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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한국 기독교, 장동민, 새물결플러스, 2019
27-43쪽 발췌
내가 고민한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교회의 속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거룩함(puriry)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 됨(unity)이다. 이 두 본질적 속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교회라 할 수 없다. 과연 우리 교회가 이 두 가지 속성에 부합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비신자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까?
우선 거룩함부터 생각해보자. 교회가 세상의 관습을 좆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보통 거룩함이라고 하면 주로 성적인 문제를 생각한다. 음란한 세상의 문화를 피하기 위해 ‘세상 친구’를 멀리하고, 음행의 전 단계인 술·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음행을 주제로 설교할 때면 남편을 걱정하는 여성도들은 한숨을 쉬고, 듣고 있는 남성들은 막연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나는 거룩함의 문제가 음행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7계명의 죄는 다른 계명이 금하는 죄악들과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교회 목회자가 논문을 표절했다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나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불평하듯이 비난했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바람피운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라고 한마디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은 육체적 순결을 포함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성도들이, 세상이 원하는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거룩함의 요체다. 세속주의(secularism)의 물결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해야 한다. 물질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사업을 하고 사람을 대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투자를 하고 사윗감을 고르지는 않는가? 권력자 앞에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지만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으름장을 놓지 않는가? 사회적 약자들을 나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동정과 구제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는가? 북한 이탈주민이나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에 대해 세상과 똑같은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사회의 양극화나 실업, 사회적 갈등에 대해 나와 다른 입장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있는가?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는 기준과 회사가 CEO를 모집하는 기준이 유사 하지 않은가? 교회 안의 파워게임과 교회들 사이의 경쟁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은가?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한 증권 회사 대표는 문제가 된 대기업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기업 가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지분과 세습에만 골몰한다”고 일갈했는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이를 설교에 반영해 성도들의 의식을 깨우며 가치관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과연 내 설교가 성도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는지 설교할 때마다 회의가 들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문제 삼는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게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대신 성경적 가치관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졌다고 자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은 내 문제다. 내 자신이 회생은 하지 않고 아는 것만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에 힘이 없는 게 아닐까? 과연 ‘설교’를 통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의 삶을 묘사하시면서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그분은 제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세상은 그런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우리는 세상을 미워하기는커녕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세상의 것에서 성공을 거두면 기도 웅답을 받았다고 좋아한다. 세상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대신 조롱한다.
두 번째 교회의 속성은 하나 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일 아침 예배 때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강요하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서로 인사한다. 예배 후 아는 성도들과 반갑게 악수하고 함께 식사하며, 싱가대와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고, 지난 겨울 다녀온 비전 트립에서 은혜 받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달 바자회 계획을 짠다.
금요일 점심이면 식당과 찻집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데, 곁에서 들어보면 십중팔구 구역 예배 모임이다. 요새는 셀 처치나 가정 교회로 전환하는 교회도 많은데, 이런 전환은 모두 공동체의 친밀한 사귐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하나 됨은 이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교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랑을 나누는 사교 클럽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과 사회적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어 교제하는 대안 공동체다(갈 3:28: 골 3:11),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신인류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행 11:26),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와 인종과 계급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용서받은 공동체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교회다.
과연 우리 교회가 맺는 사귐이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는 사귐인가, 아니면 나와 비슷한 계층에 한정된 사김인가?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가 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같은 나라 안에 살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형제로 대하지 못한다. 교회는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북한 이탈 주민 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배타적이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시설 속에 가두고 특수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 교회의 일원으로 반아들이지 못한다. 중산층 중심의 교회가 되어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정치적 보수와 진보에 대해 대체로 보수 편을 들고 있다. 이는 진보적인 사람과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거룩함과 하나 됨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지 교회가 영향력 면에서 축소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상당 부분 이미 상실해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죄를 자각하고 철저하게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벗어버리고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마음이 죄악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고 더 절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중보 기도를 요청한다. 이 사람이 바로 사회적 계층의 차이와 문화적 관습을 뛰어넘을 수 있고, 그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교회의 속성인 거룩함과 하나 됨을 잃어버린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 희미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거룩함과 하나 됨이라는 속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를 반성하다가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교회에 대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젊은 시절 큰 기대를 가지고 간절하며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겼었는데 말이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 주일 설교하고 성도를 인도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교회를 관리하는 종교 관료의 역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고, 불신자를 직접 진도해 제자를 삼거나 세례를 주지도 않는다.
