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건강관리카드 발급 투쟁을 전개하며
2017년 11월 21일, 대우조선 건강관리카드 발급 투쟁의 첫 시작이다. 사업홍보를 통해 선박제조 과정에서 석면에 노출된 대우조선지회 조합원 6명과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석면건강관리카드를 신청했다. 사업을 추진할 당시 노동조합의 미온적인 태도 속에 일반 조합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더 많은 노동자를 조직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1996년 대우조선에서 석면 노출에 의한 악성중피종이 발생한 점 ▲신청자 모두 악성중피종이 발생한 부서에서 재직중이었던 사실에 확신을 갖고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대우조선에서는 해마다 2~3명의 노동자가 석면 노출에 의한 폐암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석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대우조선 사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신뢰하며 카드발급을 보류했다. 추후 자료를 보강하여 재접수함에도, 석면을 취급한 사실이 없다는 대우조선의 공문에 18년 5월 3일, 공단은 건강관리카드 발급 대상에 해당되지 않음을 통보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승인 사례, 그리고 현장 노동자의 인우보증 진술보다 공단은 ‘석면자재 취급 사실이 없음’이라는 대우조선 공문 몇 줄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그렇다고 마냥 포기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공장 구석을 누비며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확인해 갔다. 우선 석면(asbestos)의 대체 물질은 ‘non’을 표기했을 것이라는 판단에 비석면(non-asbestos) 위주로 자료를 검토하면서, 조선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가스켓 및 조인트 시트가 과거에는 석면 재질이었음과 제조사인 ‘테화칼파씰’에서 1999년부터 비석면(석면 포함) 제품을 생산해 왔음을 밝혀냈다.
이후 2018년 10월 12일, 1년간 대우조선지회에서 상근활동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활동 기회가 찾아왔다. 가장 먼저 노동조합 창고에서 먼지 쌓인 자료를 뒤적이기 바빴는데, 대우조선에서 발생한 악성중피종으로 1997년경 금속연맹(현 금속노조)에서 대우조선 석면사용 실태조사를 진행했다는 선배 활동가의 이야기를 귀담인 둔 기억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세월과 함께 폐기되어야 할 자료이겠지만 내게는 보물상자와 다름없었다. 이를 토대로 대우조선 직업성 암 발생 내역, 97년 실태조사 참여자와 중복 여부, 업무상질병판정서 등을 분석해 가면서 차곡차곡 석면취급 데이터를 쌓아 갔다.
순탄할것 같았던 사업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서 제동이 걸렸다. 석면사용 자료는 충분히 확보했지만 보직이 노안부장이 아니다 보니 사업추진에 제약과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의 합병이 발표되면서 당장은 중요하지 않은 사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부지회장으로 노동조합을 연임하면서 나름의 권한으로 20년 3/4분기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안건에 ‘건강관리카드 발급 사업’을 상정하여 사업을 추진했고, 사측과 보이지 않는 두뇌싸움에 안건은 4/4분기로 이관될 만큼 노사 입장이 팽배했다.
당시 노동조합의 핵심 사안은 과거 석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측의 입장에 대반 반박이였는데, 사측은 뻔뻔스럽게도 ‘자료가 소멸되어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공단은 사측의 허술한 주장을 인용함)
투쟁 기조는 간단했다. 사측과 실랑이 할 필요 없이 곧바로 정부와 담판지으면 되는 것이다. 이에 ‘석면 노출 여부는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판달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실무합의를 작성한 후 21년 2월 18일 ‘대우조선 석면노출자 49명 건강관리카드 집단 발급 기자회견’으로 정부책임을 묻는 투쟁을 배치했다.
그 결과 약 2개월 뒤인 4월 22일, 산업안전보건공단은 대우조선의 석면 노출을 인정하며 49명 전원에게 건강관리카드를 발급했다.
이후 2차 건겅관리카드 발급 사업을 기획하며 퇴직자 및 하청 노동자로 대상자를 확대했고 21년 6월 7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약 6개월간 229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돌이켜 보면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힘들었지만 폭넓은 데이터 구축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과정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 하나를 공유하고자 한다. 주인공은 47년생의 여성 노동자로, 상담 당시 실무적인 내용 보다는 산재 트라우마로 남편을 잃었던 이야기, 당시 홀로 자녀를 양육하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상황 등 담담하게 본인이 살아온 삶을 말씀하셨다. 긴 이야기 끝에 삐뚤삐뚤하게 써내려간 글씨를 보며 마치 글씨에 살아온 삶을 함축한 듯 싶어 서글펐던 기억이 떠올랐다. 산업화 정책앞에 노동자 희생이 당연시 여겨졌던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이렇듯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까이 있었다.
이 외에도 상담을 진행하면서 제도의 많은 문제점을 확인했다. 근본적으로는 건강관리카드 발급 신청의 주체가 노동자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제도가 있는지도 잘 모를뿐더러, 대공장에서조차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 현실이다 보니 설사 제도를 알고 있더라도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웠다. 또한 혼합작업에 의해 다량의 석면을 흡입하더라도 석면을 직접 절단·가공하지 않으면 고노출군에 속할지라도 비대상자로 분류되었다. 전반적으로 발급기준을 완화하고 대상물질을 확대하여 실질적인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시급했다.
이 또한 고민에서 멈추지 않았다. 21년 11월 10일,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과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는 ▲건강관리카드 발급 대상 물질을 확대, 노출기준 완화 ▲노동자의 제도 이용 보장 대책마련 등 ‘건강관리카드 제도개선 촉구 및 집단발급’ 기자회견을 열며 역사적인 제도개선 투쟁에 돌입했다.
노동안전보건 전문가도 아니고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닌 내가 이러한 투쟁을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당연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있음에 마땅히 싸워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보다 ‘자세’였다. 지식의 쌓임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만 마음자세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감을 갖자! 진짜 전문가는 현장에 있음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동지의 ‘확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건강관리카드란 산업안전보건법 제137조에 근거하여 직업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업무에 노출된 노동자에게 카드를 발급하여, 퇴직 후에도 직업병의 조기발견을 위한 무료검진 및 관련질환 발생 시 산재절차 간소화 등의 예방과 보상을 지원하는 제도.
*대우조선지회는 21년 2월 18일부터 12월 10일까지 총 278명이 건강관리카드를 신청 하였음.
12월 10일 기준, 카드 발급자는 총 209명이며 그 외 검토ㆍ진행 중에 있음.
또한 용접흄, 도장페인트, 디젤엔진연소물질, 조리흄 등의 물질이 제외되어 제도개선 투쟁을 병행 중에 있음.
* 이 글은 22년 1월 <산재없는 그날까지> 119호에 실렸으며 일부 수정하여 재게재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