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3년 新羅(신라)-唐(당) 연합군과 百濟(백제)부흥군-왜군 연합이 東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을 전개했던 白村江(백촌강), 그리고 백제부흥군의 총사령부인 周留城(주류성) 등을 정밀 답사하기로 했다. 백촌강과 주류성의 위치는 지난 90여 년에 걸쳐 韓·日 사학계에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1913년, 와세다대학 교수였던 쓰다 쇼키치(津田左右吉)는 「백촌강=錦江(금강), 주류성=韓山(한산)」이라 했고, 1923년 조선총독부의 역사편수관 오다 쇼코(小田省吾)는 「백촌강=東津江(동진강), 주류성=위금암산성」 說을 주장했다. 국내 학계는 광복 이후에도 대체로 쓰다說과 오다說로 갈라져 논란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15년 전 在野사학자 朴性興(박성흥·90)옹은 「백촌강=牙山灣(아산만) 입구, 주류성=홍성군 長谷面」이라고 주장해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예산군 德山面(덕산면)에 거주하는 朴옹은 지난 30년간에 걸친 韓·中·日 3국 史料의 면밀한 비교 연구와 정교한 현장 답사를 통해 이제는 그 자신의 說을 그 어떤 학자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로 굳히고 있다.
박성흥說의 검증―이것은 필자에게 해묵은 숙제거리였다. 날씨는 그런대로 맑았지만, 마을 안길에는 전날 내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차체가 낮은 승용차로 험한 길을 다니기는 애당초 무리일 것 같았다. 승용차를 新平面(신평면)사무소 주차장에 세워두고 卜益采씨 등이 몰고 온 12인승 봉고차에 옮겨 탔다.
우선 가까운 沙平城(사평성: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 잿골)을 찾아갔다. 1979년 10월26일에 완공된 揷橋防潮堤(삽교방조제) 남쪽 2km에 위치해 있다.
사평성內에는 선돌(멘히르) 2基가 서 있다. 이는 이곳에 有史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사평성은 주류성의 위치를 比定(비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의 하나가 되지만, 그 설명은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땅도 바위도 해변도 하얗다
沙平城으로 比定되는 당진군 산평면 운정리 잿골의 土城. 토성 내부에 선돌 2基가 있다.
우리 일행은 삽교湖 입구에 위치한 漢津港(한진항)에 들렀다. 왕년에 국내 최대의 소금 적출항이었던 이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은 뒤 현대철강(舊한보철강) 앞길을 돌아 해안 쪽으로 접근했다. 「두포」와 「성구미」 일대는 땅도 바위도 온통 하얗다. 석문방조제(10.5km) 위를 봉고차로 달렸다. 방조제의 남쪽은 간척지이고, 북쪽은 바다다.
이 일대 지명에서도 백색의 느낌이 완연하다. 석문면 삼봉리의 차돌배기 마을, 해안 경비중대가 들어선 白土丘陵(백토구릉), 현대철강 부근의 白石구릉, 송산면의 白土광산, 漢津의 白石광산…. 서해안은 으레 거무스름한 갯벌투성이인데, 유독 이 일대만 하얀 백사장이 널리 깔려 있다.
필자와 동행한 朴泰信(재야사학자 朴性興옹의 차남)씨는 현재 경남 河東에서 石山사업을 경영하는 돌 전문가이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 일대엔 규석(흰색 차돌)과 고령토가 널리 분포되어 있죠. 금강 하구나 동진강 하구에는 황해의 뻘물이 역류해 오는 탓에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지만, 이곳은 하얀 규석과 고령토의 自淨(자정)작용에 의해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거죠』
중국의 史書에 기록된 白江口가 바로 이곳 牙山灣(아산만)을 묘사한 것이라는 심증이 갔다. 黃河나 양자강 하구의 규모를 감안하면 중국인의 눈에는 아산만이 河口로 비쳤을 터이다.
石門방조제를 건너 석문면 삼봉리에 있는 白石해안에 들렀다. 병풍처럼 단애를 이루고 있는 白石해안의 색깔 역시 이름처럼 하얗다. 白石해안의 한복판에 바다 쪽으로 100여m쯤 돌출한 「長巖(장암)」이란 이름의 암맥이 있었다는데, 방조제 축조공사 때 採石(채석)을 위해 발파되어 이제는 그 끝 부분인 「황새바위」만 남아 있다. 白江口 전투 직전 唐軍함대가 정박해 있었던 해역이다.
倭船 400척과 唐船 170척의 격돌
재야사학자 朴옹은 당진군 石門面에서 高大面에 걸친 아산만 입구 일대를 白江口, 즉 「日本書紀」에 기록된 「白村江」으로 보았다. 일본 사료에 나오는 白村江을 일본인은 「하쿠스키노에」라고 읽는다. 일본어에서 「에(江)」 또는 「이리에(入江)」는 금강·동진강이라고 할 때의 江(강)이 아니라 우리 말의 「灣(만)」을 의미한다.
「舊唐書(구당서)」에 따르면 663년 8월27~28일의 양일간 백제부흥군을 구원하려고 원정항해를 감행한 왜국의 함대 400척과 도독 劉仁軌(유인궤)가 지휘한 唐의 함대 170척이 白江口 해역에서 大해전을 벌였다. 倭將(왜장)들은 자기들의 함선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물때(조수)와 풍향을 무시한 채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적벽대전 이래 중국 水軍의 전통수법인 火攻(화공)과 撞破(당파)작전에 걸려들어 왜국 함대 400여 척이 불타고 왜병 1만여 명이 전멸하는 참패를 당했다. 「資治通鑑(자치통감)」에는 『연기와 화염이 作天하니 (왜병들이 흘린 피로)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東아시아 최초 국제해전의 장소에 대해 「舊唐書」 등 중국 史書에는 「白江口」, 「日本書紀」에는 「白村江(하쿠스키노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국의 함대가 해전에 앞서 기항해 전열을 가다듬은 「白沙(백사)」는 400척이 동시에 입항할 수 있는 지형이어야 한다. 朴性興옹은 이 白沙를 현재의 석문면 장고항리 「白沙場漁港(백사장어항)」마을의 해안으로 比定(비정)한다. 白沙로 比定된 이 해안의 하얀 백사장은 무려 4km에 달한다. 동행한 朴泰信씨는 다음과 같은 부친의 견해를 전달했다.