기존 교회에 청빙을 받아 정해진 기간 동안 직업인처럼 맡겨진 일(주로 설교)을 감당할 뿐이다. 주일에 품위 있는 예배를 인도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한 해를 대과(大過) 없이 보낸 것을 흡족해한다. 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만일 내가 교회를 사임하면 나와 비슷한 목사가 부임해 내가 하던 일을 할 것이다.
많은 경우 교회의 중요 의제(agenda)는 교회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교회력에 따른 연례적인 집회와 행사들은 매닌 겪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진다. 교회의 무기력함을 돌파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 세미나에 참여해 그 세미나에서 권하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경험상 몇 달 동안 강조하다가 아무런 효과 없이 흐지부지 없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는 바자회를 열고, 비전 트립이나 성지 순례 등을 계획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교회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는 프로젝트는 뭐니 뭐니 해도 예배당 건축이다. 성도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매주 가 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기획이다. 그러나 그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이 정말 영적 활력인지 아니면 알맹이 없는 허세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성도들은 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영적 소비자로 전락했고, 교회는 사교의 장소로 변질되고 말았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기 어렵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다가 사회로부터 유무형의 박해를 받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에게 박해가 없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이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하락에 대해 분석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 더 이상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옛날 미개한 시대에는 절대자의 도움을 찾았지만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고,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를 고용하며, 정신적인 어려움은 상담가에게 털어놓으면 된다. 일주일의 삶을 끝낸 후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토요일에 여행을 떠나서 일요일까지 놀다오기 때문에 교회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풍요의 사회, 세속적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정말 영적인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풍요한 삶을 산다고 해서 사람의 영적인 욕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만능의 사회가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기계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 영적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영적인 욕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다. 사실 영성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생각할 만큼 도처에서 영성 운동이 환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전통적인 종교가 부흥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나 소설, 대중음악 등이 영성을 주제로 삼을 정도다. 이는 근대주의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대열에서 한국교회만 뒤떨어진 것으로 보여 조급증이 인다.
한국교회 위기론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한국전쟁 이후 1970-80년대에 이르는 약 30년 동안은 부흥과 성장의 시대였다. 199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고,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명목상의 신자는 늘었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계속 줄고 있다. 백만을 헤아린다고 하는 ‘가나안’ 성도도 의미 있는 현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또 그만큼의 잠재적인 ‘가나안’ 성도가 있다. 헌금을 할 수 있는 연령대는 줄어들고, 젊은이를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지역의 중소 교회들은 무기력하게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각 교단의 신학교들은 목회지망생의 감소로 인해 구조 조정을 하거나 새로운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세상을 설명하고 변혁시키려는 큰 뜻을 품은 신학(Theologia)은 사라져가고, 신학은 전문적인 목회자를 길러내는 실용적 학문으로 전락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줄어드는 데 반해 교회의 주변 기관들은 늘어났다. 기존의 기관인 노회, 연회, 총회에 더해 지역 연합회나 초교파적 연합 기구들이 많이 생겼다. 전통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외에도 한국교회연합(한교연),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등 연합 기구가 여럿 생겼다. 수십 개의 기독교 출판사가 난립하고, 기독교 인구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의 방송국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 기독실업인회(CBMC)도 지역 단위로 분화되었고, 직능별 단체와 선교회, 협의회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다. 