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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제3장 인생의 목적
기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삶은 물론, 종교적인 탐구의 토대가 된다. 궁극적 실체와의 합일은 초월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지복(아난다), 열반, 또는 심지어 신성한 애인과의 혼인으로 다양하게 특징지어진다. 유일신론적인 신앙에 따르면 신은 기쁨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신과 그의 피조물들의 합일은 그 기쁨을 완전하게 한다.
이 절은 인간의 심정과 신의 심정이 합일하여 공명할 때 천국의 기쁨을 묘사하는 구절들로 시작된다. 그리고 천국 기쁨의 광활함과 감각을 통한 부분적인 쾌락을 비교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이같은 통찰은 윤리에 대한 논의에서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조지 워싱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덕과 행복 사이에는 불가분의 합치점이 있다."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 삶과 천국의 기쁨 사이에 상승 작용을 묘사하는 구절들로 끝맺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려는 노력이 수반되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자세는 성령의 기쁨을 끌어 당길 수 있다. 이것은 부부의 사랑과 신성한 신비한 연간속에서 경험된다.(제19장 '부부사랑'참조)
1. 하늘의 기쁨
종교 경전 당신께서 나의 인생길을 몸소 가르쳐 주시니,
당신을 모시고 흡족할 기꺼움이,
당신 오른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합니다. 시편 16.11 (기독교)
일월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즐거운 놀이를 보고 싶은 까닭이다. 친필 14.25 (천리교)
행복은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생겨나는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인간이 그것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한다.
과학과 건강. 57 (크리스천 사이언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일도 없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두셨다. 고린도 전서 2.9 (기독교)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즐거움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꾸란 32.17 (이슬람)
나는 여래이니
가장 높은 양족존
세상에 출현함은
큰 구름이 덮이는 듯
바짝 마른 일체중생
흡족하게 비를 주어
괴로움을 다 여의고
안온한 낙을 얻고
세간의 즐거움과
열반의 기쁨을 얻네. 법구경.5 (불교)
카르마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우주의 구극에 들어가 일체를 관조하여 모든 것을 알며 영원한 지복을 누리느니라. 쿤다쿤다, 판차스티카야 170 (자이나교)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염원하여 마음이 편안을 찾느니라. 실로 하나님을 연원할 때 마음이 편안하니라. 꾸란13.28 (이슬람)
나의 성모시여! 거룩한 스승과 하나됨으로 내가 지복을 얻었나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그와 하나 됨 속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 즐거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주옥같은 선율의 천사들이 내려와 성가를 노래합니다.
그대 모두 찬양하라, 나는 거룩한 스승과 하나 되는 지복을 얻었도다.
아디 그란트, 람칼리, 아난두, M.3,p.917 (시크교)
지고선이 우리의 것이기를!
바라는 대로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보지 못할 곳이 없는 당신의 영으로
오, 주여! 당신의 의로서 주실
선한 마음의 놀라운 기적을 내리소서!
언제나 장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아베스타, 야스나 43.2 (조로아스터교)
말씀 선집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목적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이 보이는 인간의 심정에서 현현되는 것입니다. (27.29, 1969.11.15)
사람은 왜 태어났느냐? 하나님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또 만물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만물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81.334, 1975.12.29)
도대체 신의 창조는 무엇을 목적한 것이냐? 신이 있다면 신이 창조한 그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바라는 목적과 같은 것이냐? 하나님께서도 기쁘시기 위해서 지으셨던 것입니다. 기쁘고 좋기 위해서 말입니다. 기쁘고 좋은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기쁠 것인가? 돈을 놓고 기쁠 것인가? 이 우주의 모든 만상을 놓고 기쁠 것인가? 인간들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놓고 기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놓고 기쁘시기 위해서 만물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 만물들을 그런 목적하에서 지은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들이 바라보는 최고의 소원이 무엇이며 최고의 종착점이 무엇이냐? 이렇게 보게 될 때 사랑을 통해 기쁨을 목적으로 만물을 지었다 할진대는, 피조세계의 만물은 사랑을 통해서 연결 될 수 있는 인연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물은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상적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114.63, 1981.05.16)
인정(人情)과 천정(天情)의 합일점이 행복의 출발점이다. (뜻길,p.174)
사람은 자기가 좋은 때는 부모, 형제, 친척을 찾아 함께 즐기고자 합니다. 좋은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한 것이요, 영원한 것은 심정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와 자식입니다. 즉 부모와 나입니다. 하나님과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입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아버지를 찾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12.104, 1962.12.16)
어떤 사람이 요런 물건, 요런 물건, 요런 물건을 잔뜩 만들어 놓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이 '아이고, 좋아! 아이고, 좋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게 되면 주인이 그걸 보고 '정말 좋아요? 정말 좋아요? 하고 물어 자기보다 더 좋아한다는 걸 확인하면 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든 자기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기의 것을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 있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쥐새끼를 봐도 '아이고, 하나님이 저걸 얼마나 사랑하시겠느냐?' 하며 사랑하고, 강아지새끼도 사랑하고, 나비를 봐도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러면 너 줄게, 너 줄게. 너 가져라, 너 가져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주지 그렇지 않으면 안 줍니다. 주인 입장에 있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하고 좋아하면 '그래, 너 주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사랑의 자극제로 나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사랑을 유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만물을 사랑하는 걸 볼 때 하나님이 '그 녀석 나보다 나은데' 하십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팔이 있다면 뒤로 와서 붙들고 안고 '야야, 이 녀석아! 좋구나!' 이럴 판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붙들 때 나도 좋아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붙들면 하나님이 '애, 그건 안 된다' 그러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좋다고 자꾸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께로 무한히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도 '좋다, 좋다, 좋다' 그러십니다. 그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취해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쩌겠습니까? 하나님 만나서 사랑의 병이 나서 취해 놀고 있으면 하나님 그걸 보고 좋아하시겠습니까, 나빠하시겠습니까? '아, 내 사랑이 좋긴 좋구만. 하 하!' 하고 크게 웃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에이, 고약한 녀석! 에이, 고약한 것' 그러시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아이고, 좋다!' 그러시겠습니까? 대단히 좋다, 그 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둘이 취해서 타든 깔든 아무개를 데려가도 좋고, 꽁무니에 그냥 붙여도 좋고, 다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제일 바람직한 길이 아니겠느냐? 하나님도 바라고 인간도 바라고 만물도 바라는 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1.171-172, 1981.02.15)
2. 감각적 기쁨을 초월하는 신성한 기쁨
종교 경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서 14.17 (기독교)
무한자는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며, 덧없이 흘러가는 무상한 것 가운데 찾아지는 즐거움이란 없다. 오직 무한자에게 즐거움이 있나니 그 무한자를 구하여 힘써 정진하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7.23 (힌두교)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영원한 축복이 있는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안식처를 약속하셨도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즐거움이니 그것은 더없는 경사이니라.
꾸란 9.72 (이슬람)
이 세상과 천상에서 누리는 애욕의 즐거움도 갈애가 멸진한 즐거움에 비한다면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다나 11 (불교)
독거의 맛을 알고 잠잠해진 평안을 몸소 체험한 사람은 법열의 맛을 즐기면서 두려움 없이 악에서 떠난다. 법구경 205 (불교
외계와의 접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때,
그는 신의 요가에 완전히 제어되며
끝없는 행복에 이른다.
감각의 접촉에 기인하는 경험들은
다만 괴로움의 원천일 분이다.
그것들은 시작과 끝이 있나니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바가바드기타 5.21-22 (힌두교)
자존자 브라흐만은 모든 기쁨의 원천이니,… 만일 자비로운 그가 우주에 편만해 있지 않다면, 살 수 있는 자가 실로 누구며 숨쉴 수 있는 자는 또한 누군가? 기쁨을 주는 이는 오직 그뿐이다.
기쁨의 본 모습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건대, 고귀하고 학식이 높으며, 건강하고 이 세상의 모든 부를 한 몸에 지닌 젊은이가 있다고 하자.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이라고 보자.
그 기쁨의 백배가 간다르바들이 누리는 한 즐거움보다 낫지 않으며, 베다성전에 정통하여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는 사람의 즐거움은 또한 이보다 낫다.
천상의 제석천이 누리는 기쁨으 백배는 낙원의 조상들이 누리는 한 즐거움보다 못하여 천신들의 즐거움,… 제 의식으로 태어나는 신들의 즐거움,… 인드라의 기쁨,…브리하스파티(神主)의 기쁨,…프라자파티(創造主)의 기쁨,… 브라흐마(造物主)의 기쁨의 각각 한 즐거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베다성전에 정통하여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는 이의 즐거움은 브라흐마가 누리는 즐거움에 못지않다.
이렇게 말해진다. 언설로 형용할 수 없고 생각조차도 닿지 못하는 브라흐만의 환희를 아는 자, 그는 두려움을 모른다. 그는 "내가 왜 정의를 행하지 않았던가? 내가 왜 그릇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들로 괴로워하는 법이 없다. 브라흐만으 환희를 아는 자는 실로 선악의 이원을 넘어선 경계에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 타잇티리아 우파니샤드 2.7-9 (힌두교)
말씀 선집
우리 인간을 가만히 보면 그저 여기저기 다니다가 눈도 마비가 됐고, 귀도 마비가 됐고, 냄새 맡는 코도 마비가 됐고, 맛보는 입도 마비가 됐고, 두 팔도 마비가 됐고, 전부 마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내 눈이, 내 귀가, 내 모든 감각기가 일체화되어서, 모든 신경 선까지 전체를 종합해서 나를 하나로 이끌 수 있는 그 길이 어디냐? 도취하고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길이냐? 그것이 내 개인의 인생길로, 내 하나의 길로,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는 가정이 만족하고, 내가 속해 있는 종족이 만족하고, 내가 속한 나라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세계가 만족하고, 내가 속한 하늘땅이 만족하고, 하나님까지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빛의 길이 어디 있느냐?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95.181, 1977.11.13)
개인 생활을 중심삼는 사람들은 잘못 느끼지만, 은혜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보는 만물이 옛날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아도 새롭고, 저녁에 보아도 새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서서히 물결쳐 올 때 신비스러움을 입체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95.134-135, 1970.03.21)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입니다. 그 점이 어떤 점이냐? 부자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 내가 하나님하고 동등할 수 있다니, 그런 기쁨이 얼마나 크겠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거기서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 나 죄인이오'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까?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인데 기도가 필요합니까? 위신과 체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고 비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체험한다면 뼈와 살이 녹아날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 지도자도 왔으리라고 보는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받아봤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숨을 쉬면 세계가 들락날락한다는 것입니다. 아편을 먹고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아편만 못하겠습니까? 술만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오게 되면 채워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수(4)백조나 되는 세포까지도 춤을 추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눈대로, 손은 손대로 전부 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 외의 다른 것은 갖다 주더라도 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고귀한 욕망이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됩니다. (69.79-80, 1973.10.20)
오늘 하루가 기쁨으로 소화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 기쁨을 내일의 기쁨으로 가져가지 못한다면 오늘의 기쁨은 나에게 있어 영영 원수가 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슬픔과 어려움과 탄식의 조건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쁨이 좋은 것만이 아닌 줄 아옵니다. 문제는 기쁨과 슬픔을 연걸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목적 성사를 위해 내적 투쟁이 그 환경에 얼마만큼 맺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아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이 뜻과 더불어 생애노정을 가는데 있어서 뜻과 얼마나 일치되었느냐, 뜻의 가치에 저희들의 기쁨과 슬픔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43.10, 1971.04.18)
3. 즐거운 생활
종교 경전 원한을 품은 자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원한을 버리고 즐겁게 살자. 원한을 가지 자들 속에서라도 원한을 떠나 살자.
