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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기 학봉 김성일의 구국활동
최효식(崔孝軾)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장
<目 次>
Ⅰ. 머 리 말
Ⅱ. 초유사의 활동
Ⅲ. 김성일의 지도력과 관․의병의 조정
Ⅳ. 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공과
Ⅴ. 맺 음 말
[한글 요약] 임란초기 학봉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의 직책을 맡아 관군을 소집하고 경상도 지 방의 의병을 소모하여 구국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수령이 없는 지역에 수령과 소모관을 임명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그리고 관군과 의병진의 화의나 융합을 도모하여 일본군의 호남지역으로의 진출을 차단하여 호남을 수비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성일은 선무원종 일등공신이 되었고 문충공, 이조판서에 중직되었다.
[영문 요약] At first stage of Imjinoaeran(壬辰倭亂), Kimsungil took the position of service of the Choyousa(招諭使), Kyungsangdo(慶尙道). He fused the army in cause of justice into the one with the government troops and kept the aggression of the Oaegun(倭軍). And especially, left big contribution in the defense of Honam(湖南).
[주제어]
김성일(Kimsungil), 승문원(Suongmunwon), 관군(the Government troops), 의병진(the Army in cause of justice), 가수(Kasu), 통신사(The diplomacy envoy), 초유문(Choyoumun), 진주혈전(The Jinju battle), 김수(Kimsu), 곽재우(Khoakjaewoo), 김시민(Kimsimin), 학봉집(Hakbongjib)
Ⅰ. 머리말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이 당한 가장 큰 국난이었다. 이 국난을 극복한 주체는 그 당 시 정규군인 관군과 구원군인 명군보다도 민중의 의용군인 의병이었던 것이다. 임난이 발발하자 국방을 담당한 관군은 쉽사리 붕괴되어 전 국토가 왜군의 점령하에 들어가 게 되니 각 지방의 의사들이 솔선하여 창의하고 군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토왜전열에 앞장섬으로써 비로소 침략군을 물리치고 국토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처음부터 관군과는 서로 견제대립 하려는 상관 관계가 되어 관군과 의병장 사이에는 시기상극하는 실정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유 독 영남지방의 의병만은 학봉 김성일(1533~1593)의 지도력에 힘입어 관군과 서로 협조하여 타도에 비하여 왜군에게 패사한 사람이 적었으며 또 의병장인 김면․곽재우․ 정인홍 등은 모두 왜군을 토벌하여 큰 공훈을 세우게 되었던 것은 김성일이 관군과 의병을 조정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김성일이 왕명을 받아 의병을 초모한 경위와 그 당시 의병과 관군이 서로 견제에 의한 상황에서 이들 관․의병을 조정 영도하여 호남지방으로 침 범의 관문인 진주성을 잘 보전하였고 왜군에게 점거되었던 영남일대1)를 거의 수복하여 국가중흥의 터전을 마련한 것을 중점적으로 살펴 정리하고자 하는 바이다.
Ⅱ. 초유사의 활동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기 나라가 매우 위급한 최전선 영남 우도에서 초유사와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구국활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성리학이 만개된 사회 에서 퇴계 이황․남명 조식․율곡 이이 등의 학풍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중 김성일은 안동 임하현 출생으로 퇴계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승문원, 예문관, 춘추관, 경연관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특히 영남사림의 숭상의 대상이 되었던 것 이다.
그런 까닭에 김성일은 의병 봉기에 힘이 되었던 것이며 관․의병간의 대립에 있어 융화 화합할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2) 정계에서는 동인의 수장격인 위치에 있었
1) 李魯, 『용사일기』 , 전규태 譯, 을유문화사, 1974년판을 인용하였음.
2) 김석희, 『학봉의 주체사상과 애민의식』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 학봉김성일선생 기념사업회, 1999.
다고 볼 수 있다.3)
통신부사로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일은 성균관 대사성겸 승문원 부제조에 임명되었다. 선조 25년 봄 형조참의에 특배되었고 다시 4월 1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 되었던 것이다.4)
그러나 임란이 발발하자 통신사일에 있어 정세보고를 잘못한 건으로 김성일은 55세때 체포명령이 우역편으로 전해지자 창원에서 스스로 서울로 가던 중 갑자기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5)
그러나 전쟁발발로 나라가 매우 위급해졌기 때문에 국왕 선조는 좌의정 유성룡과 대간 최현 등이 극력 해명했으며, 김성일 자신이 창원에서 왜군을 사살하고 올린 장계 에서 한번 죽어 나라에 은혜로 갚겠다고 치계한 것 등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6) 그래서 김성일은 직산에서 급하게 가던 길을 되돌려 전주, 남원, 운봉, 팔랑치로 넘어 5월 4일 경상우도 함양에 도착하였던 것이다.7) 마침 이곳에는 단양출신인 조종도가 장인의 상을 당하여 와있었고, 의령출신 이노도 창의거병을 위해 이곳에 있었다. 김성일은 이들을 만난 것을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반가워했으며8) 즉시 경상도의 사민들을 초유하는 글을 지어 널리 반포하였던 것이다.9)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0)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와서 부색해져서 섬 오랑캐가 군대를 몰래 동원하여 우리 국경을 함부로 침범하여 동․서 두 방면에서 돌진 하니 큰 성과 큰 진도 일찍부터 예방의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열흘 사이에 적병은 벌써 험관․준령을 넘어서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게 되자, 주상께서 서울을 떠나 피란하시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가 숨게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생긴 후 오랑캐의 화란이 오늘날처럼 참혹한 때는 일찍 이 없었던 것이다.