『긴 항해를 마치고 「백사장어항마을」의 해안에 도착한 왜군의 斥候(척후)가 지형정찰을 위해 저기 저 구릉 위에 올라갔다가 白石村의 곰개(熊浦) 안에 정 박 중인 唐船 170척을 발견하고 先制공격을 한 것입니다』
백사장어항의 구릉에서 白石村의 곰개까지의 거리는 2km도 되지 않는다. 朴옹은 白石村을 「日本書紀」에 기록된 白村으로 比定하고 있다.
이어 필자 일행은 長古港(장고항)에 진입했다. 장고항의 해변은 잔모래가 아니라 잘게 부숴진 하얀 석영(차돌)으로 뒤덮여 있다. 선착장에는 때마침 황해의 외딴섬으로부터 연락선이 들어와, 승객들이 상륙하고 있었다.
필자 일행은 장고항 서쪽 끝에 위치한 石門으로 갔다. 石門은 두 개의 흙기둥이 불끈 솟은 모습이다. 올라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동행한 朴泰信씨는 두 기둥 위를 덮은 바위지붕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재야사학자 朴옹은 이곳을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능비문)에 새겨진 「巖門城(암문종성)」이라고 比定했다. 이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396년 漢江 이남의 38개 성을 공파했는데, 이곳은 그 하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石門 옆에는 방파제가 축조되어 있어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동행한 사진작가 趙明東씨는 『황해는 지는 해를 보는 곳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신새벽에 石門 방파제로 올라가 동쪽 바다를 바라보면 日出의 장관을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파제에서 내려다보니 이 앞바다는 동해의 바닷물 못지않게 푸르고 수심도 깊다. 동행한 해안경비 대대장 출신의 구성모씨는 『장고항과 국화도 사이의 폭 1km의 해역이 수만 t급 대형선이 다니는 항로』라고 말했다.
劉仁軌가 倭兵 전사자를 묻은 「막무덤」
재야사학자 朴옹은 石門面의 白沙(백사)·白村(백촌)뿐만 아니라 高大面의 只伐浦(지벌포)·孫梁(손량) 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촌강 전투 당시의 포구들을 모두 고증해 냈다.
615번 지방도로를 통해 高大면의 「배다리」에 이르러 길가에 봉고차를 잠시 세워 두고 주변 지형을 살폈다. 버스정류소 앞에서 東面하면 왼쪽으로 지벌포, 오른쪽엔 손량 등 옛 포구가 위치해 있다. 朴옹은 백촌강 전투에서 패전한 왜선들 중 침몰을 면한 일부가 밀물을 타고 이곳으로 도주했다가 唐 함대의 추격을 받아 전멸당한 지벌포와 손량을 이곳으로 추정한다. 이 옛 포구 주위의 바다는 石門방조제 축조로 이제는 모두 농지로 변해 버렸다.
「舊唐書」에 따르면 「?尸萬野(강시만야)」, 즉 왜병의 시체가 밀려와 갯가를 덮었다. 「강시」라면 죽은 누에처럼 허옇게 부푼 시체다. 唐 함대를 총 지휘한 유인궤는 文官 출신인데, 범상한 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은 「舊唐書」의 이어지는 기록이다.
<仁軌는 시신들을 모아 묻어 주고, 弔祭(조세)를 지내 원혼을 달래 주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당진군 고대면 서쪽에 높이 1間(약 2m), 주위 80間(약 160m) 규모에 달하는 土饅頭狀(토만두상)의 흙더미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흙더미를 주민들은 「막무뎀이밭」이라고 부른다. 朴옹은 이 「막무뎀이밭」 자체가 백촌강 전투 당시에 전사한 왜군의 시체가 묻힌 막무덤인 것으로 추정한다.
「배다리」에서 515번 지방도로를 따라 장항리 쪽으로 500m쯤 달리면 고대면 대촌리 구억마을이다. 길가에서도 「막무덤」이 보인다. 접근해 보니 土築(토축)의 흔적이 역력하다. 막무덤의 평평한 상부에는 비닐하우스 등이 들어서 있다.
필자 일행은 이어 면천면 서북단 九龍里(구룡리)에서 내려 絶境(절경)의 협곡(승전목) 1km를 걸었다. 이곳은 백제부흥군이 약 2개월간 사령부로 삼은 避城(피성)의 위치를 지금의 면천면으로 比定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지만 자세한 설명은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朴옹은 피성의 위치를 지금의 면천면 城上里 재골의 蒙山城(몽산성)으로 보고 있다. 몽산성 아래로 禮唐(예당)평야의 중추부인 면천의 들이 활짝 펼쳐져 있다.
이어 揷橋邑(삽교읍)에 들렀다. 삽교읍 서쪽으로는 삽교천이 흐르고 그 천변에 九萬里浦(구만리포)가 있다. 구만리포는 삽교방조제 축조로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이 南延君(남연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묘를 도굴하러 왔을 때 160t짜리 선박을 타고 이 포구에 상륙해 범행장소인 예산의 가야산 북쪽 기슭으로 向發했다.
삽교읍에서 일행과 저녁을 함께 하고 북상해 당진읍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石門중학교 박물관-大湖방조제-加露林灣(가로림만)-泰安郡 白樺山(백화산) 중턱에 위치한 국보 제307호 태안 마애삼존불상을 답사하고 난 뒤 40번 지방도로를 타고 南進, 홍성군 廣天邑(광천읍)을 거쳐 주류성으로 比定되는 장곡면 대현리 石城까지 답사했다.
대호방조제를 건너 瑞山(서산) 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삼길포 해안과 게(蟹)의 집게발처럼 돌출한 「벌말」의 방파제에서 바라본 가로림만 안쪽은 뻘물과 갯벌로 인해 거무스름하다.
百濟부흥전쟁의 발발
石門방조제 안쪽의 간척지. 돌도 흙도 해안도 죄다 하얗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백제부흥전쟁의 앞머리부터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기 660년 7월12일 羅唐연합군에 의해 사비성(부여)이 함락되었다. 7월18일에는 웅진(공주)으로 피란갔던 의자왕이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羅唐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도주하지 못한 백제의 신하들은 붙들려 唐軍의 진영에 구금당했다. 그들 중 1人인 黑齒常之(흑치상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탈옥, 그의 출신지인 풍달군(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으로 도주했다. 그는 곧 任存城(임존성)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 부흥을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 백제부흥군이 처음 궐기했던 임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異論이 없다. 그 위치는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의 봉수산이다.
이에 武王(무왕)의 종질로서 달솔(백제 16관등 중 제2위) 福信(복신)과 승려 道琛(도침)이 가세하자 열흘 사이에 의병의 군세는 3만 명에 달했다.