고뇌하는 자들 가운데 있으면서 고뇌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고뇌하는 자들 속에서라도 고뇌를 떠나 살자.
욕정에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 있으면서 욕정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욕정에서 사로잡힌 자들 속에서라도 욕정을 떠나 살자.
아무런 막힘도 없는 우리, 즐겁게 살자. 광음천(光音天)의 신들처럼 즐거움을 먹으며 살자. 법구경 197-200 (불교)
성령은 즐거운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함께 하신다. 예루살렘 탈무드,수코트 5.1(유대교)
북새야, 일어라.
마파람아, 불어라.
나의 사랑하는 임이 이 동산에 오시어
달콤한 열매를 따먹도록,
내 동산에 향기를 퍼뜨려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내 동산으로 찾아 왔소.
몰약 같은 향기로운 나뭇가지도 꺾고
꿀도 송이째 따먹으리오.
포도주만 마시라, 젖도 마시리라.
친구들아, 먹고 마시어라.
흠뻑 사랑에 취하여라. 아가 4.16-5.1 (기독교)
말씀 선집
선생님은 어떤 일에 손대게 되면 '이것 때문에 태어났다!' 라고 생각합니다. 생겨나기를 이것 때문에 생겨났고, 그 다음에 좋아서 합니다. 좋아서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깊은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가 싫어서 하는 데에는 손을 안 됩니다. 마음이 다 압니다. 좋아서 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가셔서 복을 빌어 주십니다.
(308.214, 1999.01.05)
여러분이 70년 내지 80년을 산다고 볼 때 그 가운데 3분의 3가 슬픈 생활이라고 한다면, 이 3분의 2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쁜 생활로 만들어야 됩니다. 천국화 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면서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도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고 나서도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또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34.141, 1970.08.30)
왜 남자가 여자를 필요로 하고, 왜 여자가 남자를 필요로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공명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아! 좋다!' 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아도 좋고, 자지 않아도 좋다 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하고,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합니다. 완전한 남자와 완전한 여자의 사랑이 공명되어야만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102.21, 1978.11.19)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하나님의 이상적 사랑으로 완전히 꽃피워서 그 사랑의 향취가 온 천지에 진동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해져서 아버지와 아들딸의 자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들딸의 행복을 노래하고, 아들딸의 희망과 아들딸의 만사를 찬양할 수 있고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가진 그 사랑의 귀한 선물 위에 입체적 사랑을 가해 가지고 이 우주가 '부웅' 부풀게 될 것입니다. 고무주머니(풍선) 알지요? 납작 달라붙은 고무주머니를 '푸' 불면 커지듯이 우주가 부풀어서 존재 세계의 만물이 그 가운데 들어가더라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우주가 됩니다. 모든 것을 충만시킬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101.35, 1978.10.28)
양심과 타고난 선
양심은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촉구하고 악을 행하려는 성향을 막는 내면의 신적 광채이다. 불교는 이 기능을 '깨달음을 얻은 마음' 또는 '불성'이라고 묘사하는데, 그것은 지혜의 눈을 통해 밝혀질 수 있다. 유교는 그것을 인(仁)으로 간주하는데, 널리 알려진 맹자의 비유에 따르면, 이것은 우물에 막 빠지려는 아기를 보호하려는 측은한 마음의 발로를 말한다. 또한, 이슬람은 인간의 마음을 본래 곧은 것으로 간주하며, 사도 바울은 양심이 심지어 전혀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조차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양심은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자기 향상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이상을 추구하며 고무한다. 양심은 또한 소극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이기적인 행동을 하거나 남을 해치는 행동을 할 때 꾸짓고 타이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문선명 선생은 양심을 부모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보배 같은 스승' 이라고 말한다. 양심은 하나님이 선사한 것이며, 우리가 자기 형상을 가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했던 우리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자기중심적 욕망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비뚤어진 양심을 말하기도 하는데, 양심은 본성적으로 천부적인 것이긴 하지만 후천적인 훈육과 교육이 양심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그릇된 판단들로 양심을 세뇌하는 것은 실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양심에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양심의 표면에 있는 차원은 상대적이며 어떤 사람의 진리 개념을 고수한다.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에는 본심이 있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떳떳한 마음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타르수스의 사울 같은 사람에게 보다 고차적인 진리의 통찰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삶의 방향을 바꾸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다. 양심의 뿌리에 신성한 본질이 있기에 모든 인간은 결국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은 문선명 선생의 낙관적 견해의 기반이 될 것이다.
1. 선에 근거한 본심과 심정
종교 경전
율법을 가지지 않는 이방사람이 인간 본성에 따라 율법대로 행할 때 그들이 율법을 갖지 않았을지라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그 행위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 행위를 증언하고 그들의 이성이 그 행위를 서로 고발도하고 변명도 합니다.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비밀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있을 것입니다.로마서 2.14-16 (기독교)
부드러움과 선은 인간 성품의 바탕이다. 예기 38.18 (유교)
참된 종교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성에 근거한 덕행이다.
쿤다쿤다 프라바차나사라 7 (자이나교)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17.21 (기독교)
와비사 이븐 마아바드가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사도를 만나러 갔을 때, 그가 '덕목에 관해 나에게 질문하려 하느냐?' 라고 나에게 말하기에 '예'라고 내가 대답하였다. 그가 계속하기를 '너의 마음에 불어 보아라. 덕이란 영혼이 안식을 취하고 마음이 평안한 것이니라. 죄란 것은 영혼에 혼란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가슴에 고통을 주는 것이니,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종교적 충고이니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27 (이슬람)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보는 자,…그는 영웅이며, 신들과 사람들의 스승, 깨달은 자 붓다이다. 육조단경 1 (불교)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도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네 온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네 몸은 온전히 밝을 것이다. 누가복음 11.34-36 (기독교)
인간에 대한 당신의 계시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참된 내면의 자아의 광산 속에 감춰져 이는 그 보석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132 (바하이교)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니는데 이것이 참된 자아이다. 그러나 무시 이래로 온갖 미혹에 덮여 있기에 사람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 알지 못한다.
선남자야!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집 어디엔가 숨겨진 황금이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낯선 이가 방편으로 그녀에게 "나는 당신을 부려 김을 매게 할까 하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하였다. "지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아들에게 황금이 묻힌 곳을 가르쳐 준다면 당신을 위해 일을 하겠소."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그 방법을 알고 있으니, 당신의 아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겠소." 그 여인이 말했다. "우리 집의 남녀노소 그 누구도 묻힌 곳을 알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소?" 이에 그 사람은 묻힌 황금을 캐내어서 그 여인에게 보여 주자 그 여인은 기뻐하며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선남자야, 사람의 불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으니, 이는 마치 그 가난한 여인이 지니고 있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황금과 같다. 내가 지금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지니고 있는 불성을 보게 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온갖 미혹으로 가려져 있다. 여래는 일체를 중생에게 한 덩어리 빛나는 황금과도 같은 깨달음의 곳집, 곧 불성을 보여준다. 대반열반경 214-215: 숨겨진 보화의 비유 (불교)
사람은 모두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모두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제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리가 장차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가지니, 이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 해서도 아니며 마을의 벗들에게 명예를 얻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한 마음은 인의 단서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네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四體)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네 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는 데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요,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알아서 모두 넓히고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잘 채우면 족히 사해를 보존할 수 있고, 진실로 채우지 못하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맹자II.A.6 (유교)
말씀 선집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양심은 항상 선을 향해 달리려 합니다. (219.118, 1991.08.28)
석가모니도 하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불심을 가지고 있다 했는데, 그 불심이 뭐냐? 그것은 순수한 본연의 마음을 말합니다. (33.45, 1970.08.20)
'마음의 본원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그 대상적인 위치에 있는 나다' 하는 이런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2.40, 1987.03.22)
인륜도덕은 인류의 양심을 중심삼고 하늘을 향해 바른 길을 가야 됩니다. 바른 길을 가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양심은 고차적인 이상세계를 향해서 이렇게 발전하려고 합니다.
(90.161, 1976.12.26)
본래 천법의 도리를 따라가는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망하는 것을 방비해 주고 보호해 주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본래 있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마음이 있기에 인간에게도 본래부터 있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만든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심아, 내가 이렇기 때문에 이런다' 그럽니까? '내 생각이 그렇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고 명령한다고 해서 양심이 작용합니까? 어디인지 모르지만 다른 데서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공사문제를 중심삼고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1.241, 1970.06.0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만은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은 지능에 속하는 것이어서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어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내려온 것이 사실이지만, 선을 찾아 세우려는 그들의 근본목적만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의 본심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선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선의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타락인간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의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선을 추구하는 그 본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들로써 엮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갈 곳은 결국 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 종말론 2.3)
하나님의 창조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을 당신의 자식으로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양심' 이라는 최고 최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지상계에서 일생을 항해하는데 필요한 나침반으로 하사하신 것이 양심이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흔히들 인생 100년을 애기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양심의 작용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심의 작용 중 최고 최상의 기능이 바로 참부모 참스승 참주인의 역할 기능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참부모 참스승 참주인의 위치에서 우리의 생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하나님의 대신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인도하고 감시하는 책임이 양심의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우리의 모든 언행은 물론 생각까지도 부모보다 먼저 알고, 스승보다 먼저 알고, 하나님보다 먼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지도하고 감시하는 본원적인 기능을 양심에게 전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정처럼 맑고 투명해야 할 ㅇ니간의 양심에 타락성의 때가 끼어 지금까지 각종 죄악과 질병 속에서 본래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 주관권의 이 사악한 세계에서 하루라도 빨리 해방-석방을 받고 싶어 울부짖고 있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5.277-278, 2007.07.04)
양심의 방향성과 목적의 내용에 있어서 무엇이 되느냐 하면 참사랑이 목적의 내용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방향, 양심의 뿌리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변하지 않는 이런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6.311-312, 1991.04.15)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100퍼센트, 120퍼센ㅌ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타락한 세상에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도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불씨와 같이 남아 있습니다. 이 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잘만 피우면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없으면 구원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본성의 씨가 남아 있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99.276-277, 1990.02.20)
2. 자기 양심과의 투쟁
종교 경전
너는 평소에 스스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 것이나, 네가 죄를 지을 때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칸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베드로전서 3.16 (기독교)
마음은 이중적이다. 순수한가 하면 또한 불순하다. 욕망과 결합하면 불순하게 되며 욕망을 완전히 여의면 순수하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6.34 (힌두교)
나는 자책하는 영혼에 걸어 맹세하노라. 꾸란75.2 (이슬람)
어떤 사람이 아무런 사랑스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유익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심약한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런 사랑스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괴로워했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그는 괴로워했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양심을 마비시킨다. 이티붓타카 25 (불교)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생각과 양심까지도 다 더러워졌습니다.
