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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회장님은 엄지 발가락 유투버
작성자 시민기자 서성윤
지난 10월 15일, 최근 인터넷 온라인공간과 화성지역 신문사에 핫한 사) 경기도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화성시지회 회장이신 ‘이무길(남,48세, 뇌병변1급)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이하 시민기자 서성윤을 ‘서’로, 지회장 이무길을 ‘이’로 기록하였습니다.
(1) 소개
-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본인 소개와 인사 부탁 드립니다.
-이: 반갑습니다. 화성시 봉담읍에 살고 있는 이무길이라고 합니다. 지난 2015년에 전입해서 화성시에 거주 7년차가 되었습니다. 경기도뇌병변인권협회 화성시지회에 2020년 4월에 지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2) 요즘 어떠세요?
-서: 요즘 기사에 많이 나오시던데요. 소감은 어떠신지요
-이: 네, 잘 나왔는지 찾아도 보고 기사 스크랩도 해두었어요. 다음 카페나 페이스북에, 그런데 소감은 이미 보도자료를 소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라 신문기사가 이렇게 나오는 구나 하고, 마음은 그냥 담담했어요.
-서: 글을 준비할 때,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요?
-이: 기사 준비하시는 분이 인터뷰 대신 질문으로 글을 달라고 해서, 제 엄지발가락으로 썼어요. 한타 한타 쳐가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는 데 .약간은 답답하고 지루했어요. 그래도 이번에 기사 나가고 자신감을 얻어 [화성시장애인주장대회]에 살아오는 과정을 적어 추가로 응모할 준비하고 있는데, 발가락으로 제법 많은 기록들을 하는데, 속도가 제법 빨라진 것 같 습니다.
하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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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장님은 발가락 유투버
-서:오기전 이름을 검색해보니. HOT한 유투버이자 페이스북 관리자이시던데요? 잘 모르는 분들 위해서, 자세히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이: 예, 유튜버 맞습니다. 맨처음엔 제목을 E발가락으로 했는데, 좀심심한 것 같기도 해서 엄지발가락티비로 바꿨어요. 그리고 대신 E발가락으로 썼습니다.
-서: 탄생하게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이: 나도 유부브를 하고싶다 생각을 했는데, 여건이 좋지 않았어요. 뭣보다 카메라가 좋아야 하거든요 그러다가, 자립을 하고, 학교조금 한가해지고, 스마트폰을 [콜드]라는 기종으로 바꾸고 잘 나오는 편인 것 같습니다.
-서: 유투브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있나요?
-이: 내용은 발로 뭔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약간의 발로하는 것들에 대한 재주가 있고, 키덜트 기질이 있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비싼 장난감은 못 사고 (중국산)장난감 종류를 사 와서 발로 만드는 것을 말로 중계를 하거든요. 만드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재미있게 보여주려면 연기해가면서 설명해나가는거죠,
-서: 유투버 1인 대사를 해나가신다는 건가요?
-이: 네~말로 무각본/머리에서나오는 즉석 대사를 이어갑니다.
-서: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로 연령대는 어떤 분들이 보시고, 몇 명정도의 유투버가 있나요?
-이: 연령대는 다양합니다. 거의 대부분 아는 분에게 부탁을 했으니깐요, 구독자는 현재 37명이 있습니다. 목표는 소소하게 40명을 채우는 것인데 잘 안되네요.
-서: 만약에 전혀 모르는 분들께 [엄지발가락티비]를 어떤 관점으로 봐 주길 바라는지 마음을 알려주세요?
-이: 그냥 징그럽게 봐줘도 상관 없고, 그냥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렇게 봐주셔도 됩니다. 저는 손만 쓰는 사람이 아닌 발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 아니죠, 남들보다 발가락을 더 잘 쓰는 분이자나요.
-이: 네~, 발가락을 쓰기도 하고 입을 쓰는 사람도 있어요,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유튜브를 하게 된 거에요, 제 취미생활을 저만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공유도 할겸, 그렇게 해서 유투버가 된거죠,
-서: 아~~~ 정말로 멋지십니다. 반대로, 지회장님처럼 발가락을 쓰시긴하나, 도전하지 못한 다른 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해봐라] 전하실 희망의 메시지가 있을까요?
-이: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발로 하는 유튜버, 입으로 하는 유투버, 이런 식으로 용기를 내서 해봐라.
-서: 하기 위해서 한거라고 보시면 된다는 이야기시죠?.