蘇定方(소정방)은 수하 병력을 보내 임존성을 공략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소정방은 9월3일 본국으로 서둘러 철수했다. 소정방軍은 對고구려 원정군의 주력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蘇定方은 개선하면서 義慈王(의자왕) 이하 백제의 지배층 93명과 포로 1만2000명을 끌고 갔다.
웅진성과 사비성에는 唐將 劉仁願(유인원)이 지휘하는 당군 1만 명과 武烈王(무열왕)의 넷째아들 金仁泰(김인태)가 지휘하는 신라군 7000명이 점령군으로 남았지만, 이런 규모의 병력으로 사비성(부여)-웅진성(공주)을 지키기도 어려웠다. 백제 전역에서 유민들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백제부흥군의 총지휘본부로서 임존성은 약간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해발 484m의 급경사 바위산에 축조된 길이 2540m의 석축산성에 3만 병력이 장기 주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복신과 도침은 흑치상지와 병력을 나누어 남쪽 12km 지점의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대현리)으로 총지휘본부를 옮겼다. 복신은 倭國에 사자를 보내 그곳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장남 扶餘豊(부여풍)의 귀국과 구원병의 파견을 요청했다.
661년 정초부터 백제부흥군은 차령산맥을 넘어 강동(공주-부여)까지 공격했다. 웅진의 唐將(당장) 유인원은 서라벌에 急使(급사)를 날렸다. 신라는 대규모 구원군을 파견했다.
3월5일, 이찬(신라 17관등 중 제2위) 品日 휘하의 신라군이 頭陵山城(두릉산성)의 남록에 진을 치려 했다. 두릉산성은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의 계봉산성으로 比定된다.
3월12일 무열왕의 셋째아들 金文王과 대아찬(제5위의 관등) 良圖(양도)가 이끄는 후속부대가 도착해 36일간 두릉산성을 공략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때 신라군의 보급부대가 부흥군에게 습격당해 막대한 무기와 양곡을 탈취당했다. 이에 복신의 부흥군은 대전 부근까지 진출, 신라와 웅진 간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 해 6월에는 武烈王이 59세로 병사하고 그의 장남 金法敏(김법민)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文武王이다. 唐의 戰後(전후) 처리와 점령정책이 실패한 상황에서 왕권 교체기의 신라는 위기에 봉착했고, 백제부흥군은 기회를 잡았다. 백제의 오랜 우호국이었던 倭國은 부흥군의 지도자 福信으로 부터 파병 요청을 받고 있었다.
왜군에 옹위되어 周留城에 입성한 豊王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 소재 鶴城山城. 鶴城山城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둔 石城山城과 더불어 周留城을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아스카(飛鳥) 조정의 실력자이던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는 이에 호응해 구원군의 파견을 결심했다. 그는 어머니인 사이메이(齊明) 여왕과 함께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를 출항해 규슈(九州)의 하카타(博多)항에 상륙, 이곳을 대본영으로 삼았다. 이곳 아사쿠라(朝倉)의 行宮에서 68세의 사이메이 천황이 갑자기 병사(661년 7월) 했지만, 나카노 오에(中大兄) 황자는 원정 준비를 진행시켰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우선 수군이 필요했다. 그 당시 왜국에서 최대의 해상세력은 北규슈 연안지방에 사는 아즈미(阿曇)씨, 그 수령은 아즈미 히라부(阿曇比羅夫)였다. 히라부(比羅夫)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軍將(군장)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다.
아즈미氏에 이어 유력한 해상세력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아베히케다(阿倍引田)씨였다. 그 수령은 아베히케다히라부(阿倍引田比羅夫)였다. 이 2인의 히라부가 제1함대와 제2함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부여풍을 호위할 병력도 필요했다. 사이무라지 아지아사(狹井連檳?)라는 야마토(大和) 지역의 호족을 총지휘관으로 삼은 육군 5000명이 조직되었다.
北규슈에는 아즈미氏의 병선이 상당수 있었겠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부족한 병선은 스루가(駿河: 지금의 시즈오카縣) 지방에서 건조되었다.
662년 5월, 扶餘豊은 왜병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 주류성에 입성한 부여풍은 복신 등에 의해 백제왕으로 옹립되었다. 舊백제 지역의 200여 성이 부흥군에 호응했다. 왜국은 부흥군에 화살 10만 箭(전), 絲 500근, 綿 1000근, 布 1000端(단)을 지원했다.
공주-부여 지역의 羅唐軍은 부흥군의 병참선 차단에 의한 군량 부족으로 위기에 몰렸다. 662년 8월 문무왕은 欽純(흠순: 김유신의 동생)을 비롯한 19명의 장수가 이끄는 대군을 파견, 지금의 大田 회덕에 위치한 내사지성의 백제부흥군을 討破(토파)했다. 이어 9월 하순 신라군은 총력전을 전개, 옹산성(회덕)을 함락시켜 보급로인 熊津道(웅진도)를 개통시켰다. 부흥군은 차령산맥 以西인 內浦 지역으로 철수했다.
『周留城에서 농성하면 굶주리게 된다』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소재 石城山城의 건물址. 石城山城은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인 周留城으로 比定되며, 이 건물址는 부흥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662년 12월 부흥군은 근거지를 避城(피성)으로 옮겼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이때 풍왕은 주류성에 머물던 일본군 장군 사이노무라지(狹井連)·에치노다쿠쓰(朴市田來津)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워 근거지의 이동을 역설했다.
<주류성은 논밭이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는 메마르다. 농사짓고 누에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은 싸움터일 뿐이다. 여기 오래 있다가는 백성과 병사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다. 이제 피성으로 도읍을 옮기려 한다. 피성은 서북방면으로 高連旦涇水(고련단경수)가 흐르고, 동남방면으로 진흙수렁의 큰 둑이 있어 적군을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되고, 그 둘레에 논과 밭이 있어 수로를 파서 물을 댄다. (중략) 그 지대가 낮다고 하여 어찌 옮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에치노다쿠쓰는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피성과 적이 있는 곳 사이는 하룻밤만 걸으면 되는 거리입니다. 만약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굶주림이란 다음 일이고, 패망하지 않는 것은 당면의 일입니다. 지금 적이 감히 공격을 못 하는 것은 이곳의 산이 험하고 골짜기는 좁아 지키기에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 오늘까지 버텨 올 수 있었겠습니까>
풍왕은 에치노다쿠쓰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근거지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부흥군의 실력자 복신도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백제부흥군이 옮겨간 피성은 주류성과 40km 떨어진 지금의 당진군 면천면이다. 면천면의 옛 이름이 「木彗城(혜성)」이고, 이것의 일본어 발음은 「헤사시」이다. 「日本書紀」의 저자는 「木彗城」을 일본어 발음이 같은 「避城」으로 轉寫(전사)한 듯하다.