디도서 1.15 (기독교)
몸에 응혈이 있어 그것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 온 몸이 건강하고, 그것이 온전치 못하면 온 몸도 그와 같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마음이지 않느냐?
알 나와위 하디스40선6 (이슬람)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에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4-8 (기독교)
말씀 선집
사람은 자기 생애의 인연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을 앞에 모시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철칙입니다. 마음의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는 하늘이 때립니다. (4.260, 1958.08.03)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천법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17.39, 1966.11.06)
탕자들은 죽어도 고향에 못 찾아갑니다. 양심이 그러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다른 누가 도와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는 것입니다. 형님 앞에 잘 못하면 형님 앞에 나서기 싫어집니다. 형님은 모르더라도 양심이 미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형님을 멀리 대해야 되고 그 앞에 굴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 이치가 질서를 따라서 돼 있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둔해서 모르지, 예민한 사람은 다 아는 것입니다. (400.328, 2003.01.11)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신 속에 가장 소중한 스승을 일생동안 내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잘못 대우하고 짓밟고 남용합니다. 그 스승은 바로 인간의 양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항상 우리 자신에도 도움이 되도록 말을 하며 우리를 참사랑과 연결시켜 주고자 합니다. 부모와 같이 우리의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속에는 또한 양심의 소리에 항상 거역하는 반란자가 있습니다. 그 반란자는 바로 육체인 것입니다. 육체는 양심을 비참하게 짓밟고 남용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를 때닫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양심의 적이었던 육체, 우리 자신의 생명과 인성을 크게 손상시킨 육체의 편을 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항상 마음속에 스승이요, 부모로서 인류의 궁극적인 부모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때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며, 나아가서는 '제2의 하나님' 이라고까지도 불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양심의 적인 육체에 대해 동정적이며 육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육체를 통제하고 역제하며 양심의 정당함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육체는 육체적인 욕망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배가 고프면 훔쳐서라도 허기를 면하려고 합니다. 육체는 언제나 편안함을 추구하며 남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육체의 영역을 주관해야 하는 엄청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01.208, 1990.04.09)
하나님은 지혜의 대왕이십니다. 인간이 완성에 이르는 길을 먼 곳에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 바로 여러분의 양심 속에 그 길을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양심은 여러분의 주인입니다. 여러분의 스승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대신입니다. 양심은 여러분의 모든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먼저 압니다. 여러분의 생각까지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것이 여러분의 양심입니다. 스승보다, 부모보다, 하나님보다 먼저 압니다.
이런 양심이 여러분을 위해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충고를 해줬습니까? 밤이나 낮이나 나쁜 생각만 해도, '네 이놈!' 하고 나무라면서 지치지도 않고 여러분을 끌고 강을 넘고 고개를 넘으려고 얼마나 수고했습니까? 양심은 언제나 참된 주인의 모습을 지니고 여러분을 보호하고 도우려 하는데도 번번이 배반한 여러분이 아닙니까? 우주로부터 점지 받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스승인 데도 불구하고 이 선생을 여지없이 천대한 여러분의 몸뚱이를 어찌하렵니까? 여러분의 본연적 사랑을 이어줄 수 있게 한 부모 대신 보내 준 양심을 무자비하게 유린한 육신만을 붙들고 그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한평생을 허송세월로 막을 내리겠습니까? (447.163-164, 2004.05.01)
여러분은, 나는 당당한 하나의 인격자인데 내 양심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양심은 작 있습니다.여러분의 마음은 틀림없이 자고 있습니다. 양심은 누구의 제재나 지배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심은 쉬지 않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중에도, 환한 곳에서나 호화찬란한 곳에서도 잘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야, 이놈아!' 하면서 몸을 치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러한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자고 있다고 말하는 이 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니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세계 인류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늘땅을 품고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종말세계를 향해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처한 인간들의 양심을 깨워 줍시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세계 인류 전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고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울 수 있는 종교가 되어 있습니까? 그런 내용을 갖춘 주의나 이념이 있습니까? 양심이 깨어 거기에 들어오는 그 충격, 그 결의, 그 각오는 세상만사를 일시에 밟아 치울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칼이 무서운가, 죽음이 무서운가, 내 양심에서 일어나는 이것을 누가 막을소냐? 아무도 못 막습니다. (10.284-285, 1960.11.06)
완전성
종교 경전
들은 절대자와 하나 된 사람, 진리로 체현된 사람, 죄 또는 세속적인 타락의 족쇄에서 자유로운 사람, 성스러운 은총의 충만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의 공덕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성자, 현자, 붓다, 또는 신성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완전 상태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역 너머가 아니다. 우리가 단지 노력하기만 한다면 성취할 수 있는 목적지이다.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은 열망이다. 그것의 임무는 완성, 극 자기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그 이상은 결코 우리의 나약함이나 불완전함 때문에 낮추어져서는 안 된다." 여기에 기술된 구절들은 완전 상태를 성취한 사람의 탁월한 품성을 묘사한다. 특히 와넌함의 세 가지 품성이 강조된다.
첫째는 몸과 마음의 통일이다. 성자는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성욕, 탐욕 또는 다른 욕망을 정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관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양심의 지시에 따라서 옳은 것만 행하고자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의 의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둘째, 완전성은 하나님과의 통일이다. 하나님은 최고의 인간적 열망들의 전형이며 모델이다. 그래서 성자는 하나님 자신의 완전성에 동참하고자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속성들, 즉 절대, 불변, 사랑, 정의 등을 구현하게 된다.
셋째, 완전성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또는 자비는 죄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하나님 본질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남자와 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풍요한 삶을 즐거워하며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한다. 성자의 사랑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항상 선으로 악을 갚은다.(제13장 '참사랑' 참조)
1. 완전성은 마음과 몸의 일치에서 시작
종교 경전
어떤 사문이 부처께 여쭈었다. "선이란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일러 위대하다 합니까?" 부처께서 대답하셨다. "도를 따르며 참을 굳게 지니는 것, 그것이 선이요, 자신의 뜻이 도에 어긋남이 없을 때 이를 일러 위대하다 하느니라." 사십이장경 15 (불교)
너희의 성향이 내가 가져온 것과 부합될 때까지 너희 중 누구도 진정한 신자라 이를 수 없느니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41 (이슬람)
깨달음에 넉넉한 자는 사악한 행위에 끌려 다니지 않나니, 그는 언제나 진리로 일깨워진 지성에 의해 인도되는 까닭이니라. 아차랑가 수트라 1.174 (자이나교)
깨달음을 얻는 방법
마음을 바르게 닦고
집착을 끊고 소유욕을 버리고
항상 편안하고 즐거우며
번뇌가 사라져 빛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열반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법구경 89 (불교)
마부에 의해 잘 길들여진 말처럼
모든 감관이 잠잠하고
교만과 번뇌를 끊어버린 사람은
선들조차도 그를 경애한다.
대지처럼 너그럽고 잘 수양된 사람은
화를 내는 법이 없다…
그는 마치 흙탕에 휘둘리지 않는 호수 같으며
그와 같이 평정심을 지닌 사람에게 윤회는 없다.
바른 지혜를 얻고 오염을 여의었으며
완전한 평온과 부동심을 지닌 자
그의 마음은 고요하고 그의 말은 고요하며
그의 행동 또한 고요하다.
사특한 믿음 없이 절대를 깨달아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욕망을 버린 사람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법구경 94-97 (불교)
아르주나가 말했다. 자신의 존재가 지고자 안에 굳건히 서서 부동의 지혜를 지닌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 크리슈나여! 그는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습니까?
거룩하신 주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만유 속에서 자신을 보며, 자신 속에서 일체만유를 보는 자,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헐떡이는 갈애를 떨쳐 버린 자, 그를 일러 확고부동한 지혜의 사람이라 하느니라.
슬픔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쾌락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탐욕과 두려움과 노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자, 그를 일러 확고한 통찰을 지닌 성자라 부르느니라.
이기적인 욕망으로 더 이상 흔들이지 않으며, 좋다 하여 의기양양해하거나 슬프다 하여 침동해하지 않는 사람, 그는 진실로 확고한 지혜 속에 머무는 자니라.
거북이가 사지를 갑 속으로 거두어들이듯 감관을 대상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사람, 그의 지혜는 확고히 서 있느니라.
수행자가 아무리 애써도, 오, 쿤티의 아들이여! 날뛰는 욕망들은 그의 마음을 채어가 버릴 것이니라. 모든 감각기관들을 통어하며 언제나 내 속에 머물며 나에게 전일하는 자, 그는 진실로 확고한 지혜 속에 머무는 자니라. 바가바드기타 2.54-61 (힌두교)
아부 후레이라가 하나님의 사도가 하는 말을 전하였다. "가장 완벽한 신앙을 가진 자는 가장 훌륭한 성격을 가진 자이다." 아부 다우드 및 다리미 하디스 (이슬람)
마음의 해로운 독을 버리고 생명의 삶을 영위하며,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을 행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목적을 성취했으며, 존재의 속박들을 파괴했으며, 충만한 영지로써 자유를 얻은 비구는 아래의 아홉 가지 규준들을 범할 수 없다.
마음의 해로운 독이 사라진 비구는 의도적으로 어떤 생명을 죽일 수 없으며, 주어지지 않은 것을 의도적으로 훔칠 수 없으며, 음행을 저지를 수 없으며,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할 수 없으며, 속가에서 가장으로 지녔던 지식 등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즐거움을 향수할 수 없다.
마음의 해로운 독을 버린 비구는 애욕 때문에 배회할 수 없으며, 증오 때문에 배회할 수 없으며, 미혹 때문에 배회할 수 없으며, 두려움 때문에 배회할 수 없다.
