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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성지순례(3)
김철교(수필가, 시인, 배재대 교수)
6월 25일 : 빌라델비아교회, 사데교회, 에베소(마리아, 요한, 누가)
(1) 빌라델비아교회(사도요한 기념교회)
호텔에서 약 1시간 반 걸려서 빌라델비아교회(사도요한 기념교회, St. Jean Church)에 도착하였다. BC140년 경 도시가 형성될 때 빌라델비아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알라쉐히르(Alasehir)라고 부르고 있다. 빌라델비아는 AD17년에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건하였다. 이곳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도시입구에 포도송이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것은 어떤 특정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빌라델비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것은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위 환경은 매우 번화하였다.
빌라델비아는 ‘형제사랑’이라는 뜻으로, 150년경에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초대교회 성령운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빌라델비아교회 즉, 사도요한교회는 600년경 비잔틴 시대에 재건되었으나 지진으로 모두 파괴되어 3개의 초대형기둥만 남아있다. 가로세로가 각각 4M, 높이는 15M에 이르는 대형 기둥으로 보아 빌라델비아교회가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 지금은 8만명정도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며, 이 지역에는 포도밭과 목화밭이 많다.
요한계시록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배반치 않음을 칭찬하고 책망한 것은 없으며, 믿음을 지키라고 권고하셨다(계 3:7-13).
교회 터를 떠나려고 하는데,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나는 방석빵을 시온성 담임목사님께서 사오셔서 단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빵의 크기도 엄청나서 방석빵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정확한 빵이름은 모른다. 항상 유머가 풍부하시고 또 모든 일에 앞장서 봉사하려 하시면서 목사티를 내지 않는 분이어서 성지순례단이 훨씬 활기차고 화기애애하여 피곤한 줄 몰랐다. 어쩌면 현대목회 현장에 가장 바람직하고 시대적 흐름에 잘 적응하시는 목회자 상이 아닐까. 요즘도 말씀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으며, 속이 텅 비어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고 권위로 뭉개려는 구시대의 목회자들이 아직도 적지 않아서 한국교회에 짐이 되고 있다.
<빌라델비아교회 혹은 사도요한교회> <방석빵(?)을 들고 있는 정성영 팀장>
빌라델비아교회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사데교회로 향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장에는 낮은 포도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빌라델비아 지역은 포도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어서 과거에는 300여 교회에 무상으로 성찬식용 포도주를 공급하였다고 한다.
(2) 사데교회
라오디게아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했던 사데교회가 있었던 이곳은 과거에는 샤르디스(Sardis) 지금은 샤르트(Sart)라 불린다. 이곳은 BC6세기경 터키 서부지역을 제패했던 리디아왕국의 수도였다. BC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게 멸망당했으며 철학자 탈레스와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태어난 곳이다. 사데에 흐르는 파크톨루스(Pactolus) 강가에는 사금이 많이 채취되어 세계에서 최초로 금화를 만들어 사용한 부유한 성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발굴할 때 많은 순금 그릇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이다스(Midas)왕의 전설은 이 지역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를 길러 주었다는 실레노스가 길을 잃었을 때 그를 후대하였다고 하여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무슨 소망이든 한 가지만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자, 마이다스는 자기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 소망이 이루어져 마침내 먹는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난처해진 마이다스는 신에게 자기의 소청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 신의 명령에 따라 파크톨루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원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파크톨루스강에서는 사금(砂金)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이곳의 아르테미스신전은 BC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건립되었으며 신전 뒤편에 중세 비잔틴 시대에 붉은 벽돌과 기와로 지어진 작은 교회가 있다. 아르테미스(아데미)는 제우스의 딸로서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약18M 높이의 돌기둥 78개로 건물의 기초가 이루어진 큰 신전으로 지금은 두 개의 이오니아식 돌기둥만이 성한채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데지역 아르테미스 신전 터> <신전 터 옆에 세워진 사데교회>
이 지역은 세상적인 풍요로움과 도덕적 타락이 극심하였으며, 교회도 이 풍조에 휩쓸려 안일과 부도덕으로 인해 생명력을 잃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꾸중을 들었다(계 3:1-6).