3) 이완재, 『영남학파에 있어서의 학봉선생의 위치』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학봉김성일선생 기념사업회, 1999.
4) 『학봉선생연보』 .
5) 이노, 『용사일기』 , p. 34.
6) 『宣祖實錄』 권26, 25년 5월 壬午條; 『학봉집』 권2 행장, 부록권1 연보.
7) 이노, 『용사일기』 , p. 37 참조.
8) 이노, 『용사일기』 , pp. 38~39.
9) 『학봉선생문집』 권3, 『招諭一道士民文』 . 최현, 訊齊集 권13, 학봉선생언행록; 김시황, 『학봉선생의 초유문에 대하여』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 학봉김성일선생 기념사업회, 1999, pp. 433~456.
10) 이재호 『경상우도에서의 학봉의 토멸 구국활동』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 학봉김성일선생 기 념사업회, 1993, pp. 343 351, 번역문 참조.
여러 도의 장수들은 국가를 방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도, 혹은 적병이 침범 했다는 소문만 듣고는 병졸을 흩어 버리고 달아나기도 하고, 혹은 적병을 무서워하고 겁을 내면서 물러나 몸을 움츠리고 있기도 했으며, 군수와 현감은 한 고을을 통 치하는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도 모두 그 처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 무기고를 불태우거나 버리고서,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분발하여 선두에 서서 적병을 공격하는 자가 없었으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고 도 망해 흩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적병의 침입하는 기세는 마치 사나운 물결과 같았으므로, 이 물결이 몰아치는 앞에 방비하는 제방이 한번 무너지매 다시 물결을 막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성에는 창을 들고 적병에 대항하는 병졸이 없었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병과 싸우는 관원이 없었으므로, 적군의 침략은 마치 사람이 전혀 없는 땅에 들어오는 것처럼 되어, 마침내 영남 일도가 함락되어 적병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우리의 형세는 마치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나서 아침에 저녁 일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현시의 변고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변장이나 군수․현감들의 과실뿐이겠는가. 이 지방의 선비와 백성 된 사람들도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도 큰 난리를 만나 나라를 잘 지키게 된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진력할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도 상사를 위해 대신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적병이 이르지 않았는데도,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을 서서 먼저 도망하여 산림 속에 숨어 있으면서 구차스럽게 목숨을 아껴 살아 남으려는 계책을 세우고 있으므로, 수령들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들은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적병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 추나라가 노나라와 전쟁을 할 때 추나라 관리들은 전사자가 30여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이것은 관리가 평상시에 백성의 고통을 돌보아 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번에 사민들이 흩어져 달아난 변고는 어찌 孟子의 이른바 당사자의 잘못 저지른 것은 곧 당사자에게 앙갚음이 되돌아간다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는데,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근년 이후로 조세도 과연 번가했으며, 부역도 과중했으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과 해자 등 적병의 침입을 방비할 기구는 모두 전쟁을 미연에 방비하기 위한 준비이니 성상께서 백성을 보전하려는 생각은 먼 앞일을 헤아렸던 것이다. 어찌 백성들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이익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나라와 노나라의 전쟁은 비록 한쪽은 이기고 한쪽은 진 것이 있었지마는 다 같은 중국 안의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는 그다지 이익과 손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 염치풍속을 가진 왜적들은 우리 땅에 부녀를 잡아가서 그들의 처첩으로 만들고, 우리의 장정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으며, 땅에 가득 찬 민가는 모두 불태워 잿더미가 되었고, 관청이나 개인의 저장물은 모두 저들이 차지하게 되어,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게 되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참화는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는 실로 지사는 창을 베고 자면서 적병 죽일 것을 기다리고 있을 날이요, 충신은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시기인데도, 경상도 67주중에서 아직까지 용기를 내면서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남보다 먼저 도망하지 못할까, 깊은 산속에 들어가지 못할까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설령 산속에 들어가서 적병을 피하고 마침내 자신과 가족을 보전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 일을 수치로 여길 것인데, 하물며 자신과 가족을 보전할 도리가 절대로 없을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당직은 사리를 자세히 말하여 사민들의 의혹을 환하게 깨우치려고 한다. 지금 적병은 서울을 침범하는 일에 서둘러서 행로를 지체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병화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았지마는, 적병이 제 목적을 달성한 뒤에 흉악한 무리들의 국내에 가득 차게 된다면, 그때는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도피할 만한 곳 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를 비유한다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장악하듯이 거센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이 될 것이니 가린한 우리의 많은 백성들은 다시 어느 곳에서 몸을 붙이고 살수가 있겠는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일이 오래됨에 따라 식량이 떨어져, 앉아서 깊은 산속에서 굶어 죽게 될 것이고, 산속에서 나온다면 부모나 처자가 왜적에게 사로 잡혀 욕을 당할 것이며, 예의를 지키는 사족은 짓밟혀 결단이 나게 될 것이다. 왜적에게 항복하면 영원히 무도한 종족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에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이해와 생사만을 가지고 말했을 뿐이다.