앙굿타라 니카야 4.370 (불교)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고, 귀하에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이(그를) 귀하에 여긴다. 도덕경 56 (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이 여기서 출발하는 에 있어서 어떻게 가야 되느냐? 각자가 지향하는 양이 100이라 할 때, 거기에서 몸과 마음이 50대50이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 머물게 됩니다. 완충지대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만일 몸이 60이면 틀림없이 지옥에 갑니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 그늘 진 곳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빛나는 곳입니다. 그렇게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그늘 진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내려가면 갈수록 캄캄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항상 '나'라는 존재는 선악의 모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여러분과 같은 연령일 때 이런 내용으로 고심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세운 표어가 뭐냐 하면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1조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아를 완성하여 자아를 주관할 수 있게 될 때, 즉 내 몸을 제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주성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의 상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37.122, 1970.12.23)
사람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적 사람과 몸적 사람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도대체 뭐냐? 마음은 종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뭐냐? 횡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몸입니다. 이것이 본래부터 하나님의 이상적 기준에 서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종적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탱' 울릴 때 몸적인 모든 것, 횡적인 것은 다 느끼게 됩니다. 마음적, 종적 기준이 존재하는 영인체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땡' 울리면 횡적 기준이 되는 몽뚱이도 '땡' 하고 공명되게 돼 있습니다.…영인체에 참된 사랑이 '땡' 울리게 되면 몸뚱이가 공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무엇에 의해 공명이 되는 것인가? 참된 사랑의 울림에 공명되어 있습니다. (177.216, 1988.05.20)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하나 되면 하나님이 임재 한다는 것이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거기에 임재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 되는 원칙이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상대적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안식처라는 말과 통합니다. 그러면 쉬는 데는 무엇 가운데 쉬는 것입니까? 사랑 가운데 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라는 이상이 있다면 그러한 내심적 기준이 최고의 이상의 기준이 아니겠느냐. 그러한 마음의 사랑을 지닌 곳을 심정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솟는 샘터와 마찬가지여서 퍼내고 퍼내더라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기에 끝이 없는 논리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91.78, 1977.01.30)
하나님이 순금입니까, 가짜 금입니까? 순금입니다. 하나님이 순금이니 우리가 같이 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몸과 같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나님이 온전한 것같이 너희들도 완전하라" 는 말이 나옵니다. (91.321, 1977.03.01)
그렇다면 지상에서 가정천국은 어떻게 이루는 것입니까? 첫째, 가정을 형성하는 모든 요인들은 개인완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타락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상속받게 된 타락성을 벗과 자신의 인격완성을 보아야 합니다.
즉, 몸과 마음의 갈등과 싸움을 완전히 극복하고 승리하여 일심 일체 일념의 경지에서 완전 일화의 세계가 인격완성으로 열매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서는 시기, 질투, 욕심, 증오 등 모든 악의 요인이 되는 타락성이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443.175, 2004.03.23)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용하여 생활적인 감정과 대하고 있는 우주 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그런 인격자를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6.349, 1959.06.28)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랑의 실체인 개체를 주체적인 입장에 세워 놓지 않고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이요, 나라도 불가능한 것이요, 국가도 세계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완전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3.97-98, 1969.01.26)
2. 완전성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
종교 경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태복음 5.48 (기독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3.9 (기독교)
성은 천도이고 그 성을 이룩함이 인도이다. 성의 경지에서는 애쓰지 않고도 중정하게 되고, 생각하지 않고도 터득하고, 모든 행동이 자연히 도에 맞는다. 이러한 경지의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 중용 20장 18 (유교)
첨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아와 그 안에서 온전하게 되며,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부인하라. 너희가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너희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자비하심이 너희에게 충만할 것이요, 그 자비하심으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리라.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면 결코 하나님의 권세를 부인하지 못하리라.
몰몬경, 모르나이서 10.32-33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여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예례미야 17.7-8 (기독교)
지고한 스승은 만족과 관용의 나무이니,
정의가 그 꽃이며 교화는 그 열매로다.
이 나무는 신 안에서 기쁨에 겨워 영원히 시들지 않으며,
명상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도다.
주안에서 그것은 기꺼이 쓰여지나니,
자기 없는 행위로서
기고한 사랑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로다. 아디 그란트, 바르 마즈,M.1,p.147 (시크교)
지혜의 주는 부족함이 없는 지도를 통해
맹세한 벗인 그에게
온 마음으로, 또 행동으로,
완전불멸의 의 ․ 주권 ․ 선한 생각의
강력한 교제를 허락하시리라.
마음으로 아는 자에게,
통찰력 있는 자에게 이것이 명백하리니,
그는 말로 행동으로
선한 주권과 정의를 받드는 도다.
오, 지혜의 주여!
그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조력자입니다. 아베스타,야스나 31.21-22 (조로아스타교)
노담이 말했다. "나는 만물이 근원하는 경지에 놀고자 하오." "어떠한 뜻이냐?" 하고 공자가 물었다. 노담이 말했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지미하고 지락하다. 지미를 체득하고 지락의 경지에 노는 사람을 지인이라고 한다." 장자 21 (도교)
최고아는 생 ․ 로 ․ 병 ․ 사에 걸림이 없으며, 지고 청정하여 여덟 가지 물듦이 없느니라. 그는 무한한 지혜와 통찰과 지복과 권능을 지니며, 파괴될 수 없으며,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그는 사람의 감관이 닿을 바가 아니며, 일체의 걸림이나 장단점 또는 재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영원불변하며, 비길 데 없는 자존자로다.
쿤다쿤다, 니야마사라 176-77 (자이나교)
말씀 선집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8절)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신성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은 창조목적을 두고 보면,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서 천국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완전하게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러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그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신성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1.1)
인간이 참된 모습을 이루려면 모든 생사화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인간 개체 내에서는 참된 모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참은 반드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전체적으로 수습하고 주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을 갖게 될 때 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기반을 갖지 못하면 '참' 이라는 명사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참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떠나게 될 때 참도 떠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참이 아닌 악이 기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참은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 마음대로 관리하는 그런 자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참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참 앞에 굴복해야 됩니다. 참을 세우고 거기에 순응해야 됩니다. (24.315, 1969.09.14)
하나님을 생활 속에 직접 오관을 통해 느껴서 하나님의 실존을 알게 되어야 진짜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실존을 체휼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실존을 생활 속에서 직접 체휼하며 살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간순간 느끼고 알아서 매사에 임하게 되고,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실체를 쓰고 주인적 인격과 형체를 갖추어 유형세계인 지상세계와 만물 만상은 물론 영계까지도 주관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확실히 아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 생활 속에서 모시고 살고, 영계의 실존은 물론 실상까지도 믿고 알게 되면 인간 삶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쉽고 거리낌이 없어질 것입니다. 운전자가 고속도로의 법규를 지키며 운전대를 잡고 졸지만 않으면 무난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늘이 주신 양심의 지향을 따라서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몸과 마음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 완성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447.157-158, 2004.05.01)
참된 인간은 뭐냐? 하나님과 놀고, 하나님과 쉬고, 하나님과 자고, 하나님과 살고자 하는 인간이 최고의 참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느냐 하면 그러한 참된 인간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참된 것을 찾아 나가고 참된 세계를 찾아 나가는데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세계가 참된 사랑의 세계요, 참된 행복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이상경(理想境)이 현현하는 것입니다. (60.284, 1972.08.18)
3. 완전성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
종교 경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 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43-48 (기독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나를 닮으라; 내가 악에 대해 선으로 갚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닮으라." 출애굽기 랍바 26.2 (기독교)
사랑하는 이들이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시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7-8,16 (기독교)
친구와 적을 동등하게 보며, 존경과 멸시를 평등하게 여기며, 추위와 더위, 즐거움과 고통을 평등하게 보며, 이기적인 집착을 버리고 칭찬과 비난을 동등하게 여기며, 고요하고 항상 만족하며 어디서나 조화로우며 믿음에 확고한 신애자, 그와 같은 사람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바가바드기타 12.18-19 (힌두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양선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23 (기독교)
말씀 선집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이란 표준이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33.79, 1970.08.09)
예수님은 승리적 천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역사상에 없었던 사랑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딧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죄인들이 악을 대하여 충성하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의 근본입니다.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면 희락과 화평이 나오고, 인내를 통해서는 자비와 양선(良善)이 나오며, 충성의 생활을 하면 온유와 겸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기 위해서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인내, 천적인 충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들이 천국의 이념을 달성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이념인데 오늘날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까? 또 인내와 충성심이 있습니까? (2.345, 1957.08.04)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땅위에 좋은 사람도 좋아하고, 나쁜 사람도 좋아합니다. 죄를 지어서 사형장에 나가 죽게 되는 사형수도 '하나님!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하고 죽습니다. '요놈의 하나님! 나 죽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나쁜 짓을 해서 죽어가는 입장에 있는 사람도 좋은 마음으로 희생해서 재출발로 희망을 다짐하면서 하나님 앞에 최고로 기여하고, 그와 더불어 있고 싶어 하고, 내심으로는 부모를 떠나서 형제를 떠나서 누구보다도 간절히 가까이에서 사정을 통하고 싶어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참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참된 분은 좋아하는 양반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까지도 좋아해야 합니다. 그 앞에는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고, 모든 것을 의논하고 싶고, 모든 것을 바랄 수도 있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야 참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자라 나오는 과정에서 미운 사람이 있는 사람은 참된 사람인가요, 거짓된 사람인가요? 거짓된 사람입니다. 미운 사람이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거짓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참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양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좋아하자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가 세 번 이상 좋게 대해 주면 그가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못했는지 잘했는지 빤히 안다는 것입니다. (39.302-304, 1971.01.16)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 박혀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꼼짝달싹 못하고 달려서 사는 녀석이다. 내 몸뚱이를 내 맘대로 어떻게 하려야 할 수 없어. 내 몸뚱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 깊게 박혀 있으니 나는 내 맘대로 살려야 살 수 없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니 살려야 아니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밥을 먹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먹고, 살더라도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40.24-25, 1986.02.01)
인생의 가치
인간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비록 타락한 온갖 사회에서 인생은 값없이 여겨지고 인간의 가치는 부와 지위, 교육수준 또는 외모로 결정된다는 세속적인 편견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하나님은 각 개인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귀중한, 심지어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창조했다. 이 절에 포함된 경전 구절들은 인간의 고결한 가치를 묘하고 있다.
한 개인은 전체 세계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개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더욱이 각각의 개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가정, 그리고 국가와 온 피조세계 만물에 둘려 쌓여 안겨있다. 각 개체는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어떤 개체의 죽음은 모든 존재에게도 상실을 가져다준다.
이 때문에 살인, 자살, 낙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설 자리가 없다 더욱이 육신의 삶은 영적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므로(제5장 '영원을 위한 준비' 참조), 목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개인과 우주의 완성으로 향한 길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에 고착된 세계에서 자기 내면의 고귀한 잠재적 가치를 실현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 같은 잠재적 가치는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참된 가치는 샘의 원천을 찾아서 하나님과 세계 앞에 주목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의무이다.
1. 황금보다 귀중한 인간
종교 경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마태복음 16.26 (기독교)
악을 꾸미는 자들이 나를 뒤쫓고 노려보아도 이 곤경에서 나 어찌 두려워하리. 한갓 돈 많음을 자랑하며 재물을 믿는 그들이거늘,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고 죽을 목숨을 살려주시랴? 목숨 값은 엄청난 것, 그 값을 치르기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로다.