근거지 이전은 큰 실책이었다. 662년 2월, 신라군이 백제의 거물성(거창), 거열성(남원), 덕안성(은진), 사평성(당진군 신평면 土城) 등 4개 성을 쳐서 빼앗고, 부흥군 2000여 명을 죽였다. 신라군이 점령한 사평성과 피성의 사이는 12km에 불과하다. 이에 놀란 풍왕은 천도 3개월도 안 된 663년 2월2일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
풍왕 등이 피성으로부터 주류성으로 되돌아온 무렵, 하카타(博多)항에서는 후속군이 진발을 개시했다.
후속군 2만7000명은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뉘었다. 제1진(1만7000명)은 前將軍 가미쓰케노 와쿠코(上毛野稚子), 中將軍 코세 오사(巨勢譯語), 後將軍 아베 히라후(阿部比羅夫) 등이 지휘부를 이루었다. 제2진(1만 명)은 이오하라(盧原)가 이끌었다.
왜군 進發(진발)이 어떤 이유에서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뉘어 결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추측컨대 이번에도 병력 수송에 필요한 선박의 절대수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국의 함대는 제1진 1만7000명을 실어 한반도에 상륙시킨 후 하카타항으로 귀항, 제2진 1만 명의 수송작전에 임했을 것이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가미쓰케노(上毛野)를 총사령관으로 한 제1진은 한반도 남해안에 상륙해 신라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던 2개 성을 탈취했다고 한다. 신라를 배후에서 누르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 시기에 內紛에 휩싸인 부흥군 수뇌부
주류성으로 比定되는 石城山城에서 출토된 銘文 기와.
이런 시기에 백제부흥군의 지도부에서 심각한 내분이 발생했다. 부흥군의 副元帥(부원수) 격인 승려 도침이 元帥(원수) 격인 복신에게 살해당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부흥군 내부에서의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풍왕은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사태를 제어하지 못하고 祭祀(제사)만 주관했다. 복신의 전횡에 대해 풍왕은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풍왕과 복신의 알력은 「日本書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5월 왜국 사신 이누우에기미(犬上君)가 고구려 방문을 끝내고 귀로에 石城(샤쿠사시)에서 풍왕을 만났다. 이때 풍왕은 이누우에에게 복신이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때의 「石城」이 문제다. 韓·日 사학계는 대체로 부여군 石城面에 있는 古城으로 비정해 왔다. 그러나 朴性興옹은 10여 년 전부터 이같은 학계의 다수설에 정면 도전해 왔다. 백제부흥군은 662년 9월 江東(공주-부여) 지구에서 패전, 차령산맥 以西의 內浦지역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풍왕이 부여와 논산 사이의 石城面까지 나가 이누우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분은 더욱 심각해졌다. 풍왕과 복신은 서로가 서로를 제거하려 한다고 믿었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굴방에 누워 있으면서 풍왕이 문병하러 오면 처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부여풍은 먼저 심복들을 풀어 복신을 체포하고, 그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끈으로 묶었다.
풍왕 앞에 끌려온 복신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풍왕의 심복에게 『썩은 개, 얼빠진 종놈』이라고 외쳤다. 복신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젓갈이 되었다.
백제부흥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의 주력인 제3차 파견군(후속군 제2진)이 하카타灣을 출항해 해상에 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백제부흥군의 내정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령관은 이오하라 기미(盧原君). 1만여의 병력이 400여 척의 선박에 분승했다. 이로써 왜국이 전후 세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 투입한 병력은 3만2000명을 웃돌았다.
당시 왜국의 인구는 많았다. 西일본이 벼농사의 適地(적지)였기 때문이다. 단위 생산고는 벼농사의 본바닥인 중국의 양자강 以南 지역보다 오히려 나았다. 당시, 西일본의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로 추정된다.
당시 倭國은 바다에 약했다
문제는 수송이었다. 필자는 하카타-이키島-對馬島-釜山 항로를 몇 차례 답사한 바 있지만, 결코 항해하기 수월한 항로는 아니다. 특히, 당시 왜국은 大船 건조의 기술 면에서 東아시아 주요국들에 비해 크게 낙후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농업의 適性度(적성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지역 간의 상품유통의 필요가 적었던 데다 어업도 육지와 연해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갯가에서 貝類(패류)를 채취하던 수준이었다. 大船 건조의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군사용 大船 건조는 국가권력이 관료기구를 통해 추진하지 않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國策(국책)사업이었다. 왜국은 「大化」라는 연호를 세우고 형식상 통일국가의 체계를 이룩했다고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부족연합국가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한반도의 3國은 일찍부터 국가권력에 의해 官船(관선)을 건조해 왔다. 신라는 隋(수)·唐과의 교류를 위해 황해를 횡단하는 大船이 필요했던 만큼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唐의 황실은 華北(화북)에서 흥기했던 만큼 건국 초기엔 해상에 대한 지식은 물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해상무역이 발달한 江南을 병탄함으로써 진보된 항해술과 조선술을 획득했다. 더욱이 그동안 바다를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를 수차례 원정했던 만큼 水軍의 경험도 축적되어 있었다.
제3차 왜국 원정군의 움직임은 속속 신라 수뇌부에 전달되었다. 대한해협을 건너 거제도 해역에 이르면 이후에는 남해안과 서해안에 바짝 붙어 항해했을 터이고, 곳곳의 포구에 상륙해 식수와 군량 등을 확보하고 휴식도 취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원정 항해의 비밀이 지켜지기 어렵다.
신라로부터 왜군의 동향을 통고받은 웅진의 唐將 유인원은 본국에 병력의 증파를 주청했다. 唐고종은 孫仁師(손인사)를 웅진도행군총관에 임명했다. 손인사는 663년 5월 말 山東兵 7000명을 병선 170척에 나눠 싣고 산동반도에서 출항해 남양만의 덕적도를 거쳐 아산만에 진입해 있었다.
朴性興옹에 따르면 손인사 軍의 상륙지점은 1979년 10월 방조제 축조로 삽교호 안으로 들어간 仙掌港(선장항)이다. 손인사는 선장항에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 약간의 병선을 거느리고 충청도 서해안을 남하해 웅진강(지금의 금강) 하구를 통해 웅진에 들어가 도독 유인궤와 유인원을 만나 향후의 전략을 협의했다. 유인궤는 문무왕에 대해 신라군의 출청을 요청했다.
이에 문무왕은 金庾信(김유신) 등 28將과 5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부흥군 정벌에 나섰다. 663년 7월17일 경주를 출발한 신라군은 8월 초순 공주에 도착했다.
