있지요. 먼저 백령도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북한 장산곶 남쪽 38°선 바로 아래에 있으며,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191.4㎞ 떨어져 있습니다. 남한의 서해 최북단의 땅으로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에서 훨씬 가깝고, 인 천에서 배로 약 4시간 소요된다.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화동과 사 곶 사이를 막는 간석지 매립으로 약 100만 평이 불어나 8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백 령도의 한자 표기는 ‘흰 백(白)’, ‘깃 령(翎)’이며, 일명 백학도(白鶴島)라고 부릅니다.
백령도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소속이지만 예로부터 황해도와 가까워 황해도 문화권에 속 해 있었음이 자연스러운데, 그 중 하나가 설화 내용입니다. 앞서 백령도를 일명 백학도라 하 였는데, 이것도 황해도 선비와 고을 사또의 딸 사이에 해피한 만남이 백령도에서 이루어졌으 며, 이 가교역할을 한 것이 ‘흰색의 학(백학)’이었다고 한데서 비롯되지요. 이번에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거타지(居陀知) 설화도 마찬가진데, 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2)
♣ 한걸음 더 깊숙이 알아보기
진성여왕은 즉위하면서 주(州)·군(郡)에 1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 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 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대 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이 국왕을 비판하는 일이 생기고, 888년부터는 주· 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아서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 세금을 독촉했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난이 원종과 애노의 난이 889년 사벌주(현, 경북 상주)에서 있었고, 891년에 북원(현, 강원도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동쪽으로 원정시켜 명주(현, 강원도 강릉)까지 함락
신라 진성여왕(제51대, 재위 887~897) 때 즉, 9세기 말에 해당하네요. 여기서 잠시 진성여 왕과 당시 국내 정세를 알아보겠습니다.
1) https://www.koreageoparks.kr/bbs/content.php?co_id=geopark_11_00 2) https://www.incheon.go.kr/IC040310/1515688 참조
시켰다. 점차 각 지방의 반란은 계속되어 결국 후3국으로 분열되는 직접적 단초를 제공하 였고, 결국 신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혼란의 세월이었던 셈이죠.
“신라 사신 아손양패(阿飡良貝)가 당나라로 떠나려 할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바로 당나라
로 가는 길목인 진도(津島, 미상)에 집결해 바닷길을 가로막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 러자 아손양패는 이에 대비해 활 잘 쏘는 군사 50명을 뽑아 호위하게 하고는 곡도(鵠島, 백령 도의 옛 이름)에 당도했다.3)
그러나 섬에 당도하고 나자 풍랑이 일어 양패 일행은 10여 일 동안이나 섬에 갇혀 있게 되 었다. 당나라로 떠나야 할 날자는 자꾸 지나가는데 바람은 좀처럼 잘 줄을 몰랐다. 언제나 떠 나게 될 것인가. 답답해하던 양패가 부하 하나를 시켜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섬에 있는 ‘신 지(神池, 신령한 연못이란 뜻으로 지금의 연지동)에 제사를 지내라’는 점괘가 나왔다.
양패는 그 연못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풍랑이 잠들기를 빌었다. 그러자 갑자기 못 안의 물이 한 길 이상이나 용솟음치더니 다시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날 밤 한 노인이 양패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활 잘 쏘는 군사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고 가면 바람이 진정되고 순풍을 얻을 것이요.” 잠을 깬 양패가 궁사들을 모아 놓고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누구를 섬에 남겨 두고 가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궁사들은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하기로 하고 나무 조각 50개에 궁사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던 지고는 그 중에 가라앉는 나무가 있으면 그를 남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활 잘 쏘기로 소문난 궁사 거타지(居陀知)의 이름만이 물에 잠겨 뜨지 않았다. 이 리하여 사신 양패는 거타지를 홀로 섬에 남겨 두고 떠나게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순풍을 타고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혼자 남은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못가에 앉아 있었는데 돌연 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서해의 신 약(若)이라오. 매번 한 사미승이 해가 뜰 때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서는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연못을 세 번 도는데, 그러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사미승은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빼내어 먹어치우는데,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 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또 올 것인데, 부탁이니 그대가 활로 쏴주시오.” “좋습니다. 활쏘기야 내 특기이니 염려 마십시오.”
다음날 해가 뜨니 과연 사미승이 나타나 주문을 외우고 노인의 간을 빼내려 했다. 그 순간 거타지의 화살이 중의 가슴을 꿰뚫었다. 중은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때 노인이 나와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며 말했다.
“그대가 주신 은혜 갚을 길이 없으니 청컨대 내 딸을 아내로 삼으시오.” 외로웠던 거타지는 기꺼이 그의 딸을 아내로 삼을 것을 승낙했다. 그러자 노인은 딸을 꽃가지로 변신시켜 품속에 넣어 주고는, 곧 두 마리 용을 시켜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가게 했다. 얼마 후 두 마리 용이 호위하는 거타지의 배가 사신의 배와 함께 당나라 국경에 도달했다. 당나라 사람들이 보니 두 마리 용이 신라의 배를 호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당 황제는 신라 사신들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들이라 하여 특별히 큰 잔치를 열어 주고 후히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신라에 귀국한 거타지가 꽃가지를 꺼내자 꽃가지는 여자로 변신했고, 둘은 결 혼하여 오래도록 같이 잘살았다고 한다.”
이 설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의 외교 관계에 따른 교통로를 짐작할 수 있
3) 고려 이전까지 불리던 백령도의 별칭
는데, 백령도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당시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활동했다는 점입니다. 육로는 북쪽에 발해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육로로)접근할 수 없었던 점도 결정적 고려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백령도가 당으로 가는 항로상의 중간 기 항지이자 외국으로 떠나는 출항지였다는 것입니다. 백령도는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항로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며, 한국과 중국을 잇는 항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 다.4) 첫째는 연안항로로 한반도 연안을 따라 요동반도 남단까지 가서 노철산 수로를 이용하여 산동반도에 닿는 코스이고, 둘째는 횡단항로로 황해를 횡단하는 코스이며, 셋째는 사단(斜斷) 항로로, 남중국에서 동지나해를 가로질러 한반도 남부에 도달하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통일신 라시대에는 연안항로는 북쪽의 발해 때문에 불가능하고, 사단항로는 긴 항로의 위험 부담 때 문에, 주로 두 번째의 횡단항로가 사용되었겠지요. 이외에도 다른 시대에 다른 섬(예를 들면, 덕적도) 즉 옹진군 지역의 도서들은 이러한 횡단항로 상의 중요한 기항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옹진군의 도서들은 통일신라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제사회에 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령도, 그리고 옹진군의 섬들, 그리고 옹진군을 감싸는 황해, 비록 불편하고 위험한 바닷길 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 문물교류의 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겠죠.
통일신라 때 백령도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더 궁금증이 남는 것은 통일신라 때의 기항지 등 섬에 남아있는 흔적들 찾기, 무동력 상태의 어떤 방법으로 갔을까? 배의 형태와 규모, 그리고 잔해라도 찾을 수 없을까? 도해(渡海) 기간 등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점차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거타지와 일행은 두무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걱 정스런 마음에 구명조끼는 입었을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도 해 봅니다.
4) 서영대, 2018. 『옹진군지(1편)』
첫댓글 큰 역사 공부했습니다
고문님 강녕하시죠?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