시편 49.5-8 (기독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좋다!' 하게 되면 옷 잘 입고 집 좋고 좋은 자동차 타고 남부럽지 않게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편안히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나쁜 습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31.171, 1984.05.01)
어떤 고통과 슬픔,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대우주의 이념권내에 있는 자신의 위치가 그만한 어려움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고통의 고개를 넘어갈 것입니다. 또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할 내가 아니요, 이만한 죽음의 고개와 바꿔버려야 하는 나의 생명이 아니라고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서 성공한 자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고개가 닥쳐와도 내가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나의 가치는 땅 위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는 자가 땅 위에 있어도 하늘의 사람입니다. 땅에서 죽더라도 그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9.166, 1960.05.08)
세상에서 지극히 귀한 것이 무엇이냐? 금은보화도 아니요, 세상의 명예나 권세도 아닙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할 것이냐 할 때 답변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갖추어야 할 바는 갖추지 못하고도 마음으로는 만천하 앞에 자신을 최고의 가치적 존재로 인정시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관념을 넘어서 가장 귀한 내 자신을 남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얼마만한 가치의 내용을 지닌 존재냐?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가 이 우주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보화가 되고, 진정한 보물이 되었다면, 그 보물은 하나님도 그리워 할 것이요, 왔다 가신 예수님도 그리워 할 것이요,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성도, 만 역사 가운데 제 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남긴 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그리워할 것입니다. 지난날 뿐 아니라 현세의 이 만민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 가치를 동경할 것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럴 수 있는 보화가 자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17.13-14, 1966.11.06)
2. 우주적 가치를 지닌 인간
종교 경전
주께서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주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편 8.3-5 (기독교)
하늘과 땅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한 자이다. 장아함경 (불교)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을 영광되게 하셨으며 땅과 바다에 그들을 옮겨 좋은 양식을 베프셨으며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프셨노라. 꾸란 17.70 (이스람)
이 세상은 오직 의인을 위해 창조되었다. 의로운 자 한 명이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세상은 그와 하나 되기 위한 목적을 창조되었다.
탈무드 샤바트 30b (유대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명문의 규정을 정했노라.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것이 살인이나 지상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징벌의 목적이 아닌 한, 모든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모든 인류를 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노라.
꾸란 5.32 (이슬람)
오직 한 사람(아담)만이 창조되었다. 이를 가르쳐 주기 위해 성서에서는 누군가 한 영혼을 파멸시켰으며 그것을 마치 그가 전 세계를 파멸시켰다는 것으로 여긴다. 또 누군가 한 영혼을 구하면 그가 전 세계를 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의 거푸집에서는 같은 동전이 나오지만, 거룩하신 그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창조된 인간은 그러하지 못하다. 왕 중의 왕이신 거룩하신 그분은 인간을 모두 아담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나, 아무도 그의 형상을 닮지 않았다. 그러기에 인간은 각각 "세상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 고 말하는 것이다. 미쉬나, 산헤드린 4.5 (유대교)
말씀 선집
하나의 생명은 우주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의 족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262.145, 1994.07.23)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야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작은 하나의 개체지만 전체의 역사를 대신한 존재요, 미래의 모든 인연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4.268, 1958.08.03)
하나님이 사람을 어떠한 존재로 지었느냐? 하나님의 절대 유일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자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몰랐습니다. 요즘 인간의 한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됩니까? 몇 푼이나 됩니까. 그런 무가치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선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 사랑의 상대권을 갖추어 남자를 지었고 여자를 지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142.143, 1986.03.08)
하나님의 참된 사랑, 하나님의 이상, 하나님의 행복, 하나님의 평화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 대상이 없어서는 하나님 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 사랑하자'고 해서 사랑해서 뭘 합니까? 하나님 혼자서 이상이 있으면 뭘 합니까? 하나님 혼자서 평화니 무슨 행복이 있으면 뭘 합니까?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나님도 역시 행복, 평화, 사랑,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르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 '나'라는 인간 자체가 없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치를 미처 몰랐습니다. 이와 같이 고귀하고도 이상적인 존엄한 가치, 하나님까지도 사랑에서 해방할 수 있고, 하나님까지도 이상에서 해방할 수 있고, 하나님까지도 행복과 평화에서 행방할 수 있는 이 존엄한 가치를 알아서 이제는 마음 깊이 머리를 숙이면서 스스로 찬양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77.314-315, 1975.04.30)
여러분이 결혼할 때 결혼 상대는 자기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낫기를 안바라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도 사랑의 상대는 자기보다 낫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가치가 최대의 가치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보다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최고의 것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만인에게 하나같이 가능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천상의 높고 귀한 자리에서 이 우주를 바라보고 관리하고 주도하게 되어 있지, 무엇을 바라보아서 목이 끌려 다니고 복종하게 돼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그렇습니다 해방된 마음입니다. 어느 누구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만민 평등입니다. 참사랑의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리, 하늘나라의 보좌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1.272-273, 190.12.30)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의 주체적인 이성성상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을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성체 밖에는 없는 것이다. (원리강론, 기독론 1)
위를 바라보다 아래를 바라보나 전후를 바라보나 좌우를 바라보나 모든 것이 나와 인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인연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가는 생애노정, 즉 일생 동안의 인연인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역사 이래 지금까지 인연되어야 할 인연의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깨어지는 날에는 나를 중심삼은 하늘의 인연이 깨어질 것이고, 땅의 인연이 깨어질 것이고, 세계 혹은 종족과 가정의 모든 인연의 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고 하늘과 땅을 대신한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늘을 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 몸은 땅덩이를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나는 천지의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주권자, 대표자의 심정에 의해 움직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인연을 가진 우리를 깊이 해부해 들어가면 무한한 가치 있는 존재요, 무한히 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8.10-11, 1959.10.25)
하나님의 왕권 앞에 설 수 있는 본연의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도 주려고 했던 그 가치를 내가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안팎으로 미화돼 있으면 천하가 다 야광석같이 비치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같이 비치는 것입니다. (354.25-26, 2001.09.16)
3. 살인, 자살, 그리고 낙태는 생명의 대역죄
종교 경전
진리가 아닌 다른 이유로 하나님께서 고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꾸란 17.33 (이슬람)
살인하지 못한다. 출애굽기 20.13 (기독교)
한 남자가 라바 앞에 찾아와 말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 저에게 살인을 명했습니다. 제가 거절하면 저를 죽일 것입니다." 라바가 그에게 말했다. 차라리 살인보다는 죽음 길을 택하십시오. 당신의 피가 그 사람(희생자)의 것보다 순수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 반대일 것입니다.
탈무드, 페사힘 25b (유대교)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학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신에게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생명은 모두에게 귀중하다. 이 이치를 자기에게 견주어 남을 죽이거자 죽게 하지 말라.
모든 생명은 행복을 바라는데, 폭력으로 이들을 해치는 자는 자신의 안락을 구할지라도 내생에서도 행복을 얻지 못한다.
모든 생명은 행복을 바란다. 폭력을 이들을 해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구하면 내생의 행복도 얻게 되리라.
법구경 129-32 (불교)
너희는 서로 살상하지 말라. 하나님은 너희에게 자비로우신 분이니라. 꾸란4.29 (이슬람)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창세기9장 5절). 바울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살도 여기에 포함된다. 창세기 랍바 34.13 (유대교)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을 위한 방편을 제공하거나, 또는 "이 악하고 고통스런 삶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에게 죽음은 삶보다 낫다"…는 말을 하며 죽음을 찬미하거나 다른 사람의 자살을 부추기는 비구는 승직을 상실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비나야 피타카 (불교)
가난을 두려워하여 너희 자녀들을 죽이지 마라. 하나님이 그들과 너희에게 베풀어줄 것이니라. 그들을 죽이는 것은 큰 죄이니라. 꾸란 17.31 (이슬람)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낙태를 획책하는 비구는 결코 고행자라고 할 수 없으며, 붓다의 승단을 따르는 자도 아니다. 비나야 마하박가 1.78.4 (불교)
말씀 선집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의 보호가 모든 윤리와 도덕성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168.239, 1987.09.21)
이것을 인권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북에서 김일성은 3백만을 학살했습니다. 모택동은 1억 5천만을 학살했습니다. 또, 소련 혁명 당시에는 7천만을 학살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에 나왔지만 월남에서 60만을 학살했다는 것을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인권이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권을 유린하는 공산당을 놓고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91.255, 1977.02.23)
하나님과 이 우주를 합하더라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없어서는 완성이 안 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몸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 욕심이 있다면 하나님이 욕심이 있는 그 앞에 무엇을 바라겠느냐? 이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한 "우주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하는 말도 그래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91.19, 1977.01.13)
나라는 존재는 부모가 필요로 하고, 미래의 남편이 필요로 하고 아내가 필요로 하고, 그 다음엔 형제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크다고 하지만 국민이 없으면 뭘 해요? 그래서 나라가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결국 뭣이 필요로 하느냐면, 영계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다름에 무엇이 필요로 하느냐?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변할 수 없고, 제일 귀한 부모가 나를 필요로 하고, 또 그런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고, 형제가 필요로 하고, 가정이 필요로 하고, 나라가 필요로 하고, 세계가 필요로 하고, 영계와 이 온 우주가 필요로 하고, 하나님까지도 나를 필요로 하는데, 내가 왜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 그리고 상대, 형제, 가정, 나라, 세계, 영계, 하나님…. '아, 나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될 때 전부에 대해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부모에 대한 범죄요, 미래의 부부에 대한 범죄요, 형제에 대한 범죄요, 가정과 나라에 대한 범죄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사랑의 법도를 어기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거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꿈에도 그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74.30, 1874.11.10)
자기가 지금 애기를 가졌다면, 그 애기가 어떠한 아들딸로 태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거 낙태시킬 수 있느냐 말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 성군이 되고, 미국을 살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자기 아들딸로서 자기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데,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제거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의 어머니가 오늘날처럼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면 선생님이 태어나겠습니까? 그러면 낙태가 죄냐, 죄가 아니냐 할 때, 죄라는 것입니다.
애기는 사랑과 생명과 혈통의 정수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게 사람이냐 동물이냐, 생각할 때….세포가 무슨 동물입니까? 세포가 사람이 아닙니까? 세포 가운데는 사랑이 들어가 있고, 생명이 들어가 있고, 핏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와 똑같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230.121, 1992.04.26)
어버니 아버지가 '아이고! 다리병신 애기 차버리자' 그게 사랑입니까? 그게 참사랑입니까? (117.292, 1982.04.11)
4. 인간 본연의 가치 구현
종교 경전
너희 중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고귀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니라.
꾸란49.13 (이슬람)
머리장식이나 가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과 정의를 가진 자, 그는 청정하다. 그를 또한 바라문이라 한다.
법구경 393 (불교)
그의 행위가 그를 낮춘다면, 그의 가문은 번성할 수 없도다.
나흐줄 발라가, 어록21 (이스람)
사성계급으로 브라흐민, 카트리, 수드라, 바이샤가 있으며, 인생에는 네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주를 명상하는 자는 누구나 높은 자라 이르니라.