아아, 군신간의 대의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로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법도인 것이다. 모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께서 피란하시고, 종묘사직이 장차 넘어질 지경이며 많은 백성들이 다 죽을 지경인데도 아무런 관심도 없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천지간의 변치 않는 도리에 대하여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적병의 칼날에 죽게 되고, 형제․처자가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제 가문의 화변이 또한 위급한 처지인데도 자제된 사람들 이 머리를 싸 쥐고 쥐처럼 숨고서, 죽을 각오를 하고 같이 살아남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식된 도리에 어떻게 되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해 보건대, 영남지방은 본래 인재의 부고로 일컬어져 왔으며 일천 년의 국운을 유지한 신라와 오백 년의 국운을 지탱한 고려, 그리고 우리 조선 이백 년 동안에도 충신․효자의 영성과 의열은 역사에 빛나고 있어,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습속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었으며 이것은 진실로 사민들이 다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년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퇴계․남명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관학을 처음 강명하여 인심을 순환시키고 윤기를 바로잡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으니 배우는 선비들이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어 흥기하고 학행을 본받은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이들이 평일에 많은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가 어떠했겠는가. 그런데도 갑자기 왜변을 만나게 되자, 다만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일을 서둘러서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소홀히 하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면, 구차히 한 목숨 부지하더라도 장차 어찌 다른 사람과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수 가 있겠으며, 죽어 지하에 돌아가더라도 또한 어찌 우리 선현들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의관․예악을 가진 문화민족으로서 치욕을 당할 수가 있겠으며, 단발문신의 야만풍속을 따를 수가 있겠는가. 이백 년을 지켜 내려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 줄 수가 있겠으며, 수천 리나 되는 강산을 차마 왜적의 소굴로 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며,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이니 이런 일을 참을 수가 있겠으며,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적병의 목을 베어오는 것을 장려하는 진나라도 처음부터 순수한 오랑캐의 나라가 아닌데도 노중련은 “진나라의 무도한 것을 미워하여” 오히려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기면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무지한 이 섬 오랑캐는 얼마나 더러운 종족인데도 그들에게 우리의 토지를 훔쳐 차지하게 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욕보이도록 맡겨 두고서 이들을 몰아내고 이들을 베어 죽일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왜적의 병졸은 용감한데 우리의 병졸은 겁을 잘 내고, 왜적의 무기는 예리한데 우리의 무기는 무디니 비록 군사를 일으키더라도 일을 할 도 리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생각이 모자란 말이다.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실패할 것이라 하여 의지를 변경하거나 상대보다 힘이 약하다 하여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의리상 당연히 할 일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퇴하더라도 화살이 없는 활시위를 당기고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서 강적과 맞서 싸워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왜적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후원 없는 군대로서 우리 땅에 깊숙히 쳐들어온 것은 바로 작전상의 금기를 범한 것이니, 어찌 낭패를 당하지 않고서 잘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 군졸이 비록 겁을 낸다고 하지만 용감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늘 그렇겠는가. 충의가 격발되면 약졸도 강병이 될 수가 있고, 적은 병력으로서도 많은 병력을 대적 할 수가 있으니, 이것은 다만 단시일에 대처할 수 있는 문제일 뿐이다.
