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씨(永川李氏)경정종택(敬亭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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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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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종택(敬亭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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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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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326 (원소재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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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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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성(李民宬, 1570~1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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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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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李時夏)/이영호(李永鎬) |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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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면 산운(山雲) 마을에 세거(世居)하는 영천이씨(永川李氏) 고가(古家) 중에서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된 집으로, 이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영천이씨로 이 곳 산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거주한 분은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 선생인데, 그의 아들인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 선생 이후로 종택을 이루며 살고 있다. 대문 입구에는 ‘이영호(李永鎬)․윤구(允求)’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이영호의 아들이 윤구이다. 경정종택 대문 앞에는 350년이나 된 회나무 한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어서 종택과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종손인 이시하 옹은 올해로 연세가 96세라고 한다. |
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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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갖추어진 전형적인 종택 건물이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제사 공간인 사당(祠堂)만 남았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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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복원된 종택의 배치를 살펴보면,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사랑채(수락당)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 뒤에는 팔작기와지붕을 얹은 콘크리트조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방형의 토석담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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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당(壽樂堂) |
사랑채 건물 전면에 붙어 있는 현판이다. 수락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원래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즉 서기 1603년에 당시 명필인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경정 이민성 선생을 위해 썼던 글씨이고, 숙종(肅宗) 경자년(庚子年) 즉 1720년에 선생의 증손(曾孫)인 이수규(李秀逵)가 그 글씨를 새겨서 게시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당하여 소실되었다가 이민성의 종(從) 10세손(世孫)이 되는 이홍(李鴻, 1887~1972)이란 분이 이 건물을 다시 세운 뒤에 쓴 글씨이다. 현판에 위와 같은 내력을 적어 두었다. 수락당은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여러 고을을 다스리며 높은 업적을 쌓았으며 통훈대부 충추목사 겸 충주진병마절제사를 지낸 만옹(漫翁) 이정기(李廷機, 1613~1669)를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정기는 이민환(李民寏)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민성(李民宬)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저서로는 <만옹유고(漫翁遺稿)> 2권이 있다.
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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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관천인(學貫天人) 백세사종(百世師宗) |
산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인 학동 이광준을 비롯하여, 두 아들인 경정 이민성,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등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학록정사(鶴麓精舍)가 경정종택에 있다. 학록정사에서 보면 대문 앞쪽 100m 지점에 긴 담이 막고 있는 집이 바로 경정종택이다. 1847년 사림(士林)에서 위판(位版)을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봉안하니 상향축문(常享祝文)에 이르기를 “학관천인(學貫天人) 백세사종(百世師宗)” 즉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꿰뚫었으며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다’라는 말이다. 선생이 남긴 문집 20권(문집 12권, 별집 2권, 속집 6권)에는 주옥같은 시문을 많이 담고 있으며 연사창수집(燕槎唱酬集)과 동문잡선(東文雜選)에 실려 있다. 「경정 이민성의 문예론과 시」라는 제목으로 논문이 출간되고 그 머리말에 “북한에서도 경정 선생의 시를 문학사에서 다루고 있으며 1986년에 펴낸 조선문학 개관에 ‘경정의 시는 현실면의 부정을 폭로 비판한 대표적인 한시’다.”라고 분석하였다. 또 2005년에는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한 문명순씨는 「경정 이민성 문학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관련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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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일(諱日, 제삿날)을 기록한 편액 |
