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이황헌(남, 1934년생)씨
* 2010년 8월 6일 자택에서 인터뷰
안중읍 안중리에 거주하는 이황헌씨는 안중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안중고등학교 교사로 37년을 근무하였다. 퇴직 후에는 자택에 안중서당을 운영하며 평생동안 선생이라는 외길을 걷고 있다.
필자)선생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이력을 간단히 말씀해주시죠?
이)저는 포승읍 신영리 가장동이 고향입니다. 5살에 안중으로 이사하여 옛 시장 옆에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작은 포목점을 하며 조끼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었습니다. 안중초등학교를 나와 안중고등공민학교를 3회로 졸업한 뒤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마쳤습니다. 졸업 뒤 안중 중․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정년퇴직하였습니다.
필자)안중고등공민학교에 대하여 말씀해주세요?
이)안중고등공민학교는 1949년에 성공회 안중교회 박병무신부가 세운 학교입니다. 이사장은 태화정미소를 운영하였던 박재필씨였고, 박병무 신부님이 교장이었으며, 안중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세준, 정시우, 이종구, 영어를 담당했던 선생님 3명 등 6분이 가르치셨습니다.
필자)설립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이)당시 선생님들은 포부도 크셨고 대단히 헌신적이었습니다. 유세준 선생님은 1953년인가 설립인가를 받은 뒤에 초대교장을 지내셨고, 정시우 선생님은 삼정리 분인데 해방 후 청년운동에 투신하셨고, 박정희 정권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1기 대의원도 지냈던 분으로 나중에 고등학교가 설립된 뒤에는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이종구 선생님은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인데, 학력은 중학교 졸업인가 하는데 한학을 아주 많이 하셨던 분입니다. 일제 때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셨고, 해방 후에는 안중에서 교육운동을 하셨습니다. 제가 다닐 때는 교무부장을 하셨구요. 안중학교 교가도 작곡하셨을 겁니다. 듣기로는 경찰 쪽에서 영입하려고 하였지만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저기, 늘푸른 공원 안에 송덕비에 잘 나와 있어요.
필자)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요?
이)세 분(유세준, 정시우, 이종구) 선생님은 평생 교직을 한 내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정말 존경심이 드는 분들이예요.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교육받고 상급학교 진학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어요. 월급도 받지 못하고 일했다고 해요. 어려운 학생이 있으면 학비도 받지 않고 공부시켰고, 그 때는 학교 그만두게 하는 일이 없었어요.
필자)학제는 어땠습니까?
이)3년 과정이었어요. 교과도 일반교과와 같았구요. 학력인정을 못 받아서 그렇지 일반학교와 똑같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닐 때는 학력인정 못 받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요.
필자)성공회 안중교회에서 안중고아원을 운영하면서 퇴원하는 고아들을 위해 목공과도 설치했었다는 데 아시는 대로 말씀 좀 해주시죠?
이)제 기억으로 목공과는 중학교 승인을 받은 뒤에 설치하였을 거예요. 고아원 아이들도 다녔지만 학교 못 다닌 어려운 아이들도 다녔지요. 그보다는 전쟁 뒤엔가 6개월짜리 특강과라는 게 있었어요. 학교 다닐 나이가 넘어버린 아이들에게 속성으로 6개월을 가르쳐서 졸업시키는 제도였죠. 장가간 놈들도 있어서 당시로서는 아주 유용한 제도였죠.
필자)초기 고등공민학교는 고급요정 안일옥에서 시작하였다고 들었는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이)안중고등공민학교 터는 적산농지였어요. 안일옥은 안중중․고등학교 뒷문 길가에 있었던 요정이었어요. 일제 말에 서울 기생들을 데려다가 열었던 요정인데 안중시가지 규모로 볼 때 너무 컸지요. 일제 때는 만호리에 놀러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했다는데 결국 망해버렸어요. 고등공민학교를 세울 때 안일옥 건물을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썼지요. 건물이 커서 작은 방을 터서 교실을 만들었는데 지금 교실만한 것 세 개하고 교무실이 나왔어요. 굉장히 큰 건물이죠. 1회들은 가마니를 깔고 공부했다는 데 우리는 나무로 된 간이의자를 놓고 공부했어요. 학교 건축은 나중에 했어요.
필자)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안중고등학교에 부임하셨어요?
이)고려대학교 졸업한 뒤 군대를 갔다 왔어요. 고려대학교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몸이 아파 1년 쉬고 입학했으니까 1957년이고, 4.19때 4학년 이었으니까 1964년쯤 되겠네요. 제대하고 학교에 인사차 들렸더니 유세준 선생님이 할 일 없으면 내일부터 학교에 나와서 아이들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을 했고 해서 선생님과는 특히 가까웠지요. 그래서 교편을 잡게 되었어요.
필자)안중중․고등학교는 그 뒤로 이사장이 바뀌던데요?
이)박재필씨와 성공회의 노력으로 중학교를 인가받은 뒤 나중에 고등학교까지 설립되자 박재필씨 본인의 재력으로는 운영이 어렵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그래서 유세준선생님이 재력이 있는 자신의 친구(이명헌)를 소개시킨 거죠.
필자)선생님의 안중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활동을 소개해주세요? 혹 보람 있게 생각되는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부탁합니다.
이)선생노릇 하는 거야 다 똑같지요. 저는 물리를 가르쳤는데 선생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어요. 보람이라면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만이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안중학교 졸업생 중에 고시합격자만 10명이 넘고, 어떤 반은 같은 학급에서 대기업 사장, 국회의원 하는 이계안, 변호사하는 공제한, 경찰국장, 항공대 교수를 한꺼번에 배출하기도 하였지요. 시골학교에서 그만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한 번은 이 친구들이 초청을 해서 저녁을 대접받았는데 가슴이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필자)지금 운영하시는 서당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이)제가 퇴임을 1999년에 하였는데, 퇴임 전부터 무슨 일을 할까 고민했어요. 그래도 평생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서당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퇴직 3년 전부터 한문공부를 했고 퇴직한 해에 곧바로 열었지요. 이왕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니 죽을 때까지 가르치다 마쳐야지요.
필자)평생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신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