현재 도망한 병졸이 산곡에 가득 차 있는데, 처음에는 그들이 비록 몸을 빠져 나와 살려고 도망했지만, 끝내는 한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줄을 알게 된다면 모두가 분발하여 나라를 위하여 힘쓸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인데, 다만 이 일을 솔선 인도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이런 시기를 당하여 만약 한 사람의 의사라도 분발하여 일어나서 한번 큰소리로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지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이니 그 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성상께서는 이미 자기를 책망하는 애통의 교지를 내리셨고, 보잘것없는 소신에게 사민들을 초유하는 책임을 맡기셨으니 옛날 당나라의 무사들도 오히려 흥원의 조서를 보고는 감동하여 울었던 일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의 예의를 숭상하는 선비들이야 어찌 팔을 걷어 붙이고 의분심을 일으켜 군부의 위급함을 구원 하려고 전장에 나오지 않겠는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이 격문이 도착되는 날에 군부와 현감은 그 고을 백성 들을 효유하고, 변장은 그 토졸을 격려하고, 문관․무관이나 부노․유생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전달 고유하여, 동지를 먼저 불러모아 충의로서 단결하여, 혹은 방비 시설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기도 하고, 혹은 군졸을 이끌고 싸움을 도우기도 하며, 부민은 유차달(柳車達)처럼 많은 곡식을 운반하여 군량을 보급하고, 용사는 원충갑 (元沖甲)처럼 무기를 휘둘러 적병을 무찔러서,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겠다는 각오로서 한꺼번에 똑같이 일어난다면 군성이 크게 떨쳐져서 의기가 백배나 날 것이므로, 괭이․곰방메․몽둥이 같은 것들도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의 구실 을 할 수 있으니 적병이 비록 장창과 대검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일이 성공한다면 나라의 수치를 완전히 씻을 수가 있을 것이며, 성공 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쓰기를 바란다.
당직은 한 사람의 쓸모 없는 유사이므로, 비록 군사관계의 사무는 배우지 못했지 마는 군신의 대의에 대해서는 대강 듣고서 알고 있었는데, 경상 일도가 뒤엎어진 뒤 에 토민들을 초유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국을 보존시킬 뜻은 간절하 지마는, 초나라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을 수가 없으며, 다만 조국에 통곡한 뒤 군병을 일으킨 장순(張巡)의 충열을 사모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의사들의 힘을 힘입어,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시킨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다. 조정의 상 격은 후면에 기록되어 있으니 아울러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초유문은 왜군의 침입에 대해 영남지방은 유구한 충의의 전통이 있으며 퇴계 ․ 남명사상으로 무장된 유사들에게 토왜구국의 앞에 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그 핵심은 우리가 어찌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문화수준이 높은 우리 민족이 저 오랑캐 왜군에게 굴복할 수 있겠는가 비록 무기병력의 우열이 있다할지라도 몸을 던져 왜군을 물리쳐서 국토를 보존시켜야 될 것이 아닌가하는 국토를 수호할 결연한 뜻을 표했던 것이다. 그 문장이 마음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단시간에 작성11)되었지만 충의로써 분발하였던 까닭에 여러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12)
11) 이노, 『용사일기』 , p. 316.
그리고 그가 아끼는 자들에게 의병 소모관의 임무를 주어 조종도은 단성, 산청, 함 양으로, 이노는 삼가, 의령, 합천 방면으로 파견하였고, 김성일 자신은 산청, 단성을 거쳐 경상 우도의 본부라 할 진주로 갔던 것이다.13) 그는 촉석루에 올라 삼장사시로 비 장한 심경을 토로하였다.14)
김성일은 진주의 중요성에 대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진주는 남방의 거진으로서 영남․호남 양도의 요형에 있으니 만약 진주를 지키지 못한다면 보존된 영우 사방일대의 고을도 단시일에 토분와해의 형세가 되어 보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왜적은 반드시 호남까지 침범하게 될 것입니다. 진주성은 마치 당나라 때 수양성이 강회지방의 보장이 된 것처럼 오늘날 영․호 양도의 보장이 되었으니 이곳은 반드시 수비해야 할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경상도내는 지금 감사의 권왕병 소집으로 도내가 텅 비어 있으며, 진주의 정병도 이미 감사․병사의 소집에 응하여 가다가 모두 무너져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나머지 수성하는 군병이 천 여명인데 활 쏘는 아병은 겨우 6,70명뿐입니다. 신이 본주(진주)에 유둔하여 군병을 감독조직하여 이 진주성을 굳게 지켜 호남과 내륙지방을 방비할 계책을 세우려고 합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진을 버리고 달아난 수령․변장등에게는 공을 세워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도록 하고서, 이미 자치한 가덕검사 정응린과 고성현령 김면에게는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의령의 정암진을 파수하도록 하고, 권관 주대청등에게는 판관 김시민과 더불어 진주성을 지키도록 조치하였습니다.15)
이와 같이 진주성의 군사전략상 중요한 위치인 것16)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군령을 엄중히 시행할 것과 백성들에겐 폐정개정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면 지금이라도 단시일 내에 왜군을 토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김성일은 군대에 기율이 없는 것을 통탄하고 우선 군령의 조목을 정하여 열 읍에 반포 하였다. 군령의 골간은 군 졸 10명이 도망하면 통장을 참형에 처한다. 통장이 도망하면 도 훈도를 참형에 처하고, 일군이 다 도망하면 영장을 참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막하인 조종도를 단성, 산청, 함양에, 이노를 삼가, 의령, 합천 등에 보내어 점검토록 하였다.