기독교 기관들의 형세가 마치 2008년 경제 위기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실제 부동산 값의 여러 배에 해당하는 금융 파생 상품의 버블이 형성되었고, 이게 한 번에 꺼지면서 대혼란이 찾아왔던 글로벌 경제 위기 말이다. 경제 위기의 주범들은 보너스를 챙겨 유유히 빠져나갔고, 서민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신학자와 저술가들은 위기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고민했고 또한 저마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교회가 세속주의에 물들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속적 물질과 권력과 대형화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만족만을 주는 가벼운 설교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하며, 세속적 마케팅의 방법으로 교회 성장을 도모한다는 원인을 찾아냈다. 또한 성직자 중심의 계급화된 교회 제도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가 되고, 목회자는 민주적 리더십을 가진 목회자가 되어야 하며, 소그룹 중심의 셀 처치나 가정 교회로 전환할 것을 권한다. 그 외에도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관에서 멀어진 것이 교회의 위기이므로 전통을 회복 해야 한다는 해결책도 제시되었고,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적 교리를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둔 해결책도 제시되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세계에서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자는 미셔널 처치 운동이 나왔고,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013년 ‘새물결플러스’ 출판사는 위에서 살핀 논의들을 정리해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새로운 한국교회를 위한 20가지 핵심과제』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이 책에 논문을 기고한 20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크게 4부로 나눌 수 있다. 이 책 각 장의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교회 내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제1부는 “근본정신 회복하기”라는 제목 아래에서 신학적 빈곤, 반지성주의, 인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설교, 값싼 구원론 등을 다루었다. 제2부 “교회 문화 직시하기”에서는 교회의 세속화를 질타했다. 기고자들은 무속적·상업적 성령 운동비판,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 건물에 국한된 신앙 행태, 맘몬 숭배, 잘못된 신앙 언어 사용, 교회 내 성차별, 쇼로 변질된 예배 등을 세속화의 양상으로 예시했다. 제3부에서는 “구조개혁 시도하기”를 통해 교회의 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한다. 메가 처치 현상, 사제주의, 교회 세습, 목회자 납세, 신학교 구조 조정, 교단의 현실 등을 문제로 지적 했다. 제4부의 제목은 “참여 방식 점검하기”로 한국교회가 사사화(私事化)되고 공적 영역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기고자들은 공적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타 종교를 무시한 공격적 선교를 비판하며, 생태 문제와 통일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에 기고한 신학자와 저술가들은 모두 그동안 한국교회의 자성(自省)과 개혁을 주장해온 대표적인 지성인들이다. 이들의 분석은 과학적이고, 태도는 진지하다. 저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진지하게 실천해온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글을 읽을 때 나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들의 주장은 모두 현재 한국교회의 현상을 분석할 뿐 역사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많은 경우 역사적 변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변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방안은 대증요법(對症療法)에 불과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역사신학 전공자로서 사건들의 역사적 요인을 늘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런 허전함을 느낀 것이리라.
예를 들어 목회직의 대물림(세습)을 문제 삼으려 할 때, 단지 세습의 현상을 조사하고, 그 폐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경에서 세습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운데, 이는 성경 시대에는 그런 문제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직의 세습이 왜 유독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부각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신학교에서 교회의 3대 표지(標識) 중 하나가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라고 만날 가르쳐도 소용이 없고, 요즈음은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다고 안타깝게 외쳐보아야 공허한 메아리다. 신학자들은 칼뱅 시대에 얼마나 권징이 잘 시행되었는지 논문을 발표하지만, 논문 쓰는 대학원생들 몇이 읽을 뿐이다. 정치하는 목사들이 ‘권징 조례’나 ‘총회 결의’를 숙지하는 이유는 정치적 맞수가 자신들을 ‘불법’이라고 걸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있을 뿐이다.
교회나 노회에서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권징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성경을 알지 못해서일까?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내 답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징이 권위 있게 시행되려면, 권징을 받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사회적 압력이 필요하다.
