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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부안 내 고향 변산반도 찬미기
송영섭
나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서 태어나 10살 때 하서면 석상리 운암(삼밭실) 부락에서 성장했다. 석불산 아래서 뒤로는 옥녀봉 귀 바위가 있어 어린 시절 그곳에서 뛰어놀며 산갈퀴 나무도 하고 칡도 캐 먹고 맹감나무 열매를 위시한 각종 나무열매를 따 먹어 입술이 시퍼렇게 되기도 하고, 그 시절에는 서리가 있어 닭 서리, 보리 서리, 밀 서리, 복숭아 서리, 참외 서리는 지금처럼 도적 취급하는 시대가 아닌 유소년들의 놀이로 미덕이었다.
정월보름 때는 동네와 동네끼리 편을 지어 불 싸움도 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딱지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땅따먹기 등 놀이를 즐기다가 우리 집에서 4km만 가면 장신리 바닷가에서 게 잡고, 고동 잡고, 조개 잡아서 삶아 먹고 또 좀 더 가면 돈지 바닷가가 나온다. 언제나 초등학교 때는 소풍을 돈지로 갔다. 그리고 변산반도 해수욕장을 가려면 우리 집에서 6km만 가면 백련리 바닷가 해창 큰 다리 넘어 변산 해수욕장이 나온다.(지금의 새만금지역)
그곳을 오가며 게도 잡고, 고동도 잡고, 조개도 잡고 생합도 캔다. 여기는 외 변산이고 상서 초등학교에서 동아실로 해서 내 변산 청림을 거쳐 들어가면 울창한 숲길(소나무숲)을 간다. 그곳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직소폭포 내소사가 나온다. 변산반도는 상서면 하서면 변산면(구 산내면) 진서면 줄포 곰소까지 벨트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나 고향을 떠난 뒤에도 고향에 오면 차를 타고 한 바퀴 삥 돈다. 해수욕장, 포구마을, 염전, 줄포, 곰소항은 각종 바닷고기와 새우젓으로 시장이 서 있다. 그곳에서 쭈구미, 풀치, 갈치 각종고기, 각종 젓갈을 값싸게 사 가지고 집에 와서 자녀 집까지 나누어 먹기도 한다.
상서초등학교 6학년 때는 직소폭포 거쳐 내 소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 어디든지 다닐 수가 있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교통수단이 없어 고향 산천이지만 큰맘 먹지 않으면 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고향 변산반도 아름다운 곳을 다 가보지 못하다가 다른 나라 세계를 돌아보고 와서 보니 내 고향산천이 너무도 정겹고 아름다운 고을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히 내 고장 변산반도를 아름다운 고장으로 침이 마르도록 찬양한 옛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변산 소나무는 부안의 자랑이다. 강인한 생명력과 견고성으로 고려시대이래 장구한 세월 나라의 주요한 관수물자로 국가에서 봉산(封山), 즉 국유림으로 지정. 특별히 보호정책을 펴왔다. 일찍이 조선중기 전라 감찰사를 지낸 김종직은 민정시찰차 변산 일대를 둘러보고 변산 소나무 진가를 말하기를 중국 송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왕안석은 소나무는 모든 나무의 으뜸(白木之長) 이어서 나무(木)에 벼슬을 붙여 ‘松’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소나무는 변치 않는 의리와 절개를 상징하고 장생불사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고려시대 대 문장가 백운거사 이규보의 인연은 특별하다.
그는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지적통찰력을 갖추고 첫벼슬로 부안 변산 소나무 관리 업무를 맡았고 부안 위도에서 유배 생활 중,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변산 일대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소나무 재목을 기르는 곳이며 특히 월명암 근처(내소사 주변)에서 생육하는 소나무는 재질이 우량하여 관목(棺木)으로도 최상품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예부터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하늘의 곳간이라고 하였다.
변산은 소나무외에도 난초(변란), 꿀(변청) 또 송진은 관솔을 태워 나오는 그을음을 모아 아교와 혼합하여 구워 만든 진먹은 고려 때 초조대장경 인쇄본 제작의 재료가 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택擇里志)에서 “가히 변산은 영산이다. 예부터 기근과 병란의 염려가 없어 난세를 피하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서 팔도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하나이다.”라고 소개하면서 “온 산야가 낙락장송으로 하늘을 가리고 그 산자락 주변은 소금 굽고 물고기 잡고 농사지으며 땔감과 물이 풍부하여 어염시수(魚鹽柴水, 魚鹽柴草 라고도 한다)가 두루 갖춰진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라고 생거부안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고려말 시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 : 목은 이색의 부친)은 변산 소나무 숲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백제유민이자 신라중기의 고승인 진표(眞表) 대사가 득도한 의상봉 동쪽의 암자 부사의 방(不思義 房)에서 변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는
내 일찍이 변산의 울울창창한 송림의 아름다움을 듣고 잠시 틈을 내서 산에 올랐더니 인간이 하늘에서 하강한 듯 사다리는 천자나 되고 스님과 구름이 반칸씩 차지했네, 신선세계의 고요함을 이제알고 또한 보았으니 세상인연을 감히 누군들 상관하겠는가.