-이: 아무튼 뭐라고 말할 필요 없이, 바로 주저하지말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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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회장 인생 이야기
-서: 외람된 질문인데요, 혹시 회장님 들어오시기 전에 학창시절이나 살아온 이야기들 해 주실 게 있을까요 ?
-이: 지금서 말하지만, 뇌병변(뇌성마비)장애로 인해 30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손을 쓸 수 없고 불편한 몸으로 집을 나와 봐야 우리집 옆 공원 아니면 주변 한바퀴 도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특히 8,90년대에는 중증 장애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처다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 없는 시간을 골라 잠깐 밖에 나가서 뭐 사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반복했 었습니다.
어느 날은 공원에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여자 학생들이 비아냥 거리고 놀리는 바람에 모멸감, 수치심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와 버리기도 했었습니다.
-서: 안타깝네요, 뭐라 반응하거나 대꾸할새도 없이요?
-이: 사춘기를 넘어선 나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던 환경, 사회 인거죠. 이후에는 트라우마처럼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만 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서 놀라곤 했답니다.
-서: 학교는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이: 장애인을 섬기는 기독교 종교 단체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과 얘기도 하며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 운영하는 교회에 갔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셨지요. 너는 몸으로 하는 노동을 못하니 머리를 쓰는 노동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공부를 하여 학벌을 취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시는 것이였습니다. 목사가 되길 봐라 는 느낌이었고, 나도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기에(나의 누나, 형은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초등도 못나와서) 목사님이 공부를 할수있게 가르쳐 준다고 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교회에서 살다시피하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3년만에 합격했지만, 고등하교 검정고시는 기초가 너무 없어 검정고시는 포기하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세월은 흘려 고등학교를 졸업학교 화성동부IL에 들어가서 자립에 대한 공부와 체험을 하게 되고 이렇게 인권 활동까지 하게 된거지요.
-서: 처음, 장애인 인권운동은 어떻게 하기 시작했어요 ?
-이: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 저는 에바다IL센터를 통해서 장애 인권 운동을 알게 되었습니다.그 세계는 나에게는 신세계였습니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편견 없이 서로를 도와주며 어울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장애 인권 운동을 하며 야학도 다니고 인권공부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려가며 재미있게 어울렸다. 물론, 장애인권운동을 하는데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새벽까지 전철타가며 경기도 일때를 투쟁하고, 항의하며, 돌아다녔으며, 밥도 못 먹고 다닐 때도 많았다. 그래도 화가로서, 작품 활동에 공부에 모든 것을 하던 그 때, 그때가 있어 지금의 제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생각 해보면 그때가 가장 즐거웠습니다.
-서: 그래도 에바다야학, 센터가 그 인권현장에 발을 내린에 뿌리였군요. 인권단체 입문 과정이나 배경은요 ?
-이: 3년을 그렇게 다니다 보니 장애인권운동에 하는 사람으로 제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나의 인권은 어디서 찾지? 나의 권리는 어디서 찾지?] 스스로 나의 인권도 못 찾고 권리도 못 찾는데, 내가 누구의 인권과 권리를 찾아준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같이 인권 운동하던 동지들과도 갈등이 일어나고 많은 방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교 과정을 들어가고, 나오며 만난 강북례 화성동부IL센터장님의 추천을 통해서 지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서: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으셨군요. 어쩜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삶이기만 하네요.
일간, 저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것으로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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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부와 비젼
-서: 네, 회장님. 마지막으로 화성시 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님으로서의 포부나 비젼을 알려주세요.
-이: 올해는 다~지나갔지만, 저의 생각은 뇌병변장애인을 위한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게끔 조력 해주는 것입니다. 뇌병변장애인은 몸을 쓰는 게 한계가 있어, 우리는 주로 보치아를 많이 하는 데, 그러한 몸을 너머 예술쪽의 감수성 있는 장애인을 발굴하여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뇌병변장애인협회에 대한 비젼은 전문 인력을 키워 자부심, 성취감을 길려 이사회에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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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무리하며.
-서: 굉장히 긴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이 글이 나가게 되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하는 분이 있을까요 ?
-이: 고정 관념 있는 사람. 그런 분은 반드시 이글을 보셨으면 합니다. 저렇게 장애를 갖고도 저 사람도 하니 나도 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발로도 하는데, 손으로 왜 못하겠습니까, 다~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도 기억해주세요. 유튜브에서 [엄지발가락티비] 입니다. 힘내세요 !