사랑채인 수락당 뒷면 벽에는 경정종택에서 제사를 모시는 분들의 휘일(諱日, 제삿날)을 기록한 편액이 있다. 국기안(國忌案)이라 하여 왕이나 왕비의 제삿날을 적어서 서원에 게시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이처럼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선조들의 제삿날을 게시하는 일은 다른 종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전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춘하추동 네 계절에 한 번씩 지내는 사시제(四時祭)를 가장 중요한 제사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에는 사시제보다는 기제사를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학동 이광준 내외 두 분, 경정 이민성 내외 세 분, 자암 이민환 내외 세 분을 비롯하여, 종손의 3대조 내외 두 분씩 모두 열 네 분의 기일(忌日)이 기록되어 있는데, 순서대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1. 관찰사학동선조부군(觀察使鶴洞先祖府君) 7월 16일 1-2. 증정부인평산신씨(贈貞夫人平山申氏) 9월 18일 2-1. 경정선조부군(敬亭先祖府君) 8월 15일 2-2. 증숙부인양양권씨(贈淑夫人襄陽權氏) 9월 1일 2-3. 숙부인의령남씨(淑夫人宜寧南氏) 2월 10일 3-1. 충간공자암선조부군(忠簡公紫巖先祖府君) 2월 24일 3-2. 증정부인광주이씨(贈貞夫人廣州李氏) 5월 24일 3-3. 증정부인남양홍씨(贈貞夫人南陽洪氏) 8월 22일 4-1. 현증조고처사부군(顯曾祖考處士府君) 1월 3일 4-2. 현증조비유인순천박씨(顯曾祖妣孺人順天朴氏) 7월 17일 5-1. 현조고처사부군(顯祖考處士府君) 12월 23일 5-2. 현조비유인함안조씨(顯祖妣孺人咸安趙氏) 9월 2일 6-1. 현고처사부군(顯考處士府君) 1월 9일 6-2. 현비유인월성박씨(顯妣孺人月城朴氏) 7월 17일
이광준, 이민성, 이민환 세 분은 산운마을의 영천이씨 가문을 부흥시킨 분이므로 불천위(不遷位)로 삼아서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불천위 제사는 명문(名門)의 후손들의 혈연적 유대를 강화시키는 구심적인 상징이 된다. 그런데 종손의 증조부까지만 제사지내는 것은 집안마다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4대 봉사, 그러니까 고조부까지 제사의 대상으로 여긴 경우가 많았다. 한편 ‘6품 이상의 관료는 3대까지 제사지낸다’는 시왕(時王)의 제도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으니, 경정종택의 경우가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 |
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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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 |
문명(文名)이 중국까지 알려진 좌승지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 1570~1629)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이니,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둘째 아들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懸光)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깊이 배워 경전(經傳)과 역사(歷史)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출중하였다. 1597년 문과 정시(庭試)에 급제한 후 박사, 전적, 사성, 좌랑, 정랑, 지평, 장령, 형조참의, 부승지, 좌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주청사(奏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번이나 중국에 갔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제수되었다. 36세 때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使)로 보내지게 되자, 선생은 웃으면서 “남해에 발을 씻고 한라에 옷을 말리면 이 또한 남아의 일대사가 아닌가?”하고 40여 일만에 돌아오니, 심희수(沈喜壽)는 “충신(忠信)은 모든 관리의 사표(師表)요, 문장은 한 시대의 호걸이다.”라면서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대북파의 주동으로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불륜을 저지르자, 정경세(鄭經世), 정온(鄭蘊), 이언영(李彦英) 등 8명과 더불어 이를 반대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 절의를 높이 찬양하여 ‘팔학사(八學士)’로 불렀다. 1614년 광해군이 생모를 추존하여 백관이 하례하자,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나는데 여러 신하들이 바로 잡아드리지 못하니 진실로 신하들의 죄이다.”라고 탄식하고 “아들에게는 원수의 어미가 없고 어미는 아들로서 귀하게 된다.[子無讐母母以子貴]”는 말을 써서 풍자하였는바, 마침내 이이첨 등 북인에게 삭탈관직당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오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으로 복귀했다. 조정에 복귀하자 바로 주청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명나라 조정 대부들이 여러 가지 일로 훼방을 놓아 9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선생이 간절한 글을 올리니 일은 성사되었는바 그 공으로 왕이 인견하고 통정대부로 승차시켰다. 공의 문명(文名)은 오래 전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1602년 사헌부감찰로 있을 때 세자책봉 주청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처음 갔다. 이때 그곳 학사들은 시문에 능한 선생을 동방의 이적선(李謫仙) 즉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이라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진 청천(晴川) 오대빈(吳大斌)은 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시를 지어주며 화답시를 청했다. 선생이 차운하여 시를 지어주니 청천이 말하기를 “가슴속에 아름다운 덕을 숨겨 놓지 않았다면 입으로 주옥같은 시를 뱉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두루 진신사대부(搢紳士大夫)에게 보여주더라도 모두 옷깃을 여미고 경복하리다. 우리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인물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감히 면전에서 대할 때 칭찬하는 겉치레가 아니다.”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널리 알려져 두 번째 중국행 때도 많은 교유가 있었는바 사신 임무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 학동 이광준의 팔순 생신날 잔치를 열었는데, 선생이 헌수잔(獻壽盞)을 올리자 학동은 미리 준비한 시구 “인간 평생 팔십이나 사는 것은 이제도 드물거니와 옛날에도 드물었네.[八十人間世 今稀古亦稀]”라고 먼저 읊고 대구(對句)를 지으라고 명하니, 선생은 주저 없이 “장차 십년이 도리어 백년으로 변하여 팔백수를 한 팽조와 함께 하소서.[還將十變百 彭祖與同歸]”라고 응대하니, 아름다운 문장에 모두가 감탄하였다. 정묘호란(1627년) 때는 영남호소사 장현광 선생의 휘하로 좌도 의병대장으로 천거되었다. 전주로 분조한 세자를 도와 군량을 조달하고 이듬해 3월 강화 행재소에 가서 어가를 호위하여 돌아온 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9년 형조참의를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만년에는 냉천정(冷泉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장수지소(藏修之所)로 삼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여헌 선생은 이르기를 “관보(寬甫)가 당초에는 문장으로 세상에 떨치더니 만년에는 성리학에 전심하여 그 의론(議論)이 고명(高明)하다.”라고 했으니 학문의 경지가 높았음을 알 수 있겠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냉천정(冷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