文武王의 공격로
청양군 七甲山에 위치한 豆率城(두솔성). 文武王은 신라군 5만을 이끌고 웅진으로 행군하던 중 두솔성을 지키던 백제부흥군과 왜병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8월10일경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과 劉仁願 부대의 唐兵 1만 명 등 도합 6만 명이 주류성을 향해 進發했다. 같은 날 도독 유인궤는 杜爽(두상)·扶餘隆(부여융·의자왕의 아들)과 함께 함선 170척을 이끌고 웅진강을 거쳐 북상해아산만에 진입했다.
文武王이 이끈 羅唐연합군 6만 명은 공주시 탄천면 반여울 나루에서 도강해대안의 豆率城(두솔성: 지금의 칠갑산) 아래로 행군했다. 8월13일, 육군이 두솔성을 포위하자 부흥군과 왜군이 모두 나와 항복했다. 「三國史記」 김유신傳에 의하면 문무왕은 왜병들에겐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우리와 너희는 나라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고 있고,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 좋게 교류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에 와서 백제와 함께 악행을 하며 우리나라를 침해하려고 하는가? 지금 너희 나라 군졸들은 내 손바닥 안에 있지만,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내니 돌아가 너희 왕에게 내 뜻을 전하라>
왜병을 통해 왜왕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문무왕의 솜씨는 이렇게 치밀했다. 문무왕은 백제부흥군과 고구려의 멸망 후에 전개될 東아시아 세계의 力學관계를 내다보고 왜국에 선심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조선조의 지도지리학자 金正浩는 그가 지은 「大東地志」에서 『그래서 두솔성을 一名 慈悲城(자비성)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두솔성은 지금의 청양군 장평면 赤谷里 칠갑산 꼭대기에 있는 산성이다. 이같은 위치 比定에 異論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자 일행은 홍성 대현리 학성산성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長谷寺(장곡사·청양군 대치면) 가는 길에서 우회전해 645번 지방도로 접어들었다. 장곡사 앞길을 통해 長坪面 赤谷里의 마재터널을 빠져나오니 도로 왼쪽으로 두솔성이 위치한 칠갑산 정상부가 보인다. 사진작가 趙明東씨가 사진 촬영을 위해 앞장서 정상부를 향해 올랐지만, 積雪(적설) 때문에 중도에서 내려왔다.
청양군 定山面 쪽에서 칠갑산 정상부로 접근하기 위해 赤谷里 비탈길을 내려가려 했지만, 눈이 쌓여 포기하고, 되돌아 내려오다 이번에는 「낙지터널」을 통과해 美堂里를 거쳐 정산면에 진입했다. 정산면에서 장곡사 뒤로 빠지는 길이 663년 8월13일 신라군 5만 명이 통과한 행군로인 것으로 추정된다.
8월13일 두솔성의 백제-왜국 연합군을 항복시킨 신라군은 8월17일 백제부흥군의 사령부인 주류성을 포위했다. 그렇다면 주류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사흘 정도의 행군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당시 보병이 적의 요격을 경계하며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는 대체로 30리 정도였기 때문이다.
칠갑산 두솔성에서 장곡사를 거쳐 홍성군 장곡면 석성산성에 이르는 길은 약 40km이다. 그렇다면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석성산성」 說은 설득력이 있다. 필자가 답사해 보았지만, 그 중도에 자연 장애물은 없다.
현재, 주류성의 위치를 부안의 위금암산성으로 比定하는 연구자도 적잖다. 칠갑산에서 위금암성까지의 거리는 약 110km이다. 중도에 금강·만경강·동진강 등 세 개의 강을 도하해야 한다. 동행한 步兵 대대장 출신 구범모씨는 『칠갑산에서 6만 大軍이 사주경계를 하면서 행군, 3~4일 만에 위금암성을 포위하는 것은 古代戰은 물론 現代戰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얕보고 덤볐다가 전멸당해
당진군 고대면「배다리」버스정류소 부근에서의 답사팀. 앞에 보이는 산은 왜군의 시체가 밀려와 쌓인 당시의 포구 「손량」. 이 일대의 논은 백촌강 전투 당시 바다였다.
이오하라기미(盧原君)가 거느린 왜선 400척이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는 주류성에도 전해졌다. 문무왕이 거느린 羅唐연합군 6만 명이 칠갑산의 두솔성을 함락시킨 바로 그 날(8월13일), 풍왕은 이오하라를 接應(접응)하기 위해 주류성을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듣건대 구원군 장군 이오하라기미(노원군)가 1만여의 健兒(건아)를 이끌고 渡海(도해)해 오고 있다. 諸將(제장)들이여, 이 城을 지키는 계책을 마련하라. 나는 친히 騎兵(기병)을 이끌고 나가 白江에서 일본군을 맞이할 것이다』
풍왕은 이오하라기미軍의 상륙예상지점인 白江口에 군진을 설치했다.
663년 8월27~28일에 전개된 백강구 전투는 육전과 수전이 배합된 입체적인 국제전이었다. 해안에서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포진해 왜국의 전선을 호위하는 연계작전을 펼쳤다. 전단은 육상에서 먼저 전개되었다. 신라의 기병이 부흥군의 기병에 통타를 가해 기선을 제압했다.
唐 함대의 최고지휘관은 유인궤, 보유함선은 170척이었다. 왜국의 선발대는 唐의 함선 수가 적은 것을 얕잡아보고 먼저 돌격을 감행했다. 당시 해전에서는 唐軍의 함선처럼 舷側(현측)이 높으면 높을수록 유리했다. 접근전에서 敵 함선에 대해 위로부터 화살을 날릴 수 있고, 불타는 장작을 던져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봉대의 패전을 목격한 倭軍의 諸將들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풍왕도 참석했다.
『큰일은 아니다』
이렇게 緖戰(서전)의 패전을 대수롭지 않게 판단했다. 이어 다음날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우리 수군이 모두 앞을 다투어 猛進(맹진)하면 唐의 수군은 도주할 것이다』
8월28일 왜국 함선들은 그들의 작전계획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唐의 전함은 前後로 진퇴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왜국 함대가 저돌적 공격을 감행하자 唐 함대는 左右로 갈라져 그 兩翼(양익)으로 왜국 전함을 포위했다. 이어 화살 공격과 火攻을 퍼부었다.