<유투브 주소>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KZKhyKESo_5f5S9zFgjA
회장님은 엄지 발가락 유투버
작성자 시민기자 서성윤
지난 10월 15일, 최근 인터넷 온라인공간과 화성지역 신문사에 핫한 사) 경기도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화성시지회 회장이신 ‘이무길(남,48세, 뇌병변1급)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이하 시민기자 서성윤을 ‘서’로, 지회장 이무길을 ‘이’로 기록하였습니다.
(1) 소개
-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본인 소개와 인사 부탁 드립니다.
-이: 반갑습니다. 화성시 봉담읍에 살고 있는 이무길이라고 합니다. 지난 2015년에 전입해서 화성시에 거주 7년차가 되었습니다. 경기도뇌병변인권협회 화성시지회에 2020년 4월에 지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2) 요즘 어떠세요?
-서: 요즘 기사에 많이 나오시던데요. 소감은 어떠신지요
-이: 네, 잘 나왔는지 찾아도 보고 기사 스크랩도 해두었어요. 다음 카페나 페이스북에, 그런데 소감은 이미 보도자료를 소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라 신문기사가 이렇게 나오는 구나 하고, 마음은 그냥 담담했어요.
-서: 글을 준비할 때,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요?
-이: 기사 준비하시는 분이 인터뷰 대신 질문으로 글을 달라고 해서, 제 엄지발가락으로 썼어요. 한타 한타 쳐가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는 데 .약간은 답답하고 지루했어요. 그래도 이번에 기사 나가고 자신감을 얻어 [화성시장애인주장대회]에 살아오는 과정을 적어 추가로 응모할 준비하고 있는데, 발가락으로 제법 많은 기록들을 하는데, 속도가 제법 빨라진 것 같 습니다.
하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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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장님은 발가락 유투버
-서:오기전 이름을 검색해보니. HOT한 유투버이자 페이스북 관리자이시던데요? 잘 모르는 분들 위해서, 자세히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이: 예, 유튜버 맞습니다. 맨처음엔 제목을 E발가락으로 했는데, 좀심심한 것 같기도 해서 엄지발가락티비로 바꿨어요. 그리고 대신 E발가락으로 썼습니다.
-서: 탄생하게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이: 나도 유부브를 하고싶다 생각을 했는데, 여건이 좋지 않았어요. 뭣보다 카메라가 좋아야 하거든요 그러다가, 자립을 하고, 학교조금 한가해지고, 스마트폰을 [콜드]라는 기종으로 바꾸고 잘 나오는 편인 것 같습니다.
-서: 유투브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있나요?
-이: 내용은 발로 뭔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약간의 발로하는 것들에 대한 재주가 있고, 키덜트 기질이 있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비싼 장난감은 못 사고 (중국산)장난감 종류를 사 와서 발로 만드는 것을 말로 중계를 하거든요. 만드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재미있게 보여주려면 연기해가면서 설명해나가는거죠,
-서: 유투버 1인 대사를 해나가신다는 건가요?
-이: 네~말로 무각본/머리에서나오는 즉석 대사를 이어갑니다.
-서: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로 연령대는 어떤 분들이 보시고, 몇 명정도의 유투버가 있나요?
-이: 연령대는 다양합니다. 거의 대부분 아는 분에게 부탁을 했으니깐요, 구독자는 현재 37명이 있습니다. 목표는 소소하게 40명을 채우는 것인데 잘 안되네요.
-서: 만약에 전혀 모르는 분들께 [엄지발가락티비]를 어떤 관점으로 봐 주길 바라는지 마음을 알려주세요?
-이: 그냥 징그럽게 봐줘도 상관 없고, 그냥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렇게 봐주셔도 됩니다. 저는 손만 쓰는 사람이 아닌 발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 아니죠, 남들보다 발가락을 더 잘 쓰는 분이자나요.
-이: 네~, 발가락을 쓰기도 하고 입을 쓰는 사람도 있어요,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유튜브를 하게 된 거에요, 제 취미생활을 저만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공유도 할겸, 그렇게 해서 유투버가 된거죠,
-서: 아~~~ 정말로 멋지십니다. 반대로, 지회장님처럼 발가락을 쓰시긴하나, 도전하지 못한 다른 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해봐라] 전하실 희망의 메시지가 있을까요?
-이: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발로 하는 유튜버, 입으로 하는 유투버, 이런 식으로 용기를 내서 해봐라.
-서: 하기 위해서 한거라고 보시면 된다는 이야기시죠?.