청교도 시대에는 이것이 가능했다. 간음죄를 지은 주지사(Governor)에게 ‘수찬정지’(성찬을 주지 않는 징계)를 선언하면 그는 다음 번 선거에서 낙선할 것이었다.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목사에게 정직(停職)의 벌을 가하면 그는 아무 데서도 목회를 하지 못한다. 교회와 세속 사회의 권력이 겹치는 부분이 있을 때 비로소 권징이 의미가 있다. 교회가 권징을 하면 교인은 형사 처분까지 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압력이라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공적인 사회는 더 이상 종교 내부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여러 교파들이 공존하기 때문에, 또 한 교파 안에서도 노회끼리 회원(목사) 수를 놓고 경쟁하기 때문에 권징이 시행되기 어렵다. 노회나 총회에서 판결을 내려도, 이에 불복하고 이 문제를 다시 세속 법정으로 가지고 간다.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신실하게 권징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말 성경의 기준으로 옮고 그름을 가리고 싶다면, 신학교에서 배운 오래된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던 중 ‘크리스텐덤’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크리스텐덤 시대에 형성된 교회법을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다는 말이다. 일단 이 난어가 머릿속에 자리 잡자 다른 많은 문제들도 이 범주에 넣어 생각하게 되었다. 억지로 생각을 끌어 맞춘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해결을 못 하고 속에 넣어두었던 문제들이 저절로 척척 맛아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소위 ‘프레임’(frame)이 내 안에서 형성되어갔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 내용도 크리스텐덤 시대와 달라야 한다. 우리 시대 교회의 회중은 일주일에 엿새를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속 사회의 시민이다. 유아세례를 받고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1년 동안의 교리 공부를 마쳐서 기독교적 마인드가 형성된 기독교 세계의 백성이 아니라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고 최소 12년 이상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 교육을 마친 근대인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12년의 공교육을 마치면 하나님 없이 세상을 설명하려 하는 ‘방법론적 무신론자’(methodological atheists)가 되어 졸업하기 마린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권위를 전제로 신앙을 강요하는 설교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로 들릴 것이다. 우리 시대의 설교자는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종교적 클리셰(cliche)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대화하고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교회의 형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 곧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은 모두 크리스텐덤 시대부터 시작된 교회들이다. 크리스텐덤 사회에 디자인된 교회의 형태는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의 정치적 제도뿐 아니라 조직과 법과 윤리와 습속(習俗) 등을 모두 재점검해야 한다. 예배의 날짜와 시간, 회집의 장소, 헌금을 모으고 사용하는 방식, 목사·장로·집사의 역할과 선출 방법, 목회자의 지위와 역할 등 기의 모든 것이 재고(再考)의 대상이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방법도 긴급히 정립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와 영성과 제도를 뒷받침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는 신학 자체를 비평적으로 보아야 한다. 청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진보적 에큐메니컬 신학과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으로 양분된 배경은 무엇이고, 이 분리를 어떻게 극복하고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신학의 내용뿐 아니라 보존과 전달의 과정도 중요한데, 우리 시대에 적합한 신학교의 구조와 교과 과정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이런 문제들을 크리스텐텀/포스트크 리스텐덤이라는 해석의 프레임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나는 세기적인 발견을 한 것 같은 기쁨에 들떠서 대화가 통하는 동료와 학생들에게 내 주장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으려 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적합한 교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지 연구해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 무렵의 나는 교회론에 관계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IVP에서 막 출간된 『새로운 교회가 온다』라는 책을 만났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라는 호주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다. 당시 찬반양론이 비등했던 ‘이머징 처치’ 운동을 설명하는 책이겠거니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장부터 ‘파산한 크리스텐덤’이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단숨에 읽어내려 갔는데,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나만 포스트크리스텐덤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역시 해 아래 새 것은 없어!”라는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알고 보니 포스트크리스텐덤을 문제 삼은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인도에 따라 레슬리 뉴비긴의 저서를 섭렵했다. 뉴비긴은 우리 시대가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이고 그 시대를 사는 우리 가 새로운 교회론을 정립해야 한나고 역설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뉴비긴의 포용성과 학문성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을 수호하려는 사명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세 번째 정독하고 있는데, 매번 새롭게 배울 것이 많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 책을 처음 출간한 것은 1989년이었고, 한국어 번역판 초판은 1998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6쇄를 거듭하다가 2007년에 재판이 나온 것이니, 사실 내가 너무 늦게 읽은 것이다.(2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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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지성근 역, 『새로운 교회가 온다』(서울: IVP, 2009).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서울: IVP, 2007),
27-43쪽 발췌
내가 고민한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교회의 속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거룩함(puriry)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 됨(unity)이다. 이 두 본질적 속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교회라 할 수 없다. 과연 우리 교회가 이 두 가지 속성에 부합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비신자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까?