푸른 소나무 숲속 어느 날에나 나의 물음이 허용될까? 죽장망혜(竹杖芒鞋 : 대지팡이와 짚신만을 갖춘 간편한 차림새) 홀가분한 몸으로 날마다 오려므나.
또 역사상 부안이 생산하였던 최고의 공예품이자 문화적 걸작으로 고래시대 중엽부터 말기까지 번성하였던 유천도요지의 상감청자(象嵌靑瓷)를 꼽는다. 유천도요지는 현대사적 제69호로 지정되어 있고 놀라운 사실은 이 유천도요지가 변산의 소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우수한 도요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점토질(粘土質 : 끈적끈적한 찰흙)의 흙과 평균 온도 1,400℃의 고온을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풍부한 소나무 땔감이 있어야 한다. 또한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운송할 수 있는 해상수송로 항만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유천리에 줄포만의 항구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고려청자도 생산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변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경관을 일컫는 적소폭포 등 변산8경도 변산 소나무가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다.
변산 소나무야말로 변산 경치의 금상첨화(錦上添花) 화룡점정(畵龍點睛 : 가장 요긴한 부분을 완성시킴)이다.
변산 8경은 웅연조대(熊淵釣臺 : 줄포곰소 서해 잇는 바다의 아름다운 정경)다.
직소폭포(直沼瀑布 : 높이 30m로 변산의 대표적 절경)다.
소사모종(蘇寺暮鐘 : 내소사의 은은한 종소리)이다.
월명무애(月明霧靄 :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안개에 잠긴 산경과 노을)다.
서해낙조(西海落照 : 낙조대에서 보는 서해 바다의 낙조)다.
채석범주(彩石帆舟 : 채석강의 돛단배)다.
지포신경(止逋神景 : 지포리에서 쌍선봉에 이르는 숲과 산길)이다.
개암고적(開岩古蹟 : 개암사 울금바위 산성일대의 고적)이다.
우리 부안의 랜드마크는 변산반도요. 진수(眞髓)는 소나무다. 솔은 모든 나무의 으뜸이며 장생불사의 표상인 해, 달, 산, 돌, 물, 솔,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 열 가지 사물을 소재로 한 십장생도(十長生圖)에서도 나무 중에 유일하게 솔만이 그려져 있다.
그동안 변산 소나무는 강인한 생명력과 견고성 때문에 나라의 주요한 관수물자로 그 효용성을 인정받아왔다. 근자에는 퇴계 이황의 문집(벌집)에서 발견된 변산의 ‘실상사 남계운’과 직소폭포운, 마천대운의 시문도 변산의 솔숲이 짙게 우거져 있어 한층 문장의 품격을 격상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익산 왕궁터에 뿌리 내린 변산 솔씨 혼수품 이야기다.
명문 벌족인 진천 송씨 가문에서 면면히 가꾸고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이 소나무단지가 사실은 우리고장 부안 변산 솔씨 서말을 혼수품으로 가지고 송씨가문에 출가 한 최씨 할머니께서 비롯되었다. 이 솔씨는 유서 깊고 울창한 이곳 솔밭의 원조로 변산 월명함 주변 소나무였다. 400여년 전 남원의 삭녕최씨 가문에서 딸 셋을 순차적으로 출가 시킬 때, 큰딸은 옆전 한말, 둘째딸은 중국 명품 벼루 단계연(端溪硯)을 셋째딸에게는 변산 월명함 주변 솔씨 3말을 혼수감으로 주었다.
지리산 줄기의 그 많은 솔씨를 제처 두고 굳이 변산 해송 솔씨를 고른 것은 그만큼 서해바람을 버금은 변산 적송재질이 우량한 종자이기 때문이다.
삭녕 최씨 가문은 훈민정음의 창제와 용비어천가 주해(註解)에 직접 참여하고 영의정 벼슬을 두 차례나 역임한 최항(崔恒)의 명문후예다.
