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고이왕(古爾王)의 낙초(樂初) 개원(改元) 이야기
※ 공선연(公孫淵)의 요동국(遼東國)이 조위(曹魏)의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에게 정벌(征伐) 된 AD.238년에 요동국(遼東國)과 결혼동맹(結婚同盟)했던 온다라(百濟)도 이웃,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있다가 함께 해(害)를 입었습니다.
☞ [三國誌卷八(삼국지권8)魏書八(위서8)二公孫陶四張傳(2공손도4장전)]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六]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爲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爲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경초2년(238년)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6월, 군(軍)이 요동(遼東)에 도착했다. [6]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 등을 보내 보기(步騎) 수만으로 요수(遼隧)에 주둔케 하고 주위 20여 리에 참호를 팠다. 선왕(宣王)의 군대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비연(卑衍)으로 하여금 이를 맞아 싸우게 하니 선왕(宣王)이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宣王)이 군대에 명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향하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양평(襄平)으로 나아갔다. 비연 등은 양평에 방비가 없는 점을 두려워해 밤중에 달아났다.
제군(諸軍)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영격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운선(運船,물자를 운반하는 배)이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土山)을 쌓고 노(櫓,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 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자 대병(大兵)으로 급히 들이쳐 유성(流星)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
※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빼앗긴 구지왕(仇知王)의 아들, 고이왕(古爾王)은 온다라(百濟)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바다 건너 지금의 황해도(黃海道) 재령강(載寧江) 유역(流域) 금마저(金馬渚)로 천도(遷都)하여 나라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낙초(樂初)로 개원(改元)했습니다.
온다라(百濟)가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빼앗기고 천도(遷都)한 이야기를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고, 황룡이 날아 나왔다고 기록했습니다.
☞ [三國史記卷第二十四(삼국사기권제24)百濟本紀第二(백제본기제2)沙伴王,古尒王(사반왕,고이왕)]
五年 夏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5년(서기 238) 여름 4월, 궁궐 문 기둥에 벼락이 치더니 그 문에서 황룡이 날아 나왔다.
※ 금마저(金馬渚)로 천도(遷都)한 고이왕(古爾王)이 낙초(樂初)로 개원(改元)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기록하지 않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꼬투리만 기록을 남겼습니다.
☞ [三國遺事卷第二(삼국유사권제2)紀異卷二(기이권2)南扶餘,前百濟,北扶餘已見上(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이미 위에 나와 있다)]
又沙沸王[一作沙伊王]仇首崩, 嗣位, 而幼少不能政, 卽廢而立古爾王. 或云, 至樂*{景}初二*{三}年己未, 乃崩, 古爾方立.
또 사비왕(다른 이름 사이왕)은 구수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원본(原本)에는 온다라(百濟)의 연호(年號)인 낙초(樂初)로 기록돼 있는데, 일제강점초(日帝强占初) 우리 사서를 모두 수거해서 황실사학자(皇室史學者)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감수(監修)를 받은 후에 되돌려 받은 복간본(復刊本)에 위(魏)나라 연호(年號) 경초3년(景初三年)을 부기(付記)한 것입니다.
낙초2년(樂初二年)은 고이왕(古爾王)이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금마저(金馬渚)로 천도(遷都)하여 낙초(樂初)로 개원(改元)한 이듬해(239년)입니다.
AD.239년, 경초3년(景初三年)은 야마타이고쿠(やまたいこく邪馬台國) 히미코(ひみこ卑彌呼) 여왕(女王)이 위(魏)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 미즈호노쿠니(みずほのくに瑞穗國) 회복(回復)을 도와달라 요청한 해입니다.
이즈모쿠니(いづもくに出雲國)를 지키던 코토시로누시노카미(ことしろぬしのかみ事代主神)가 아버지 구수왕(仇首王)이 돌아가신 234년에 열다라(十濟)의 제7대왕으로 즉위(卽位)한 사반왕(沙伴王)은 할아버지 초고왕(肖古王)과 아버지 구수왕(仇首王)이 세운 담로국(擔櫓國)들이 위기(危機)를 맞게되었습니다.