우선 거룩함부터 생각해보자. 교회가 세상의 관습을 좆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보통 거룩함이라고 하면 주로 성적인 문제를 생각한다. 음란한 세상의 문화를 피하기 위해 ‘세상 친구’를 멀리하고, 음행의 전 단계인 술·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음행을 주제로 설교할 때면 남편을 걱정하는 여성도들은 한숨을 쉬고, 듣고 있는 남성들은 막연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나는 거룩함의 문제가 음행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7계명의 죄는 다른 계명이 금하는 죄악들과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교회 목회자가 논문을 표절했다고 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나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불평하듯이 비난했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바람피운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라고 한마디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은 육체적 순결을 포함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성도들이, 세상이 원하는 비성경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거룩함의 요체다. 세속주의(secularism)의 물결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해야 한다. 물질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사업을 하고 사람을 대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투자를 하고 사윗감을 고르지는 않는가? 권력자 앞에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지만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으름장을 놓지 않는가? 사회적 약자들을 나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동정과 구제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는가? 북한 이탈주민이나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에 대해 세상과 똑같은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사회의 양극화나 실업, 사회적 갈등에 대해 나와 다른 입장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있는가?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는 기준과 회사가 CEO를 모집하는 기준이 유사 하지 않은가? 교회 안의 파워게임과 교회들 사이의 경쟁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은가?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한 증권 회사 대표는 문제가 된 대기업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기업 가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지분과 세습에만 골몰한다”고 일갈했는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이를 설교에 반영해 성도들의 의식을 깨우며 가치관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과연 내 설교가 성도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는지 설교할 때마다 회의가 들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문제 삼는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게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대신 성경적 가치관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졌다고 자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은 내 문제다. 내 자신이 회생은 하지 않고 아는 것만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에 힘이 없는 게 아닐까? 과연 ‘설교’를 통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의 삶을 묘사하시면서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그분은 제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세상은 그런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우리는 세상을 미워하기는커녕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세상의 것에서 성공을 거두면 기도 웅답을 받았다고 좋아한다. 세상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대신 조롱한다.
두 번째 교회의 속성은 하나 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일 아침 예배 때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강요하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서로 인사한다. 예배 후 아는 성도들과 반갑게 악수하고 함께 식사하며, 싱가대와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고, 지난 겨울 다녀온 비전 트립에서 은혜 받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달 바자회 계획을 짠다.
금요일 점심이면 식당과 찻집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데, 곁에서 들어보면 십중팔구 구역 예배 모임이다. 요새는 셀 처치나 가정 교회로 전환하는 교회도 많은데, 이런 전환은 모두 공동체의 친밀한 사귐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하나 됨은 이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교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랑을 나누는 사교 클럽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과 사회적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어 교제하는 대안 공동체다(갈 3:28: 골 3:11),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신인류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행 11:26),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와 인종과 계급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용서받은 공동체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교회다.
과연 우리 교회가 맺는 사귐이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는 사귐인가, 아니면 나와 비슷한 계층에 한정된 사김인가?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가 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같은 나라 안에 살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형제로 대하지 못한다. 교회는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북한 이탈 주민 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배타적이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시설 속에 가두고 특수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 교회의 일원으로 반아들이지 못한다. 중산층 중심의 교회가 되어 사회 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정치적 보수와 진보에 대해 대체로 보수 편을 들고 있다. 이는 진보적인 사람과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거룩함과 하나 됨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지 교회가 영향력 면에서 축소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상당 부분 이미 상실해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죄를 자각하고 철저하게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벗어버리고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마음이 죄악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고 더 절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중보 기도를 요청한다. 이 사람이 바로 사회적 계층의 차이와 문화적 관습을 뛰어넘을 수 있고, 그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교회의 속성인 거룩함과 하나 됨을 잃어버린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 희미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거룩함과 하나 됨이라는 속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를 반성하다가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교회에 대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젊은 시절 큰 기대를 가지고 간절하며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겼었는데 말이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 주일 설교하고 성도를 인도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교회를 관리하는 종교 관료의 역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고, 불신자를 직접 진도해 제자를 삼거나 세례를 주지도 않는다.
