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난영의 딸 ‘김시스터즈’ 김숙자 “어머니 이난영은 앞서간 프로듀서 원조 K팝 스타 김시스터즈 키웠다” ▲ ‘가수 이난영 탄생 100년’에서 김시스터즈의 리더 김숙자씨가 부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photo 최성환 목포대 교수 지난 5월 31일 오후 7시 바닷가에 자리한 전남 목포문화예술회관 공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공연장 2층까지 객석을 채웠다. 목포가 낳은 가수 이난영(李蘭影)은 1935년 이래 ‘민족의 노래’로 승화한 ‘목포의 눈물’을 불렀었다. 이날 공연장은 그의 딸들로 구성되었던 ‘김시스터즈’의 리더 김숙자씨의 토크콘서트장. ‘목포의눈물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가수 이난영 탄생 100년’ 행사 중 하나였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살고 있는 김숙자(76)씨는 “노래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 마치 지금도 어머니가 살아계신 듯하다”며 먼저 아버지(김해송·1911~1950?)에 대해서 말문을 열었다.
“아주 무서웠어요. 여섯 살 때 클래식 곡에다 가사를 붙여 아주 빠른 노래를 형제자매들이 모두 이어 부르게 했는데, 그게 6개월 걸렸어요. 처음부터 똑바로 가르쳐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지요. 음악의 기둥을 세워주신 분이지요.”
평양숭실전문 때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는 아버지 김해송(金海松)은 1930년대부터 작곡가(신민요·가요), 성악가(재즈·가요)로서 그리고 뮤지컬 기획과 악극단 운영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광복 이전 최고의 가수 이난영과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음악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스승 아래 조기교육을 받은 셈. 김해송·이난영 커플의 자녀는 모두 12명. 이 중 7명이 성장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문 열고 들어오시면서 ‘하나, 둘, 셋’ 하십니다. 그러면 무조건 언니, 오빠, 동생들과 노래를 화음을 맞춰 불러야 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은 김해송이 1939년 조직한 ‘저고리시스터즈’. 멤버는 이난영을 비롯,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박향림, 대단한 인기가수였던 장세정, 이화자였다. 그리고 해외(미국)로 최초 진출한 걸그룹이 김시스터즈. 김해송·이난영의 딸들이다. 한류(韓流)와 K-POP의 원조다.
이날 김숙자씨는 마지막엔 ‘목포의 눈물’을 관객과 함께 불렀다. 눈물도 글썽였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인 김선태씨(목포대 국문과 교수)는 “눈물이 절로 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칠남매를 키우느라 너무 고생하셨어요. 무대를 너무도 사랑했고, 저희들을 가르쳐서 미국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 이난영은 훌륭한 디렉터이고 프로듀서였다. 아버지는 1950년 전쟁 중 납북돼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아이들을 혼자 몸으로 키우며, 먹을 게 없어 고생하면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이난영은 ‘오동추야’라는 30명가량 되는 극단을 이끌기도 했다.
김시스터즈는 1951년 대구에서 처음 결성됐다. 언니 영자씨와 둘이었다. 1년 만에 언니가 키가 크자 무용단으로 가고, 1953년 사촌 민자씨(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 이봉룡은 ‘목포는 항구다’ 작곡자), 동생 애자씨와 다시 모였다. 미8군 클럽에서 컨트리음악을 불렀다. 어머니가 팝송을 라디오로 듣고 받아적어 외워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자매들도 숙자씨의 오빠(영조)가 조립한 라디오로 FM방송을 들으며 노래를 익혔다. 클럽에 출연한 대가는 위스키와 맥주. 이것을 쌀과 바꾸었다.
“미8군 클럽에서 단연 인기를 얻으니, 그게 일본에 있는 미군들에게까지 퍼졌답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시안쇼를 기획한 톰 볼(Tom Ball)이 이 얘기를 듣고 1958년 한국에 와서 어머니와 계약을 한 거예요. 김시스터즈를 데려가겠다고요.”