친정아버지 최상중(崔尙重)도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군량미 운송 책임관인 운량장(運糧將)의 직책을 수행했다.
최씨 가문의 규수가 달랑 변산 솔씨 서말만 가지고 시집온 며느리를 맞이한 익산 왕궁면 장암의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耈)는 이 씨를 아주 값진 보배처럼 반겼고 이를 40여만평의 종중땅에 넓게 뿌렸다. 이 씨앗이 발아 성장하여 아름답게 푸르름이 짙은 솔밭으로 조성되었으니 이게 바로 호남고속도로 인접지역인 익산시 왕궁명 등용리 일대와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일대의 울울창창하게 들어찬 짙푸른 소나무단지다.
송씨 가문에서는 최씨 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변산 솔씨를 가문의 으뜸가는 자산으로 여기에 이 소나무를 후손이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금송입의(禁松立議)라는 종중규약을 만들어 놓을 정도였다.
어찌되었던 변산 월명암 송자(松子)가 익산 왕궁터전에 뿌리를 내렸다. 금년은 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 33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새만금의 창조적 녹색 수변 신도시와 함께 바야흐로 서해안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반도란 남자의 생식기다. 어느 도인과 부안 변산을 둘러보던 중, 필자를 변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말하면서 금후에 큰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고 40세 때 예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저런 연유와 더불어 외국에서 일을 하고 귀국 시는 반드시 내 고향 부안 변산반도를 한바퀴 돌아보며 귀국보고를 하기도 하였다.
내 고향 변산반도는 서해안 시대와 더불어 새만금 간척사업지로서 세계 앞에 웅비하리라. 연계된 고군산 열도, 김제, 군산과 더불어 세계적 허브의 사명을 하리라 굳게 믿는다.
끝으로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현황과 내 고향 변산반도 정기를 타고난 인물들을 열거하고자 한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면적 157㎢으로 1971년 도립공원에서 1988년 6월 11일 국립공원으로 승격했다. 범위는 변산면, 하서면, 상서면 진서면에 걸쳐있다. 변산의 경치는 일찍이 한국 8경의 하나로 꼽혀왔으며 내변산(산의 변산) 외변산(바다의 변산)으로 나누어진다.
내변산의 경승은 300~400m의 산지가 이루는 산약미, 계곡미와 울창한 수림 및 산중에 산재하는 사찰 등이다.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開巖寺)는 고려 숙종때 창건한 절로 그 뒤 조선 초기에 건립된 개암사 대웅전(보물 292호) 개암사 동종(지방문화재 126호)이 있다.
변산면 석포리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때 창건한 고찰로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291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277호),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278호), 내소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제 124), 내소사 선실당과 요사(지방유형문화제 125) 등을 소장하고 있다.
직소폭포 그리고 변산면 중계리 부조대와 신라시대 창건의 월명암, 낙조대(448m)가 있다. 내변산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 울금바위, 선계폭포, 가마쏘와 외변산의 경승은 주로 암석해안의 해식애(海蝕崖)와 모래해안의 백사청송 등 해안 경치로 이뤄지고 변산면의 격포리 해안에는 채석강(彩石江), 적벽강(赤璧江)의 두경승이 있다.
변산면 대항리(大項里) 해안의 변산해수욕장은 백사청송 4km의 아름다운 경치와 조석간만의 차 및 완만하게 깊어지는 수심 등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해수욕장이 있고 그 밖에 변산면 일대에는 호랑가시나무군락, 후박나무군락, 소나무군락, 꽝꽝나무 군락 등 천연기념물이 있다.
주요인물은 부안지역 향토문화사의 르네쌍스 진흥절정기에 명기 이매창으로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3대 여류시인이다.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시를 노래한 기생(1573년 출생, 1610 사망)으로 부안에서 태어났다.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이매창은 조선시대의 대표명기로 천민출신 유희경,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李貴)등 문인 관료들과 교류했다.
매창의 본명은 향금(香今) 호가 매창이다. 부안현 아전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다. 38세 사망했으며 58수를 구해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매창집) 대게 기생은 관비출신으로 관아 관기명부에 올라 관리를 받았다.
임진왜란 공신 선전관 영선군 고희장군(호조판서 추증)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패지지(賜牌之地 : 나라의 임금이 내려준 땅)인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의 석불산 사방십리의 광활한 땅을 하사 받았다. 그 땅에서 필자도 성장했다.