어느 정도 군대의 기강이 확립되자 김성일은 여러 지역을 순시하고 군사를 격려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진주에서 삼가를 거쳐 거창으로 갔다. 거기서 金沔 등 여러
12) 『宣祖實錄』 권60, 28년 2월 기유조.
13) 『학봉집』 권2.
14) 이재호, 『역사기록의 허실에 대한 검토 -특히 촉석루 삼장사시 작자의 경우-』 『학봉의 학문과 구 국활동』 , 학봉김성일선생 기념사업회, 1999.
15) 『宣祖實錄』 권27, 25년 6월 병진조.
16) 이노, 『용사일기』 , pp. 64∼68.
장군을 만나 격려하고 의병장 이정李瀞을 함안으로 보내 군병을 모집하고 군량 또한 모으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합천으로가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등을 독전하였던 것이다. 수령이 없는 영산, 창령, 현풍에 격문을 지어 사민들을 달래고 가수, 별장, 소모관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 사회분위기가 달라지자 왜군에게 부역 한 이민들은 서로 뉘우치고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의병에 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2년 6월에는 의병장 손인갑이 초계에서 역시 노략물을 싣고 내려오는 왜군선을 쳐부수고 전사한 바가 있으며17) 거창의 김면도 멀리 성주지역의 무계포까지 나가 왜 군선을 격파하고 포획한 물건들을 진주에 있던 김성일에게 수송하기도 하였다.18)
7월에 거창에서 왜군이 진주를 침범할 것이란 정보를 접하고 즉시 단성으로 가서 함양, 의령 등지의 군졸을 진주로 집결시켜 대비토록 하였다. 이때 왜군은 남강까지 진군하였으나, 이 정보를 알고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다. 그 여세를 몰아 사천, 진해, 고성 등 해변의 여러 고을들을 수복하게 되었다. 이어 곽재우를 보내 창녕, 현풍, 연산 등의 왜군을 모두 물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김면, 정인홍 두 장수와 낙동강 요지의 초계군에 곽율을 가수로 삼아 전치원, 이대기 등의 의병과 힘을 합쳐 낙동강 연안의 왜군을 격멸시켜 버렸다.19) 의병장 김준민이 다시 무계에서 왜군선을 쳐부수고, 또 곽재우가 현풍, 창령의 낙동강 일대에 서 연달아 공파함으로써20) 이후 왜군은 낙동강 통로를 완전히 잃고 둔책 마저 철거하였으며, 오직 대구를 경유하는 육로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계진에서 정암진에 이르기까지 왜군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니 전략상 중요한 낙동강 통로를 두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사우도와 좌도가 비로서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영천에서 60여인이 와 전 참봉 권응수를 의병대장으로 임명21)하여 영천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상주, 함창, 문경지방에도 이봉을 의병장, 정경세를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임란 발발 3개월여만에 왜군의 치하에 교통이 두절되었던 경상좌․우도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유사로 적의 치하에 놓여 있던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의병 창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김성일은 무엇보다도 진주성에 관한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치계진주수성승첩장22)에 잘 나타나 있다. 김성일
17) 『宣祖修正實錄』 권26, 25년 6월조.
18) 이노, 『용사일기』 , p. 96.
19) 이노, 『용사일기』 , pp. 39∼40.
20) 『宣祖修正實錄』 권26, 25년 7월조.
21) 이노, 『용사일기』 , pp. 100, 101.
이 전투를 대비하여 진주성의 동쪽에서는 삼가 의병장 윤탁․의령가장 곽재우․초계가장 정언충, 북쪽에서는 합천가장 김준민, 서쪽에서는 전라의병장 최경회, 남쪽에서는 고성가장 조응도․복병장 정유경 등으로 하여금 사방에서 성원토록 조치하였다. 그 리고 왜군의 포위공격이 본격화되자 김성일도 직접 산청에서 의령으로 진주하여 목사 김시민,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여러 장졸에게 진심으로 협력하여 끝까지 슬기롭게 사수하도록 독전하였고 또한 군기 등을 성안으로 수송하여 지원하였던 것이다.23)
10월에 조정에서 김성일에게 가선대부로 가자24)했으니 그것은 경상감사로써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민심수습에 공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아래와 같이 쓰고있다.25)
김성일이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을 때, 차자를 올려 시폐를 논하면서 말이 매우 솔직 하니 선조께서 겉으로는 우용함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전란이 발발하자 병사로서 부임하는 도중에 적장을 사사하여 적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초유사로서 부임해서는 도민을 초무하여 안정을 얻게 했으니 김성일의 공로가 컸던 것이다. 이때 절도사․순찰사등 여러 진영의 관원들이 모두 의관차림도 없이 군중 속에 섞여 있으니 김성일은 ‘어찌 우리나라 군문의 위용을 변경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군관들에게 홍의에 새 깃 관을 쓰도록 했으니 그가 평시에서나 전시에서나 절도가 동일한 것은 이런 일에서도 징험할 수가 있겠다. 이때에 와서 선조께서 김성일이 공로가 많은 이유로써 가선대부로 승자시킨 것이다.