사반왕(沙伴王)은 4촌형(四寸兄)인 고이왕(古爾王)과 담로연맹(擔櫓聯盟)하여 열다라(十濟)의 국정(國政)을 맡긴 다음 AD.238년에 급히 열도(列島)로 건너간 것입니다.
☞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倭人傳(왜인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경초 2년(238년) 6월,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天子)에 조헌(朝獻)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왜의 사신을)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其年十二月, 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 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 以到.
그 해 12월,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제조(制詔-천자의 명령)한다 :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巿牛利)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이 도착했다.
汝所在踰遠, 乃遣使貢獻, 是汝之忠孝, 我甚哀汝. 今以汝爲親魏倭王, 假金印紫綬, 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金印), 자수(紫綬)를 내리고 장봉(裝封-물건을 넣고 봉인함)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其綏撫種人, 勉爲孝順. 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 道路勤勞, 今以難升米爲率善中郎將, 牛利爲率善校尉, 假銀印靑綬, 引見勞賜遣還.
이로써 네 종인(種人)들을 어루만져 달래고 효순(孝順)에 힘쓰도록 하라. 네가 보낸 사신인 난승미, 우리(牛利-도시우리)는 먼 길을 걸어 애썼으므로 난승미는 솔선중랑장, 우리(牛利)는 솔선교위로 임명하여 은인(銀印), 청수(靑綬)를 내리고 접견하여 위로하고 돌려 보낸다.
今以絳地交龍錦五匹、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靑五十匹, 答汝所獻貢直. 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眞珠、鉛丹各五十斤, 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 悉可以示汝國中人, 使知國家哀汝, 故鄭重賜汝好物也.」
이제 강지교룡금(絳地交龍錦) 5필, 강지추속계(絳地縐粟罽) 10장, 천강(蒨絳) 50필, 감청(紺靑) 50필로 너의 조공에 답한다. 또한 감지구문금 3필, 세반화계 5장, 백견(白絹) 50필, 금 8냥, 오척도(五尺刀) 2구, 동경(銅鏡) 100매, 진주와 연단 각 50근을 특별히 네게 하사한다. 모두 장봉하여 난승미, 우리에게 주어 돌려보내니 도착하면 받도록 하라. 모두 네 나라사람들한테 보여주어 국가가 너희를 사랑함을 알도록 하라. 네게 좋은 물건을 하사함은 이 때문이다.」
※ [삼국지]의 ‘경초 2년(238년) 6월’기사는 착오(錯誤)입니다.
‘경초 2년(238년) 6월’에는 위(魏)나라가 공손연(公孫淵)의 요동국(遼東國)을 공격하고 있던 전쟁 막바지로 사신 교류가 어려운 시점입니다.
[삼국지]와 같은 사신 교류 기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경초 3년(239년) 6월’로 기록돼 있습니다.
☞ [日本書紀巻九(일본서기권09)神功皇后(신공황후)]
卅九年. 是年也, 大歲己未[魏志云, 明帝景初三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斗米等, 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鄧夏遣使將送詣京都也.].
39년 이 해의 간지는 기미(己未)이다 [위지(魏志)에서는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6월에 왜 여왕이 대부(大夫) 난두미(難斗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가서 조헌할 것을 청하자, 대방군 태수 등하(鄧夏)가 관리를 보내 데리고 가게하여 경도(京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 [일본서기권9(日本書紀巻九)]는 지나사서(支那史書)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왜인전(倭人傳)]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왜여왕(倭女王)의 이름을 히미코(ひみこ卑彌呼)라고 쓰지 않고, 120년(二周甲) 늦은 시기(時期) 인물인 신공황후(神功皇后) 연대기(年代記)로 왜곡(歪曲)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지(三國志)]에 왜여왕(倭女王)으로 기록된 히미코(ひみこ卑彌呼)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소개된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아마테라스오호가미(ぁまてらすおほかみ天照大神)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日本)의 황실사학(皇室史學)이 천황(天皇)의 연대기(年代記)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천년(千年)을 끌어올리면서 조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