1959년 1월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얼마 걸리는 줄도 모르고 모두 꽉 끼는 한복을 입고 갔다가 혼이 났어요. 미국에서 만난 톰 볼이 그러더군요. 의상, 악기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는 다 주고 떠나왔었죠. 어쩔 줄 몰라 우리가 울기만 했더니, 톰 볼이 울지 말라며 의상도 해주고, 악기도 주었어요.”
영어가 통하지도 않고 음식도 맞지 않아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김치에 목말라 하던 애자씨는 황달까지 걸렸다. 다행히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호텔에서 가진 ‘차이나 돌 레뷔(China Doll Revue)’쇼에서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 한국의 미8군 클럽에서 불렀던 로큰롤을 주로 불렀다. 패티 페이지의 ‘테네시 왈츠’도 불렀다.
“당초 4주 계약에서 무려 8개월 반으로 바뀌었어요. 다른 호텔들도 공연 요청을 했고, 뉴욕에서도 요청해왔습니다. 이듬해 1960년 라이프(LIFE)지에 소개되기도 했지요. 시카고 TV 가이드의 표지로도 나왔죠. 미국 CBS 인기 TV쇼 ‘에드 설리반 쇼’에 22차례 출연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복을 입고서 아리랑을 부르고, 이어서는 노래 부르며 악기를 함께 했지요.”
1960년 김시스터즈가 불렀던 리메이크곡 ‘찰리 브라운’은 빌보드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김숙자씨가 다룬 악기는 모두 13가지. 애자·민자씨도 10개 이상의 악기를 다루었다. 색소폰, 트롬본, 플루트, 벤조, 기타, 클라리넷, 아코디언, 마림바, 백파이프, 피아노, 만돌린, 바이올린 등등.
“어머니는 내다보시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가야금, 북, 장구를 배웠고 춤과 발레와 승무도 배웠어요. 1955년 무렵까지요. 미국 가서도 악기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보컬이 뛰어나니, 목소리에다 악기를 다뤄야 이길 수 있다고. 우리 시스터즈가 운이 좋았던 것이 한 호텔에서 장기공연하면서 악기를 끊임없이 배울 수 있었다는 거지요.”
가수 이난영은 1963년 성공한 딸들의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딸들은 ‘에드 설리반 쇼’에 어머니와 함께 출연했다. 이난영은 딸들에게 “성공해서 돌아와라. 절대로 남자와 데이트하지 마라(팀이 깨지면 안 되므로). 셋이 함께 움직여라”고 주문했다. 같은 해 김씨의 오빠와 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즈(김영조, 영일, 상호, 태성)가 미국에 왔다. 김시스터즈는 셋이서 1973년까지 활동하다가 민자씨가 헝가리인과 결혼하면서 큰 언니 영자씨가 들어왔다. 김시스터즈는 1980년까지 활동했다. 이후부턴 김숙자씨와 김브라더즈가 함께 1995년까지 공연했다. 1967년 김시스터즈는 50만달러의 세금을 납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액납세자 6위였다. 김씨는 호텔을 경영하는 이탈리아인과 결혼, 두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목포에서 어릴 적 밥 짓다가도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했다고 했습니다. 노래하면서 속이 풀린다고 했어요. 언제나 노래가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젊어진다고. 제가 나이가 들다 보니 어머니 말씀이 이해가 되더군요.”
1916년 태어난 이난영이 열두 살 때까지 산 곳은 유달산이 비껴 보이고,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목포 양동 산동네 초가였다. 목포는 식민도시의 전형이었다. 교역항으로서 급속도로 발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전국 6대 도시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그러나 항구도시 목포는 수탈의 중심지였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김과 면화, 쌀, 소금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인은 개항장 중심의 계획된 신시가지에서 신문물을 향유했고, 조선인은 산비탈 빈민촌에서 허덕였다. 이난영은 1965년 숨졌고, 목포 사람들이 2006년 경기 파주 용미리 묘지에서 목포로 모셔 수목장으로 치렀다. 목포는 지금 눈물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최태옥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21세기 목포의 미래를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게 이난영 탄생 100년 행사의 취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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