이랬던 까닭에 1593년 6월에 전개되었던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에 만약 김성일이 살아 있었다면 그렇게 무참히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유성룡과 사관들은 말하고 있다.26)
Ⅲ. 김성일의 지도력과 관․의병의 조정
임란 발발과 함께 관군이 맥없이 붕괴되고 흩어지자 각지에서 창의거병한 의병진이 왜군 격퇴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장들의 활약이 커지자 지방의 군수권을
22) 『宣祖實錄』 권33, 25년 12월 신묘조.
23) 『宣祖修正實錄』 권26, 25년 10월조.
24) 『선조실록』 권31, 25년 10월 신해조, 동 계축조.
25) 『宣祖實錄』 권31, 25년 10월 계축조.
26) 『징비록』 . 『宣祖實錄』 권60, 28년 2월 기유조.
갖은 감사와 병사가 서로 의병진을 청기하고 견제하려는 갈등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27)
경상우도에서 첨예하게 대립된 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감사 김수와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의병장 곽재우는 전쟁이 발발하자 4월 24일 의령에서 전국 최초로 거병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 의령에서 낙동강의 정암진은 막아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으로 진출을 못하게 한 것은 임란기에 있어 큰 공로라 아니 할 수 없다.28)
그러나 경상감사 김수는 경상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음에도 왜군을 맞아 피하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열 읍에 공문을 보내 의병장에 예속된 군병을 많이 빼앗아 갔다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의병진이 붕괴할 지경에 이르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곽재우는 격문을 보내어 김수를 베어 죽이려고 하였다.
김수는 재차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학정을 행하여 민심을 이반시켰으며, 뒤에 적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먼저 도망하여 한번 교전하지도 않고서 적군을 맞아들였으니 김수의 죄상은 낱낱이 들추어 내어 목 베어 죽여도 인심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즉언 중간에 김수의 죄상을 8조목을 거론하고는, 끝에 가서 네가 신자의 본분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서 천하․후세에 사죄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내가 곧 네 머리를 베어 신․인의 분노를 풀어야겠다는 것이다.29)
이 격문을 받은 감사 김수는 매우 두려워하고 어찌해야 될지 주저하다가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곽재우는 역적과 다름없다고 정부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의주에 가있던 비변사의 여러 관원들은 경상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일들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곽재우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宣祖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 병세를 믿고서 행동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 김수도 재차 시킬 수가 없고, 곽재우도 견책할 수가 없으니 윤 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성일로 하여금 과복을 개유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고, 김수의 계사에 ‘신의 생사가 단시일에 달려 있다.’는 말을 하면서 김수의 형세가 상필 위급한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30)
이같이 국왕 선조도 의병장과 감사간의 대립갈등에 대해 왜군과 대전하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우 낭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김수의 위축된 상황의
27) 『宣祖修正實錄』권26, 25년 12월조.
28) 『宣祖實錄』 권27, 25년 6월 병진조.
29) 『망우집』 권1, 창의시자명소.
30) 『宣祖實錄』 권26, 25년 3월 갑오조.
타개를 위해 김성일로 하여금 조정하도록 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일은 곽재우와 김수에게 각각 서신을 보내어 서로 화의하기를 강력하게 권하였던 것이다. 이 때 김수는 근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기도 용인까지 갔다가 패배하였다. 그래서 김 수에 대한 분노가 한층 높아갔다.