-이: 아무튼 뭐라고 말할 필요 없이, 바로 주저하지말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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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회장 인생 이야기
-서: 외람된 질문인데요, 혹시 회장님 들어오시기 전에 학창시절이나 살아온 이야기들 해 주실 게 있을까요 ?
-이: 지금서 말하지만, 뇌병변(뇌성마비)장애로 인해 30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손을 쓸 수 없고 불편한 몸으로 집을 나와 봐야 우리집 옆 공원 아니면 주변 한바퀴 도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특히 8,90년대에는 중증 장애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처다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 없는 시간을 골라 잠깐 밖에 나가서 뭐 사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반복했 었습니다.
어느 날은 공원에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여자 학생들이 비아냥 거리고 놀리는 바람에 모멸감, 수치심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와 버리기도 했었습니다.
-서: 안타깝네요, 뭐라 반응하거나 대꾸할새도 없이요?
-이: 사춘기를 넘어선 나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던 환경, 사회 인거죠. 이후에는 트라우마처럼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만 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서 놀라곤 했답니다.
-서: 학교는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이: 장애인을 섬기는 기독교 종교 단체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과 얘기도 하며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 운영하는 교회에 갔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셨지요. 너는 몸으로 하는 노동을 못하니 머리를 쓰는 노동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공부를 하여 학벌을 취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시는 것이였습니다. 목사가 되길 봐라 는 느낌이었고, 나도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기에(나의 누나, 형은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초등도 못나와서) 목사님이 공부를 할수있게 가르쳐 준다고 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교회에서 살다시피하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3년만에 합격했지만, 고등하교 검정고시는 기초가 너무 없어 검정고시는 포기하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세월은 흘려 고등학교를 졸업학교 화성동부IL에 들어가서 자립에 대한 공부와 체험을 하게 되고 이렇게 인권 활동까지 하게 된거지요.
-서: 처음, 장애인 인권운동은 어떻게 하기 시작했어요 ?
-이: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 저는 에바다IL센터를 통해서 장애 인권 운동을 알게 되었습니다.그 세계는 나에게는 신세계였습니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편견 없이 서로를 도와주며 어울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장애 인권 운동을 하며 야학도 다니고 인권공부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려가며 재미있게 어울렸다. 물론, 장애인권운동을 하는데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새벽까지 전철타가며 경기도 일때를 투쟁하고, 항의하며, 돌아다녔으며, 밥도 못 먹고 다닐 때도 많았다. 그래도 화가로서, 작품 활동에 공부에 모든 것을 하던 그 때, 그때가 있어 지금의 제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생각 해보면 그때가 가장 즐거웠습니다.
-서: 그래도 에바다야학, 센터가 그 인권현장에 발을 내린에 뿌리였군요. 인권단체 입문 과정이나 배경은요 ?
-이: 3년을 그렇게 다니다 보니 장애인권운동에 하는 사람으로 제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나의 인권은 어디서 찾지? 나의 권리는 어디서 찾지?] 스스로 나의 인권도 못 찾고 권리도 못 찾는데, 내가 누구의 인권과 권리를 찾아준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같이 인권 운동하던 동지들과도 갈등이 일어나고 많은 방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교 과정을 들어가고, 나오며 만난 강북례 화성동부IL센터장님의 추천을 통해서 지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서: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으셨군요. 어쩜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삶이기만 하네요.
일간, 저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것으로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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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부와 비젼
-서: 네, 회장님. 마지막으로 화성시 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님으로서의 포부나 비젼을 알려주세요.
-이: 올해는 다~지나갔지만, 저의 생각은 뇌병변장애인을 위한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게끔 조력 해주는 것입니다. 뇌병변장애인은 몸을 쓰는 게 한계가 있어, 우리는 주로 보치아를 많이 하는 데, 그러한 몸을 너머 예술쪽의 감수성 있는 장애인을 발굴하여 인도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뇌병변장애인협회에 대한 비젼은 전문 인력을 키워 자부심, 성취감을 길려 이사회에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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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무리하며.
-서: 굉장히 긴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이 글이 나가게 되었을 때, 이러한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하는 분이 있을까요 ?
-이: 고정 관념 있는 사람. 그런 분은 반드시 이글을 보셨으면 합니다. 저렇게 장애를 갖고도 저 사람도 하니 나도 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발로도 하는데, 손으로 왜 못하겠습니까, 다~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도 기억해주세요. 유튜브에서 [엄지발가락티비] 입니다. 힘내세요 !
<유투브 주소>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KZKhyKESo_5f5S9zFg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