실학의 비조(鼻祖)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은 세종 때 우의정 지낸 반계의 9대조 유관의 사패지(賜牌地)가 있는 우반동(보안면)에서 반계서당(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운영 하면서 반계는 진사급제 후 우반동에 칩거 사회개혁 사상과 이상국가 건설을 도모하였다.
반계 수록은 13책 26권으로 편제 19년 작업 끝에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다. 출생지는 서울 정동 그러나 중년(32세) 할아버지 고향에 내려와 20년 살다가 52세에 타계했다.
‘청호 성중엄(晴湖 成重淹)’은 부안 하서 청호서 유소년기를 보낸 인물로 부안읍에서 출생하여 생원시와 진사에 합격 성균관에 입교 심오한 경전 연마에 정려(精勵)해온 인사다. 그는 한때 조선왕조실록(성종실록편) 편찬의 기사관(記事官)으로 발탁되어 공헌하다가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노곡 고홍달(老谷 高弘達)’은 부안지역 향토 문예진흥의 견인차역할을 했다. 고홍달은 부안읍 봉덕리에서 태어나 혈기 방장한 약관의 나이에 왜군이 파죽지세로 도성 한양을 향해 밀려오자 백부인 임란공신 선전관 영성군 고희장군을 따라 선조임금의 의주 몽진길에 호위한 공로로 원종공신으로 책록 되고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 되었다.
그는 향시 생원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교 수학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고 부안 향리에서 전원생활과 시문 정진에만 몰두했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문장과 기예가 탁월하여 본래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 심광세 부안 현감의 신임을 받아 부안 현청의 상사(上舍 현감의 최고자문역) 직무를 맡기도 했다.
‘석암 정경태(石菴 鄭坰兌)’는 부안 출신으로 중요 무형문화제 제41호 가사예능 보유자다. 가곡, 가사 명인으로 본명은 정영옥 1990년 미국 켄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와 1992년 일본 동경신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방이후 꾸준히 채보해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 창악보를 편찬하였다. 한때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다. 1979년 국악계원으로 대한정학회 창설 회장직으로 정가뿐 아니라 국악, 춤, 서화, 음양학, 시문, 장기, 바둑 두루 능한 천재적 저서 가곡, 가사 명인이었다.
‘신석정(辛錫正)’은 호는 석정(夕汀) 1907년 전북 부안태생으로 한국 문학상, 문화포상, 한국 예술문학상을 수상하고 1939년 첫 번째 시집 촛불, 두 번째 슬픈 목가, 마지막 시집은 대바람 소리를 발간했으며 그는 반속적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 시를 써 목가시인 이라 평가를 받았다.
신석정 시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체험의 가능성이 패쇄 된 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문학적 단면을 보여준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로서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구는 전원적 자연친화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진다.
‘우송 고재웅(愚松 高在雄)’은 부안군 하서 청호 출생으로 1939년에 태어나 2020년 8월 20일 별세했다.
증조부는 석천집(石川集)를 발간하고, 조부 고맹상은 송호정을 건립하고, 부친 고광호는 하서청호 일대 상수도를 설치 기증하여 지역 주민성금으로 고광호 공적비를 건립했다.
고재웅 청장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하고 제1회 사법 및 행정요원 자격시험(구 고등고시 예비시험 : 보통고시합격)에 합격한 수재였다. 주요 경력은 제주, 군산, 여수항만 청장을 역임하고 상훈은 근정포장, 저서는 우송 낙수록, 우송 여록을 간행했다.
필자(송영섭)의 외가(청호)의 선배이고 부안저널 쌍방기고 칼럼 이문회우(以文會友) 관계로 본인의 ‘정암 특별기고문집’에 격려사 및 칼럼을 쓰고, 글쓰기에 천재적인 분으로 변산반도에 정기를 타고나 변산반도 칭송 및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칼럼에 기고한 고향의 위인으로 존경받는 분이였으며, 부안저널을 위시 각종 신문에 기고된 우리 부안이 낳은 국민의 스승이었다.
이상은 내가 기억하는 내 고향 인물들이다. 사랑하는 생거 부안 내 고향 변산반도여 안녕.
(프로필)
송영섭(宋榮涉)
호: 정암(正庵)
전북 부안출생
미국 U.T.S(미국신학대학원) 수료
선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현)신통일한국 국민연합원로회 자문위원
전)일본 총회장역임(2009. 2.16~ 2013.1.24)
심정문학회원: 2018수필신인상수상
저서: 참하나님을 반하게 하라. 외 37권
이메일: song-mart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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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영섭 회장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항상 귀필로 즐거운 일만 가득 하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