「舊唐書」에는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왜선 400척이 모두 불탔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日本書紀」는 『순식간에 官軍(관군: 왜군) 패하다』라고 기록했다. 백강구 전투가 끝나자 「國人」(국인: 왜국 고위층)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 누가 조상의 묘소를 돌볼 것인가!』
풍왕은 종자 몇 명을 데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倭將 에치노다쿠쓰는 마지막까지 버티면서 칼을 휘둘러 唐兵 10여 명인을 참하고 전사했다. 익사한 왜병도 많았다. 전장에서 살아남아 귀국한 왜국의 장병은 몇 사람에 불과했다.
9월7일, 문무왕이 이끈 신라군은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풍왕의 아들 忠勝·忠志는 城兵·백성을 데리고 항복했다.
백제부흥군의 최후
주류성이 함락된 후에도 임존성에 웅거했던 遲受信(지수신) 부대는 항전을 계속했다. 문무왕은 10월21일부터 임존성을 공격했지만,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한 데다 휘하 장병들도 지쳐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10년 전 필자는 임존성이 위치한 봉수산에 올라갔지만, 이번 답사에선 積雪(적설) 때문에 등반을 포기했다. 산정의 높이가 484m에 불과하지만, 임존산 아래의 지표면이 해발 3~4m이어서 그야말로 평지돌출형의 철옹성이다. 또한 산세가 암벽으로 이뤄졌고, 동쪽 산록의 경사가 50~60도, 서쪽 산록의 경사가 30~40도에 달한다.
임존산성의 동쪽으로는 無限川(무한천)이 흘러 자연적 外濠(외호)를 이루고 있다. 山上의 분지에 길이 2500여m의 石城까지 쌓여 있었다. 이렇게 難攻不落(난공불락)의 요새이긴 했지만, 홑산이어서 많은 병사가 장기 농성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었다.
이런 임존성도 守城將 흑치상지가 유인궤의 설득에 넘어가 唐軍에 투항함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663년 11월, 유인궤는 흑치상지에게 병사와 무기·식량을 주어 임존성을 공격하게 했다. 지수신 軍은 임존성의 지리와 부흥군의 虛實(허실)에 정통한 흑치상지의 공격을 받자 곧 무너졌다.
지수신은 처자식도 거두지 못한 채 고구려로 망명했다. 임존성의 함락으로 의자왕의 항복 후 3년여간 치열하게 계속된 백제부흥운동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백제의 유민들은 계속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의 사학자 요리다(依田風)는 백제 멸망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 유민을 모두 5500명으로 계산하면서 역사기록에 누락된 것을 감안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인터뷰] 日帝 학자의 通說을 극복한 在野사학자 朴性興 옹
『周留城은 洪城에 있고, 한산說과 부안說은 허구다』
回甲 이후 30년간 연구의 結實
史書 原典 해독의 최고 실력자
지난 12월31일 밤 8시 필자는 「주류성=홍성군 장곡면」 說을 주장해 온 在野사학자 朴性興옹의 자택을 방문했다. 자택은 옛 德山縣監(덕산현감)의 官舍 터인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 1구 365번지였다. 집은 지은 지 오래되어 낡았지만, 서재엔 귀한 서적과 자료 파일들로 그득하다.
몇 달 전, 필자는 금년 90세인 朴옹이 노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하고 싶었다. 10여 년 전에 처음 만나 朴옹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朴옹은 필자가 만난 학자들 가운데 韓國·中國·日本 史書의 原典 해독이 가장 流麗(유려)하고 연구도 깊은 분이다.
필자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누워 있던 朴옹은 얼른 일어나 좌정했다. 병세가 크게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10년 전의 훤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쇠잔해 보였다.
朴性興은 1917년 8월26일 한 해에 2300섬을 추수하는 대지주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祖父는 지금의 덕산초등학교의 前身인 덕산소학교의 설립자였다.
朴옹은 충남지역 名門 공주고보 10회 졸업생이다. 졸업 후 충남 溫陽(온양)에 있던 神井(신정)소학교 교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이어 일본으로 유학, 東京理科大學에 입학했다. 대학 4학년 때 미군기들이 東京에 공습을 가하자 외아들의 신변을 걱정한 부친의 엄명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948년 정부수립 후 그는 정부 고위직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上京하지 않고 독서로 소일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때도 중앙정계의 실력자가 권유한 고위직 취임을 마다했는데, 面民들의 추대만은 뿌리치지 못해 德山면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5·16혁명이 발발하자 스스로 면장직에서 물러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과수원 경영)에 열중했다.
回甲(회갑) 무렵부터 그는 馬韓史(마한사)와 百濟史(백제사)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1990년에는 전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역사논문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때 그가 집필해 최우수상을 받은 논문의 제목은 「周留城考(주류성고)」였다.
육순 무렵부터 馬韓史·百濟史 연구
이상의 略傳(약전)은 필자의 이번 답사에 동행한 朴옹의 차남 泰信씨로부터 들은 얘기를 간추린 것이다. 경남 河東郡에서 石山사업을 경영하는 泰信씨는 內浦지방의 地理에 어두운 필자를 위해 이번 답사에 동행을 자청해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해방둥이인 제가 중·고교 다닐 때 배운 국사교과서에는 주류성은 「한산」, 白江은 「금강 하구」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1913년 그 說을 처음 발표한 학자는 와세다大 교수 쓰다 쇼키치(津田左右吉)였습니다. 쓰다說은 그 후 李丙燾(이병도) 박사와 東京帝大 이케우치(池內宏) 교수의 지지를 받아 定說視(정설시)되었습니다.
다만 李丙燾 박사는 쓰다 교수의 「백강=금강 하구」 說을 그대로 따르되, 주류성은 「한산의 乾芝山城(건지산성)」이라고 보완했어요. 쓰다說은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통설이 되어 우리 국정 교과서에 실렸던 것입니다』
─쓰다 교수가 주류성과 백촌강의 위치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래 내로라하는 일본의 대표적 역사학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습니다. 그 배경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제부흥군의 흥망이 걸렸을 때 일본이 3만2000여 명의 구원군을 파병할 정도로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친선 또는 특수관계에 있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가 韓土(한토)를 통치했다고 조작한 것과 같은 의도로 봅니다. 日帝(일제)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方途(방도)였어요』
─이제, 李丙燾 박사가 주장한 「주류성=한산의 건지산성」 說은 우리 학계에서 부인당하고 있죠.
『일찍이 가루베(輕部慈恩) 박사는 건지산성이 百濟城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성이라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998년, 우리 학계에서도 발굴조사를 통해 건지산성이 백제산성이 아니라 고려산성임을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주류성=한산, 백촌강=금강 하류」 說은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역사학계에선 쓰다 說의 지지자가 많은 것 같던데요.