아디 그란트, 가운드, M.4,p.861 (시크교)
명상에 전념하는 지혜로운 자, 세속에서 떠난 평안을 즐기는 자, 그와 같이 사려 깊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를 신들도 부러원한다. 법구경 181 (불교)
말씀 선집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의 가치를 규명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99.63, 1978.07.23)
하나님도 "너를 놓고는 못 살겠다."고 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자. (뜻길,p.189)
인간의 귀중한 가치를 만점으로 만드는 것은 참사랑과 일체가 될 때 가능합니다. 심신일체는 양심과 육신이 공명권에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굽쇠의 주파수가 같을 때, 하나를 땡 치면 그 반대의 소리굽쇠가 울립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참사랑으로 양심을 치면 육신이 울리는 것입니다. 참사랑으로 육신을 땡 치면 양심이 공명권을 만들게 됩니다. 거기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그 한 가운데 들어가면 가르쳐야 될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223.356-357, 1991.11.20)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몸은 마음이 가는 길을 반대하지 않고 따라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몸이 마음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류도 하나님의 참사랑에 이르지 못하고 실질적인 인간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399.153, 2002.12.22)
타락한 인간의 최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본래의 창조목적으로 주신 자아와 자주성, 존엄성 및 가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뜻길, p.202)
하나님의 성전
인간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사랑, 창조성, 영원의 갈구 등 신성한 품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성령을 붙어넣었다.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자신의 거처를 짓고자 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과 공명하여, 마치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보고 듣고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함께 움직임으로써 인간은 신성을 지니게 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신성하게 할 수 있다.
힌두교나 여타의 동양 종교들에서 이러한 궁극적 실재의 참된 자아 또는 아트만이란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된 자아를 모르고 살아가며, 전적으로 이기적인 동기로 삶을 영위한다. 문선명 선생의 의하면 우리는 인간 타락의 비극 때문에 더럽혀진 성전과 같다. 하나님의 영은 타락한 인간 속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원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유형적 몸이 되어 이 세계를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인격 속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과 복귀를 위한 인간의 노력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성전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
종교 경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고린도 전서 3.16 (기독교)
너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가슴속에 거룩하신 분게서 거주하고 계시는 것으로 자의식을 갖도록 해 주어라 탈무드, 타아니트 11b (유대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기독교)
하늘과 땅은 나를 담고 있지 않지만, 내 신실한 종의 심정은 나를 담고 있다.
수흐라와르디 하디스 (이슬람)
하나님께서 세상을 채우듯이 영이 육체를 채우니라. 하나님께서 볼 수 있으나 당신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은 볼 수 있으나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양식을 제공하듯이 영은 육체에 양식을 공급한다. 하나님께서 순수하신 것처럼 영 또한 순수하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지성소에 거주하듯이 영은 육체의 가장 깊은 곳에 머문다.
탈무드, 베라코트 10a (유대교)
내가 그를 사랑할 때, 나는 그가 듣는 청각이 되고, 그가 보는 시각이 되고, 그가 두드리는 손이 되고, 그가 걷는 다리가 되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8 (이슬람)
내가 인간에게 내 영혼을 불어넣었도다. 꾸란 15.29 (이슬람)
주 하나님이 땅의 흙을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7 (기독교)
가장 작은 것보다 작으며, 가장 큰 것보다 큰 자아[最高我]는 영원히 만유의 가슴속에 있다. 의식과 감각들이 청정해지고 갈애에 끌려 다니지 않을 때 자아의 영광을 보며 모든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리라.
그는 앉아서도 아니 가는 곳이 없으며, 누워서도 못 이를 곳이 없나니, 마음이 청정한 이만이 장려한 그의 광채를 보리라. 환희 가운데서도 또한 이를 넘어 서 있는 그를.
그는 형색에 머물면서 형색을 여의었고, 살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을 가운데 있으면서 움직이는 법이 없나니, 우주에 편안하며 지고한 이가 바로 자아라. 그를 진실로 아는 현자는 모든 슬픔을 벗어나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 1.2.20-22 (힌두교)
빛나지만 비밀스런 곳에 숨겨진 큰 자아[최고아]는 만유의 가슴속에 산다. 움직이고 숨쉬며 눈을 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있다. 그는 사랑의 근원이니, 사량 분별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다만 사랑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전 존재가 도달해야 할 구극의 경계이니, 이를 얻어라!
빛나는 그는 가슴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주의 크고 작은 일체만물이 그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생명의 원천이며, 이 세간의 덧없음을 초월한 진리이다. 그는 전 존재가 도달해야 할 구극의 지경이니, 이를 얻어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2.2.1-2 (힌두교)
부자들은 시바신께 사원을 지어 바치나니
가난한 사람, 나는 무엇을 할까?
오, 나의 주시여!
나의 두 다리는 기둥,
몸뚱아리는 성전,
나의 머리는 황금의 첨탑입니다.
서 있는 사원은 쓰러지리니
움직이는 나는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바사반나, 바차나 820 (힌두교)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예지 곧 진리의 빛은 창조되거나 지음을 받지 아니 하였나니, 참으로 그러할 수 없느니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이를 놓아두신 범위 안에서 독립되어 있어 홀로 작용하나니 모든 예지도 그러하도다. 그렇지 아니하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느니라.
보라, 사람의 자유의지가 있나니, 이것이 인간의 정죄를 받는 소이니라. 이는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이 명백히 드러났으나 저들이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정죄를 받나니, 사람은 영이 까닭이니라. 원소는 영원하니라. 영과 원소는 떨아 질 수 없게 결합되어 있어 충만한 기쁨을 누리느니라.
서로 분리될 때 사람은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느니라. 원소는 하나님의 장막이니라. 참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장막 곧 성전인니, 어떠한 성전이든지 더러우면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파멸시키느니라. 교리와 성약93.29-35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말씀 선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마음과 같고 아담 해와는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몸뚱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본래 영계에 가게 되면 사람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되게 됩니다. 영계에 가게 되면 체를 가지 부모의 자리에 선 그분이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몸과 같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과 같은 입장에 있는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큰 하나님이 나를 중심삼은 조그만 마음의 하나님으로서 마음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작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07.127-173, 1980.04.27)
아내는 남편이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면, 하나님이 마음의 근원에서 대답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362.190, 2001.12.12)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얼굴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주인이 없으면 모든 외적인 물건들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아담 해와가 아무리 못났어도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다른 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분들의 얼굴은 순수한 하나님의 기쁨을 표상할 수 있는 얼굴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눈으로 보는 것도 자기들의 눈을 통해 보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봤을 것이고, 그들이 듣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타낼 수 잇는 표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95.247, 1977.12.04)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그 날부터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을 완성한 사람. 하나님과 일치되는 심정과 심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3.298-299, 1958.01.26)
예수님의 마음과 몸은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마음이었느냐 하면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자기의 몸이 아니라 아버지의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천리 법도요, 만 인간이 지니고 싶은 소망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는 그 말씀을 통한 실체적인 하늘의 성전으로서 또는 실체적인 하나님의 보좌를 대신한 존재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3.264, 1958.01.120)
개성을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몸과 마음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이 거하는 하나의 전(殿)으로서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게 되므로, 결국 그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고 말씀하셨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1.1)
밥 먹는 것은 누구를 위해 먹습니까? 잠자는 것은 누구를 위해 잡니까? 여러분이 베개를 베고 누울 때, '아! 하나님하고 같이 잔다' 이런 생각 해 봤습니까? '가슴을 휘어잡아 기분이 좋다. 하나님이 주무신다!" 이렇게 해봤습니까? 그리고 또 썩 일어나게 되면 내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일어났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92.153, 1977.04.01)
사람 가운데 세계가 다 들어가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들어가 낮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놓고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유스럽습니까. 아무리 발로 차도 거리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데도 걸리는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더욱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모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25.101-102, 1983.03.13)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보기 바랍니다. 체(體)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무형의 하나님은 체가 없습니다. 체를 입지 않고는, 체를 갖지 않고는 영계나 지상세계를 치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부모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체를 입어야 할 텐데, 그 체를 입는 대표가 누구냐 하면 아담 해와라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인류의 시조인 동시에 천지를 주재하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실체를 가진 하나님, 즉 영원한 무형세계의 하나님의 형상을 대신 입고 나타난 자리, 부모의 자리에서 세계를 통치할 책임이 아담 해와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133.91-92, 1984.07.10)
하나님은 무형이십니다. 영계에 가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왜 그렇게 사랑을 중심삼고 만들었느냐 하면 이 피조세계는 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체를 가진 아버지가 됨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무형과 유형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가 하나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를 입기 위해서는 아담 해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체를 입는 데는 무엇이 결정하느냐? 사랑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런 체를 갖출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담의 모습과 해와의 모습이 하늘나라의 왕궁에, 왕좌에 오르게 되어 그 왕과 왕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지상세계와 무형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왕국이 어떤 왕국입니까? 사랑의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함고만이 영과 육이 합하게 되어 있지, 다른 것 가지고 합할 수 없습니다.
(143.93, 1986.03.16)
하나님의 완전한 즐거움을 위하여
피조물로서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특히 유일신 종교들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섬기고 사랑하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섬김과 복종만으로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전인류에게 사랑과 자비를 널리 펼침으로써 그의 형상과 모습을 닮은 자녀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몇몇 경전에서도 하나님은 그런 기쁨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권이다. 문선명 선생은 창조성을 지닌 대상으로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설명하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으로 만물과 어우러질 때, 하나님은 자신의 분신으로서 사랑의 본성을 닮은 수 많은 자녀들을 보고 기쁨을 누린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인유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사랑이 충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주관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계신다. (제6장 '하나님의 슬픔' 참조)
1.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종교경전
내가 정령과 인간을 창조함은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들이 나에게 주어야 하는 어떠한 영양물도 나는 필요치 않으니라. 권능과 만고불변의 주, 하나님이 모든 영양분을 주시니라.
꾸란 51.56-58(이슬람)
하나님께서 당신의 세상을 지으시되 오로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내가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미슈냐, 아보스 6.11(유대교)
우리에게는 아버지 되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며, 만물은 그에게서 생겼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8.6 (기독교)
하나님의 기쁨은 가장 위대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승리이니라.
꾸란 9.72 (이슬람)
하나님 두려워하고 그 분의 기쁨을 위해 건물을 짓는 가장 좋은가, 아니면 부서지는 제방의 끝자락에서 자기 자신과 함께 지옥의 불길 속으로 굴러 떨어진 건물을 짓는 가장 좋은가? 하나님께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인도하지 않으시니라.
꾸란 9.109 (이슬람)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30.16 (기독교)
인위적인 끼를 계발하려 하지말고 자연의 하늘을 계발하라. 자연의 하늘을 계발하면 삶의 덕이 되고, 인위적인 꾀를 계발하면 삶을 해친다.