점심은 처음으로 현지식이 아닌 한식 비빔밥을 한나식당에서 먹었다. 참기름대신 올리브유를 넣어 비볐다. 식사를 마치고 승차하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사진을 가지고 다가왔다. 6.25때에 터키군으로 참전한 용사였다. 차에 올라와 인사도 하고 매우 반가워했다. 우리가 돈을 주려고 했으나 돈을 바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젊었을 때 목숨을 걸었던 땅의 백성들이 반가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참전용사. 의정부에서 찍은 옛 사진도 보여주었다.>
(3) 에베소
사르디스(사데교회)에서 2시간 반 거리에 에베소가 있다. 에베소(셀죽)는 소아시아 지역의 최대 무역도시로 동서양을 연결해 주는 항구도시였다. 자연적인 바닷물 퇴적작용으로 인해 흙으로 메워저 지금은 에베소 유적지에서 바다까지 4Km이상 떨어져 있다. 에베소 신전터에서 항구로 나가는 넓은 길가에는 당시의 유명한 인사들의 석상들이 서 있었다는데 지금은 목이 잘린 몇몇 석상들만이 남아있다.
<에베소 항구로 난 도로> <에베소 히드리안 신전>
에베소는 많은 상인, 벌률가, 철학자, 예술가들이 들끓는 사치와 향락의 도시였다. BC3세기부터 주요도로는 천연대리석으로 포장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천연대리석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한 수세식 공중화장실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당시는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면서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문화였다고 한다. 주거지역에는 대형목욕탕이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어 놓을 만큼 화려한 도시였으나, 1세기경 대지진으로 무너져내렸다.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에베소에서 자주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세계부호들과 유명 여성들은 에베소를 여행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에베소 공중화장실 유적지> <도미시안 신전 입구의 헤라클레스 상>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악한 자를 물리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인내함을 칭찬하시며,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시고, 처음 행위를 견지하라고 권고’하셨다(계2:1-7).
옛 에베소 교회의 건물은 없다. 바울시대 당시에는 특정 교회건물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여기저기에서 모임의 형태를 띈 교회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에베소 성곽도시 안 신전터에서 십자가가 새겨진 돌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비잔틴시대에는 무너진 신전터에 교회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전 터 주변에서 발견된 십자가 표지> <신전 터 주변에서 발견된 기독교 상징 익투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52년경) 형성되었으며, 3차전도여행 때 2년, 로마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3년간 여기에서 사역하였다. 바울은 2차 전도예행때 천막짓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행18:2) 에베소로 동행하여(행 18:19) 3개월정도 머물렀다(행18:2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3차전도여행때 에베소에서 2년간 장기적인 복음 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행19:10).
3차여행 때 에베소에 다시왔을 때 아볼로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은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여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었다(행 19:2-7).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갈 때 디모데(딤전 1:3)를 에베소 교회 지도자로 남겨 둔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로 바울이 2차선교여행때 할례를 행하여 데리고 온 동역자이다(행 16:2-3). 마게도냐에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를 보냈으며,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순교하기 직전인 67년경에 디모데후서를 써서 보낸다.
에베소는 또한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말년을 보낸 곳이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어머님을 부탁한 것도 요한이다.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아니하고 자연사한 사람이다. 에베소에 무덤터가 있다. 물론 누가와 마리아도 에베소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성모 마리아, 사도요한, 그리고 누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여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69년경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에베소에서 바다가 보이는 해발 400m의 산정상에 마리아를 위해 집을 마련했다. 마리아는 여기서 약3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로마교황청은 1967년 이곳 성모마리아집을 성지로 지정하였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가 죽은 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군인에 의해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이 후 밧모섬에 유배되어 낮에는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요한계시록을 쓰며 생활하던 중, 도미시안 황제의 죽음으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에베소교회와 서머나교회를 지도하였다. 예수님 12제자중 순교를 당하지 않고 가장 오래 살았다.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되자 요한의 무덤 자리에 사도요한 기념교회를 건축하였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527-565)황제가 교회를 증축하였으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술을 배웠다. 바울을 따라 로마전도여행에 동행하였으며(행27:1-28:15), 바울의 주치의로 마지막까지 바울과 함께 사역하였다(딤후 4:11).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람나무에 목매달려 7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사도요한은 누가의 시신을 에베소에 안치하였으나, 그 후 이스탄불로 옮겨져 지금은 돌에 새겨진 십자가와 안내판만이 남아 있다고 하여 빠듯한 일정 탓에 직접 가지는 못하고 지나쳤다.