한편 김성일은 정부에서 감사 김수의 말만 듣고 곽재우는 살피지 않고 패역의 주형을 가한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상도의 인심을 잃을 것을 염려하여 정부에 보고를 올려 곽재우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곽재우는 일개 사민으로서 도주(감사)를 범하려고 격문을 보내어 죄장을 성토했으니 그 자신은 나라를 위하여 분개했다고 하지마는 행동은 난민에 관계됩니다. 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고군을 일으켜 분발하여 왜적을 쳐서 도내의 잔민들이 그를 의지하여 간성으로 여기고 있는데, 지금 난언한 죄로써 곧 그를 죽인다면 왜적을 막아낼 계책도 없고 군민들도 실망하여 한꺼번에 궤산될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재우에게 재삼 계칙했더니 이미 명령을 따르고 있는데, 이 일 때문에 순찰사(김수)에게 득죄하여 형세가 서로 용납할 수가 없기에, 신이 또 김수에게 서신을 보내어 재우를 잘 대우하도록 하였으니 근심할 만한 변고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김수가 재우를 반적으로써 이미 계문하였고, 또 타인이 지주한 것으로서 말을 하고 있으니 이 같은 일로써 주형을 가한다면 그가 복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도의 인심을 수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충의가 분개하여 용기를 내어 왜적 을 토벌한 형장은 일도에 널리 나타나서 아동과 주졸이 모두 곽장군을 일컫고 있으니 광망에 대한 주벌을 용서해 주신다면 반드시 성효가 있을 것입니다.31)
이 장계로서 곽재우에 관한 의심이 풀려 정부에서는 즉시 김수를 영남으로 되돌아 가게 하였다. 그래서 겨우 인심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김성일의 조정으로 감사 김수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를 일에서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와 감사 김수의 대립갈등 하였던 것을 위기에서 김성일의 지도력에 의해서 화해하여 해결되었던 것이다.32) 최전선 영남에서 관․의 병의 갈등과 대립을 김성일과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사태가 잘 수습되었던 것이다.33) 그런 까닭에 곽재우와 김시민은 상호협력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에서 의병장 정인홍은 제용감정으로, 김면은 합천군수로, 박성은 공조좌랑으로, 곽재우는 유곡찰방으로 제수하여 그들의 전공을 표창하여
31) 『宣祖修正實錄』 권26, 26년 6월삭 기축조.
32) 이노, 『용사일기』 , p137~140.
33) 『宣祖實錄』 권32, 25년 11월 신사조.
장려하였으며, 판관 김시민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로 임명하였다.34) 김시민은 진주를 안정시키고 나가 싸워서 여러 번 왜군을 물리쳤다. 그런 까닭에 김천 이하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노략질하던 왜군이 모두 도망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김순민은 수군을 거느리고서 서해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며, 김성일 등은 진주의 관문을 지키고 있었으니 왜병은 금산군을 경유하여 호남의 경계로 침입하려다가 여러 번 좌절되어 왔던 길을 도로 따라 물러났으므로 호서(충청도)도 또한 왜군에게 함몰되지 않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 이도(경상․전라)의 방위에 힘입어 군용 물자를 공급하게 되었으니 그때 장사들의 방수한 공노가 또한 컸던 것이다.35)
그리고 경상도 북부지역인 상주에 전 검열 정경세, 함창에 전 찰방 권경호 문경에 사인 신담을 각각 소모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에 정부에서 경상도를 나누어 좌․우 감사를 두어 이성임을 우도관찰사로, 김성일을 좌도관찰사로 임명했으니 대개 영남은 지역이 넓어서 이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도의 사민들이 정부에 상소하여 김성일을 우도에 종전대로 두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김성일을 우감사로 영해부사 한효순을 좌감사로 임명하고 경상감사였던 김수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36)
Ⅳ. 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공과
『학봉집』 연보에 의하면 김성일이 1592년 6월 1일 경상좌도 관찰사에 보임된 것을 안 것은 두 달 뒤인 8월 11일 이었다. 이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마 전시의 통신이 두절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도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성일에 대한 사민들의 만류가 많았다. 초계군 의병장 이대기는 만원서를 올려 평생을 군려를 풀지 않았고 관군과 의병간의 화의를 도모하였다고 하였고37) 합천유생 박이문朴而文, 함양유생 정유명 鄭惟明38) 등은 청유금성소를 임금께 상소하였던 것39)이다. 그래서 김성일은 9월 4일
34) 『선조실록』 , 권68, 28년 10월 병진조.
35) 『宣祖修正實錄』 권26, 25년 8월삭 무자조.
36) 『宣祖修正實錄』 권26, 25년 6월삭 기축조.
37) 『宣祖修正實錄』 권27, 26(계사)년 4월조.