장자 19 (도교)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 능력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이 너의 원이라면, 나 아닌 어느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보아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네가 나의 왕국이 지속되는 동안 나의 동기를 신중히 생각할지라도 너는 결코 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127 (바하이교)
말씀 선집
원래 인간은 부모인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고 생기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52.36 1971.12.12)
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해야 되느냐? 개인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가정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단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국가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세계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하늘과 땅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합한 목적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41.323, 1971.02.18)
우리는 무엇을 중심삼고 태어났으며,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될 것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가야 될 것이냐? 여기에 하나님을 빼놓고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고는 동기 없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거두어질 수 없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건물을 지을 때 설계자가 설계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을 하게 됩니다. 설계의 원본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은 설계자가 목적한 건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100 1968.11.17)
선생님의 생활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과 이 세계를 위해 산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류를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참부모와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부모와 인류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얼마나 하늘이 바라는 생활과 일치되었느냐 하는 것을 늘 비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147.115 1986.08.31)
2. 인간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종교 경전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세기 1.31 (기독교)
나는 숨겨진 보물이니, 나를 알리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하였도다. 하디스 (이슬람)
오, 만유의 주, 만세!
모든 행위의 원천이며 만율 향유하는 이, 그대는 만유의 혼, 만유의 생명이라! 모든 지략과 환희의 주이시여!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5.1 (힌두교)
행복은 진리와 사라으로부터 생겨나느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인간이 그것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한다.
과학과 건강, 57 (크리스천 사인언스)
씩씩한 젊은이가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으신다.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너의 하나님께 너를 반기신다. 이사야 62.5 (기독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맑아져서
즐거움이 넘치게 살아가게 되면
얼일도 확실히 마음 용솟음치면
인간들도 모두 다 같은 것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용솟음치면
월일도 인간도 다 같은 거야
친필 7.109-111 (천리교)
사람이 무엇인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나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아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편 8.4-4 (기독교)
브라흐만의 창조행위는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희에 의한 것이다.
베단타 수트라 2.1.32-33 (힌두교)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리고 천지간의 만물을 창조한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도다. 하나님이 소 일거리를 찾고자 했다면 그분 스스로 그것을 찾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리 아니하고 위선을 행해 진리를 던지니, 진리가 펼쳐지고 위선은 소멸되리니...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함이니, 그분 가까이 거주하는 자들은 그분을 경배함에 거만하지 않고 피로해하지도 않으리라. 꾸란 21.16 (이슬람)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구애받지 않는 주관가 의지를 직접 작용시켜 인간에게 당신을 알고 사랑할 유일한 특성과 능력을 베풀 것을 결정하셨다. 그 능력은 전 피조물에게 기초가 되는 창조 충동과 기본 목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능력이라.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27 (바하이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서 기쁨을 누리시려고 우리를 찾으셨다.
(뜻길, P196)
하나님이 아무리 절대자락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좋다'는 말, 행복하다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갖춘 자리에서라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평새을 성악가로 살아온 사람이라도 무인도에 버려져 혼자서 목이 터지라고 노래를 부른다고해서 행복하겠습니까?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도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5 2005.09.12)
하나님은 참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필연이었습니다. 참사람의 창조이상은 혼자 이루는 이상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의 높고 선한 뜻을 인간과 더불어 기뻐하시기 위한 이상입니다. 참사랑의 하나님을 바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죄짓고 싸우는 불행한 이 세계는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었음이 자명해집니다. (400.81, 2002.12.27)
가정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행복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인류를 찾아 나오는 목적도 신 자신의 행복을 모색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신 자신이 행복의 터전을 찾아 나오는데 인간을 떠난 지리에서는 그러한 이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일치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정서적인 모든 내용을 갖춘 자리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역시 그러한 자리에서 행복을 느끼겠다는 것입니다. (32.179, 1970.07.15)
하나님에게 '당신이 이 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서 뭘 할 것이오? 뭘 하려고 그런 세계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아, 하나의 세계가 되면 기쁘니 좋지' 하실 것입니다. 왜 좋으냐? 좋아서 뭘 하느냐? 좋은 것은 기쁘기 위해서인데, 기뻐서 뭘 하느냐? 좋은 것은 기쁘기 위해서인데, 기뻐서 뭘 하느냐?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슬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식이 없어서 슬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권력이 없어서 슬퍼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 있나니 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서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을 하나 만들 수 있는 사랑만 갖는다면 하나님은 기쁜 하나님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 행복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을 통학 만물까지도 흡수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가진 것이 제일 귀하다는 것입니다. (11.315-316, 1981.05.10)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고 또한 심혈과 당신의 생명의 핵심을 다 기울여 지으셨으며, 사랑과 애정을 몽땅 퍼부어서 지으셨습니다. 어떠한 힘 가지고도 떼려야 뗄 수 없고, 갈리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으신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정과 행복은 그 인간을 통해서만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20.207, 1968.06.09)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오늘날 기성교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인데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을 수 있느냐? 다른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언제나 홀로 절대적인 자리, 상대가 없는 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상 불행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나라의 대통령의 권한을 가졌을지라도, 어머니가 죽어 혼자 살고 있는데 '혼자 사니 얼마나 행복하십까?' 하는 아들이 있다면 '이놈의 자식아, 무엇이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아버지가 세계적인 대통령이라고 해서 '아버지, 행복하지요?' 하면 '오냐, 오냐, 행복하다' 그러게 되어 있습니까? 효자라면 혼자 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내가 어머니 한 분 모셔다 드릴까요?' 이래야 효자입니다. (57.247, 1972.06.04)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완성하고, 3대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드리는 데 있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3.1)
하나님의 자녀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같은 통찰은 세계의 다른 신앙전승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간주된다. 그러한 부모-자녀 관계가 얼마나 진정한 관계일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절에 담긴 구절들의 주제이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느끼는 심정의 깊이와 힘이 우리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로부터 느끼는 애정과 의리보다 더 강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깨닫고, 그래서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거운 짐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고 또한 나누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의미 심장할 것인가?
1. 하나님의 자녀로서 타고난 사람
종교 경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을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14-17, (기독교)
너희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다. 신명기 14.1 (기독교)
아나스와 압둘라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전하기를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자식이며,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이는 그분의 자녀를 다정하게 대하는 이들이다."
바이하키 하다스 (이슬람)
우리는 우리를 만든이의 자녀들,
그가 우리를 죽이리라 두려워 말라.
우리는 신의 자녀들,
그가 우리를 죽이리라 두려워 말라. 딩카족의 기도 (아프리카 전통종교)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3.1 (기독교)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느 것을 허락하고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8.16-17, (기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진짜 사랑하실 자리가 어니냐 하면 인간이 요구하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정과 천정이 결합되는 자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관계의 인연을 맺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단시간 내에 이런 말을 듣고 있지만, 여기 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우주의 궁극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자지고 누구보다도 심각한 입장에서 오랫동안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들어가서 얻은 답은 뭐냐?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라는 결론입니다.
부자의 관계라 해서, 오늘날 우리를 낳아 주고 같이 사는 어머니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절대적인 하나님과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우리 인간의 관계인 것입니다. 인류가 도달하여야 할 본연의 가치의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엄청난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53.286, 1972.03.04)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부자의 관계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 같으면 '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 나하고…'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와 어머니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이 무엇이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어디냐? 사랑이 교차되는 중심, 생명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 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초의 인연과 최초의 통일의 장소가 부자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69.78-79, 1973.10.20)
하나님은 우리 인간,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참된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누가 시작했느냐? 아담 해와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아들딸같이 사랑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사랑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모르고 태어나서 자기만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은 포위해서 품어 주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하나님을 보고 웃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자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이 커 가는 것입니다. (149.312, 1986.12.21)
부자의 관계가 갖고 있는 특성은 무엇입니까? 사랑과 생명과 혈통의 관계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는 우리의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인간은 절대적인 참사랑의 상대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축이 세워지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만인 그보다도 더 높고 귀한 자리가 있다면 인간의 욕망은 또 그 자리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최고의 자리는 당신을 위해 숨겨놓고 당신의 자식이요 사랑의 상대자 되는 아담 해와에게는 두 번째 좋은 자리에 세워 창조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부모 되시는 하나님은 백 퍼센트 당신 전체를 투입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위권, 동참권, 동거권, 상속권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4-15, 2005.09.1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의 아버지이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보다 잘 생겼구만' 하면 하나님이 기분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나쁘다면 하나님은 인간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나님도 좋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40.343, 1971.02.11)
우주의 진리, 천리의 대도의 원칙은 뭐냐 하면 부자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 부자의 관계는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하나님의 이상적 사랑으로 완전히 꽃피워서 그 사랑의 향취가 온 천지에 진동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해져서 아버지와 아들딸의 자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101.35, 1978.10.28)
2. 하나님 자녀의 존엄성 회복
종교 경전
하나님은 반석이시니그 하시는 일이 완전하시고 가시는 길은 올바르시다. 거짓이 없고 미쁘신 신이시라. 다만 올바르고 곧기만 하시다. 흠 없이 낳으신 자식들이 잘못되어 비뚤어직 비꼬인 세대가 되었구나. 너희가 어찌 여호와께 이럴 수 있느냐? 이 어리석은 것들아, 미련한 것들아. 그가 너희를 있게 하신 너희 아버지가 아니시냐? 신명기 32.4-6 (기독교)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랒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이사야 1.2 (기독교)
저희는 다 부처님의 아들 같사오니,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저희를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세 가지의 괴로움으로 인해 나고 죽은 가운데 여러 가지 고토을 받으며, 미혹하고 무지하며 하찮은 것에 집착하여 기뻐하였나이다. 오늘날 세존께서 저희로 하여금 하찮은 것을에 대한 온갖 논의의 때를 깊이 생각하고 버리도록 하셨으나, 저희는 그 속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얻은 열반이란 것이 겨우 하루 품삯만한데, 마음이 크게 환희하고 만족스러워했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저희는 저희가 실로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지 못하고 있나이다.
법화경 4 (불교)
말씀 선집
본연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였습니다. 타락은 그것의 단절을 의미하며, 복귀는 부모와 자녀의 인연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316.236, 2000.02.13)
하나님은 믿음의 왕이시므로 믿음의 왕자를 찾으실 것이요, 하나님은 사랑의 왕이시므로 사랑의 왕자를 찾으실 것이다. (뜻길,p.197)
우리는 효자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정세를 앞에 놓고 심각하면 그 심각한 이상 밤을 새워 가면서, 혹은 자기 일신을 망각해 가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체휼적인 경지에서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느냐? 문제는 여기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62.35, 1972.09.10)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녀를 품고 싶었으며, 얼마나 그걸 기다려 왔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의 센터가 되면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천주의 센터가 되면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효자가 되면 온 가정이 따르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따르고, 온 세계와 천주, 하나님까지 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넘버 원 아들과 딸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황족권을 이루어야 됩니다. (293.208, 1998.05.26)
슬픔의 고개를 넘고 고통의 고개를 넘고, 분한 심정의 고개를 넘어야만 그날의 복이 결정되는 천륜의 원칙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만물을 붙들고 눈물 흘리며, 아버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요, 아버님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아버님의 고난이 내 고난이오니 '그 모든 고통을 제게 맡기시옵고, 아버님은 행복한 자리에 서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4.294 1958.09.14)
하나님의 형상
어떻게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가? 이 절과 다음 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 주제에 관해 설명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그릇이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은 닮아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 진리, 정의, 사랑 등의 이상을 말한다. 성자나 자아를 완성한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천국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적 인간의 변화, 즉 문선명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인격혁명'을 필요로 한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몇 가지 방식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전지, 전능, 절대,영원 등 하나님의 속성을 검토하고, 인간이 이와 동일한 품성을 지니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와 같은 품성들은 지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본성적 권리이다.