기존 교회에 청빙을 받아 정해진 기간 동안 직업인처럼 맡겨진 일(주로 설교)을 감당할 뿐이다. 주일에 품위 있는 예배를 인도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한 해를 대과(大過) 없이 보낸 것을 흡족해한다. 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만일 내가 교회를 사임하면 나와 비슷한 목사가 부임해 내가 하던 일을 할 것이다.
많은 경우 교회의 중요 의제(agenda)는 교회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교회력에 따른 연례적인 집회와 행사들은 매닌 겪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진다. 교회의 무기력함을 돌파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 세미나에 참여해 그 세미나에서 권하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경험상 몇 달 동안 강조하다가 아무런 효과 없이 흐지부지 없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는 바자회를 열고, 비전 트립이나 성지 순례 등을 계획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교회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넣는 프로젝트는 뭐니 뭐니 해도 예배당 건축이다. 성도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매주 가 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기획이다. 그러나 그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이 정말 영적 활력인지 아니면 알맹이 없는 허세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성도들은 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영적 소비자로 전락했고, 교회는 사교의 장소로 변질되고 말았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기 어렵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다가 사회로부터 유무형의 박해를 받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에게 박해가 없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이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하락에 대해 분석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 더 이상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옛날 미개한 시대에는 절대자의 도움을 찾았지만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고,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를 고용하며, 정신적인 어려움은 상담가에게 털어놓으면 된다. 일주일의 삶을 끝낸 후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토요일에 여행을 떠나서 일요일까지 놀다오기 때문에 교회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대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풍요의 사회, 세속적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정말 영적인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풍요한 삶을 산다고 해서 사람의 영적인 욕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만능의 사회가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기계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 영적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영적인 욕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다. 사실 영성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생각할 만큼 도처에서 영성 운동이 환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전통적인 종교가 부흥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나 소설, 대중음악 등이 영성을 주제로 삼을 정도다. 이는 근대주의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대열에서 한국교회만 뒤떨어진 것으로 보여 조급증이 인다.
한국교회 위기론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한국전쟁 이후 1970-80년대에 이르는 약 30년 동안은 부흥과 성장의 시대였다. 199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고,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명목상의 신자는 늘었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계속 줄고 있다. 백만을 헤아린다고 하는 ‘가나안’ 성도도 의미 있는 현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또 그만큼의 잠재적인 ‘가나안’ 성도가 있다. 헌금을 할 수 있는 연령대는 줄어들고, 젊은이를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지역의 중소 교회들은 무기력하게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각 교단의 신학교들은 목회지망생의 감소로 인해 구조 조정을 하거나 새로운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세상을 설명하고 변혁시키려는 큰 뜻을 품은 신학(Theologia)은 사라져가고, 신학은 전문적인 목회자를 길러내는 실용적 학문으로 전락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줄어드는 데 반해 교회의 주변 기관들은 늘어났다. 기존의 기관인 노회, 연회, 총회에 더해 지역 연합회나 초교파적 연합 기구들이 많이 생겼다. 전통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외에도 한국교회연합(한교연),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등 연합 기구가 여럿 생겼다. 수십 개의 기독교 출판사가 난립하고, 기독교 인구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의 방송국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 기독실업인회(CBMC)도 지역 단위로 분화되었고, 직능별 단체와 선교회, 협의회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다. 