<사도요한기념교회 세례터> <사도요한 무덤 터>
(2) 두란노서원(셀수스 도서관, The Celsus Library): 대리석2층 건물로 입구에는 지식, 지혜, 이해, 우정을 상징하는 4개의 여신상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다. 바울이 제3차선교여행때에 두란노 서원에서 2년동안 강론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여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 건너편 산 정상(원형극장이 있는 곳)에 바울이 갇혔던 감옥이 있으며, 그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나 제자로 양육하고 후일 디모데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 지도자로 보냈다.
사창가 출입구 표지. 발크기가 이보다 작으면
미성년자로 입장불허>
(3) 원형극장: 헬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고 로마 황제들에 의해 로마식으로 재건된 원형극장은 에베소 성의 중앙에 있으며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반원형 로마식 야외극장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요한도 밧모섬에서 돌아와 이곳 원형극장에서 많은 군중들에게 설교하였다. 바울은 당시 아르테미스 숭배자들과 논쟁하다 언덕위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또한 박해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한곳이라고 한다. 여기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사도요한교회의 정문을 쌓았다고 한다. 기독교 박해의 현장에 있었던 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순례단원들도 모두 모여 “저 멀리 보이는 시온성....”찬송가를 시온성교회 이갑모장로의 지휘아래 합창하였다.
(4) 아데미 신전(아르데미스, Artemis): 이곳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 아데미 신전은 길이 120M, 폭60M로 127개의 둥근 돌기둥과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지진으로 파괴되어 18M의 돌기둥 하나만이 외롭게 서있다.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상주하면서 남자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381년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인들이 이방신전들을 파괴하고 대신에 교회당을 건설하면서 그 흔적들이 대부분 유실되었다. 아데미 신전터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은 대영박물관과 에베소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5) 그 밖의 신전터 유물들
① 니케아 여신상: 날개달린 승리의 여신상이다.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이 오른손에는 밀 묶음을 들고 있다. 로마시대의 작품이다.
② 아스클레피오스 뱀 지팡이: 이 유적지에 병원이 있었다는 흔적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로 수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가 병자를 치료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가 할 일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를 안 제우스가 격노해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때 아스클레피오스가 사용한 뱀 지팡이는 지금도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미국·영국·한국 등 각국 의사단체들의 상징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니케아 여신 상> <아스클레피오스 지팡이가 새겨진 돌판>
에베소 유적지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KIPA(우리나라에 진출한 영국의 Tesco에서 운영하고 있다.)에 들렸다. 식탁을 닦을 때에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Duru라는 상표를 가진 방향제를 사기 위함이었다. 터기에 몇 번 왔던 시온성 목사님이 추천한 상품이다. 향기가 참으로 좋아서 대부분의 여성 순례단원들은 몇 개씩 구매하였다.
<쿠샤다시 마을 결혼 축제의 밤> <쿠샤다시 항구, Coastlight Hotel 야경>
쿠샤다시항구에 있는 Coastlight Hotel에 투숙하였다. 바닷가에서 바다로 향한 가설 나무다리 위에 우리 일행 일부가 모여 담소를 나무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무다리 주변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어 있어 분위기를 돋우어 주었다. 하늘에는 환한 북두칠성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내는 40여년전 숙명여고 고교동창생을 이번 여행길에 우연히 만나 뉴스꺼리가 되었다. 아내는 서울사대를 나와 33년간을 국어 선생님으로 봉직하다가 명예퇴직을 한 반면, 친구는 이대약대를 나와 의사와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아왔다고 한다.
저녁이 늦어 호텔방으로 향하는 길에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보니 마침 그 동네 결혼식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남녀노소 어린이까지 어울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우리보고 함께 합류하라고 권유했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학생들 축제때 함께 무대에 나가 엉터리 춤일망정 열심히 흔들어댔건만 요즘은 무대가 마련돼도 쑥스러워 머뭇거린다. 나이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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