또한 경전들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 안에 거한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과 완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인간은 한결같이 완전히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으로 훼손되지 않았다면, 결혼으로 하나 된 남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한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인간은 하나님을 어떻게 닮았는가
종교 경전
사람의 아들아! 잊히도록 오래된 내 존재와 내 본질의 옛 영원 속에 감싸인 채, 나는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알았노라. 그래서 내가 너를 창조하여, 네 위에 나의 모습을 새기고 너에게 나의 아름다움을 계시하였노라.
바하울라의 숨겨진 말씀, 아라비아어 3 (바하이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과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26 (기독교)
랍비 아키바는 말했다: 인간은 사랑받는 존재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 9장 6절에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가르쳐 주시듯 각별한 사랑으로 인간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셨다 미슈나, 아보스 3.18 (유대교)
하나님의 인간 창조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진실된 종교을 위한 너희의 얼굴을 확고히 하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은 변하지 않으니 바로 그것이 바른 종교이니라. 꾸란 30.30 (이슬람)
너희 스스로 하나님의 성격에 일치하도록 하라. 아부 누아임 하디스 (이슬람)
밝은 빛이 땅 위에 나오는 것이 진괘(震卦)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힌다. 역경 35 (유교)
만일 사람들이 하늘과 같으면 땅으로붙 받은 그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면 그것이 바로 신이다. 세이와 천황에게 내린 계시 (신도)
하나님은 자리롭고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불리므로 너희도 자리롭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라. 모든 이들에게 무료로 선물을 주어라. 하나님께서 의롭고 사랑이 많은 분이시기에 너희도 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자라 되어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6.8.7 (힌두교)
무지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과 붓다의 마음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음 본질의 영역에서 그 둘은 모두 한 맛이다. 밀라레파 (불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기 19.1-2 (기독교)
아버지, 전능하신 힘이여!
모든 것 안에 있는 그 힘이여!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를 채우소서.
우리가 당신처럼 될 때까지,
우리가 당신처럼 될 때까지. 수수족의 기도 (아프리카 전통종교)
"바세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브라흐마가 아내들과 재물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고타마여!"
"그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악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고타마여!"
"그의 마음이 더러움으로 물들어 있는가, 아니면 무구청정한가?" "그것은 무구청정입니다, 고타마여!" "그는 스스로 통여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그는 스스로 통어합니다. 고타마여!"
"자, 그러면 바세타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司祭]들이 재물과 아내들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지니고 있습니다, 고타마여!"
"그들이 마음속에 노여움을 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품고 있습니다, 고타마여!"
"그들이 악의를 지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지니고 있습니다. 고타마여!" "그들의 가슴에 청정함이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고타마여!"
"그드리 스스로 통어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고타마여!"
"그러면 재물가 아내들을 지니는 브라흐민들과 이들을 지니지 않는 브라흐마 사이에 일치나 유사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타마여!"
"그렇다면 베다에 능통하고 또한 아내와 재물을 지니는 브라흐만들이 육신을 벗고 죽은 후 아내와 재물을 지니지 않는 브라흐마와 하나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로다!"...
"자, 바세타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법을 따라 사는 비구가 여인가 재물을 지닐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는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고타마여!"
"그는 분노로 가득할 것인아, 아니면 분노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그는 자유로울 것입니다, 고타마여!"
"그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할 것인가, 아니면 악의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악의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고터마여!"
"그의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 것인가, 아니면 청정할 것인가?" "청정할 것입니다, 고타마여!"
"그는 스스로 통어할 것인가, 아니면 못할 것인가?" "진실로 통어할 것입니다, 고타마여!"
"자,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비구는 가정과 모든 세간의 염려에서 벗어나 있고, 노여움이나 악의를 지니지 않으며, 청정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통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브라흐마도 또한 가정이나 모든 세간의 염려에서 벗어나 있고, 노여움이나 악의를 지니지 않으며, 청정한 마음으로 스스로 통어한다. 그렇다면 비구와 브라흐만 사이에 일치와 유사점이 있는가?" "있습니다, 고타마여!"
"그렇다면 진실로 세간의 모든 근심에서 자유로운 비구가 육신을 벗고 죽은 후에 그와 한 가지인 브라흐마와 하나 되는 것고 같은 일은 모든 점에서 가능한 일이로다!"
디가 니카야 13.31-34, 테빗자 숫타 (불교)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물질이 아니다. 그는 두뇌, 혈액, 뼈, 그리고 다른 물질의 요소로 조립 된 존재가 아니다. 성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물질은 모양이 아니다. 영의 모양은 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영적이고 온전하다. 그리고 영적이며 온전하기 때문에,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인간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관념이고, 형상이며, 인간은 육체적 구조가 아니다. 과학과 건강,475 (크리스천 사이언스)
말씀 선집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겠느냐? 하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겠지' 라고 대답합니다. 그건 우리에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냐, 어떤 분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에게 제일 좋은 대답이 있다면,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최고의 답이 있다면, 나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거창한 답이 있다면 우리나라와 같은 분이다. 우리 세계와 같은 분이다. 우리 형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형님도 멉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할 때 나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127.233, 1983.05.15)
하나님도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피조만물을 지었는데 그 피조만물은 자신의 형상을 그래로 본 떠서 전개시켜 지었고, 그 중에서 자신의 인격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창조적인 입장에 세워 놓기 위해 지은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소성을 지녀야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정을 체득하고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서로 동화되고 하나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서로 기뻐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끔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절대자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 절대자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지었다는 것입니다. (39.9, 1971.01.09)
사람은 자기를 닮은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누구를 닮았느냐? 앞으로 이상세계는 누구를 닮아야 되느냐? 하나님을 닮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지었겠어요? 창세기 1장 27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을 누구를 닮게 만들었다고요? 하나님을 닮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자신을 닮는 것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을 닮아난 그것을 보시면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26.167, 1969.10.25)
닮은 데는 어디서부터 닮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도를 중심삼고 영원한 사랑, 전지전능, 무소부재한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신데, 어디서부터 우리가 닮아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면 우리도 영원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면 우리도 무소부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어디든지 가서 살고 싶지요?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무엇을 닮아야 제일 좋아하실 것이냐? 닮는데 최고의 뿌리가 무엇이고 조상이 무엇이냐? 무소부재보다 좋고 전지전능보다 좋고 유일무이한 것보다 좋은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러한 것을 다 주고라도 한 가지, 한 가정이 될 수 ㅇㅆ는 근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닮게 한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 닮는 날에는 무엇이든 다 잃어버려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 가는 대로 그것은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서푼어치밖에 안 될 정도로 못생겼더라도 사랑만 있으면 말 같은 총각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26.167, 1969.10.25)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참사람이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참된 사람이 넘쳐 사는 세계를 이루려면 인간혁명이 아닌 인격혁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격을 닮는 것이 인격혁명입니다. 신격과 대등할 수 있는 기준까지 합치되게 하는 것이 인격혁명입니다. 하나님은 지식도, 돈도,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149.271, 1986.11.27)
하나님은 가장 공적인 분이요, 사탄은 철두철미 자기 중심한 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복귀의 공식은 결국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철두철미 사적인 것을 희생하고 공적인 것을 세우며, 자기 중심한 이기주의에서 남을 위하는 이타주의로 돌아가 봉사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니 반드시 흥하고 사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 결국 망하는 것이 천리입니다. (88.209, 1976.09.18)
2. 가정에서 온전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종교 경전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고,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창세기 1.27 (기독교)
나는 그요, 그대는 그녀이다.
나는 가락이요, 그대는 가사이다.
나는 하늘이요, 그대는 땅이다.
우리 둘이 여기 함께 살며 자손들의 부모가 되리라. 아타르바 베다 14.2.71 (힌두교)
사랑의 복음… 더 이상 결혼한 두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존재 내에 있는 두 개체적 본성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일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합쳐진 영적 개체성은 하나의 유형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하나님을 반영한다. 이 신성하게 통일된 영적 의식에서 영원한 천국의 기쁨-신의 창조의 완전성- 으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물은 없다.
과학과 건강, 576 (크리스천 사이언스)
말씀 선집
아담 해와는 무엇이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들어갈 수 있는 집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있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신 말씀을 보니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무엇이 거하는 성전입니까? 하나님의 무엇이 거하는 성전이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가지고 사랑할 것이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몸을 가지고 아담 해와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비밀입니다. 이것을 몰랐습니다. 아담 해와를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 해와를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전입니다. (161.44, 1987.01.01)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갈라놓은 것이 사람인데, 사람은 성상과 형상으로 남자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때가 되면 이들이 어머니 아버지, 즉 천지부모가 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그 뼈에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341.239, 2001.01.02)
1남과 1녀는 무형이신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나타난 아들딸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을 여자는 하나님이 마이너스(-) 성품을 대신할 실체대상입니다. 창조이념은 양성(兩性)의 중화체(中和體)로 계신 하나님의 성상(性相)을 이성(二性)으로 분립했다가 다시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을 닮은 모습으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각 하나님의 일성(一性)을 닮아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들 1남 1녀의 결합은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과 마이너스(-) 성품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닮은 중화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두 사람, 즉 부부는 하나님의 전체를 표상하는 결합체입니다. (9.83, 1960.04.16)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대상의 자리에선 우리 인간이 상대적이긴 하나, 대상적이긴 하나, 대상적인 자리에서 변하는 것을 원하느냐? 원치 않습니다. 절대적이요, 유일적이요, 불변적이요, 영원적인 대상의 가치를 지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 속세에 속한 우리 인간 세계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홀로 단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사람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도 사랑하는 대상의 절대, 유일, 불변, 영원을 요구하는데, 우주의 중심 되시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의 대상이 변하기를 바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대상의 존재가 한계적이길 바라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적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존재가 불변이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77.185, 1975.04.06)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이냐? 아담과 해와를 지어놓고 그냥 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늙어 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장성하여 서로 이성에 대한 상대적인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인류의 참된 지상천국을 건설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남성인 아담은 하늘을 대표하고 여성인 해와는 땅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둘이지만 그들이 횡적으로 하나 되면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두 사람이 통하고 나면 천주는 자동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21.44, 1968.09.01)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났지요?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체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대상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그러한 주체와 대상의 중화적 주체로서 아담과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런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 전지전능한 사랑의 힘에는 무엇이든지 허락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창조의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능력을 부여받아 우리도 사람을 창조할 수 있는 자리가 아들딸을 낳는 자리인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지었다는 자리에 우리도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57.111, 197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