기독교 기관들의 형세가 마치 2008년 경제 위기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실제 부동산 값의 여러 배에 해당하는 금융 파생 상품의 버블이 형성되었고, 이게 한 번에 꺼지면서 대혼란이 찾아왔던 글로벌 경제 위기 말이다. 경제 위기의 주범들은 보너스를 챙겨 유유히 빠져나갔고, 서민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신학자와 저술가들은 위기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고민했고 또한 저마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교회가 세속주의에 물들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속적 물질과 권력과 대형화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만족만을 주는 가벼운 설교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하며, 세속적 마케팅의 방법으로 교회 성장을 도모한다는 원인을 찾아냈다. 또한 성직자 중심의 계급화된 교회 제도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가 되고, 목회자는 민주적 리더십을 가진 목회자가 되어야 하며, 소그룹 중심의 셀 처치나 가정 교회로 전환할 것을 권한다. 그 외에도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관에서 멀어진 것이 교회의 위기이므로 전통을 회복 해야 한다는 해결책도 제시되었고,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적 교리를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둔 해결책도 제시되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세계에서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자는 미셔널 처치 운동이 나왔고,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013년 ‘새물결플러스’ 출판사는 위에서 살핀 논의들을 정리해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새로운 한국교회를 위한 20가지 핵심과제』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이 책에 논문을 기고한 20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크게 4부로 나눌 수 있다. 이 책 각 장의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교회 내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제1부는 “근본정신 회복하기”라는 제목 아래에서 신학적 빈곤, 반지성주의, 인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설교, 값싼 구원론 등을 다루었다. 제2부 “교회 문화 직시하기”에서는 교회의 세속화를 질타했다. 기고자들은 무속적·상업적 성령 운동비판,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 건물에 국한된 신앙 행태, 맘몬 숭배, 잘못된 신앙 언어 사용, 교회 내 성차별, 쇼로 변질된 예배 등을 세속화의 양상으로 예시했다. 제3부에서는 “구조개혁 시도하기”를 통해 교회의 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한다. 메가 처치 현상, 사제주의, 교회 세습, 목회자 납세, 신학교 구조 조정, 교단의 현실 등을 문제로 지적 했다. 제4부의 제목은 “참여 방식 점검하기”로 한국교회가 사사화(私事化)되고 공적 영역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기고자들은 공적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타 종교를 무시한 공격적 선교를 비판하며, 생태 문제와 통일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에 기고한 신학자와 저술가들은 모두 그동안 한국교회의 자성(自省)과 개혁을 주장해온 대표적인 지성인들이다. 이들의 분석은 과학적이고, 태도는 진지하다. 저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진지하게 실천해온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글을 읽을 때 나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들의 주장은 모두 현재 한국교회의 현상을 분석할 뿐 역사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많은 경우 역사적 변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변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방안은 대증요법(對症療法)에 불과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역사신학 전공자로서 사건들의 역사적 요인을 늘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런 허전함을 느낀 것이리라.
예를 들어 목회직의 대물림(세습)을 문제 삼으려 할 때, 단지 세습의 현상을 조사하고, 그 폐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경에서 세습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운데, 이는 성경 시대에는 그런 문제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직의 세습이 왜 유독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부각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신학교에서 교회의 3대 표지(標識) 중 하나가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라고 만날 가르쳐도 소용이 없고, 요즈음은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다고 안타깝게 외쳐보아야 공허한 메아리다. 신학자들은 칼뱅 시대에 얼마나 권징이 잘 시행되었는지 논문을 발표하지만, 논문 쓰는 대학원생들 몇이 읽을 뿐이다. 정치하는 목사들이 ‘권징 조례’나 ‘총회 결의’를 숙지하는 이유는 정치적 맞수가 자신들을 ‘불법’이라고 걸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있을 뿐이다.
교회나 노회에서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권징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성경을 알지 못해서일까?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내 답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징이 권위 있게 시행되려면, 권징을 받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사회적 압력이 필요하다.