『쓰다說이 제기된 지 꼭 10년 만인 1933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관 오다 쇼코(小田省吾)씨는 쓰다 교수의 「주류성=한산, 백촌강=금강」 說이 문헌기록과 어긋난다면서 주류성은 부안군 변산반도에 있는 「位金岩山城(위금암산성)」이고, 백촌강은 「東津江(동진강)」이라는 說을 내놓았습니다.
京城帝大 이마니시(今西龍) 교수도 오다說에 동조했어요. 원광대학 全榮來 교수는 광복 이후 지금까지 오다說을 계승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다說에 큰 약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후 70여 년간 오다說은 쓰다說과 더불어 주류성과 백촌강의 위치논쟁에서 양대 계파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朴性興옹이 지적하는 오다說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문무왕은 5만 병력을 거느리고 7월17일 경주를 출발, 8월 초 공주에 도착했다. 신라군이 경주에서 공주로 이동하는 단골노선은 금산-연산-논산-공주 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제2차 羅唐연합군의 작전목표인 주류성이 변산반도(전북 부안)의 위금암성이었다면 논산에 도착한 5만 신라군은 논산에서 남서쪽 80km에 위치한 위금암산성을 향해 곧장 이동했을 것이다.
(2)위금암성이 주류성이었다면 신라군은 공주에 집결하지 않고, 남쪽 노선을 통해 곧장 전북 부안지방으로 이동해야 합리적이다. 그러나 신라군은 논산 북쪽 30km에 위치한 공주에 집결했다.
(3)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웅진성에서 唐將들을 만난 후인 8월13일 두솔성(청양군의 칠갑산) 아래를 행군하다가 두솔성에 주둔하던 백제부흥군과 왜병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8월17일 주류성을 포위공격해 9월7일 항복을 받았다.
古山子 金正浩는 「두솔성은 角山(각산)에 있고, 角山은 청양 七甲山(칠갑산)이다」라고 했다. 오다說대로라면 8월13일 두솔성을 통과한 대군이 금강·만경강·동진강을 건너 8월17일 위금암성에 도착했다는 얘기다. 웅진과 위금암성 사이는 110km인데, 그 도중에 두솔성이 없고, 이 이동거리와 지형으로 미뤄 4일간에 6만 대군(신라군 5만+당병 1만)이 이동할 수도 없다.
「大東地志」 기록 무시한 일본 학자들
古山子 金正浩가 지은「大東地志」의 洪州牧 條. 그 앞머리에「本百濟周留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朴선생님께서 周留城과 白村江 위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30년 전에 내가 조선조 제1의 지도·지리학자 古山子 金正浩가 지은 「大東地志」를 보다가 洪州牧(홍주목:지금의 홍성군) 條에서 「洪州牧本百濟周留城」(홍주목본백제주류성: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이라는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다시 城池項(성지항)을 찾아보니 「洪州邑城(홍주읍성)이 주류성」이라고 쓰여 있어요.
「日本書紀」에서 관련 기록을 살펴보니까 平地의 석축성인 홍주읍성을 주류성으로 볼 수 없더군요. 이에 의문과 흥미를 갖게 된 나는 연구 끝에 주류성은 洪州邑城이 아니라 홍성군 長谷面 山城里에 있는 두루山城, 즉 「洪城郡誌」에 쓰여 있는 鶴城山城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또한 史書의 비교연구와 현지답사를 통해 백강은 牙山灣(아산만)이고, 孫仁師(손인사)가 唐兵 7000명을 거느리고 상륙한 지점은 無限川이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한 아산군 仙掌港(선장항)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견해를 논문 「주류성考」로 발표한 것은 1990년경이었습니다』
─일본학자들은 왜 「大東地志」의 기록을 輕視(경시)했을까요.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학자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한국의 사료를 참고·인용하지 않았습니다』
─豊王(풍왕)과 福信(복신)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복신이 稱病(칭병)을 하며 누웠던 「窟室(굴실)」은 찾아내셨습니까.
『내가 「주류성考」를 쓰던 당시에는 「福信窟(복신굴)」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3~4년 후에 홍성향토문화연구원 회원들이 중장비까지 동원해 탐색한 결과 烏棲山(오서산) 동북쪽 중턱, 즉 장곡면 廣城里(광성리) 內院寺(내원사) 앞에서 높이 2m, 폭 4.2m, 길이 5.3m 규모의 자연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주류성 고증에서 남아 있던 한 가지 숙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朴선생님은 장곡면 大峴里(대현리)·산성리에 있는 石城과 鶴城山城(학성산성) 일대를 주류성이라고 比定하자 홍성군에서는 상명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뢰해 1995~1997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습니다. 이때 石城의 건물지(폭 13m, 길이 30m)에서 「沙尸良」(사시량) 과 「沙羅」(사라)라 쓰인 기와조각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나 「周留城」이라는 쓰인 기와 조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발굴조사팀은 이 때문에 이 성이 주류성이라는 판단을 보류한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朴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로써 주류성의 위치가 고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성은 복신과 풍왕이 활약하던 시대보다 약 250년 전에 축조된 성입니다.
그때의 유물만 발굴되고 백제부흥전쟁 시기의 銘文(명문) 기와 같은 것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戰時(전시)였던 만큼 銘文이 들어가는 기와 따위를 제조할 여유가 없었을 터이니까요』
─朴선생님께서는 석성·학성 산성뿐만 아니라 그 아래로 펼쳐진 대부동 盆地(분지) 일대를 모두 주류성으로 比定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2차 羅唐연합군이 부흥군을 공략한 663년 8월의 시점에서 주류성의 병력은 의병 3만여 명에다 일본에서 풍왕을 호위하고 주류성으로 들어온 왜병 5000명을 더하면 3만5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3만5000여 병력이라면 그 정도의 廣域(광역) 포진은 마땅한 것입니다』
『면천面에는 高連旦涇水가 흐른다』
「高連旦涇水」가 흐르는 避城의 서북방면으로 比定되는 당진군 면천면 구룡리 계곡.
─「日本書紀」 天智 원년(662) 12월 條에 따르면 풍왕과 복신은 근거지를 주류성으로부터 避城(피성:헤사시)로 옮겼다가 663년 2월2일 주류성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朴선생님은 避城을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잿골」로 比定하셨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면천은 백제-신라 당시의 이름이 木彗郡(혜군)·木彗城郡(혜성)입니다. 木彗城의 일본음은 「헤사시」입니다』
─이케우치(池內宏) 교수는 지금의 전북 金堤(김제)를 避城으로 比定했죠(이케우치說의 논거를 요약하면 『避城은 「삼국사기」 地理志에서 「?城縣本?骨」(벽성은 본래 벽골)이라 한 벽골과 통하며 「日本書紀」의 지리적 기재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城도 「헤사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케우치는 「高連旦涇水(고령단경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고련단경수」의 典據(전거)는 무엇입니까.