직무수행을 위해 하양에 이르렀을 때 다시 우도 관찰사에 보임되었던 것이다. 그는 9 월 14일 대구 동화사에서 좌병사 박진을 만나 방비책을 논하고 9월 16일 팔려 하빈을 처거 우도인 고령에 도착하였던 것이다.40) 거창에서 김수와 만나 관찰사 직책의 인수 인계를 하였고, 산청으로 가서 우감사 진영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산중에 은거하였던 조동도, 이노, 박성, 오장 등이 다시 나와 우리가 소생하고 국가의 회복을 기필코 할 수 있다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이때 경상좌․우도에 수령의 결원이 많았는데 김성일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기룡을 상주판관으로, 김준민을 거제현령으로, 강덕룡을 합창현감으로, 박사제를 의령현감으로, 박정완을 거창현감으로, 변흔을 문경현감으로, 여대노를 지례현감으로, 이정을 사근찰방으로, 정인홍을 성주목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임용이 중망에 아주 합당하였으므로 민심이 복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관이 김성일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임진년 봄에 영남절도사에 임명되자 남변으로 급히 달려가니 왜병은 벌써 이르러 열군이 토봉와해되어 망풍분궤하는 상태이었다. 그런데도 성일은 결연부동하면서 국사를 보수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왜병이 웅천에 들어올 적에 그는 말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비장을 독려하여 선봉의 왜장을 목 베어 죽이니 흉악한 왜세가 이 때문에 조금 꺾이게 되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성일이 왜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여 방비를 해이하게 했다는 이유로써 잡아와서 국문하려 하다가 특별히 용서하고 이내 초유사로 임명하니 도로 영남에 들어가서 동지를 창솔하여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에 원근지방에서 죽 따라 일어나서 왜군에게 점거된 고을을 수복한 것이 10 분에 6,7분이나 되었다. 그가 경상도 사민들에게 초유한 격문은 충의가 분발하고 사지가 격력 했으므로, 비록 어리석은 민중이라도 이 내용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우도 순찰사로 승진되었는데, 계사년 여름에 병으로서 진중에서 운명하니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비통하게 여겼다. 아아, 성일은 옛날의 ‘유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41)
라고 하여 김성일은 인물을 적재적소에 임명배치 하였고 민심을 수습하였던 것이다. 그는 군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할 수 없겠지만42) 의병을 규합43)하고 격려하였을 뿐 아
38) 정유명(1539-1596)은 林熏문인으로 안음에서 유림대표로 창의하였고, 김면의 참모로 활약하였음. 성팽년과 동문수학하였음. 대사헌 鄭蘊의 아버지임.
39) 이노, 『용사일기』 , pp. 115~116.
40) 이노, 『용사일기』 , pp. 120~122.
41) 『宣祖實錄』 권60, 28년 2월 기유조.
42) 『선조수정실록』 권27, 26년 4월조.
니라 의병과 관군간의 융화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대민 구호사업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44) 당시 유행하던 역질45),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사망하고 말았다.46)
Ⅴ. 맺 음 말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국방을 맡은 수신들은 왜군과 제대로 교전하지도 않고 거개가 망풍도주하고 말았다. 그런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단시일에 우리의 국토를 점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김성일은 초유사의 중책을 맡아 경상 도에 내려와서 초유문을 포고하여 흩트러진 관군을 소집하고 지방의 의병을 소모하여 대왜구국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래서 낙동강 유역의 초계, 영산, 창령, 현풍 등 고을 에 가수와 소모관을 임명하여 백성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의병진을 격려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래서 낙동강 전선을 확보하여 경상좌도와 우도의 통로를 개통하게 되었다.
이때 최전선에 위치한 경상우도에서 가장 난처한 문제는 관군과 의병이 서로 대립 시기하는 일이었다. 의병과 관군은 그 성격과 기상에서 서로 대립되는 면이 있었지만 의병장은 대부분 유사들로서 이들은 국난을 당하여 망신수국하려는 결심으로 전선에 나왔던 것이다. 반면 방위에 책임이 있던 관군장은 왜군을 보고는 싸우지도 않고 먼저 도주한 것을 본 의병장은 매우 분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갈등과 대립은 의병 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간에 매우 심각하였다. 이런 이 두 사람의 상극관계는 김성일의 조정 영도가 없었다면, 김수가 의병들에게 그 목숨을 잃었던지 아니면 곽재우가 김수에게 역적으로 몰려서 조정의 죄벌을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김성일과 같은 유능 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관․의병이 서로 화해 협력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국토를 수복 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성일은 그 외에 기민을 구휼하는 일에도 너무 노심초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휼작업을 계속하였다. 이런 과로로 인해 결국 장티푸스 인 역병에 감염되어 진주공관에서 56세로 운명하고 말았다.
김성일은 관․의병을 수합 통솔하여 진주의 요새지를 왜군의 침입에서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김성일은 육지에서, 충무공은 해상에서 왜군의 호남지역으로의 침범을 차단 방어함으로써 결국 국가중흥의 기초를 세웠던 것이다.
43) 『선조실록』 권72, 29년 2월 계축조.
44) 『선조실록』 권31, 25년 10월 계축조.
45) 이노, 『용사일기』 , p. 178.
46) 『선조실록』 권28, 26년 5월 을해조.
가선대부인 김성일은 선무원종 일등공신이었고 문충공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이같이 김성일은 평생에 군려를 닦진 않았지만 난국에 처해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특히 지극정성으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킨 애국과 민족애를 먼저 실천한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