청교도 시대에는 이것이 가능했다. 간음죄를 지은 주지사(Governor)에게 ‘수찬정지’(성찬을 주지 않는 징계)를 선언하면 그는 다음 번 선거에서 낙선할 것이었다.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목사에게 정직(停職)의 벌을 가하면 그는 아무 데서도 목회를 하지 못한다. 교회와 세속 사회의 권력이 겹치는 부분이 있을 때 비로소 권징이 의미가 있다. 교회가 권징을 하면 교인은 형사 처분까지 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회적 압력이라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공적인 사회는 더 이상 종교 내부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여러 교파들이 공존하기 때문에, 또 한 교파 안에서도 노회끼리 회원(목사) 수를 놓고 경쟁하기 때문에 권징이 시행되기 어렵다. 노회나 총회에서 판결을 내려도, 이에 불복하고 이 문제를 다시 세속 법정으로 가지고 간다.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신실하게 권징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말 성경의 기준으로 옮고 그름을 가리고 싶다면, 신학교에서 배운 오래된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던 중 ‘크리스텐덤’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크리스텐덤 시대에 형성된 교회법을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다는 말이다. 일단 이 난어가 머릿속에 자리 잡자 다른 많은 문제들도 이 범주에 넣어 생각하게 되었다. 억지로 생각을 끌어 맞춘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해결을 못 하고 속에 넣어두었던 문제들이 저절로 척척 맛아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소위 ‘프레임’(frame)이 내 안에서 형성되어갔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뿐 아니라 그 내용도 크리스텐덤 시대와 달라야 한다. 우리 시대 교회의 회중은 일주일에 엿새를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속 사회의 시민이다. 유아세례를 받고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1년 동안의 교리 공부를 마쳐서 기독교적 마인드가 형성된 기독교 세계의 백성이 아니라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고 최소 12년 이상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 교육을 마친 근대인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12년의 공교육을 마치면 하나님 없이 세상을 설명하려 하는 ‘방법론적 무신론자’(methodological atheists)가 되어 졸업하기 마린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권위를 전제로 신앙을 강요하는 설교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로 들릴 것이다. 우리 시대의 설교자는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종교적 클리셰(cliche)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대화하고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교회의 형태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 곧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은 모두 크리스텐덤 시대부터 시작된 교회들이다. 크리스텐덤 사회에 디자인된 교회의 형태는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의 정치적 제도뿐 아니라 조직과 법과 윤리와 습속(習俗) 등을 모두 재점검해야 한다. 예배의 날짜와 시간, 회집의 장소, 헌금을 모으고 사용하는 방식, 목사·장로·집사의 역할과 선출 방법, 목회자의 지위와 역할 등 기의 모든 것이 재고(再考)의 대상이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방법도 긴급히 정립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와 영성과 제도를 뒷받침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는 신학 자체를 비평적으로 보아야 한다. 청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진보적 에큐메니컬 신학과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으로 양분된 배경은 무엇이고, 이 분리를 어떻게 극복하고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신학의 내용뿐 아니라 보존과 전달의 과정도 중요한데, 우리 시대에 적합한 신학교의 구조와 교과 과정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이런 문제들을 크리스텐텀/포스트크 리스텐덤이라는 해석의 프레임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나는 세기적인 발견을 한 것 같은 기쁨에 들떠서 대화가 통하는 동료와 학생들에게 내 주장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으려 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적합한 교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지 연구해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 무렵의 나는 교회론에 관계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IVP에서 막 출간된 『새로운 교회가 온다』라는 책을 만났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라는 호주의 작가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다. 당시 찬반양론이 비등했던 ‘이머징 처치’ 운동을 설명하는 책이겠거니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장부터 ‘파산한 크리스텐덤’이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단숨에 읽어내려 갔는데,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나만 포스트크리스텐덤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역시 해 아래 새 것은 없어!”라는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알고 보니 포스트크리스텐덤을 문제 삼은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의 인도에 따라 레슬리 뉴비긴의 저서를 섭렵했다. 뉴비긴은 우리 시대가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이고 그 시대를 사는 우리 가 새로운 교회론을 정립해야 한나고 역설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뉴비긴의 포용성과 학문성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을 수호하려는 사명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세 번째 정독하고 있는데, 매번 새롭게 배울 것이 많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 책을 처음 출간한 것은 1989년이었고, 한국어 번역판 초판은 1998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6쇄를 거듭하다가 2007년에 재판이 나온 것이니, 사실 내가 너무 늦게 읽은 것이다.(2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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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지성근 역, 『새로운 교회가 온다』(서울: IVP, 2009).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서울: IVP, 2007),