『南朝의 梁나라 武帝 때 편찬된 詩選集에서 처음 나온 용어입니다. 高連은 높은 산, 경수는 맑은 물이 흐르는 黃河 상류입니다』
─이케우치 교수의 「피성=김제」說을 뒷받침해 온 것 중의 하나는 碧骨堤(벽골제)입니다.
『내포지방의 면천, 즉 백제 당시의 木彗郡(혜군: 지금의 면천면)에도 碧骨池(벽골지)가 있었습니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면천군 條에 기록된 벽골지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후일의 合德池(합덕지)로서 禮唐(예당)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에는 충남지방에서 제일 가는 거대한 방죽이었습니다』
─피성으로 근거지를 옮긴 부흥군이 석 달 만에 沙平城(사평성)이 신라군에게 점령당하자 주류성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케우치 교수는 663년 2월에 신라군에게 공취당한 4개 성 중 하나인 沙平城을 끝내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반면 朴선생님은 삽교천호 방조제의 당진 쪽 휴게소에서 2km 남쪽의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 土城(토성)으로 比定하셨습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주류성으로 比定한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에서 피성(면천)이나 사평성(신평면 운정리 성재)까지는 각각 약 40km입니다. 반면 사평성에서 피성까지는 불과 12km입니다. 신라가 사평성을 점령하자 12km 떨어진 피성에 있던 풍왕이 40km 남쪽의 주류성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당시 사평성은 응당 木彗郡(혜군:면천)의 屬縣(속현)인 사평현이 관리한 성이었겠지요. 신라는 그 후 사평현을 「신평현」으로 고쳤을 겁니다. 지명 변천에서 「사」는 흔히 「새-新」으로 변하는 겁니다』
두 노인의 말다툼 듣고 힌트 얻어
─당진군 석문면에서 고대면에 걸친 아산만 입구 해역을 백촌강 전투의 현장으로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주류성과 임존성은 모두 無限川邊(무한천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서산 남동쪽에서 발원하는 이 하천은 北流해 아산만으로 흘러듭니다. 따라서 수군이 주류성과 임존성을 공략하거나 원병을 보낼 때 아산만 입구에서 무한천 하류에 이르는 해역은 피아간 가장 중요한 水路인 것입니다』
─朴선생님께서 아산만 입구를 백촌강으로 比定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입니까.
『20여 년 전 내가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에 있는 수군만호의 성을 답사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두 노인이 술이 거나한 모습으로 티격태격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놈아! 40년간 배를 탔던 내가 뱃놈이지 네가 무슨 뱃놈이냐」
「40년간 배 타면 무얼 알어? 나처럼 원양어선을 타야 뱃놈이지」
나는 「40년 연안어선의 어부였다」는 강인선 노인이 중간에서 내리려는 것을 종점에 있는 식당까지 모시고 가서 귀중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포지역 사투리로 손량을 물었습니다.
「손랭이는 아십니까?」
「그거 高大灣(고대만)으로 들어오는 어귀에 있는 선착장입니다. 내가 배를 대던 데요」
이것이 나에게는 韓·中·日, 3국 史書(사서)에 기록된 백촌강 전투 관련 지명의 現위치를 연구하고 답사를 통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손량은 당진군 고대면 장항리와 대촌리 중간에 위치한 좁은 灣內(만내)의 옛 포구다. 지금은 매립되어 농지화했다. 백촌강전투에서 패한 왜국의 함대 중 일부는 이곳까지 도주했다가 모두 침몰당했다.
朴옹과의 대화는 2년에 걸쳐 진행된 셈이다. 2005년 12월31일 저녁 8시에 시작된 인터뷰가 해를 넘겨 2006년 1월1일 새벽 0시30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는 朴옹의 건강이 걱정스러웠지만, 朴옹은 오히려 밤샘 토론을 벌이고 싶은 모습이었다. 『이번 답사 일정 끝에 다시 찾아와 뵙겠다』고 말씀드리고 朴옹 댁에서 물러나 새해의 瑞雪--
예산 성부제님은 학산성과 석성산성을 사라져 버린 옛 풍달군의 치소로 주장한다. 주류성 함락후 임존성 공격까지의 한달여 공백은 주류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을 해산시키고 또한 주류성의 외곽 백제성 인 바로 이곳의 부흥군을 진압하는 시간이라 주장하고 싶다. 홍주목 산악지역의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임존성으로 진격하려면 이곳 풍달군의 치소를 반듯이 평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성흥 선생의 주장처럼 12km 거리의 사평성이 함락되어 부흥군이 주류성으로 되돌아 온 것일까? 사평성을 점령한 신라군은 수많은 백제 유민을 이끌고 도망가는 부흥군을 추격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을까? 추격 선발대로 기병을 보내면 수십분 이면 되는 거리 이고 걸어서 두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돌아온것은 나당군의 진압 군사력이 강하여 위협을 느끼고 주류성으로 되돌아온것이다. 신라군이 점령했다는 사평성은 고서의 기록대로 백제 남부의 산성으로 보인다.
첫댓글 월간조선에서 읽어본 글로 백제부흥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주류성을 공부하게된 계기 글이다.
정읍지역에 머물면서 부안 우금산성이 주류성으로 인식하다가 이 글을 보고 많은 부분 공감하고 주류성에 관심 가지게 되었던 글이다...
예산 성부제님은 학산성과 석성산성을 사라져 버린 옛 풍달군의 치소로 주장한다.
주류성 함락후 임존성 공격까지의 한달여 공백은 주류성으로 몰려든 유민들을 해산시키고 또한 주류성의 외곽 백제성 인 바로 이곳의 부흥군을 진압하는 시간이라 주장하고 싶다.
홍주목 산악지역의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임존성으로 진격하려면 이곳 풍달군의 치소를 반듯이 평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성흥 선생의 주장처럼 12km 거리의 사평성이 함락되어 부흥군이 주류성으로 되돌아 온 것일까?
사평성을 점령한 신라군은 수많은 백제 유민을 이끌고 도망가는 부흥군을 추격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을까?
추격 선발대로 기병을 보내면 수십분 이면 되는 거리 이고 걸어서 두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돌아온것은 나당군의 진압 군사력이 강하여 위협을 느끼고 주류성으로 되돌아온것이다.
신라군이 점령했다는 사평성은 고서의 기록대로 백제 남부의 산성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